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짱회

청평사의전설(팔짱동우회)

이모르 2020. 12. 15. 16:49

상사뱀이 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회전문. 보물 제 164호로 지정돼 있다.

 

 

팔짱회 오늘 참석한 13인들과 청평사로

오르면서 첫번째 보는것이 계곡물에 있는

청동 공주상입니다

공주몸에 뱀이 붙어 있었지요

여기서 단체 기념사진 했지요

그다음 보는게 거북바위 이고

조금 더가면 구성폭포가 나옵니다

 

그리고 청평사 보물제164호로 지정되어 있는

회천문이 나옵니다

 

우리 님들은 그 회천문 앞에서 기념사진 합니다

청평사가 왜 유명한가??

공주와 구렁이 조형물 구성폭포

그리고 회천문에 얽혀있는 전설의 사연을 범보신문에

연제된 글 옮겨와 보았습니다

 

춘천 시민으로 우리 회원 부부

병원 선생님을 부인으로 두고 계신 분이 회천문을

설명하고 있었는데 보강하는 내용입니다

 

 

거북 바위

 

 

청평사 문 들어오다 벼락맞아 ‘최후’

애틋한 사연 기려 탑 세우고 절 중창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 674번지에 위치한 청평사.

소양댐 건설로 호수가 되어 배를 타고 가거나 양구로

우회해 갈 수 있는 청평사는 강원도의

오지사찰이 되었습니다.

 

서기 972년 고려 광종 24년에 영현(永玄)스님

(문수원기에 전하는 내용이며 동문선에는

영현(永賢)스님이라 표기하고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승현(承賢)스님이 창건했다고

기록돼 있다)이 개창해 백암선원이라 했다가

폐사되었습니다.

다시 1068년 고려 문종 22년에

 이의가 중건하여 보현원이라 했습니다.

 

그의 아들 이자현은 벼슬을 버리고 보현원에서

수행에 전력해 문수보살을 두 번이나 친견하는

법력을 얻은 뒤 문수원(文殊院)으로 고쳤다가

후에 청평사로 불렀습니다.

 

 

 

구렁이가 죽어있었다는 구성폭포

 

오랜 역사를 가진 도량이지만 사찰이름이

더욱 유명해진 연유에는

당나라 태종황제의 공주(원나라

순제황제의 공주라고도 한다)와

상사뱀에 얽힌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나라 태종황제에게는 공주가 있었는데 그

 미모는 누구도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미모가 출중했으면 그녀를

한번 보는 사람마다

온몸에 전율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온 나라의 젊은이들이 공주에 대해

연정의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공주는 위험한 사랑을 나누고 있었는데

다름 아닌 평민의 청년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공주의 외출을 못하게 하고

일체 잡인들의 출입을 별궁에 금지시켰습니다.

 

그러자 평민청년은 모든 음식을 전폐하고

오로지 공주에 대한 일념 때문에 나날이

야위어 가기만 했습니다. 백약이 무효했습니다.

이 청년은 몸져 누우면서 자신이 애타는

마음을 어머니께 말했습니다.

 

 

청평사 삼층석탑(春川 淸平寺 三層石塔)은 ,

청평사 에 있는 삼층석탑이다

1984년 강원도문화재 8호로 지정되었다.

 

 

“어머니, 공주님을 한번만 보게 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죽고 말 거예요.”

 “이 놈아, 어찌 어미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이냐.

네가 제정신이 아닌 게야. 이 나라에는 엄연히 법도가 있거늘.

어찌 오르지도 못할 나무를 쳐다본단 말이야.

빨리 공주님을 잊도록 노력해 보거라.”

열병처럼 깊어가는 공주에 대한 연정을 못 이긴 청년은

며칠 가지 못해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청년은 숨을 거두면서도 “내 죽어서도 공주님 곁에서 머물 것이야.

그래서 공주님께로 향하는 내 마음을 꼭 보여주고 말거야.

이 생에서 이루지 못하면 다음 생에서라도

뱀이 되어 공주님 곁에 머물 것이야.”

청년이 숨을 거두자 그의 몸에서는 이상한 기운이 감돌더니

한 마리 뱀이 스스륵 빠져 나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스비다.

 “아니, 정말 우리 아들이 이 생을 하직했단 말인가?

아직도 살아 갈 날이 창창한데 어이해서

아비와 어미보다 앞서서 간단 말이냐.

이 불효막심한 녀석아.” 그 청년의 부모는 대성통곡을 해 보았지만

이승과 저승을 연결할 수는 없었스비다.

 

얼마 후 궁궐에서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낮잠을 자던 공주의 몸에 느닷없이 구렁이가

몸을 칭칭 놓아주질 않았습니다.

깜짝 놀란 공주는 구렁이를 몸에서 떼어내려

했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사랑했던 사람이었지만 이미 생사의

영역을 넘어선지라 공주는 이 흉물스런 구렁이(상사뱀)로

인하여 시름만 깊어져 갔습니다.

상심이 깊어진 공주는 신라로 가서 정성껏 기도를 하면

좋아질 것이라는 어느 스님의 말을 듣고

신라 땅을 돌아다니다가 청평사 인근에 도착했습니다.

 

 

 

 

이미 해는 저물어 사찰 폭포 인근에 하룻밤을 유숙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 인근 계곡에서

범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퍼졌습니다.

“바로 위에 절이 있는가 봅니다.

내 잠시 사찰에 들러 부처님께

기도를 하고 올 것이니 잠시 몸에서 내려와 주시지요.”

 

그러자 구렁이는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았던

공주의 청을 선뜻 들어 주었습니다.

구렁이는 사찰에 들어오지 못하고

잠시 바위에 똬리를 틀고 기다리겠다는 듯이

잔뜩 웅크렸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도 있구나. 내 몸에서

구렁이가 떨어져 나오다니…….

” 공주는 날아갈 듯 하다 몸을 추스르기 위해

청평사 입구 폭포로 향했습니다.

“내 부처님을 친견하기 전에 몸을 깨끗이 씻어야겠어.

얼마나 오랫동안 내 몸에 구렁이가 붙어 있었는지 모르겠어.

이 지긋지긋한 악연을 끊고 싶은데 부처님은 들어 주실지 모르겠어.”

공주는 이윽고 사찰에 들러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를 올렸습니다.

“부처님, 제가 전생에 어떤 업연이 있었는지 모르오나

이생에 이렇게 고통스런 날을 보내는 것을 보면

악행을 많이 저질렀을 것이옵니다.

이제 부처님 전에 깊이 참회의 절을 올리옵니다.

제게 닥친 이 엄청난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가피를 내려 주옵소서.”

 

기도를 마친 공주는 대웅전을 나오는데 건너편 요사채에서

스님들이 모여 바느질을 하고 있었스니다.

가까이 가 보니 여러 스님들이 모여 법복과 가사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아. 나도 스님들의 법복을 만들어 올리고 싶구나.

어디 한 번 해 보면 안 될까?”

공주는 자신도 모르게 가까이 가서 가위질을 하고,

이어 바느질을 쓱쓱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법당에서는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어딜 허락도 없이 함부로 가사불사에 손을 대는 것이요.

어서 물러가시오.” 공주는 물어나면서

“저는 다만 스님들이 만드시는 법복을

꼭 한번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했을 뿐인데…

”라며 말끝을 흐렸습니다.

스님의 야단을 맞은 공주는 얼른 몸을 추슬러

요사채를 빠져 나왔습니다.

이제 바로 앞에 있는 문(회전문)을 나오면

다시 구렁이를 만나야 하고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속박된 몸이 되고 말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아. 숙세의 업이 이렇게 가혹할 줄 몰랐다.

내 이 생에서 열심히 착한 일을 해서 다음에 만나는 생에서는

이처럼 고통 받지 않으리라.” 밖에서 공주를 기다리던

구렁이는 조바심이 났습니다.

“공주님이 금방 오신다고 했는데

왜 이리 오시지 않지? 마중이라도 나가야 하는 건가?”

몹시 궁금해진 구렁이는 청평사를 향해 기어 올라갔습니다.

구렁이가 사찰 회전문을 나오는 순간 하늘에서 청천벼락이 쳤습니다.

“쿵-쿠쿵.” 순간 구렁이는 큰 벼락을 맞고 뒤집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어 큰 비가 내리면서 삽시간에 청평사 아래는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구렁이도 큰 홍수를 따라 둥둥 떠내려가 버렸습니다.

깜짝 놀란 공주는 급히 구렁이를 찾아 내려가 보니

구성폭포에 죽어 있었습니다.

“어떤 인연으로 만났는지 몰라도 참으로 서글픈 인연이구나.

아마도 당신과 나는 아득한 전생에 나쁜 인연을 맺었나 봅니다.

내가 당신과 만난 시간은 잠시이지만 생을 바꿔서까지

나를 괴롭혔으니 착한 일을 많이 해 다음 생에는

서로 고통 받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 공주는 구렁이를 정성껏 묻어 주고 청평사에

다시 올라가 부처님 전에 간절히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 생에서 다하지 못한 사랑이 다음 생에까지

이으려 했으나 못된 구렁이로 환생한 업보에

이토록 고생을 한 것은 내가 지은 죄업이 크기 때문입니다.

부디 소녀와 인연 맺은 모든 사람들의 죄업을 참회하오니

넓으신 도량으로 헤아려 주십시오.”

 

 

 

전설속의 공주와구렁이 동상

 

공주는 간절히 기도를 하고 또 하면서

며칠 동안 참회진언을 염송했습니다.

기도를 마치자 사찰의 도력 높은 스님은

“이미 공주님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며

자초지종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공주님. 소승은 이미 공주님과 구렁이가

수억 겁 동안 맺은 악연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절에 오실 때 그 고통을 알고

소승이 구렁이를 몸에서 떼어낸 것입니다.”

공주는 그제야 청평사에 도착하자 순순히 몸에서 떨어져 나온

구렁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랬군요. 큰스님께서 저와 구렁이의 업장을 녹여 주셨군요.

 저는 이곳에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구렁이의

영가를 천도하고 평생 수행자로 살게 해 주십시오.”

하지만 공주의 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공주는 청평사를 위해 불사를 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공주의 의중을 전해들은 당나라 태종은 큰 금덩어리

세 개를 청평사로 보냈습니다.

이중 하나는 법당과 공주가 머물 숙소를 짓는데 사용하고

하나는 공주의 귀국 비용으로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훗날 사찰을 고치는데 사용하기 위해

 오봉산에 묻었다고 합니다.

이와 함께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보내 구렁이가

죽은 구성폭포 위에 탑을 조성했다.합니다

 

공주가 상사병에 걸린 청년과 생을 넘나들며 악연(惡緣)을

끊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회전문은 한국전쟁 당시

모든 전각이 소실됐는데도 불타지 않았다고 하니다.

현재 회전문은 보물 제164호로 지정돼 보존돼 있습니다.

청평사 계곡에는 공주가 목욕을 했다는

구성폭포와 공주탕은 현재도 그 모습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법보신문에서 옮겨왔습니다

 

 

청평사 3층석탑

 

 

공주가 목욕햇다는 소를 배경으로 한 사진

청평사 돌담 끼고 등산로 접어들면

 

왼쪽 냇가를 건너야 만날 수 있는 작고 아담한 탑.

사찰 길목의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홀로 서 있는 이 탑은 일명 공주탑이라 부른다.

 

 

 

청평사 입구의 환희령이라는 언덕 위에 서 있는 3층 석탑이다.

일반적으로 탑은 사찰의 중심건물인 금당 앞에

세우는데 이 탑은 사찰 길목의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홀로 서 있다.

형태는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위·아래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네 모서리가 들려 있어 날렵한

감을 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아담하면서도 안정감이 드는 탑으로,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청평사가

고려 광종 24년(973)에 창건된 사실로 볼 때

고려 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뱀에 몸이 얽혀 갖은 고생을 하던

원나라 순제(順帝)의 공주가 이 절에 와서

불공을 드린 뒤 뱀을 떨쳐버리게 되자 이 소식을 들은

순제가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와 일명 ‘공주탑’이란 애칭으로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