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왕오천축국전(국립중앙박물관)

이모르 2022. 2. 12. 10:26

 

11년 2월 13일

친우 부부 들과 국립박물관에서 전시하는 往五天竺國傳을 관람하였다

 

 

 

10층탑 앞에서 기념사진하고 입장하기 앞서 우리나라 전시관을 들러보며 新羅 百濟 高麗 朝鮮의 불상과 토기들을 관람하다 아름다운 부처상 중 손의모양 곡선이 아름답다 이르니

 

 

춘곡이 手印에대한 설명을하다 석가여래가 짓는 수인은 천지인(天地印),

 선정인(禪定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설법인(說法印,轉法輪印),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 등이 있다.는 것인데

너무장황한 설명을 서술할수 없고

 

사진출처 문화재청 홈국보78호
국보83호

 

국보83호

역사책에서 수없이 언급되었던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앞에 서다

조명으로 더욱 신비감이감도는 반가상은 고개를숙이고 한손을 얼굴에 대고 천년을 깊은 상념에잠겨있다 로텡의 생각하는 사람보다 더 예술적이라 한다면 자국의 예술품을 예찬하는 이기심의 발로라 말할수 있겠는가??? 참으로 아름답다 한홀에 혼자 모셔져 있는데우리 일행은 그앞 의자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혜초의 여행경로

혜초의 여행경로

드디어 왕오천축국전시관에 입장하다. 무려 2만km를 여행한다는 것은 지금의 발달된 교통수단으로도 힘든 일 인데 혜초의 여정은 어떠했을까? 그의 힘들고 고향의 그리움을 오원시에  고향 계림(谿林)을 표현한것을 보고  일본학자가  신라인 혜초라 판단하였다 한다...

 

이詩로 혜초가 신라인 이라 판독되었다 한다 열이 천축국에 들어가면 여섯은 죽어서 온다는 대장정을 위대한 혜초는 세세한 풍습 문화 풍물을 기록으로 남기며 여행에 임 하였으니 위생시설이 전무한 고대에 거의 불가사의 한 일이 아니겠는가?????

 

 

진본 60cm 왕오천축전 8세기 프랑스 국립도서관소장 통일신라 시대 혜초가 인도 서역지방을 여행하고 돌아와 쓴 기록 한권의 두루마리로 된 필사본으로 총227행 5893자. 총길이358cm다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 의 정치경제 문화 풍습등을 알려주는 세계유일의 기록이다

 

사본 전시본

프랑스국립도서관은 총 358cm중 60cm만 전시한다는 조건을 걸고 3개월간대여해준 프랑스 측은 문화재 보호 차원으로해석하면 되겠다

 

 

 

바비안 대석굴 혜초가 갔던 범인국으로 오늘날 아프칸이스탄에 해당한다 이석굴 계곡의 서쪽과 동쪽에 큰마애불상이 있었으나 2001년 탈레반 정권에 의해 폭파 파괴되었다

 

 

폭파 되기전의 거대 불상 사진출처 :한국기자단이쓴 모던 실크로드를 따라에서 발췌
샤리골고타

  

 

혜초가 동천축국에서 찾은 마하보디탑 실제로는 탑모양의 절이다 이 마하보디사에 도착한 혜초는 부처의 모습을 그리며 느낀 기쁨을 오언시로 남겼다

“보리수가 멀다고 걱정않는데

어찌 녹야원이 멀다하리오

가파른길 험하다고 근심할뿐

업연의바람 몰아처도 개의찮네

여덜탑을 친견하기란 실로어려운데

오랜세월 격어 어지러이 타버렸으니

어찌 뵈려는 소원 이루어 지겠는가

하지만 이아침 내눈으로 보았노라"

 

8세기초 당나라 장안성(지금의 시안) 시장풍경 세계곳곳에서 온 사람들로 붐비는 가운데 왼쪽중앙 윗부분에 빨간 조우관(깃털달린모자)쓴 신라인으로 보이는사람도 있다

 

헤초가 얼어붙은 산 눈덮힌 계곡과 산사이에 있다고 기록한 토번국(티벳트) 라싸에있는 포탈라궁 혜초가 갔을때는 그들이 불법을 모른다 적고 있으나 현대의 티벳은 불국이다

 

기독교의 한 종파였던 경교, 네스토리우스파라고 한다. 이 비석은 경교와 관련되어 있다. 중국이니까 왠지 불교일 것만 같은데, 이 석비는 기독교도의 무덤 앞에 세워져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7세기 실크로드를 통해 이 경교도 중국에 들어왔다 한다.

 

현악기의 일종인 나무공후 ... BC 2세기경, 나무 ... 우측은 베개

 

남색 방한화

남색 방한화 신장위구르자치구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유물 중 하나입니다. 8세기 투루판 인들이 신었던 비단 방한화입니다.

 

구리 안대

 

구리 안대

툴토당시 죽은 사람의 눈 위에 놓여있었다. 안대의 중앙 양쪽 눈 부분에 좁은

구멍들이 있어 바깥 물건을 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바람과 모래를 막는 역할도 가능하였다. 실제 이러한 눈가리개를 하면 시계가 좁아지고 어두어지기 때문에 선글라스로서도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한나라 의장 청동마차행렬 기원전 3세기-3세기 1969년 레이타이 묘에서출토된 한나라시대 행차의장대열 말을 탄 병사들은 창과비늘창 등 4가지의 창을 들었고 수레마차 주인이 탄 마차 도끼 등 무기를 실은 마차등으로 구성됐다행렬의 모습이 당당하고 웅장하다

 

 

 


 

 

무덤에서 발견된수문장

 

무덤에서 발견된수문장

사진촬영도 불가하고 포괄적인 이해를 가지기 위해서는 설명서가 필요했다

입구에서 동아일보가 특집으로낸 실크로드 와 왕오천축국의 무대 배경 둔황등 10면을 할애한 기사를 무료배포해 천축국과 페르샤까지 다녀온 혜초의 일정과 그가쓴 여행기속 각국의 풍습을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이 번역 요약하고 동아일보 강은지 기자가 정리한 기사를 발췌 인용해본다

 

중국 둔황 막고굴 96굴 전경

 

 

중국 바깥의 국가 호탄. 중국 외의 국가에서 최초로 비단을 생산한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우리나라 문익점 이야기와 같은 전설이 전한다. 호탄의 국왕은 비단의 비밀을 알기 위해 중국의 공주와 결혼을 한다. 그리고 중국의 공주에게 "우리나라는 비단이 나지 않으니 비단 옷을 스스로 해 입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중국 공주는 자신의 머리 장식에 누에 고치와 뽕나무 종자를 숨기고 호탄으로 들어왔고 호탄의 비단직조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합한다.

 

 

보살입상(복제) ... 8세기 전반, 돌, 둔황 제124굴, 둔황연구원 소장

 

막고굴 17 동굴 모형

 

뿔이 하나 달인 동물 유니콘

 

청동으로 만든 해치이다. 머리에 뿔이 하나 달려 ‘독각수’ 라고도 불린다. 해치는 좋고 나쁨을 판단할 때 성이 나서 눈을 동그랗게 뜬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나 분쟁이 발생했을 때 이치에 맞지 않는 편을 뿔로 가리키거나 물어 버리기도 했으며, 심지어 뿔로 찍어 그 자리에서 죽이기도 한다. 이 때문에 해치는 공명정대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무덤을 지키는 얼굴은 사람이고 몸은 동물인 흙인형 악령 등으로부터 무덤을 지키기 위해 세웠던 짐승 모양의 신상으로, 흔히 진묘수라고 한다.

 

당삼채 ( 唐三彩 )  도기낙타  7-8 세기 진품이다

 

여래좌상 벽화

 

 

여래좌상

여래좌상

눈과 백호에 베푼 은상감, 활 모양의 눈썹과 눈동자에 검은 물질을 넣는 기법,

왼손 5지와 오른쪽 제1지를 붙이는 형태의 설법인 연화좌와 수미좌를 상하로 구성한 대좌등이 카시미르불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남색 방한화 ... 8세기, 비단, 투루판, 신쟝위구르자치구박물관 소장

 

배 모양의 관 ... BC 20세기 경, 누란샤오허묘지 2002년 출토, 신쟝문물고고연구소 소장

 

가죽바구니 ... BC 2세기, 가죽, 셴셴 출토, 신쟝문물고고연구소 소장

 

십이지간 돼지인형 ... 8세기, 점토, 투루판 아스타나고분 출토, 신쟝위구르자치구박물관 소장

 

 

금관 장식

 

다리가 세개인 구리솥 ... BC 5~3세기, 구리, 신쟝위구르자치구박물관 소장



가죽바구니 ... BC 2세기, 가죽, 셴셴 출토, 신쟝문물고고연구소 소장



항아리 모양의 나무국자 ... BC 30~20세기, 나무

 

여인이 그려진 비단

 

 


마치 우리네 한복처럼 보이는 긴소매 상의 ...2~5세기, 비단, 누란고성 2003년 출토, 신쟝문물고고연구소 소장

 

 

국제상인, 소그드인

 

국제상인, 소그드인

소그드인은 중앙아시아 아무다리아. 시르다리아 두 개의 강 사이에 위치하는 오아시스 도시에 살았다. 이들은 실크로드의 요충자리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곳곳에 집단 거류지를 건설하고 실크로드의 동서를 잇는 육상의 중계역을 주도하였다. 소그드인은 중국의 수도 장안을 비롯하여 무역의 주요 대상자인 투루판, 하미, 둔황 등지에도 집단 거주하였다. 이란계 민족으로 알려져 있는 소그드인의 종교는 공대 이란 문화를 대표하는 조로아스터교였다.

 

불을 숭배하는 종교로 알려져 있는 조로아스터교는 소그드 상인의 활동을 따라 사방으로 전파 되었다 동서 교역을 주도하였던 소그드인의 활약으로 소그드 문자 역시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소그드문자는 이후 위구르. 몽골문자의 성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채색토기

채색토기 배가 불룩하고, 바닥이 평평한 토기이다, 그릇 아랫부분에는 연꽃이 위를 향하고 있는 모습이, 윗부분에는 연꽃이 엎어져 있는 모습이 장식되어있다. 뚜껑은 진흙으로 만들어 구멍을 막았고, 꽃무늬를 찍어 장식하였다.

 

공양인 두상

공양인 두상

공양인은 부처나 보살에 향기로운 꽃과 등불, 음식, 의복 등을 시주하는 살마을 말한다, 머리에 복잡한 형태의 터번을 말아 넣고 풍부한 수엽을 기른 호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두상에 나타난 수염과, 눈썹, 코 부분과 전체 얼굴 형태가 입체감이 강하여 중원 한족과는 다르다.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막고굴의 모가 벽화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막고굴의 모가 벽화 중국의 중원지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하서화랑에 위치하고 있는 둔황. 서역의 문화와 중국의 문화가 만나는 관절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4~5세기 중국의 영향이 약화되자 둔황은 실크로드의 막대한 이익을 바탕으로 남측 교외에 인도의 석굴사원 양식을 모방한 무수한 석굴사원, 즉 천불동이 건립됩니다. 둔황 천불동의 내부에 장식된 수많은 벽화와 조각에는 동서 문화의 영향이 농후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둔황 막고굴 17호굴(장경동)모형 11세기-12세기 둔황연구원소장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굴 1900년 발견당시 석실안에 3m가 넘는 높이로 수많은 두루마리가 쌓여있었다 수량은 확인된것만 4만점이 넘고 연대가 있는 문서중 이른것은 4세기 늦은것은 11세기 거다 문서의 80% 이상은 한문문서 90%는 불교관련 문헌이다

 

고대 중국사람들이 인도를 부르던 명칭 천축 이 인도를 동서 남북과중안으로 나누면 다섯 천축국이 된다 1300여년전인 723년 당나라에 유학온 신라승려 혜초는 중국 광저우를 출발해 뱃길로 인도에 도착한뒤 먼저 동축전에서 불교성지를 참배하고 중천축구 남천축국서천축국 북천축국을 순례했다

그런다음 서역으로 넘어가 대식국의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처 파미르 고원을 넘어 둔황을 지나는 대장정 끝에 727년 당나라수도 장안(지금의시안)으로 돌아왔다 4년에 걸친 약2만 km의 대장정이었다

 

727년 신라승려 혜초가 인도와 서역 여행을 마친뒤 중국땅 장안(시안)에서 왕오천축국전 을 완성했고 그것이 둔황의 막고굴에들어간것을 프랑스 동양학자 폴펠리오가 발견하여 막고굴 관리자로부터 헐값에 이들 고문서를 구입해 본국 프랑스로 보냈다 약탈이나 버금갔지만 어쨌던 돈을 주고 구입했기 때문에 중국이나 우리나라도 소유권을 주장할수 없다

페사리국(바이살리)삼보를 맨발에 알몸이다 外道는 옷을 입지않는다 음식은 보자마자 먹으며 재계(齎戒)도 하지않는다.땅은 모두평평하고 노비가 없으며

사람을 파는죄는 사람을 죽이는죄와 다르지않다.

구시나국(쿠시나가라)한달만에 구시나국에 이르렀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곳이나 성은 황폐해져 아무도 살지않는다.부처님이 열반하신곳에 탑을 세웠는데 한선사가 깨긋하게청소하고 있다

 

해마다 팔원 초파일이되면 남승과여승 도인과속인들이 그곳에모여

공양을 베푼다 탑상공에는 깃발이 휘날리는데 그수가 많아 헤아릴수없다 뭇사람들이 그것을 우러러 보니 이날을 맞아 보리심을 일으키는 자가 한둘이 아니다.

 

파라날사국(바라나시)녹야원과 구시나.사성.마하보리 등4대 영탑이 마케타국 왕의영역에 있다 이나라는 대승과 소승 이 함께행하여지고 있다 급기야 마하보리사에 도착하여보니 본래소원이 맞는지라 무척기뻤다.내뜻을 오언시로 역어본다

 

“보리수가 멀다고 걱정않는데

어찌 녹야원이 멀다하리오

가파른길 험하다고 근심할뿐

업연의바람 몰아처도 개의찮네

여덜탑을 친견하기란 실로어려운데

오랜세월 격어 어지러이 타버렸으니

어찌 뵈려는 소원 이루어 지겠는가

하지만 이아침 내눈으로 보았노라

 

중천축국 이나라왕이 등청해 앉으면 수령과백성이 왕을 에워싸고 사방에 앉는다 그리고 각자도리를 놓고 논쟁하는데 분분하고 소란스럽지만 왕은 듣기만하고 화는 내지않는다 그러다가 그대는 옮고 그대는 옮지않다 고 알린다 그러면 백성들이 왕의 말을 받아들여 다시는언급하지않는다 스님과 마주하면 왕과수령도 땅바닥에 앉는다. 왕이건 수령이건 모두좌탑을 지니고 다니며 자기좌탑에 앉지 남의좌탑에 앉지않는다.

절과 궁궐은 모두삼층으로 되어 있으며 아래층은 창고로쓰고 위두층은 사람이산다 지붕은평평하고 벽돌과목재로 지었다 그밖의 집은 모두 초가인데 중국의 맞배집과 비슷하고 단층이다.

 

 

남천축국 중천축국에서 남쪽으로 석달남짓 가면 남천축국 왕이사는 곳이다 왕은 코끼리 팔백마리를 소유하고있다 영토가넓어 남쪽으로는 남해 동쪽으로는 동해 서쪽으로는 서해 에 이르며 북쪽으로는 중천축국과 서천축국 동천축국 등과 경계가 맞닿아있다 의복과 음식풍속은 중천축국과 비슷하다 다만 언어는좀다르고 기후가덥다 무명 천 코끼리 물소 황소가 산물이다 양도 조금있으나 낙타나 노새 당나귀는 없다.

 

파사국(페르샤) 토화국에서 서쪽으로 한달을 가면 파사국이다 이나라 왕은 전에 대식을 지배했었다 대식은 파사왕이 낙타나 방목하는 신세였으나 후일 반란을 일으켜 파사왕을 시해하고 주인이됐다. 그래서 지금은 대식에게 병합됐다.의상은 예부터 헐렁한 모직상의 를 입었고 수염과 머리를 깍으며 빵과 고기만만 먹는다 비록 쌀이있더라도 갈아서 빵만 만들어먹는다.

 

사람들의 성품은 교역을 좋아해 서해에서 배를타고 남해로 들어간다 그리고 사자국에서

여러보물을 가져온다 그러다보니 그나라에서 보물이 나온다고들한다 곤륜국에가서 금을 가져오기도한다 또한 배를타고 중국땅에도 가는데 곧바로 광저우까지가서 능 비단 생사 면 같은것을 가져온다 이땅에서는 가늘고 질좋은 모직물이난다 사람들은 살생을 좋아하며 하늘을 섬기고 불법을 알지못한다.

 

토번국(티벳트) 다른 나라와달리 지대가 아주높고 춥다.집에서는 늘 보리가루

음식을 먹고떡과밥은 적게먹는다 국왕이나 백성이 모두 불법을 알지못하며 절간도없다.  거개가 땅을파구덩이를 만들어 거기서 자며 침상은 없다.사람들이 까맣고 흰사람은 드물다

언어는 다른나라와 다르다 털옷과 베옷을 입어 서캐와 이가 많은데 이를 잡으면 곧바로 입속으로 넣고 끝까지 버리지 않느다

 

돌궐(투르크) 이호국들의 이북으로가면 북쪽으로는 북해 서쪽으로는서해 동쪽으로는 중국 에 이르며 그이북은 모두돌골족이사는 강역이다 돌골족은 불법을 알지못하며 절이나 승려도 없다 의상은 모직외투와 모직상의이며 고기를 먹을거리로삼는다 성곽을 거처로 하는일도없으며 펠트천막을 집으로 삼는다 살러다닐때는 이천막을 몸에지니고 물과 풀을 따라다닌다 남자들은 모두 수염과 머리를 깍고 여자는 머리를기른다 언어는 다른나라와 같지않다 이나라 사람들은 살생을 좋아하고 선악을 알지못한다.

 

안서(安西) 개원15년 11월 상순안서에 도착하였는데 절도사는 조군이었다.

또한 안서에 중국인 승려가 주지로있는 절이두곳있고 대승법이 행해지고 있으며 고기는 먹지않는다. 대운사 사주 수행은 강설에 능란한데 전에는 경사의 칠보 대사승려였다.대운사의 의초라는 도유나는 율장을 잘아는데 왕년에는 경사의 장엄사 승려였다 명운이란 대운사 상좌는 불도를 크게 닦았는데 역시 경운사 승려였다.이들승려들은 대단히 훌륭한주지로서 불교를 믿는마음이 대단하고 공덕을 쌓기에 열심이다.법해라는 용흉사 사주는 중국인으로 안서에서 태어났지만 학식과 풍격이 중국본토인과 다르지않다.

 

우기에도 용흉사라는 중국절이하나 있는데 (...)라고 하는 중국승려가 있다.그는대단히 훌륭한 주지다 이승려는 하북기주 사람이다 소륵에도 중국절인 대운사가 있는데 한 중국승려가 주지로 있다 그는 민주(岷州)사람이다언기국(카라사르) 다시안서에서 동쪽으로 가면 언기국이다.여기도 중국군대가 주둔하고있다왕이있으며 백성들은 호인(胡人)들이다 절과 승려가 많으며 소승법이 행해지고 있다 이것이 안서4진인데 이름을 꼽으면 첫재 안서 둘째우기 셋째 소륵 넷째 언기다 중국식대로 안에 치마를 입는다

 

대서사시 혜초와의 대화 130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그분의 노고를 감격하여 맞이했다 역사공부하면 자주 들어 하던 왕오천축국전 진본을 확인하던중 활자 하나 하나가 또렸 또렸하게 쓰여져 있었다 춘곡에게 해석을 부탁하니 이르기를 최초 발견자도 옛 고서 판독 학문을 연구하여 발굴 하였는데 어찌 나같은 필부가 알겠는가? 하다. 밖에나와 한식집에서 조선왕조의 宗과 祖자에 대한 평보의 잘못된 인식에 청허가 증빙 자료를 가져와 알려 주므로 해서 고집으로 일관했던 평보는 부끄러워 하였다

 

황금 허리띠고리 1-2세기 카라사르 출토 신장위그르 자치주 박물관소장 황금으로 만든 허리띠 잠금장치 큰용한마리와 작은용 일곱마리가 노는 모습을 포현했고 터키석을 상감했다왼쪽 오른쪽은 국립박물관이 평양에서 출토한 비슷한모양의 고리를 소장하고 있다

 

격구하는 흙인형 투르판 아스타나 고분 출토 신장위구르 자치지구박물관소장 7-10세기

 

 

모자를쓴 해골 기원전 20세기-기원전10세기 모자를 쓰고 있는 여성의 두개골 발견당시 두개골에 약간 틀어올린 머리카락이 남아있었다 모자 정수리는 뾰족하고 모자 왼쪽에 깃털등을 묶었을 나뭇가지 두개가 꽂혀있다 모자 꼭대기 부분에는 털을 꼬아 만든 띠가 장식돼있고 깃털은 남아있지 않다

 

4,000년 전의 기억-샤오허 묘지

4,000년 전의 기억-샤오허 묘지 2002년 타클라마칸 사막 동쪽, 누란의 옛 성터 서쪽에 4,000년 전의 무덤이 발굴되었다. 황량한 사막 한 가운데 섬처럼 솟아 있는 언덕 위에 수백 개의 무덤들이 쌓여 있었다.

무덤 위에는 메마른 나무들이 촘ㅊ모하게 박혀 있었다. ‘누란의 미녀’라고 불리는 젊은 여인의 시신을 비롯해 이곳에 묻힌 사람들의 인종은 전형적인 코카서스 백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무덤 주인공들의 문명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1,000 년 이상이 흐른 후 이 지역에는 기원전 2세기 중국의 역사책에서 서역 36개국의 하나로 ‘누란’이 나타나지만, 양자 간의 연관은 확인되지 않는다.

 

 

 


나무로 만든 미라 기원전20세기-기원전10세기 누란사오허 묘지출토 신장문물고고연구소소장 나무를 깍아 얼굴과 몸통. 다리를 만들어놓고 눈과 입을 조각해 만든 사람의 미라출토당시 나무관에 매장되어있었다 사람이 타지에서 사망해 시신이 없을 경우 나무미라를 대신해 안장한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적으로 매우 진귀한 사례다

 

 

 

나무아래미인 8세기 투루판 아스타나 신장 위구르 자치구박물관 소장 병풍에 들어있는 그림중하나로 당대 귀족여성의 생활을 그렸다 머리를 높게 틀어올려 꽃장식 비녀를 꽂고 눈섭을 짙게 그렸다 양뺨은 붉게 칠했다 풍만한 체구에 화려한 복식을 갖췄는데 당나라 시대 풍만한 미인의 자태를 표현한것으로 보인다

 

 

동로마 금화 6세기 닝샤 구위안 출토 닝샤구위안 박물관소장 유스티니아누스 I (527-565 CE) 골드 동전입니다. 조그만구멍이있어 장식품으로 사용됐을수 있다 발견 당시 죽은이의 눈과 귀 입부분에 놓여있었다 정면에는 동로마 황제의 얼굴이 뒷면에는 십자기둥을 잡고 앉아있는 날개달린 여신이 새겨져있다

 

 

 

복희여와도 7세기 투루판 아스타나 출토 신장위그루 자치구 박물관소장

중국 고대신화에 나오는 남성신 복희와 여화를 그린것 오른쪽의 복희는 왼손에 구(矩:사각형을 그리는 도구)를 왼쪽의 여화는 오른손에 규(規:원을 그리는 도구)를 들고 있다 중앙에는 빨간 핵이 있는 태양을 아래쪽에는

두꺼비 머리가 있는 둥근달을 그렸다


 

 

불상틀 ... 5~6세기, 석고, 케리야 출토, 호탄지구박물관 소장



 

 

프랑스 탐험가 펠리오가 문서를 분리하는 과정에서 책표지가 없는 왕오천축국전이 들어있었다

 

실크로드와 경주의 관계는?

서역에서 전래된 각종 문물은 장안에 집결되어, 서역으로 향하는 중국 문물과 교환되었다. 하지만 장안이 실크로드의 종착점은 아니었다.

장안에 모였던 각종 문물은 보다 동쪽으로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중국을 통해 서역의 문물을 받아들였고, 직접 서역과 교류를 하기도 하였다. 신라 고분에 나타나는 유리제품과 황금 제품 등은 실크로드를 통하여 서역의 문물이 경주에 많이 들어왔음을 알려준다. 특히 신라의 왕릉급 무덤에서는 약 20여 점 이상의 유리그릇이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로만 글라스계통으로 보인다. 경주 괘릉과 흥덕왕릉의 무인상이나 조각에서는 신라인의 눈에 비추어진 서역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2001년 한국 불교계는 중국 산시(陜西)성 시안(西安)시 저우즈(周至)현에서 당시 혜초가 기우제를 지낸 곳에 ‘신라국고승혜초기념비(新羅國高僧慧超紀念碑)’를 세웠다.

 

영상한국사 ㅣ 186 프랑스의 동양학자가 찾아낸 『왕오천축국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