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창경궁의 비화

이모르 2021. 1. 21. 19:38

2016년 1월10일

 

창경궁을 갔다

중압감의 창경궁은 역사의 현장이다

사진을 찍고 나니 창경궁의 여러가지 비사가

생각나서 얽힌 이야기를 옮겨보았다

 

 

비와 창경궁 그리고 비화(悲話)

<문화재>

 

비와 창경궁 그리고 비화(悲話)

 

지난 9월 16일(수)에 개봉한 영화 ‘사도’는 박스오피스 4위를 차지하는 흥행을 달렸다. 이러한 사도의 흥행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갇혀 죽은 장면이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어 가능했을 것이다. 이 뒤주 사건은 지금의 창경궁 문정전인 휘령전 앞뜰에서 일어났는데, 창경궁의 전각들은 사도세자의 이야기 말고도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비가 온 뒤의 흐린 날씨 덕분인지, 창경궁은 자신이 품고 있는 슬픈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듯 했다.

 

자식교육의 참사, 사도세자

 

문정전은 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던 편전으로 사용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명정전과 함께 중건되었다. 휘령전이란 이름은 사도세자의 뒤주 사건이 일어날 당시 영조의 비인 정성왕후의 혼전(魂殿)으로 사용되면서 쓰였었다. 사도세자는 어려서부터 몸집이 컸고, 총명했다. 영조는 팔불출 소리를 들을 만큼 세자를 사랑했는데, 두 살이 되던 해에 사도를 세자로 책봉했으며 직접 『어재성훈』이란 책을 써서 교재로 사용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세자는 나이에 비해 체격이 크고 힘도 세서, 공부보다 무예를 더 좋아했다. 결국 세자는 글 읽기에 흥미 없음을 고백했고, 그 후로 영조는 세자를 질책하기 시작한다.

영조 25년 1월, 영조는 선위를 발표한다. 하지만 세자가 아직 왕의 정무를 볼 능력이 없어서 신하들이 만류하자 영조는 대리청정을 내걸었고, 신하들은 영조의 뜻을 받아들인다. 그 후 영조는 상서에 대한 답변을 지켜보며 세자에게 가르침을 주는 등 군주수업에 정성을 쏟았다. 그러던 중 세자는 병을 얻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막막하고 뛴다는 동궁의 증세에 대해 의관이 말하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아마 영조의 질책으로 세자는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영조는 반성문과 일기를 쓰라며 세자를 압박했지만, 세자는 아프다는 핑계로 모든 일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영조와 세자의 사이는 점점 멀어져 갔다.

영조 38년 5월 22일, 나경언이 “세자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들였으며, 북성으로 나가 유람했다.”고 영조에게 고했다. 영조는 그 말을 듣고 세자를 불러 죄를 물었고, 세자가 며칠간 대죄해도 용서해주지 않았다. 이에 세자는 극도의 안감을 느껴 정신병 증세를 보였고, 세자의 친모인 영빈 이씨는 영조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 후 영조는 세자를 불러 휘령전으로 가던 중, 갑자기 소리치며 “여러 신하들 역시 신(神)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왕후께서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궁의 문을 여러 겹으로 막고, 세자의 관을 벗기고 머리를 조아리게 하였다.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했고, 살려달라는 세자의 말에도 물러남 없이 뒤주를 내오게 했다. 결국 영조는 뒤주 속에 세자를 가두었고, 세자는 8일 만에 28세라는 젊은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학구열로 인한 자식 교육이 조선시대에도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자식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영조의 조기교육은 새장 속의 새처럼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둬버리고 만 것이다.

 

장희빈, 과연 희대의 요부(妖婦)였나?

– 통명전과 장희빈의 저주

 

창경궁 안쪽에 이르면 용마루가 없는 건물이 하나 보인다. 바로 창경궁의 내전이자 왕실의 대비가 거주했던 통명전이다. 통명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 단층 2익공계 팔작지붕의 건물이며 현재 그 내부에 금박으로 쓴 ‘통명전’이라는 편액은 순조의 어필이다. 통명전은 사실 ‘장희빈’의 무서운 저주가 서린 공간이다. 장희빈은 1971년에 방영된 <장희빈>부터 <동이>, <장옥정, 사랑에 살다>까지 다양한 드라마에서 주 소재로 다루어졌고, 그 때문에 우리에게도 꽤 친숙한 인물이다.

장희빈은 집안이 보잘것없었지만, 숙부인 장현이 역관으로 부를 축적하고 남인과 친분이 있었던 바 어느 정도의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궁 나인이 된 장희빈은 남인세력의 확대를 경계하던 명성왕후가 붕어하면서 숙종의 총애를 받아 숙원(종4품)을 거쳐 소의(정2품)로 승급하게 된다. 그 이후, 장희빈이 낳은 왕자 윤이 왕세자가 되면서 본인 또한 희빈(정1품)에 책봉되고 왕비에 오르게 된다. 그와 더불어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대거 기용되자 남인계의 장희빈은 승승장구의 가도를 타게 된다. 하지만 숙종이 기사환국으로 폐출되었던 인현왕후를 다시 들이고 서인을 등용하면서, 정국이 또다시 급변하게 되고 장희빈의 비극은 시작된다. 인현왕후가 궁에 돌아오자 장희빈은 꼭두각시와 동물의 사체 등을 통명전에 묻고 왕비가 죽기를 기도하였는데, 이 일이 발각되어 몰락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장희빈은 사약을 받아 죽고, 이 장면이 후대에 특히 부각되었다. 결국 장희빈은 질투로 인해 왕비에게 저주를 퍼붓고, 사약을 먹고 죽는 인물로 그려지게 되었다. 이처럼 장희빈은 지금까지 생각되어 왔던 것처럼 희대의 요부일 수도 있지만, 환국이라는 당시의 정치적 흐름을 생각해보면 지배층의 세력다툼에 희생된 왕실의 한 여성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날 통명전의 모습은 비가 내린 날씨 탓인지 유난히 우중충 해 보였다. 실제로 저주를 내렸는지는 몰라도 한 때 왕비까지 올랐던 장희빈이 사약을 먹고 느꼈을 비통함이 아직 남아있는 듯했다.

 

영춘헌에서의 죽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영춘헌은 통명전 일원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건물로, 바로 왼쪽에는 5칸짜리 서행각인 집복헌이 붙어있다. 집복헌은 영화 ‘사도’의 주인공이던 사도세자가 태어난 곳이며, 영춘헌은 정조가 독서실 겸 집무실로 이용한 곳이다. 이 두 건물은 순조 30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다. 영춘헌을 직접 마주해 보면 왕이 거처하던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건물이 작고 소박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조는 등에 난 종기가 원인이 되어 49세에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는데, 진찰을 시작한 지 15일 만에 죽었다는 것에서 사람들의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일궈낸 정조에 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조의 죽음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말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국사학계는 정조의 사인으로 병사를 정설로 보고 있으나, 일부 학자들은 정조가 독살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조의 죽음에 대한 여러 설을 알아보는 것은 창경궁 영춘헌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일부 학자들은 정조가 정적인 벽파들이 처방한 약 속에 포함된 수은과 같은 기타 독극물에 의해 죽었다고 주장하지만, 국사학계는 그에 대한 반론으로 여러 가지 근거를 들고 있다. 첫째, 정조는 오랜 시간 동안 지병에 의해 고통받았고, 특히 승하한 연도에는 중병에 시달렸기 때문에 벽파 입장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독살을 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둘째, 만약 독살을 당했다 하더라도 위독한 정조를 지켜본 혜경궁 홍씨가 회고록인 『한중록』에서 독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고 주장한다.

이 독살설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현재까지도 나오지 않고 있다. 정조의 죽음을 둘러싼 이러한 해석들을 알고서 영춘헌을 바라본다면, 영춘헌이 단순히 소박한 건물이 아니라 온갖 정치공작과 붕당 간의 세력다툼의 중심지로서 색다르게 보일 것이다.

 

 

1. 문정전 ⓒ김보람 기자

2. 통명전 ⓒ이종현 기자

3. 영춘헌 ⓒ이종현 기자

이처럼 각각의 슬픈 이야기들을 가진 창경궁은 후에 더 큰 슬픔을 맞게 된다. 바로 일제에 의한 궁궐 훼손이다. 일제는 왕실의 존엄성을 상실시키기 위해 1907년부터 창경궁 안의 건물들을 대부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다. 또한, 이름도 창경원으로 격하시킨 후 종묘와 연결된 부분에 도로를 개설하여 맥을 끊기도 했다. 궁궐에 벚꽃과 잔디가 심어지고 건물이 부서지는 수모를 겪어야 했던 지난 500년의 역사는, 현재 후손들의 복구사업으로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와 함께 창경궁을 만나는 것이, 창경궁을 진정으로 느끼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

김보람 기자
이종현 기자
허정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