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에베소의연인들(피가로의 결혼중편지의 이중창)

이모르 2021. 1. 9. 16:32

 

 

 

에페수스의 길

 

에페수스의 역사는 3천 년 전 히타이트어로 아파사스로 알려져있다.

히타이트제국은 고대 근동의 청동기시대(3300-1200B.C)중 기원전 18세기

경에 아나토리아 북 중부의 하루샤를 중심으로 형성된 왕국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은 B.C 4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였던

리시마쿠스 장군이 피온산 기슭에 건설한 신도시에 해당된다.

신도시건설이후 발전을 거듭해서 로마시대에는 인구 20만명이 넘는

국제무역항으로 번영을 누렸으며 기독교시대에 중요한 사건의 무대가

되었다.6세기경 멘델레스 강의 퇴적토로 항구가 매몰되고 7세기 아랍의

침입으로 테페로 이주하였다.

 

에페스에는 최초로 영국인 고고학자 J.T 우드가 탐사를 펼쳐 고대 7대 불가

사의 건축물중의 하나인 아르메데스 신전터를 발굴해 냈다.B.C 6세기 에

건립된 이신전은 B.C 356년에 붕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B.C 4세기에 같은 장소에 같은장소에 다시 세워진 신전은 5세기에 대규모

유린을 당했으며 현재는 기초석과 기둥 한 토막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에페스 유적지는 1895년 오스트리아 학자가 최초로 발굴 실시했다가

1.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중단되었다.

 

현재도 오스트리아 인에 의해 발굴 진행중 이다.

 

 

 

 

귀족들의 쇼핑센타

 

 

 

서민들의 시장 아고라

 

 

 

에페스엔 서민들의 물물거래장 아고라가 나온다.아고라에서 노예매매까지

있었다 하는데 반면 메비우스 기념비와 니케의 여신상을 지나면 귀족들의

쇼핑센터가 나오는데 기원전에 지어진 쇼핑센터 바닥문양이 지금도 색상이

남아있어 그때의 화려함을 짐작케한다 .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이곳 쇼핑센터엔 안토니우스와 크레오파트라가

자주들렀다 하는데 에페스의 거리를 산책하는 세기의 연인들을 연상케

하였다

 

 

 

 

 

 

 

 

 

에페스 고대도시에핀 야생화

 

 

 

거리엔 이름모를 꽃들이 피어 있었다. 그 꽃들이 옛 로마인들 취양인듯

무게있고 세련된 것이 코린트양식의 상징인 아칸사스 잎처럼 화려했다.

 

 

모든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대로마 帝國

 

안토니우스는 이곳 소아시아 서해안 에페수스에서 전쟁준비를 하여

사모스섬을 거처 서쪽의 아데네로 옮기면서 결전에 대비하였다.

바로 운명의 해전 악티움 해전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도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것”

이라고 말한 파스칼의 유명한 말처럼 클레오파트라는 세게사의 큰획으로

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폼페니우스

 

 

 

시저

 

 

율리우스 카이사르(시저)와 폼페이우스의 권력투쟁 전쟁인 B.C 48년

데살리아 파르살로스 평원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가 패배하고 이집트로

도망한뒤를 추격하여 뒤따라 이집트수도 알렉산드리아 간 51살 카이사르는

21살의 클레오 파트라와 만난다.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최고 권력자 집정관인 율리우스

가이사르(줄리어스시저)의 정부(戀人)였다.

21살 클레오파트라는 풍부한 독서량에 교양을 갖춘

아름다움과 위트가 넘치는 이혼녀였다

시저와 클레오파트라는 그후6년동안 이어져 B.C 44년

 

시저가 자기에게 은혜를 입은 부르트스에게

시해 될때도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테베레江 남쪽에 있는 시저의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시저가 죽자 급변하는 로마의 정세에 불안을 느껴 이집트로 돌아온

클레오파트라는 B.C41년 28세 되던 해에 41세의 안토니우스장군과

만나게 된다.

 

 

 

안토니우스

 

 

 

안토니우스와처음대면하는 클레오파트라

 

 

 

 

 

당시 로마는 제2의 3두 정치로 안토니우스는 소아시아와 이집트

지역을 맡았고.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와 로마제국의 서부를 맡아

통치하였다.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시기에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간

권력투쟁이 발생하게 된다.

소아시아 와 이집트를 통치하게된 안토니우스

기원전 37년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결혼한다.

 

악티움 해전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누이인 옥타비아를 정식 부인으로 데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클레오파트라와

다시 결혼하여,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사이가 나빠졌다.

그러나 BC 43년 되면, 그들 둘의 사이는 더욱 멀어지게 된다.

발단은 안토니우스가 아르메니아 원정의 성공을 자축해

알렉산드리아 시가에서 개선행진을 벌인

것이었는데, 로마인들은 이 행진을 자신들의 전통적인

개선식을 우스꽝스럽게 흉내낸 불경스러운

행사로 본 것이었다.

또한, 안토니우스가 여제사장에게 맡겨둔 유언장을

옥타비아누스가 공개하게 되는데, 그 내용에

로마인들은 더욱더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 내용은

첫째, 안토니우스가 자식으로 인정하고 유산을 남겨준 것은

모두 클레오파트라가 낳은 자식뿐이고

전 부인인 풀비아와 옥타비아(옥타비아누스의 누이)가 낳은

자식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장지를 알렉산드리아로

지정했다는 것이다.

자기가 죽으면 알렉산드리아

의 클레오파트라 곁에 묻어달라는 안토니우스의

소원은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진정이었지만, 안토니

 우스의 유언은 정치적 유언이었기 때문에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은 로마 민중의 가슴 속에 안토니우스

 에 대한 배신감과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증오심을

활활 타오르게 하였다

 

BC 32, 31세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결전의

시기가 찾아온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국지전의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 세계를 누가 수중에 넣을 것인가를 결

하는 문자 그대로의 결전이었다.

,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다툼은 정치사상의

대립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누가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앉을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 권력투쟁 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민중의 동의를 얻는 것은 어려웠다.

그래서,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적은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그 로마인 장군을 용병대장으로

만들어버린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라고

사람들이 믿게 만들었다

그 해 가을, 로마 본국의 모든 지방자치 단체는

옥타비아누스를 '국가 로마을 수호하기 위해 적

이집트를 공격하는 원정군 총사령관' 에 선출하였다.

이에 따라 카이사르의 후계자 자리를 노린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권력 투쟁은 로마와 이집트

사이에 벌어지는 국가간의 전쟁으로 그 양상을

달리하게 되었고, 이제까지 안토니우스와 함께 행동해

온 폴리오나 플란키우스와 같은 참모들은 카이사르

휘하에서 싸울 때부터 안토니우스의 동료였지만,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싸움이 로마와 이집트의

대결로 바뀐 것을 알고는

안토니우스를 떠나버렸다.

그리고 그들의 이반은 로마 병사들이 안토니우스를

버리는 발단이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에서 원정 준비에 전념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그에게 기대했던

재능을 충분히 발휘했고, 시민들에게 연수입의

4분의 1, 해방노예에게는 연수입의 8분의 1에 이르는

임시 특별세를 부과함으로써 민중의 지원을

얻는데 성공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있는 신전에서

출전을 앞두고 치르는 의식을 진행했다.

 

이것은 신들에게 로마의 수호를 기원하고,

로마군의 승리를 빌고, 적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의식으로, 공식적인 로마의 적은 클레오파트라였기

때문에 안토니우스의 이름은 한번도 거론되지

않았다.

반면, 안토니우스는 소아시아 서해안의 에페수스에서

사모스섬을 거쳐 서쪽의 아테네로 옮기면서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본영에서의 나날은 화려한 잔치로 끝이 났는데,

걸핏하면 우울해지는 안토니우스의 기분을

북돋우려고 클레오파트라가 밤마다 즐거운

잔치를 준비했기 때문이다.

안토니우스의 해군은 아테네의 외항 피레우스에서,

옥타비아누스의 해군은 이탈리아 남부의

 타란토와 브린디시에 집결하는 가운데 BC 32년이 지나갔다.

 BC 313, 옥타비아누스는 모든 전력을 이끌고

그리스로 건너갔고, 안토니우스는 지난해

겨울부터 이미 그리스의 파트라스에 본영을 설치하고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거기서 겨울을 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라도 싸움이 일어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BC 3192일 아침, 싸움이 벌어진 해역의

이름을 따서 역사상 '악티움 해전'이라고 불리는

결전의 막이 올랐다.

날씨도 쾌청하고, 동쪽에서 미풍이 불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포진단계에서부터 모든 것이

안토니우스의 생각대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바람의 방향이 동풍에서 북풍으로 바뀌면서

전세는 역전이 되었다.

 38세의 클레오파트라는 전선에 나가서 싸움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 지휘까지

맡고 있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지옥 같은 광경은

이집트 여왕을 보통 여자로 만들어 버렸다.

클레오파트라는 돛을 올리고 쏜살같이 도망가기 시작하였고,

이를 본 안토니우스도 클레오파트라 뒤

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뒤에 남은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아그리파의 함대에 포위되었고, 끝내는

로마군에 포획되었다.

옥타비아 누스는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목숨은

살려주었지만, 이집트 선박임이 분명한 배는

전리품으로 뱃머리를 모두 잘라내고 불태워버렸다.

클레오파트라는 지옥같은 전쟁터로부터 달아나

곧장 이집트로 향했고, 반대로 안토니우스는 남쪽으로

곧장 도망쳐 오늘날의 리비아에 해당되는

키레나이카에 상륙하였다. 그는 전투에서의

충격으로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단지 해변 집에 틀어박혀 온종일

바다만 바라다보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에게는 편지를 써서 혼자 살고 싶으니까

자기를 그냥 내버려 두라고 적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오라는 편지를

안토니우스에게 보냈고,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

의 간청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온 안토니우스를

격려하여 다시 전쟁을 할 것을 강요하였지만,

안토니우스는 믿을 만한 참모 하나 없고, 하루가

다르게 옥타비아누스에게로 달아나는 병사들을

보면서, 군대를 재편성하여 옥타비아누스와 맞설

마음이 나지 않았다.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 해전이 끝난 뒤에도

로마로 돌아가지 않고, 아그리파와 함께 그리스와

소아시아를 거쳐 시리아로 유유히 추격하면서,

복종을 맹세하는 군주들과 동맹관계를 경신하는 등

안토니우스의 방임 통치로 문란해진 각 속주의

통치기구를 재정비하였다.

이렇듯, 악티움 해전은 안토니우스의 세력권이었던

로마 세계의 동부가 옥타비아누스의

세력권으로 바뀐 것을 의미하였다.

 해가 바뀐 BC 30, 시리아까지 와 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안토니우스의 편지가 도착하게 된다.

자신은 자결을 선택할 테니, 클레오파트라는

살려달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

아무런 답장을 보내지 않았고, 안토니우스는

로마군이 접근해 오자, 마지막으로 남은 기병대를 이끌고

적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를 따르던 기병들이 모조리

적진으로 돌아서면서 안토니우스는 점점

불리하게 되었다.

이 때,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가 도착하였다.

클리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에게 자기가

죽었다고 알리게 한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절망에 빠져서 자살을 선택하게 되고,

칼로 제 가슴을 찌르게 되었으나, 즉사하지는

못하였다.

 

 

 

 

 

 

 

 

악티움 해전도

 

 

 

처를 입고 괴로워하는 안토니우스에게 전령이 달려와서

클레오파트라가 아직 살아있다고 전하였다.

거짓으로 죽었다고 알린 것을 후회한 클레오파트라가

사실을 알리는 전령을 보낸 것이다.

 많은 출혈로 기진해 있던 안토니우스 부하들에게

자기를 여왕에게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피투성이가 되고 얼굴마저 핼쓱해진 안토니우스를

클레오파트라는 눈물을 흘리며 끌어안았다.

안토니우스는 그가 늘 원했듯이 클레오파트라의

품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안토니우스가 죽은 81,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했다

이집트 수도에서 이 승자에게 저항을

시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안토니우스의 죽음을 전해들은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산 채로 잡아오라고 명령을 하였다.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의 보물을 줄테니,

그 대신 카이사리온을 왕위에 앉혀달라는 협상을

옥타비아누스와 벌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보물이 들어있는 영묘에 침입하였고,

카이사리온을 살해하였다.

쌍둥이 남매인 10세의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스는 로마로 보내져

아버지 안토니우스의 아내였던 옥타비아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6세인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도 형과 누나와

함께 로마에서 양육된다.

 이리하여 어떻게든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던

클레오파트라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자식들 가운데 옥타비아누스가 죽인 것은

카이사리온 뿐이다.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셋 모두 살아남았다.

카이사르의 아들, 즉 후계자는 옥타비아누스 한 사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무찌르고 이집트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BC 333년부터다.

300년 동안 계속된 그리스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BC 30년에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