남산에서(코리아 환타지)
남산 정상에서 을미년을 마감하고 병신년의
희망을 맞이하고 싶어 부부가 올러갔다
남산의 본래 이름은 인경산(仁慶山)이었으나
조선초 태조가 1394년 풍수지리에 의해 도읍지를
고려의 개성에서 서울로 옮겨온 뒤에 남쪽에 있는
산이므로 “남산”으로 지칭되었고 풍수지리상
안산으로 중요한 산이었다 나라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산신령을 모시는 신당을
세워 목멱대왕 산신을 모시고 있어 “목멱신사“라고
불리는 이때부터 인경산은 목멱산(木覓山)으로 불렸다
한다
조선의 태조는 1395년 1395년 9월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정도전에게 명하여 성터를 측정하였다 한다
정도전은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네 개의 산
남산.삼각산.인왕산.낙산에 올라 실측하고 이를 연결하는
5만9천5백 척의 성터를 결정하였으며 그해 가을 한양성곽을
개축하고 4대문과 4소문을 완공하였다
서울 어디를 가나 남산이 조망된다
남산은 애국가 2절에 인용되는 “남산위에 저소나무
철갑을 두른듯“에서 보듯이 남산과 남산의 소나무는
우리의 정체성을 지배하는 하나의 상징적 문화요소이다
일제들은 저들의 신사를 세워놓고 치욕적인 우리백성들에게
참배를 강요했었다
지금은 봉수대가 복원되어 거화의식으로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전하고 있다
옛날 릴레이식 통신수단으로 변방의 급박한 사정이나 위급한
사태를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설치하고 봉수를
올려 중앙정부로 소식을 전했다
태조는 1394년 한양에 수도를 정하고 남산에 봉수대를 설치했다
전국 봉수에서 올라오는 소식이 최종적으로 전해지는 중앙봉수소
였다 목멱산 봉수라고도 하고 정봉수라고도 하였다 한다
다섯 개의 봉수대에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을 피워 신호했는데
그 수에 따라 의미가 달라졌다 한다 평화시에는 하나 적이 나타나면
둘 경계에 접근하면 셋 침범하면 넷 적과 아군이 충돌하면 다섯을
피워 올렸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적으로 673개의 봉수가 있었는데
어떤일이 생겨도 하루 만에 한양의 남산봉수대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신사가 있던 남산엔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위용있게 서있었다
복원되는 성터와 소나무숲 조성으로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문화 행사가 진행되고 봉수대 옆엔 사랑하는 연인들이
사랑의 맹세로 자물쇄를 달아놓았다
삼각산이 보이는 봉수대 위에서 사랑하는 아이들 丙申年의
안녕을 빌었다
남산의 민속 공연
남산타워의 야경(2012년도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