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문수산성과병인양요

이모르 2021. 1. 22. 17:15

문수산성

 

 

 

 

문수산은 48번 국도(고촌-강화)로김포시 월곶면 성동리 산 35-1, 산 38

지역에위치하며 강화대교 건너기 직전 우측에 자리한 산으로 김포에서

가장 높은 전형적인 육산의 형태를 갖춘 산이다

 

 

병인(프랑스군) 신미(미군) 양란의 침입로

 

 

 

병인양요(丙寅洋擾)란 말은 1866년이 병인년('丙寅'年)이요

양요(洋擾)는 서양(西'洋') 오랑캐의 소요(騷'擾')란 말이다.

 

문수산성은 병자년에 아픔을 알고있던 숙종이(숙종20년)영의정

허적을 시켜 중축한 이유는 병자년의 치욕을 되풀이 하지 않으려는

것이었고 허적이 아뢰기를 "병자년에 적이 문수산에

처들어와서장선을 끌고 내려왓는데도 우리군사들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여 전투에 졌지만 만약 문수산에

조그마한 성을 쌓고 웅고하여 기름붇고 기를 휘두르면

능히 퇴치할수 있습니다"

 

숙종20년(1694년) 지사 이유(李濡)가 아뢰기를 “문수산은

강도의 요충이되는 땅인데 문득성을 쌓았다가 버리게

되니실로 애석합니다.

마땅히 1천보(步)를 더쌓고 통진부를 성안으로 옮겨서

갑진과 마주대하여 험로로 삼을것이며 또 김포의 군사들을

여기에 주둔시켜 전란에 임하여 굳게지키는

계책을 삼아야 할것입니다.라고 하였다한다..

 

해서 강화부에 소속되어

별장1명 군관161명 사병56명 돈군6명 수첩군80명

모입군 72명 을 두었으며 이후 1812년

순조12년에 대대적으로 중수되었다 당시 성문은

취예루 공예루 세 개의 문류와 세 개의

암문이 있었는데 이가운데 취예루는 갑곳진과

 

마주하는 해안에 있었으며 강화에서 육지로

나오는 관문 구실을 하였다 한다

 

 

 

 

그후 문수산성은 1866년 9월7일 고종3년 병인양요때

프랑스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룬곳

으로 프랑스군 로즈제독이 규르르호를 기함으로

포함 해방함 및 통보함등 600명의 수병을

갑곳진에 상륙시켜 이틋날 강화성을 함락

유린 지금까지 문제되는 외규장각도서등을 탈취

18일에는 이곳 문수산성으로 침입 봉상시사

한성근이 이끄는 수비군이 프랑스군을 기습

치열한 전투를 펼쳣으나 결국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못하고 포수4명전사2명부상1명이

포로로 잡혀가고 프랑스군 2명전사 25명부상한데

대한 보복으로 성안 민가 29채를 불사

르고 해안가의 성벽과 문루가 파괴되고 성

안이 유린되었다한다..

 

 

강화부를 점령한 프랑스군

 

 

프리 제트 게리 에르에있는 로제 제독 (센터)과 선원 4 분의 1. 나가사키 항구에 방문하는 동안 1865 년경 사진.

 

로제 제독이 지휘 한 프랑스 프리깃 함 게리 에르 (Guerrière) 호는 프랑스에 대한 한국전 선봉이었다. 여기 배는 1865 년경  나가사키 항구에서 촬영되었습니다.

 

 

 

1866 년 10 월 -11 월 위치  주로 강화 (Ganghwa) 섬,광성보 전투 결과: 프랑스 철수, 한국은 고립주의를 확인

 

 

프랑스 군은 9월 18일과 10월 4일에 각각 강화도 건너편 통진의 문수산성과

강화도 마니산 근처 정족산성에서

조선군과 교전을 벌였다. 조선군의 거센 저항에 기세가 꺾인 프랑스 군은

마침내 함대를 이끌고 40여 일 만에

조선에서 철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군은 강화도 일대에 대해

약탈과 방화를 저질러 행궁과 사당,

외규장각 등을 불태웠으며, 20만 프랑 상당의 금은보화,

조선 시대 의궤(儀軌) 300여 권 이상과 군기물자 등을

빼앗아 갔고  병인양요는 이로써 마무리 됐다.

 

프랑스군이 탈취해간 외규장각 도서가 프랑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장렬왕후 빈전도감의궤

 

 

 

 

 

 

 

출처 문화재청 국가기록물유산포털

 

1782년에 강화도의 외규장각(外奎章閣, 외각)이

완성되자 원래의 규장각을 내규장각(內奎章閣, 내각)으로 이르고,

 서적을 나누어 보관하도록 하였다. 1866년에 병인양요가

일어나면서 외규장각이 소실되고, 서적은 프랑스로 약탈되거나 불에 타버렸다.

대한민국의 외규장각 환수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1993년 떼제베를 한국 고속철도의

표준모델로 삼기 위해 방한하면서 프랑스 외규장각 문서의

반환을 약속했지만 양국이 합의점을 찾지 못했었다.

대한민국 정부와 민간에서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프랑스 정부에

계속해서 외규장각 도서의 환수를 요구해왔으며 한국의 시민단체인

문화연대 주도로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여 패소하기도 했다

 

 

 

 

이어서 양헌수장군의 활약으로

1866년 11월 9일 강화도 정족산성에서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격퇴한 전투.이 해 10월 14일 천주교 탄압과 프랑스

신부 살해를 구실 삼아 강화도에 침입한 프랑스군은

연안의 통진부를 습격, 약탈하는 등 소규모

작전을 전개하다가,

10월 26일부터 적극 공세로 전환하여 문수산성을 공략하였다.

 

그리고 조선군의 강화도 상륙을 저지하기 위하여

강화 연안의 선박을 격침시키고 경기 수영(水營)을 포격하였다.

이에 천총 양헌수가 강화도로 잠입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덕포 부근에 다수의 병력을 매복하기 적합한 지역을 찾던 중

정족산성이라는 고성(古城)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정족산성은 지세가 험준하여 동쪽과 남쪽 두 길만이 통행이

가능한 천연의 요새였던 것이다.양헌수와 중군 이용희(李容熙)는

500여명 규모의 정예부대를 편성하고, 11월 7일 강화해협

도하작전을 개시하였다.

 

 

정족산성으로 진입을 완료한 양헌수는 프랑스군의 예상

접근로인 동문과 남문에 방어의 중점을 두기로 하고

각각 병력을 배치하였다.

 

11월 9일 조선군의 정족산성 입성 정보를 받은 로즈 제독은

올리비에 대령에게 병력 150명을 이끌고

정족산성을 칠 것을 명령하였다.

 

전투 준비를 마친 프랑스군은 1개조를 정족산성

우측 동문쪽에 배치하고,

본대는 남문쪽을 향하여 정면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당시 산성 남문과 동문 방면에는 이미 조선군의

주력 부대가 배치되어 프랑스군이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올리비에 대령이 이끄는 본대가 산성 전방 100m 지점에

이르자 조선군은 일제히 사격을 가하였다. 프랑스군은

조선군의 화승총에 비하여 발사거리가 월등히 길고 사격

속도도 빠른 최신식 개인 화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러나 조선군을 얕잡아본 나머지 대포는 아예 출동시키지 않았고,

지형상 불리한 위치에서 병력수마저 열세에 놓이자

전세는 프랑스군에게 불리하게 기울어졌다.

 

이에 비해 조선군은 화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형상의

이점과 양헌수의 효과적인 작전 지휘로 사기가 고양되어

시종일관 왕성한 공격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프랑스군

부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조선군의 집중 사격으로 접근마저

저지당하자, 프랑스군은 조선군이 성을 나와 공격할 경우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서둘러 퇴각하였다.

 

 

 

 

병인양요 (丙寅洋擾)

 

 

1866년(고종 3)에 대원군(大院君)의 천주교도학살과 탄압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침입한 사건. 1866년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리고 프랑스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신자 수천 명을 학살하였다.

이를 병인박해 또는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 한다.

이 박해 때 프랑스선교사 12명 중 9명이 잡혀 처형되었으며,

 3명은 화를 면하였는데 그 중 리델은 청나라로 탈출,

프랑스동양함대 사령관 P.G. 로즈에게 박해소식을 전하면서

보복원정을 촉구하였다.

이에 로즈가 함대를 이끌고 내침하여 한·프간의 군사적 충돌을 야기하였다.

로즈의 제1차원정은 강화해협을 중심으로 한 수도 서울까지의 수로를

탐사하기 위한 예비탐사로, 9월 18일부터 10월 1일까지 지세정찰과

수로탐사를 한 뒤 지도 3장을 만들어 돌아갔다.

이어 10월 5일 한강봉쇄를 선언, 10월 11일 제2차원정에 올라

병력 1000명·군함 7척·대포 10문과 리델신부를 대동하고

강화도로 내침하였다.

10월 16일에 강화부를 점령,

<우리는 자비로운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우리 동포형제를 학살한 자를 처벌하러 조선에 왔다>라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조선이 선교사 9명을 학살하였으니, 조선인 9000명을 죽이겠다>는

강경한 응징보복의 자세를 밝혔다.

강화도가 실수(失守)되어 위급하게 되자,

정부는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하였다.

대장에 이경하(李景夏), 중군에 이용희(李容熙), 천총(千總)에

양헌수(梁憲洙)를 임명하여 출정하게 하였다.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10월 26일 문수산성(文殊山城)전투에서

조선군을 제압하였다.

이때 양헌수는 어융방략(禦戎方略)으로 강화도를

수복할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는 대군을 이끌고 덕포에서 비밀리에 심야 잠도작전(潛渡作戰)을 전개,

강화해협을 건너서, 정족산성(鼎足山城)을 점거하였다.

조선군이 강화해협을 건너가 정족산성에 농성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로즈는 올리비에대령에게 정족산성 공격을 명하였다.

11월 9일 일대 격전이 벌어졌으나, 접전의 결과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을 포함하여 60∼7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조선군은 전사자 1명, 부상자 4명이었다.

정족산성승첩(鼎足山城勝捷)은 화력면에서 열세인

조선군이 양헌수의 뛰어난 전략에 의하여 근대식 병기로 장비한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는 것과 이 싸움의 실패로 로즈함대는

원정을 포기하고 강화도에서 철수하게 되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

프랑스군은 10월 14일 상륙 이래 거의 한달 동안

강화도를 점거하였으나, 정신적·육체적으로 피로하여

야포를 동원하여 정족산성을 재공략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포기하고 11월 10일 함대를 철수하였다.

이 싸움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서구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격퇴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프랑스군은 강화도에서

철수할 때 고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 등 문화재를 약탈해갔다.

로즈의 원정은 제2차원정이 끝날 때까지 무려

두 달에 걸친 장기원정이었다. 원정을 끝내고 청나라로 돌아간

로즈는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적 보복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사 벨로네를 비롯한 베이징[北京(북경)]의

모든 외교관들은 그의 원정을 실패로 간주하였다.

첫째 외교적 입장에서 보면, 수교관계가 없는 조선으로 가서

조선개항을 위해 입약협상(立約協商)조차 벌이지

못한 채 돌아왔다는 것이다.

둘째 군사적 입장에서 보면, 정족산성에서의 패전 직후

곧 함대를 철수하였다는 것이다.

셋째 종교적 입장에서 보면, 조선원정의 목표가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보복인데 보복은커녕 오히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와 쇄국정책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프랑스정부는 공식적으로 이 원정을

성공이라고 간주하였다.

예를 들어 1867년 3월 미국정부가, 미국은 제너럴셔먼호사건으로,

프랑스는 병인사옥으로 인하여 피해를 보았으니 대(對)조선

미·프 공동원정을 제의하였을 때, 프랑스정부는

이미 조선원정을 통해 응징보복을 하였기 때문에

공동원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거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