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단재 신채호의명언

이모르 2021. 1. 21. 19:40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한국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의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공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공자가 되지

못하고 공자를 위한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예수가

아니고 예수를 위한 한국이 되니

이것이 어쩐 일이냐.

이것도 정신이라면 정신인데 이것은 노예정신이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

 

    

 

 

신채호의 명언으로 알려진 이 글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라는 구절과 함께 신채호의 명언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하여 출처를 찾아보았다.

구글로 검색해보면 출처로 두 문서가 명시되어 나오는데 하나는

<독사신론>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와 애국심의 관계>이다.

이에 에서 원문을 찾아 비교해보았다.

<독사신론>

 

 

 

 

내가 지금의 각 학교에서 교과서를 쓰는 역사를 보건대,

가치 있는 역사가 거의 없도다.

1장을 펼치면 우리민족이 지나족의 일부분인

듯하며 제2장을 펼치면 우리민족이 선비(鮮卑)국의 인부인듯 하며,

나중에 전편을 다 펼치다보면, 때로는 말갈(靺鞨)족의

일부인 듯하다가 때로는 몽고족의 인부인 듯하며,

때로는 여진족의 일부인 듯하다가 때로는 일본족의 일부인 듯하니,

아아, 과연 이럴진대 우리 몇만 방리(方里)의 토지는

이것이 남만북적(南蠻北狄)의 수라장이며,

우리 4천여 년의 산업은 이것이 아침에는 양()나라,

저녁에는 초()나라의 경매물이라 할지니, 그것이 그럴가,

어찌 그럴 이치가 있으리오?

 

역사의 붓을 잡은 자는 반드시 그 나라의 주인이 되는

한 종족을 먼저 나타내어서 그것을 주제(主題)로 지은 후에,

그 정치는 어떻게 잘 되고 못 되었으며, 그 산업은

 어떻게 성하고 쇠하였으며, 그 무공(武功)은 어떻게 진퇴하였으며,

그 습속은 어떻게 하였으며, 외래의 각 종족을 어떻게 흡수하였으며,

다른 곳의 여러 나라를 어떻게 교제하였음을 서술하여야 여기서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정신이 없는 역사이다.

정신이 없는 역사는 정신없는 민족을 낳으며, 정신없는

국가를 만들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리오.

 

어떻게 하면 우리 이천만 동포의 귀에, 항상 애국이란

말이 울려 퍼지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이천만 동포의 눈에,

나라라는 글자가 배회하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이천만 동포의

손이 항상 나라를 위하여 봉사케 할 것인가? 그렇다.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이천만 동포의 발이

항상 나라를 위하여 달리게 할 것인가? 그렇다.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이천만 동포의 목이 항상 나라를 찬사하게 할 것인가?

그렇다.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이천만 동포의 머리들이 항상 나라를 위해 뭉치게 할 것인가?

그렇다.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이천만 동포의,

 혈혈누누(血血淚淚)가 나라을 위해 솟구치게 할 것인가?

 말하노니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역사를 떠나서 애국심을 구하면 이것은 눈을 감고 보려는 것이며,

다리를 버리고 달리는 것이라, 어찌 될 수 있으리오.

그러므로 국민의 애국심을 불리 이르키려 하거던

먼저 완전한 역사를 배와줄 지어다.

저 조국을 버리고, 외인의 창귀(倀鬼) 노릇하는 자를 볼 때에 나는

 이것을 역사를 읽지 않은 자로 믿으며, 동포를 능멸하고 타력(他力)

의지하는 자를 볼 때에 나는 이것을 역사를 읽지 않은 자로 믿으며,

한몸의 화복(禍福)만을 생각하고 국가 흥망을 꿈 밖에 돌리는

자를 볼 때에 나를 이것을 역사를 읽지 않은 자로 믿노니,

아아, 저가 과연, 4천 년간 우리 조선들이 눈물과 피로 이 국토를

옹호하여 우리들에게 끼쳐 준 것을 알며, 2천만 동포가

곧 육대주(六大洲)의 신성한 한 가족임을 알며, 3천리 강산이

곧 만대 자손의 대대로 지켜나갈 강토인 줄을 안다면,

저가 이 나라를 잊고자 한들 어찌 차마 잊으며,

저가 이 나라를 버리고자 한들 어찌 차마 버리리오

 

 

대저 역사는 국가의 정신이요, 영웅은 국가의 원기이다.

모든 지구상에 야만 부락이 아니요, 국가의 제도를 성립하고,

국민의 자격으로 생활하는 자는 모두 그 역사를 존중하고,

영웅을 숭배하는데 그 국민이 문명할수록 역사를

더욱 존중하고 영웅을 더욱 숭배한다.

 

그것은 그 역사를 존중함과 영웅을 숭배함이

곧 그 국가를 사랑하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학상의

참고될 자료가 있으면 거친 들판 잡초 우거진 사이,

흙에 묻히고, 불길에 타다 남은 옛날 비석의 쪼각돌이라도

아름다운 옥, 큰 구슬과 같이 보고, 영웅의 유적(遺蹟)

있으면 부녀자와 어린애들이라도 받들어

기념하며 큰절하고 외와 전하는 것이다.

 

우리 한국은 4천여년 문명한 옛나라이니, 4천여년간에

역사의 광채도 빛날 것이요,

4천여 년간에 영웅의 공업도 빛날 것인데 종래의

누습(陋習)이 제나라 역사는 발휘하지 않고 남의

나라 역사를 전송(傳誦)하며, 제나라의 영웅은 숭배하지 않고

남의 나라 영웅을 떠받들었다. 소미 통감(少微通鑑)

아이들이라도 모두 외우지만 동국통감(東國通鑑)

노성한 선비도 읽지 않으며, 항우(項兩한신(韓信)

사적은 초동목수(樵童牧竪)도 말할 수 있으되,

을지문덕(乙支文德양만춘(梁萬春)의 공업은

학사도 잘 아는 이가 드물다.

그러는 중에 일종 맹목적인 학자의 무리가

존화(尊華)라는 두 글자를 칭탁하고, 노예적민 학문을 서로 전하여

가르치고 배와서 국민에게 떠들어대므로, 국성(國性)

소침하고 국수(國粹)가 마멸(磨滅)되게 되었으니,

어찌 웃을 일이 아니며,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니리오.

 

잘 생긴 민족의 혼

 

 

 

 

 

류관순(柳寬順, 1902 12 16 ~ 1920 9 28)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고흥(高興).일제강점기에 천안에서 3.1운동으로부터

시작된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하였다.

 

유관순이 사망한 이틀 뒤, 이 소식을 들은 이화학당

교장 프라이와 월터 선생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의 시체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이화학당의 외국인 교직원들이 유관순의 옥중사망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자,

서대문형무소는 마지못해 월터 교장서리에게 시체를 인도하였다.

1920 10 14일 정동감리교회에서 김종우 목사 주례로

장례식이 거행되고,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의 존재는 잊혀졌다. 유관순의 시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1936년에 택지 조성 등을 목적으로 이태원 공동묘지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무연고묘로 처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5년 광복 후 충청남도와 천안군의 협력으로 병천면에 유관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건립되었다. 한편 1946년부터는 이화여고교장이었던

신봉조와 박인덕 등 이화학당 출신 인사들에

의해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다.

 

이 즈음, 서대문형무소로부터 유관순의 인수한 이들이

석유상자 속에 든 유관순의 시체를 열어보니 토막으로 참살되었다는

 소문 등이 퍼뜨려졌다.

 

1962 3 1일 건국공로훈장 단장(후일 건국훈장

국민장으로 개정)이 추서되었다. 시신을 잃어버려 1989 10 12

그의 고향 근처에 가묘인 초혼묘를 세웠다.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에 탄신 100주년을 맞아

유관순열사기념관(柳寬順烈士記念館)을 개관하여

유관순 열사의 영정을 봉안하고 2003년 문을 열었다.

 

하알빈역에 내리는 이또히로부미(가운데 키작은 사람)

 

러시아 일반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 중에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가진 한 조그마한 늙은이가 이같이 염치없이

감히 천지 사이를 횡행하고 다니는가.


 저것이 필시 이등 노적일 것이다 하고 곧 단총을 뽑아 들고

그 오른쪽을 향해서 3발을 쏜 다음, 생각해 보니 십분 의아심이

 머릿속에서 일어났다. 내가 본시 이토의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일 한 번 잘못 쏜다면 큰일이 낭패가 되는 것이라,

그래서 다시 뒤쪽을 향해서, 일본인 단체 가운데서

가장 의젓해 보이는, 앞서가는 자를 새로 목표하고 3발을 이어

쏜 뒤에 또다시 생각하니, 만일 무죄한 사람을 잘못 쏘았다

하면 일은 반드시 불미할 것이라 잠깐 정지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러시아 헌병이 와서 붙잡히니 그때가 바로 1909
음력 9 13일 상오 9시 반쯤이었다. 그때 나는 곧 하늘을 향하여

 큰 소리로 대한만세를 세 번 부른 다음, 정거장 헌병 분파소로

붙잡혀 들어갔다.(안중근,「안응칠 역사」에서)

 

 

 

 

 

1909 10 26 9 30분경,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

응징하는 안중근 의거 장면도(박영선 화백)
 하 , 도쿄일일신문에 게재된 의거 직후 안중근 의사가

체포되는 장면을 그린 삽화

 

 

안중근의사

 

유동하 선생(1892.1.5 - 1918)

18살의 나이로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참여했고

거기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하셨다

뤼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루신후 러시아로 들어가 독립단체인

한인 사회당을 건립하셨다.

그러나 선생은 1918년에 시베리아에서 숨을 거둔다.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알려진바가 없다가 11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일본에 연행되었다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독립운동과 김용괄이란

사람이 유동하 선생은 일본군에게 총살당하셨다라는 증언을 한바가 있다.

 

거사 전 하얼빈에서 기념촬영(왼쪽에서 안중근, 우덕순, 유동하)

 

 

 

안중근의사가 1908년 국내 침공작전을

벌릴 때 함께 참여한 엄인섭의병장과

공동작전을 벌린 홍범도장군

 

 

 

도산 안창호(1878년 11월 9일 - 1938년 3월 10일) 선생

이준, 이상설, 이위종의 3명의 헤이그특사
(출처 : 네이버지식백과)

 

이상설(1870 12 7  - 1917 3 2)이다.

 

고종의 사실상 최후의 몸부림으로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파견되었지만 사실상 조선이 발언권을 가질 기회는 없었다 이기..

 

선생은 헤이그 특사 이전에도 시국을 비판하는 상소를 다섯차례

고종에게 올렸고, 27살에 성균관 교수가 될정도로 수재셨다.

 

특사 파견이후에도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군을 돕고 권업회를

창설하는등 독립운동을 이어가다 병으로 돌아가셨다.

 

"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라고 하셨다.

 

 

김규식 임정 부주석(1881. 1. 291950. 12. 10)

 

서재필의 영향으로 일찍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셨다.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하신 선생은 졸업 이후 바로 독립운동에 뛰어드셨다.

영어를 정말 잘하셨고 라틴어, 독일어, 불어, 중국어, 일어는

물론, 러시아어, 독어, 라틴어, 인도어까지 구사하였다고 한다.

이런 어학 능력을 바탕으로

파리 강화외의의 한국 대표로 참여하시게 된다.

신민회 사건으로 한국내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자

 상해로 망명하셔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셨다.

같은 미국통인 이승만 전 대통령과 외교적으로

노력도 하셨고 교육운동에도 뛰어드셨다.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등의 사상적 계파로 갈갈히 나뉜 독립운동을

규합하기 위해 민족혁명당을 창설하기도 했고,

임시정부의 부주석으로 활동하셨다.

광복후엔 한국에 들어와 김구선생과

함께 활동했으나 한국전쟁 도중 납북당하시고

동년에 평안북도에서 돌아가신다

 

 

 

독립운동가 강영소(1886.2~1934.8) 선생이다.

 

선생은 미국 하와이에서 에와친목회, 합성협회, 국민회를 조직하고,

홍사단과 대한인국민회의 간부로서 동포사회를 이끈 지도자시다.

그의 아버지와 그의 5형제 모두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중 4명이 건국훈장을 받으셨다.

국내에서 독립 운동을 하시다 합방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 후원회 위원등을 맡으시며 독립운동을 지원하셨다.

 

 

 

 

이른바 '5성 장군'으로 유명한 김홍일

장군(1898. 9. 231980. 8. 8)이시다.

 

1910년 한일합방이후 장군의 부친이 '"왜놈의 통치하에

사느니보다는 자유를 찾아야겠다"라고 하시며 만주로 이주,

1918년엔 장군은 '군인이 되어서 일제와 맞써 싸워야겠다'라고

결심하신후 상해로 건너가신다.

 

중국군 사관학교 입학하여 근대식 군사 교육을 받고 중화민국군

장교가된 장군은 이후 임시정부와 접촉해 독립운동에 투신하신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지원하기도 하고 별동대를 이끌고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는등 일선 지휘관으로 활동했다.

이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다 일본의 손길을 피해 다시

중국군으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중책을 맡으며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셨다.

 

이후 중국군에서 승진을 거듭해 19집단군 총사령부의 참모처장으로

취임하셨고중화민국군에서의 최종계급은 소장이시다.

이후 김구선생의 요청을 받아 광복군 사령관이 되셨다가,

 광복후 귀국해 육군사관학교와 육군참모학교 교장,

시흥지구전투사령관, 육군 제1군단장, 육군종합학교

총장 등을 역임하고 1951년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1군단장이셨는데, 빈사에 빠진 잔여병력을

수습해 한강 방어선, 낙동강 방어선에서 활약했다.

 전쟁 초기 한강 방어선 구축을 먼저 건의했으나

당시 육군총참모장 겸 육해공군 총사령관이었던

채병덕 병신새끼가 거부하여 한강 방어선 구축이 늦어졌다.

상당한 공을 세우신 장군이시지만 눈밖에 나셔서

전쟁 와중에 학교장으로 사실상 좌천되셨다.

 별명은 5성장군인데, 중국군에서 소장, 한국군에서 중장으로

 예편하셔서 두개를 합해 5성장군이라 불렀다고 한다.


 

 

1917 12 30일에 태어나 1945 2 16일에 옥사한

일제강점기의 항일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다. 윤동주가

사망한지 6달이 지나서 일제로부터 독립했으므로 생전에

조국의 독립을 보지는 못했다.

아명은 해처럼 빛나라는 의미인 해환(海煥)’. 동생인

윤일주는 달환(達煥)’, 갓난아기 때 세상을 떠난 동생은 별환이다.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특유의 감수성과 삶에 대한 고뇌,

 독립에 대한 소망이 서려 있는 작품들로 인해 대한민국

문학사에 길이 남은 전설적인 문인이다.

더군다나 1930년대부터 일제의 강압과 회유책에 의한

문인들의 절필, 변절이 심화되어 1940년대쯤부터는

다수의 문인들이 절필하거나 친일파로 변절했기 때문에,

윤동주는 이육사와 더불어 1940년대를 대표하는

민족 시인으로 추앙받는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고작 김일성 회고록에서 '시인 윤동주는

평양 숭실학교 졸업생이다'

정도로 매우 간단하게 쓰여진 게 전부이며 한국

학생들처럼 그의 시를 공부하거나 그렇지는 않다고 한다.

연구가 정체되어있는 북한 국문학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할 수 있겠다.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구파 백정기 선생

(1896 1 19  1934 6 5)이시다.

 

3.1운동에 참여하셨고 이후 베이징으로 망명하셨다.

천황 암살 기획, 군사시설 파괴 공작,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에도 참여하려 했으나

실패하는둥 상당히 전투적인 독립운동을 지향했다.

이후 '흑색 공포단'을 창설하여 더욱도 공격적인 항일

운동을 기획하였고, 다른 동지들과 함께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를 암살하려 하다 기밀이

누설되어 체포당해 감옥 복역중 옥사하셨다.

 

 

 

간호사 독립운동 단체 '간우회'를 창설하신

박자혜(1895 12 11 ~ 1943 10 16선생이시다.

 3.1 운동에 참여하셨고 의열단에도 참여하셨다.

남편이 그 유명한 단재 신채호 선생이시다. 남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면서 상당히 고생을 많이 하셨다.

 

 

독립운동가 김동수 선생이다.(1916. 12. 16 ~ 1982. 2. 20)

중국군 장교로 시작해 이후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

창설 독립운동에 가담하셨다.

 

 

조시원 선생

(1904 1023~1982 718)

그의 아버지는 일가족

10명을 독립운동가로 키우신 분이다.

1920년 중국 상해로 건너간 뒤

29년 베이징에서 다물단에 참가해

친일파 숙청작업을 전개했다.

또 만주에서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과

동만청년동맹을 조직, 무장투쟁에 참여했다.

광복 후인 45 12월 귀국, 국민의회

대의원 겸 법무위원과 삼균주의청년동맹

부위원장, 태양신문사 고문 등을 맡아

건국운동에 힘을 쏟으셨다

 

 

 

독립운동가 박재혁 의사.

의열단에 참가해 부산경찰서를 폭파하고 경찰서장을 죽인뒤 27살의

나이로 형무소에서 왜인손에 죽일바에 스스로 죽겠다며 

단식을 이어가다 옥사하셨다.

 

 

 

 

김경찬 장군(1888.6.51942.1.2)

 

이분은 무려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했으나 선생은 일본 육사 3년 후배인 이청천과 함께 탈출을 감행,

만주에서 활동하던 대한 독립 청년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에 뛰어드신다.

식겁한 일본은 장군에게 현상금까지 걸었었다.

 

이후 똑같이 일본군 장교로 있다 탈출한 지청천과 함께

신흥 무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연해주에서

대대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셨다.

 

1920년대엔 러시아 적백내전의 여파로 많은 독립군도

휘말렸는데 당시 장군이 지휘하던 독립군 또한 일본군을

적대하며(일본군은 백군의 편을 들었다) 적군에 가담해 싸웠다.

 

러시아 적군에 의해 이용된 감이 있지마는 장군은 백군과의

약골리가 전투등에서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소련적군에 의해 포시에트 군사구역 조선 파트리잔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빨갱이 적군은 빨갱이들 아니랄까봐 당시 적군과 함께

싸운 독립군데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가하게 된다.

실의에 빠진 선생은 상해와 만주를 왔다갔다 하면서

다시금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 정책에서의

간첩 활동으로 휘말려 시베리아에서 옥고를 치루였다.

 복역이후에 또 간첩죄로 고발당해 시베리아에서

옥고를 치뤘고, 거기서 돌아가시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