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을 존경한일본인
이덕일 사랑
대한제국 병탄(倂呑)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한국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를 일본 지배층은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했지만 그를 접했던 일본인들은
존경의 감정을 아끼지 않았다. 그를 에도 막부 말기
서양에 맞서 싸웠던 '양이지사(攘夷志士)'처럼 바라본 것이다.
뤼순 감옥의 담당 간수이자 헌병대원이었던
지바 토시치(千葉十七)는 안의사에게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란
휘호를 받고 크게 감격했다.
귀일(歸日) 후 그는 미야기현(宮城縣)의 다이린사(大林寺)에
안중근의 위패를 모시고 1934년 사망할 때까지 명복을 빌었다.
지금도 다이린사 앞에는 안 의사의 위 휘호를 새긴
추모비가 서 있고 매년 추도식도 열린다. 뤼순 감옥
소장이었던 구리하라 사다기치(栗原貞吉)는
히라이치(平石) 고등법원장과 마나베(眞鍋)
재판장 등에게 선처를 탄원했으나 무산됐다.
안 의사가 흰 한복 차림으로 죽음을 맞고
싶다고 하자 그는 처형 전날 부인에게 한복을 만들게 해
안 의사에게 입혔다.
구리하라 소장은 안 의사 사후 사직하고 고향 히로시마로
돌아와 의학 관련일에 종사하며 1941년 사망할 때까지
공무직에 나가지 않았다. 하급 검찰관이었던
야스오카 세이시로(安岡靜四郞)도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라는 휘호를 받는데,
후일 며느리에게 "안중근은 깊은 교양의 소유자"라는
증언을 남겨 며느리가 '초대 총리대신을 죽인 암살자를
그렇게 평가해도 될까'라고 깜짝 놀랐다고 전한다.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었던 박은식(朴殷植)은
전기 '안중근'에서 "일인(日人)들도 그 의를 흠모하여
그 필적을 구하려는 자가 많았다"라고 쓰고 있다.
중국 근대 정치가 양계초(梁啓超)는 "영구(靈柩)
태운 마차 앞서가는데…먼 하늘 바라보니 상복이나
입은 듯 먹장같은 구름안개 대지를 덮었네"라는
안 의사 애도시를 썼다.
안 의사의 의거와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는 4대사업이
전개된다는데 정작 뤼순(旅順)의 안 의사
유해 발굴 예정지에는 아파트가 들어선다 한다.
양계초 고택에는 '양계초 기념관'이 들어섰는데,
그가 눈물로 보낸 의사의 유해
발굴지에 아파트라니. 뜬금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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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히토시 교사가 27일 근영중학교
한일 공동역사 수업에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자료를 보여주며 학생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테러리스트이지만,
실은 동양의 평화론자로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 요코하마 시립 스에요시 중학교
사회교사인 스즈키 히토시(53)씨가 27일 전주
근영중(교장 최병남)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역사수업을 펼쳤다.
스즈키씨는 ‘일제 강점기 시대 화해를 위해 노력한
일본 지식인과 안중근 ’이라는 주제로 근영중 2학년
학생 8개 반을 돌면서 이야기를 풀어갔다.
매년 3월26일은 안중근 의사의 순국일로 올해로 97주년을 맞았다.
그는“안중근 의사는 일본 사람들의 잘못을 깨우쳐
주기 위해 용기 있는 일을 했다”며 “3년 전부터
순국일에 즈음해 서울 남산 안중근 기념관을 찾아
추모하고 있다”고 밝혔다.
스즈키씨는 수업 강의 중 안중근 의사와 함께
한·일 우호 증진을 위해 노력한 인물로 일본인 2명도 꼽았다.
일본인들에게 우리 서민들의 생활상과 전통의
미를 가감없이 알린 아사카와 다쿠메와 ‘
일본판 쉰들러’인 오오까와 츠네기치이다.
그는 “이 중에서도 특히 오오까와는 1923년 ‘
도쿄 대지진’당시 츠루미구 경찰서장으로
재직한 인물로, 지진 이후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뜬소문에 억울하게 감금된 300여명의 생명을 구한 인물”
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그동안 수업을 위해 모은
자료들을 학생들에게 펼쳐보이면서 이를 자세히 설명했다.
스즈끼씨는 또 일본 총리의 신사참배나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역사에 대해 반성한다면
그런 행동을 할 수 없다”며
“신사 참배는 즉각 중단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수업에 참여한 김지민 (14)양은 “일본인 교사가 직접
진행하는 수업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며 “
이번 수업으로 한·일 양국의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스즈끼씨는 근영중 조은경(40)교사와 지난 2004년
일본서 열린 한·일 교원단체 세미나에서 인연을
맺은 뒤 올해로 3년째 조 교사와 함께
한·일 공동 역사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기재기자 haidi95@sjbnews.com
909년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
이 소식을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했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哈尔滨, 哈爾濱(하얼빈), Harbin)에 도착했다.
당초 계획은 동청철도(東淸鐵道)의 출발지인
장춘의 남장춘(南長春), 관성자(寬城子)역과 도착지인
하얼빈, 채가구(蔡家溝)역의 4개 지점에서 암살을 시
도하려 하였으나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여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에서 저격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채가구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했다.
10월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하였다.
이외에도, 일곱 발의 저격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모리 타이지로우(森泰二郞),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남만주 철도의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우(田中淸次郞)한테서 총격하였다.
저격 후,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라! (Корея! Ура!)
라고 크게 외쳤다. 이 외침은 대한 만세라는 뜻이었다.
저격 30분만인 오전 10시경, 이토 히로부미는
피격당한 직후 열차로 옮겨졌다.
죽기 직전에 브랜디(옛날에는 각성제로 종종 사용)
한 모금 마시고 "범인은 조선인인가?"하고 물었으며,
주변에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바보 같은...
"이라고 뇌까리며 죽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사건 현장에 있던 주변인물들의 증언에
의한 것이지만 조작이라는 주장이 있다.
총을 세 발이나 맞고 그런 말을 남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동행한 의사의 증언으로는 분명히 열차
내로 옮길 때까지 살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다른 책에서는 죽을 당시에 "난 틀렸다...
다른 부상자는?"이란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어 전반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감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제국 공안들에게
피체되었고 최재형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일본이 아닌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했다.
하지만 안중근이 일본 제국 정부에 넘겨져
뤼순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으며, 유해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
같이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편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이
안중근을 위해 무료 변론을 했다. 안중근은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재판과정에서 재판소내의
어떤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당당히 밝혔다.
조선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いとう ひろぶみ),
1841년 10월16일-1909-10월26일) 는에도시대
후기의 무사(조수번사)이자일본제국의 헌법학자 정치가 이다.
초대 일본제국의 내각총리대신이자 조선통감부의통감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정부의 요직을 거쳤으며,
일본제국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초대·제5대·제7대·제10대
일본제국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했다.
또한 초대·제3대·제8대·제10대 추밀원의장,
조선통감부초대 통감, 귀족원 의장, 관선효고현지사 등을 지냈다.
입헌정우회를 결성해 원로로 활동했다.
대훈위 중일위(從一位)를 받고, 작위는 백작 이며, 사
후공작 으로 추증되었다. 영국런던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University College London, Univ. of London)에 유학하여 화학을
공부하였으며, 훗날 미국예일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한국에서는
에서는 을사늑약과 관련해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주도한 인물로, 일반적인
일본인의 시각에서는 초기 근대 정치인의 한 사람이자
일본의 근대화에 있어 기여한 중요한 인물로 기억된다.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1909년 6월 14일 통감직을 사퇴하고
추밀원 의장에 임명됐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에게
총탄 3발을 맞고 피격 20여 분 만에 사망하였다.
사후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충정군(忠貞君)에 추봉되었고,
대한제국의 순종황제는 그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