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고구려벽화(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이모르 2022. 2. 21. 10:43

고구려의 영토

 

2008년 베이징 하계 올림픽 개막식때 단체로 한복입고 상모돌리기 하여 이게 중국인지 한국인지 조롱이 되었었고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 개막식 또한 그들의 국기게양식 때 한복을 등장시켜 중국의 문화공정 이 이슈가 되었습니다

 

중국은 우리 문화가 세계의 우수성을 알아주는 계기가 있을 때 마다 무조건 가기들 꺼라 우겨 댑니다 김치도 아리랑도 부채춤 장구춤 상모돌리기 등 그렇다면 이제부터 한복의 변천사 고구려의 벽화에서 발견된 함복의 유래를 알아보겠습니다

중국 집안 지역에 있는 고구려 벽화는 무려 12.000개 정도라는데 고대 고분벽화(古墳壁畵)에는 사자의 현생 생활과 천상(天上)의 여러장면들이 묘사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시대 생활상과 사후관(死後觀)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할 수 있으므로, 벽화의 내용을 통하여 그 시대 사회의 여러 모습을 살 펴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의 회화(繪畵)의 발생은 오래되었으나, 다만 고고자료나 고문 기재에 근거하여 그 벽화의 존재와 내용을 추측해 볼 수 있고, 중국 선진(先秦) 시기의 벽화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존하는것은 한대(漢代, B.C.206A.D.220) 벽화로 실물은 대부분 고분벽화이며 이들은 대체로 중국에서 부실관리로 많이 회손되어가고 있다 하여 아쉬움이 큼니다

 

특히 의상 문화는 고유의 전통에서 민족의 변천사 인데 고대 고구려의상 이 발전하여 근세 한복으로 승화한 것이라 생각하면서 고구려의 벽화를 올려 봅니다 글은 위키백과에서 사진은 외국포털 국내 포스팅 에서 모셔와 편집한 글입니다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대왕비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입니다 광개토대왕은 50대를 갓 넘어 사망했지만 그업적은 대단하였고 그아들 장수왕은 97세 까지 살아 장수왕이라는 명칭을 달게 되었습니다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대왕비의  극히 일부분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33-34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和通殘兵 ? 石城 ? 連船 ? ? ? 王窮率往討從平穰 ? ? ? 鋒相遇王幢要截盪刺倭寇潰敗斬殺無數

영락 14년 갑진년에 왜()가 분수없이 대방지역을 침입하였다. 백잔군과 연합하여 석성을 공격하였다. 연이은 배---- 왕은 몸소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평양을 출발하였다. 선봉이 만나자 황당이 막아내며 무찔렀다왜구가 패전하여 무너지니 참살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광개토대왕 영정

광개토대왕의 명언 "내가가는곳이 곧 고구려 영토이다"

 

고구려(高句麗) 한국의 고대 왕조 중 하나입니다국성은 횡성 고씨(橫城 高氏)이다.본래의 국호는 고구려였으나 당시의 금석문과 역사 기록을 토대로 장수왕대에 고려로 개칭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이후에도 궁예가 세운 고려(901) 왕건이 세운 고려(918)가 계승하여 '고려' 국호는 천년 이상 지속되었습니다. 현재 한국의 영문 국호인 코리아 역시 고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중국과 한반도에서 발견된 120,000기 이상의 고분들 중에서 거의 절반이 고구려 고분이며, 이러한 고분들은 왕을 비롯한 왕족, 귀족들의 시신을 매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 집니다. 고분의 벽화는 당시의 생활상을 독특한 방식으로 보여 주는데, 많은 고분 중에서 90기에서만 이러한 벽화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북한의 5개 지역에 있는 63개의 고분이 고구려 고분에 포함되는데, 이들은 5세기~6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중 강서삼묘(江西三墓)와 동명왕릉, 그리고 16개의 다른 고분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제 되었습니다

 

고구려 벽화

 

고구려 수렵도

유효사거리가 강한 맥궁과 몸을 돌려 쫒아 오는 적에게 활을 쏘는 배사법은 오직 우리 동이족의 독창적인 전투기법으로 고대 한민족의 용맹성을 보여주는 벽화이다  5世紀 平壤 古墳壁畵로 본 高句麗 文化 正體동북공정으로 고구려의 찬란한 문화가 중국의 소수민족의 문화라 고 중국은 말합니다

일본은 더 심각해서 역사를 아예 날조한다 일본의 역사왜곡은 712년부터 시작되어 수많은 역사를 왜곡하여 왔다 좋은 것은 무조건 일본 것으로 날조하여

역사를 인식시켜 나갔습니다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 이집트나 그리스 것들은 반드시 원산지를 명시 하여 전시 되는 것과 반대로 일본은 아예 자기것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습니다 1941년 일본미술사를 처음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던 미국인 카터코벨은 1978년 화와이 대학을 은퇴하기 까지 일본 고고학을 연구 상당한 권위와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한국미술를 보려고 체류 6개월예정을 8년으로 늘리며 공부하고 중국것 또는 일본 것으로 알아왔던 수많은 미술품들이 모두 한국 것임을 인지하고 180도 인생관이 달라졌습니다 그녀는 1981년 코리아 타임지에 내가 콜럼비아 대학에서 배운 일본사는 모조리 가짜였다는 글을 서두로 아들과 함께 모두7의 관련 책을 발간하였습니다 AD427 5세기 문화의 중심이었던 5세기 평양 정치 문화 의 진행 사항은 고분의 벽화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5세기 전반까지 평양주위 벽화의 주요테마는 일상생활 및 무덤의 주인 위주었으나 5세기 중기부터 신성한 로터스(연꽃) 장식 인물로 일부 벽화 무덤에서 그림의 주재로 선택되었습니다 평양은 고구려 시조 고주몽의 무덤으로 평양에서 5세기의 한가운데에 건설된 불교의 상징도시로 연꽃으로 장식 하였습니다

고구려의 국가 전력 불교사상이 고구려를 지배했습니다 그 때문에 평양지역의 벽화에는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북한의 고구려 무덤 단지 벽화

고구려의 문화유산은 2004년 7월 1일 '고구려 고분군'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식 등록되었습니다. .평양 동명왕릉을 비롯한 진파리 15기, 호남리 사신왕릉 등 평양 주변 34기의 5개 지역 63기(벽화분 16기 포함)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평양 3인치 호남리 1-16호분.평안남도 대동군 덕화리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삼묘 덕흥리·약수리·수산리·용강대총·쌍영총 등 8곳 황해남도 안악군 안악군과 안악 1-3호분. 그들은  중국이나 일본이 아무리 자기 것으로 날조 하여도 우리의 독창적인 예술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무덤

 

무덤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요새 궁전과 무덤뿐 아니라 벽화와 유물의 고대 고구려 왕국의 무덤은 중국과 북한 국경의 양쪽에서뿐만아니라 한국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중국의 인민공화국의 유적과유물은 초기 및 중간 기간 고구려 왕국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하여 고구려 것으로 인정하였으나 동북공정의 여파로 차츰 그들의 유물로 동화 시켜나감니다  고구려의 90개에 달하는 무덤은 중국 길림성 지안에 있고 북한의 평양과 남포근처에AD500년 시대의 벽화가 전시 되어 있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와 그 양식은 고대 한반도(백제, 신라, 가야)와 일본 열도에까

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백제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고분벽화는 공주의  송산리 6호분과 부여의 능산리벽화입니다. .송산리 6호분의 사신은 백제 지배계급이 사신이 죽은 자를 보호 한다는 개념을 받아들인 것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고분으로는 경상북도 순흥의 은내리와 어숙술간묘 벽화가 있습니다. .2개의 고분은 신라와 고구려의 순흥 접경지대에서 출토되고 고구려의 요소를 담고 있어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유일하게 발굴된 가야 고분벽화는 고령시 고아동 고분벽화입니다. 그 구조와 내용, 표현기법이 모두 백제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구려의불교

5세기 후반 남포시 용강군 쌍영총 무덤 안칸 동벽에 그려진 승려와 부인의 공양 행렬.

고구려의 불교는 소수림왕(小獸林王) 2(372) 전진(前秦) 부견(符堅)이 사신(使臣)과 함께 순도(順道)를 보내 불상과 불경(佛經)을 전한 것이 그 시초이다. 2년 후(374) 아도(阿道)가 들어와 성문사(省門寺: 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운 것이 또 한국의 (寺刹)의 시작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교를 통한 공식 전입으로 실상 민간에 먼저 불교가 들어왔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불교는 한마디로 학술 외교불교라고 할 수 있다. , 고구려의 학승 등은 중국에 가서 경전을 배우고 연구함을 구법(求法)의 최상목표로 하였으며중국의 승려를 지도할 수 있는 고승도 있었다. 그 대표로 장수왕(재위 413491) 때 태어난 승랑(僧朗)을 들 수 있다.

승랑은 중국에 들어가 삼론학(三論學)을 깊이 연구하여 학문적 체계를 완성함으로써 신삼론종(新三論宗)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개척했다. 승랑은 중국 사상계를 지도한 최초의 인물로서양무제(梁武帝) 11(512)에 우수한 학승(學僧) 10명을 지도하였으며 중국에서 일생을 마쳤다.

고구려 학승들은 중국만이 아니라 일본에도 건너가 불교학술과 예술면에 큰 공헌을 하였다.[2] , 최초의 전교자인 혜편(惠便)을 위시해서 혜자(惠慈), 불교 예술가인 담징(曇徵), 일본 삼론학의 시조인 혜관(惠灌) 등이 그 예이다. 그리고 삼국통일  신라 불교를 일으킨 고구려 승 혜량(惠亮)도 들 수 있다.

위키백과

 

고구려인들의 수렵도

당시 한반도에는 사슴도 살았다 사냥꾼의 역동적인 모습에서 기마민족의 위상이 보인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수렵도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 있다. ()를 중시하였던 고구려는 수렵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이러한 배경에서 수렵도가 종종 그려졌다. 덕흥리고분(德興里古墳), 약수리고분(藥水里古墳), 무용총(舞踊塚), 장천1호분(長川一號墳) 등의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그림의 내용은 말을 타고 사냥하는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매우 힘차고 씩씩하며 속도감과 박진감이 넘치는 특징을 보여 준다. 무용총의 수렵도는 특히 이러한 의미에서 주목된다. 백제와 신라의 수렵도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전수리 고분 내 전실내부에 그려진 수렵도/통일신라
통일신라 사냥 전이/경남 을주군 중사리 절터

 

통일신라시대에는 무사가 말을 달리며 동물을 향하여 활을 쏘는 장면을 담은 전()이 남아 있어 당시에 수렵이 성행하였음을 잠작케 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수렵도(狩獵圖))]

 

귀족들의 사신접견

 

묘주
통역관

덕흥리 3실 무덤 안방에 있는 이 벽화는 13명의 관리들이 무덤 주인 진1을 기리는 모습을 입니다 그의 비문에는 그가 331년에서 408년 사이에 살았고, 부처님의 제자 였으며, 고구려 광개토대왕 밑에서 유주2도지사를 지냈다고 나와 있습니다. 13명의 관리는 유주가 분할된 13개 도도부현(縣縣)의 지사입니다. 지사와 대신 사신앞엔 통역관 여자도 보입니다

 

고구려인들의 생활

수산리 벽화 널길 문지기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 수산리 고분 벽화 널길 좌우에는 문지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갑옷을 입고 무장한 모습이 아니라 풍성한 바지의 평복차림을 하고 있습니다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다른손에는 긴 창을 들었습니다 곱슬머리에 삐죽하게 뻗친 콧수염과 크게 부릅뜬 눈 드러낸 치아 등 얼굴 표현이 매우 이국적인게 특징입니다 

수산리 고분 묘주와 신하
수산리 벽화 묘주부인 
수산리 벽화 남자시종
수산리벽화 여자시종
안악3호 고분 

 

안악3호분 묘주

관모를 쓰고 왼쪽과 오른쪽에서 자신을 보필하던 관리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국가 업무를 논하고 있는 모습이다

안악3호분 묘주부인

안악3호분에서 발견된 귀족부부의 얼굴 상:남편은 정면을 바라본채 보고를 받으며 정무를 보고있고 부인은 남편을 향해 비스틈이 앉았다 그녀는 앉은 자세로 약간 남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내는 다소 포동 포동한 얼굴에 약간의 미소를 가지고 설명을 듣고 있으며 화려한 머리 조각을 입고 하녀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꽃 무늬 실크드레스를 입고 있다

안악3호분 주인 행차
안악3호분 부억 고기창고 차고

 

모두 3명의 여인이 부지런히 부엌일을 하고 있다. 한 사람은 조리를 하고, 또 한 사람은 부뚜막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다. 옆에서는 한 여자가 소반 위 접시 등을 정리하고 있다. 부엌 앞에는 개 두 마리가 서성거리고 있는데 부엌에서 풍기는 음식 냄새에 입맛을 다시고 있는 듯한 매우 생동감이 넘치는 장면이다. 부뚜막의 모습은 순천 용호동1호분에 출토된 철제 부뚜막 모형(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그 형태가 같다.

 

고기저장고 안악3호분


부엌 옆에는 고기창고가 있다. 노루, 멧돼지 등이 쇠갈고리에 꿰어 매달려 있다. 왼쪽 기둥 안쪽에 '경옥(京屋)'이라는 붉은색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고깃간 옆에는 차고가 그려져 있는데, 두 대의 수레가 그려져 있다. 지붕을 덮고 장막을 두룬 수레, 장막이 없는 개방된 수레 두 채인데,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장막을 두룬 수레는 무덤 주인공의 부인이 사용하는 수레일 것이다. 왼쪽에 있는 수레는 대행렬도에서 주인공이 타고 있는 수레와 같다.

 

소 외앙간/안악3호분


수레를 끄는 소들은 외양간에서 여물을 먹고 있는데, 검정소, 누렁소, 얼룩소 등 세 마리 소가 있으며, 모두 뿔을 빨갛게 그려 놓았고, 코뚜레를 달았다. 마구간에는 사냥이나 전쟁에 나갈 때에 주인공이 타는 말들이 그려져 있는데, 말 세 마리가 털색이 조금씩 다르며, 말 갈기 한 올 한 올까지 묘사할 정도로 세밀한 표현이 돋보인다. 마구간 아래 나무방책 앞에서는 관리자로 보이는 사람이 시동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중이다.

 

안악3호분 우물


방의 북벽에는 지레 원리를 이용한 용두레 우물이 그려져 있으며, 우물 주변으로 다양한 모양의 물항아리와 말이나 소의 구유가 자리하고 있다. 방아를 찧고 있는 여인과 키질을 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앞방과 널방에는 행렬도 등 무덤 주인공의 공식적인 행사와 관련된 그림들이 그려져 있어, 동서 곁방의 그림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이는 다음 회에 살펴보도록 하겠다.(글출처 매경 프레미엄)

 

고구려 수도였던 집안의 무용총 벽화 이벽화에는 고구려 저택의응접실이 잘묘사되어 있다. 평상이 여러개 놓여있고 사람들은 그평상 위로 신을 신고 올라간다 당시만 해도 마루전체에 구들을 깔지않고 한쪽에만 쪽구들을 놓았기 때문에 좌석과 입석이 겸해쓰여 졌다한다 벽화 그림에 손님이 왔는데 시종은 칼을 쥐고 고기를 자를 채비를 한다 고구려인들은 추운 지방이라 고기를 즐렸다 한다 

현무

 

평양대성산 부근 고분에 있는 고구려 벽화로 북벽의 중앙에 보륜이 있고 좌우에 현무도를 그려 배치시켰다

현무(玄武) 사신(四神) 중의 하나로 여겨지는 신화 속 동물이다. 암수가 한 몸이고 뱀을 몸에 칭칭 감아 얽혀 뭉쳐 있는 다리가 긴 거북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암컷인 거북의 머리와 수컷인 뱀의 머리가 원을 그리며 교차하는 모습으로 자주 그려지는데, 이는 암수가 서로 합하여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룬다는 태극 사상도 담고 있다.

일반적으로 현무는 생명의 끝, 곧 죽음을 알리는 북쪽()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며 북쪽이 검은색을 나타낸다는 사실에서 ()’이라 하며, 거북의 두꺼운 등껍질을 등에 이고 방어에 뛰어난 점과 뱀의 날카로운 이빨이라는 점에서 ()’라고 한다고 알려져 있다. 인도의 우주상징도에서도 현무가 등장하는데, 형태는 비슷하나 재생과 불멸, 영원과 시간 등을 상징하기 때문에 의미가 전혀 다르다.

오행 중에서는 ()을 상징하며, 계절 중에서는 겨울을 관장한다.능력에는 북쪽 귀신들을 다스리고 냉기를 뿜는다.냉기는 최대한 안 쓴다.

또한 현무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360종류의 갑각류의 우두머리이기도 하다.

중국에서는 현천상제(玄天上帝), 상제몽(上帝翁), 상제공(上帝公)이라고도 불리며청대에는 북극우성신군(北極佑聖真君)에 봉해졌다. 이후 종교적으로 체계화되어 도교로 발전한다.

한국에서는 고구려와 고려의 고분 벽화에 다른 사신들과 같이 그려졌다. 또한 경복궁의 북쪽 문인 신무문(神武門)의 천장에도 현무의 그림이 있다.

대한민국 육군의 단거리 지대지 탄도미사일의 이름이 현무이다.(위키백과)

 

 

고구려 달신 해신

해신
달신(月神) 으로 오회분 4호묘의 벽화 중 웅녀신(달의 신:두꺼비)] *국사교과서 254쪽추정 하는 벽화

오회분은 다섯 무덤의 봉토분(封土墳)입니다. 고구려는 불교와 도가 사상이 혼합된 독자 문화를 이룩했으며, 천자의 자손이라는 천하관을 가졌고 영혼 불멸의 사후 세계를 믿었습니다. 벽화 중앙에 ‘해의 신’과 ‘달의 신’이 보입니다. 사신묘(四神墓)의 동벽은 청룡, 서벽은 백호, 남벽은 주작, 북벽은 현무의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해와달오회분 4호묘의 벽화 중  환웅신 (해의 신:삼족오신

고구려인에게 해와 달은 민족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천체였다. 건국시조 주몽은 ‘해와 달의 아들이며, 하백의 외손’으로 칭하는 존재였다. 고분벽화 속의 해와 달은, 해와 달의 아들이 세운 나라에서 사는 고구려인의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고분벽화에서 해는 원륜 안에 세발까마귀가 들어 있는 모습으로 표현됐고 달은 원륜 안에 두꺼비, 옥토끼, 계수나무가 홀로 혹은 두 가지 이상 조합돼 묘사됐다. 무덤칸 천장부에 그려지는 해와 달은 동·서를 나타내는 방위표지이다.

고구려인은 별자리에 대한 각별한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해와 달, 여러 가지 별자리들로 장식된 벽화고분 무덤칸의 천장부가 이런 사실을 잘 알려준다. 무덤칸 천장부에 가장 즐겨 그려진 별자리는 남두육성과 북두칠성이다. 남두육성과 북두칠성은 남쪽과 북쪽을 가리키는 별자리이다. 장천1호분에는 널방 천정에 해와 달, 북두칠성을 나타냈는데, 별자리 옆에 붉은 글씨로 ‘북두칠청’이라고 명칭을 따로 했다. 모두 북두칠성에 대한 고구려인의 깊은 신앙을 읽게 하는 표현이다.

6세기 벽화고분인 오회분5호묘와 오회분4호묘 벽화에는 각기 해와 달을 머리 위로 받쳐 든 해신과 달신이 그려졌다. 이 해신과 달신은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용인 복희, 여와형이다. 이런 형상의 관념적 바탕에는 고구려의 전통적 해신과 달신 신앙이 있다.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의 아버지는 해신인 해모수요 어머니 유화는 달신이라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글출처 계명대신문)

주작

삼실총 제1실 천장 고임면에 있는 주작(남쪽을 지키는 신) 그림.

주작(朱雀) 사신 중의 하나인 상상의 동물이다. 주조(朱鳥), 주오(朱烏), 적오(赤烏)라고도 부르며 붉은 새를 총칭한다. 습은 두 날개를 활짝 펼친 붉은 봉황이다. 때문에 봉황과 동일시 되는 경우가 많다.

주작은 남쪽을 수호하며 오행 중에서는 불의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주작은 계절에서는 여름을 관장한다. 재판관으로 죄를 심판한다한국에서는 다른 사신들과 더불어 고구려와 고려의 고분 벽화에 그려졌다. 또한 경복궁의 남쪽문인 광화문의 천장에도 그려져 있다.(위키백과)

 

삼족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우산하고분군 오회분(五盔墳) 4호묘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삼족오(三足烏) 또는 세발까마귀는 고대 동아시아 지역에서 태양  속에 산다고 여겨졌던 전설의 새입니다. 해를 상징하는 원 안에 그려지며, 종종 달에서 산다고 여겨졌던 원 안의 두까비 에 대응된다. 삼족오는 신석기 시대 중국의 양사오 문화 , 한국의 고구려 고분 벽화, 일본의 건국 신화 등 동아시아 고대 문화에서 자주 등장한다.

'삼족오'는 3개의 다리가 달려있는 까마귀를 의미한다. 그 이유를 들자면 여러 가지가 있는데, 태양이 양(陽)이고, 3이 양수(陽數)이므로 자연스레 태양에 사는 까마귀의 발도 3개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삼신일체사상(三神一體思想), 즉 천(天)·지(地)·인(人)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또 고조선 시대의 제기로 사용된 삼족정(三足鼎)과 연관시켜 ‘세 발’이 천계의 사자(使者),군주  천제(天帝)를 상징하는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삼족오의 발은 조류 의 발톱이 아니라 낙타 말 같은 포유류의 발굽 형태를 보이고 있다.

 

 

 

고구려의 상징 삼족오(三足烏)는 고대 세발 까마귀로 일본에서는 축구협회의 표상으로 삼고있다   야타가라스  (八咫烏 또는 金烏) 는 일본 건국신화에 나오는 우리의 삼족오와 비슷한 문양이지만 일본이 아무리 자기들 대륙진출을 말한다 할지라도 지리적 요건을 보더라도 대륙의 문화가 섬으로 전달 되지 섬에서 대륙으로 역 전달되지 않았다 하는것은 상식에 준한다 고구려 당시만 해도 일본에 거의80%가 한반도인 이었다 는것과 일황실도 고구려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추론이 있다 벽화 가운데는 삼족오 가 그려져있고 양옆에 용과 주작을 타고 노는 신선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기마궁술 훈련도

궁술
궁술 상세도

기마궁술 대회도- 벽화를 보면,5개의 과녁이 세워져 있고 두 명의 경기자가 말을 고 달리면서 과녁에 활을 쏘는데,2개가 떨어졌고 3개가 남아 있다. 경기 성적을 기록하는 사람,심판을 보는 사람,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경기를 진행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고구려의 기마궁술 경기대회에서 5개의 과녁을 사용하여 시험을 보는 것은,조선조 [경국 대전]의 병전에 보이는 무과의 기사에서 채용된 과녁의 숫자와 일치하고 있어,고구려 이후의 국가들은 모방했을 가능성이 높다.

덕흥리 고분은 고구려의 정치제도와 사회계급관계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묘지명에 등장하는 관직명이나 기마 궁술 대회등 4세말에서 5세기 초의 고구려모습이다

 

행진도(귀족들의 교통수단)

귀족들의 교통수단

행진도

행진도 천년이 넘은 세대 고대 고구려의 통치권자의 행차도는 근대에 들어선정조대왕 능행도나 별다른 점이없다 궁수들의 호위를 받고  행진하는 귀족

 

고구려의 전쟁 전투 

 

동구12호분
삼실층
안악3호분
덕흥리고분
덕흥리고분 포로를 처단하는 고구려병사
덕흥리고분 포로를 처단하는 고구려병사
덕흥리고분

고구려의 전투력

중국 길림성 집안현 여산 남쪽에 있는 고구려 고분 삼실층의 벽화중 攻城도 철재 투구와 갑옷으로중무장한 병사들이 기마전을 벌리고 있다 고구려는 용맹스러운 전투력으로 중국 군현을 압박하여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전쟁중 전투는 개마무사만으로 하지는 않는다. 개마무사가 대치하고 있는 적의 전투대열을 무너트려 혼란에 빠뜨리면 빠른 경비병과 보병이 달려가서 달아나는 적을 공격해야 한다. 전쟁에서는 날아오는 적의 화살이나 총알을 무릅쓰고 적진을 돌파하는 돌격대가 필요하다.

 

현대전투에서도 방탄조끼를 입고 적진을 돌파하는 병사와 그렇지 않은 병사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장갑차를 보유한 군대와 그렇지 않은 군대 사이에도 전투력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탱크가 필요 없다던 한국전에서 소련군 탱크가 보여준 위력이 바로 이를 증명한다. 고대의 전투에서는 방탄조끼와 장갑차의 역할을 철갑과 개마무사가 담당하였다. 고구려는 바로 이 철갑을 입은 개마무사를 앞세우고 광개토왕과 장수왕대에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몽골 군은 전혀 갑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그쪽에서는 갑옷이 출토 되지 않는다 다만 그들과의 전투시 개마무사들은 막데한 피해를 보았을 것이다

 

가무 고구려의 춤 

춤추는 고구려인

고구려의 춤

그림에서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이 춤꾼 다섯 명이다. 그들은 점박이 무늬 옷을 입은 채 두 팔을 뒤로 젖힌 동작을 취했다. 맨 앞 춤꾼은 모자를 썼는데, 이것이 새의 깃털로 장식한 절풍모이다. 맞은편에서 혼자 떨어져 춤을 추는 사람

전체를 이끄는 지휘자이다. 그의 지휘에 따라 춤꾼이 사뿐사뿐 움직인다.

무용에는 노래와 악기 연주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아래쪽에 한 줄로 늘어선 일곱 명이 바로 노래꾼인 듯하다. 춤꾼의 머리 위쪽에 벽화가 떨어져 다리만 보이는 사람이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아닐까 추측한다. 말을 타고 지켜보는 이는 아마도 무덤 주인일 테고, 뒤를 따르는 아이는 시동일 테다. 춤과 노래와 음악이 어우러진 흥겨운 자리를 무덤 주인이 말 위에서 느긋하게 감상하고 시

이 뒤를 따르는 풍경이다.(글 출처 소년한국일보)

 

고구려 무희들

무영총 벽화에 묘사된 고구려 춤꾼들 구당서의 기록에서 보듯 소매를 펄럭이며 춤을 추고 있다 그림 아래 사람들은 합창단 이다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그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즐기니 나라안의 邑洛에서 는 밤에 백성들이 무리를 지어 서로를 쫒고 노래를 부르며 즐겼다"했고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고구려민족은 춤추고 노래하기를 좋아했다 는 대목이 나오고 중국의 고문인 삼국지위지 동위전편에 동이족은 누에를 처 길쌈을 하며 술먹고 노래하고 춤추기를 좋아한다라고 기술 되어 있는데 우리민족의 춤사랑은 예부터 전하여져 지금 한류의 세계적인 인기가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고구려 악기 거문고 

 

5-6세기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집안현(輯安縣) 퉁구(通溝)의 고분 가운데 무용총(舞踊塚)을 비롯하여 17호분, 안악 제3호분 등에 남겨져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고구려의 악기인 거문고를 연주하는 장면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현재 거문고는 괘하청·괘상청·유현·대현·문현·무현의 6줄과 16괘와 3안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고분벽화에 보이는 거문고는 4현과 14괘로 구성되어 있지요. 줄을 받치고 있는 3개의 안족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거문고를 연주하는 도구인 술대는 거문고 연주에 있어 중요한 요소인데요. 아쉽게도 고분벽화 연주자의 오른손 부근이 흐릿하여 거문고 줄을 뜯는 도구인 술대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더 아쉬운 것은 그 많은 고분벽화의 거문고 그림 모두가 오래되고 묘사도 간략하여 술대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벽화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또 연주하는 모습도 다릅니다. 현재는 발바닥으로 악기를 고이고 무릎으로 악기를 받쳐 비스듬하게 눕혀 연주를 하는데요. 고분벽화에서는 반듯하게 다리를 모아 무릎을 꿇고 앉은 후 무릎 위에 악기를 올리고 연주하는 모습으로 현재 거문고 연주 자세와는 사뭇 다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연구자들은 이 악기가 거문고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적은 수의 괘를 가지고 있고, 안족은 없지만 거문고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괘의 특징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거문고의 모습은 이렇게 고분벽화에 남겨져 고구려의 대표 악기임을 당당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삼국사기악지에는 고구려의 대표 악기로 거문고의 유래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문고의 전래과정에 대하여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라 사람으로 사찬(沙飡)이라는 벼슬자리에 있던 공영(恭永)의 아들 옥보고(玉寶高)가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서 거문고를 50년 동안 공부하면서 새로 30곡을 작곡하여 속명득(續命得)에게 전수하고, 속명득은 이를 귀금(貴金)에게 전하였다. 그런데 귀금이 또한 지리산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으므로 신라의 임금이 금도(琴道)의 단절을 염려하여 이찬(伊飡) 윤흥(允興)으로 하여금 그 음악을 전수하도록 하기 위해 남원공사를 시켰다. 윤흥이 도임(到任)하여 총명한 소년 안장(安長)과 청장(淸長)을 가려 지리산에 들어가 전수받도록 하여 <표풍(飄風)> 3곡을 배웠다. 그 뒤 안장은 그의 아들 극상(克相)과 극종(克宗)에게 전했고, 극종이 또 7곡을 작곡했는데, 이로부터 거문고로써 업을 삼는 이가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이는 고구려에서 들어온 거문고가 신라 효소왕 때 월성(月城) 천존고(天尊庫)에 그저 신기(神器)로 보존되어 오다가 경문왕 때 이르러 겨우 일반 신라인에게 알려졌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보면 거문고는 지금과 같이 일반적인 악기로 볼 수 없습니다. 연주를 하니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고, 왕은 거문고의 전승이 끊길 것을 걱정하여 사람을 보내어 연주의 계보를 잇게 하고, 또 신의 악기로 취급하여 천존고에 보존할 만큼 거문고는 예사의 악기가 아니었습니다.(글출처 책이야기)

 

 

민속놀이

안악3호분 전실 동쪽 벽면에 있는 수박놀이하는 力士그림 상투를 머리 뒤로 묶고 아랫도리 일부만 가린채 금방이라도 한번 맞붙을 기세다 역사들의 체구와 몸짓을 다소 희화학 적으로 과장되게 그렸다

서역인과 씨름장면;

 

서역인과 고구려인이 씨름하는 모습을 그린 각저총 벽화.
서커스 악기연주 공연
수산리 음악을 연주하며 거리를 누미는
수산리 벽화 써커스

 

고구려의 의복

고구려 시녀
고구려 시녀
고구려인들의 의상
고구려인들의 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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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를 따르는 고구려 여인들의 복식이 화려 하다

당 태종시대 장휘태자묘에서 발견된 이 벽화는 조우관(鳥羽冠. 새깃털을 장식한 모자) 을 쓴 인물(오른족에서 두 번째)이 신라 사신이라 알려졌지만 고구려 사신이라고 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른쪽 여진족 가운데는 동로마제국의 사신이라 한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석가모니 열반식에 참석한 여러 외국의 왕자들과 함께 있는 모습인데 당시의 三國의 의상을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이다

사마르칸트의 바르크만 왕과 함께 객석에서 한국 대사 그들은 머리 꼭대기에 있는 두 개의 깃털로 식별됩니다.CE, 벽화, 삼국시대부터 당나라까지 신라, 백제, 고구려 사신을 그린 그림. 7세기 당나라 정기헌제의 초상
삼국시대부터 당나라까지 신라, 백제, 고구려 사신을 그린 그림. 7세기 당나라 정기헌제의 초상
고구려의상/사진출처 외국포털
백제의상/출처 외국포털
신라의복/사진출처 외국포털

 

한복의변천사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사진출처 나무위키

한복이 기록에서 처음 등장한사례는 고구려벽화에서다. 기본 구조는 상의, 허리띠, 하의, 모자(또는 두건)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후 차츰 변화하여 상의가 짧아지고 허리띠는 고름으로 간소화 되었으며 두건은 다른 형태의 모자로 대체하였다. 이후 만주족 복식을 수입하여 만든 마고자와 서양 복식을 수입하여 만든 조끼를 추가하여 지금의 한복 형태가 완성되었다. 여기에 한복을 현대 문화에 맞게 크게 간소화한 생활한복은 고름이 단추로 대체되고 소매가 줄어드는 등 일상 생활에서도 더욱 입기 편하도록 만든 형태이다.

여성용 저고리는 짧아지고 치마는 더욱 길어져서 가슴을 덮는 형태가 되었는데, 마치 서양의 볼레로와 드레스를 입은 구조와 비슷하다. 평복은 기존의 고유 형태를, 관복과 공복은 중국식 복식을 받아들인 이분적 복식 제도였으나 상류층도 일상에서는 고유 형태의 한복을 입었다.

한복은 역사적으로 큰 변화보다는 차츰 변화하여 현재의 형태를 가졌다고 보아야 한다. 한복은 기본적으로 상유하고의 형태를 벗어난 적이 없었으며 남성, 여성 할 것 없이 기본적으로 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그 위에 포(겉옷)이나 치마를 입었다.(나무위키)

 

고구려 고분 벽화 한복과 일본다카마쓰 고분벽화 한복

써거스를 보러가는 귀족행렬 수산리고분

 

수산리 고구려 여인들의 색동 주름치마

아스카 역사 공원에는 다카마쓰 고분이 있습니다. 이 고분은 1972년에 발굴되었는데, 고분 속 벽화는 당시 일본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고 합니다. 지금 까지 발견된 그 어느 벽화에서도 본적 없는 빛깔의 그림이었거든요. 또한 벽화 속 여인들의 옷차림이 일본인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고구려 벽화 속 여인들의 모습과 비슷했습니다.
 
학자들은 이 벽화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그려졌거나, 고구려인들이 직접 와서 그린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긴 저고리에 색동 주름치마를 입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은 영락없이 고구려 수산리 고분 벽화와 똑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수산리 출토
일본 다카마스지역에서 출토된 고구려연들과 같은복장

고구려 미술은 오늘날의 중국 동북과 한국의 넓은 지역을 점령한 고대 한국의 왕국(기원전 37년 – 서기 668년)인 고구려의 예술입니다. 흐르는 듯한 라인과 생생한 컬러감이 특징입니다. 이 스타일의 대표적인 예는 3~7세기에 제작된 북한과 만주에서 발굴된 무덤 벽화입니다.

 

황성옛터/주현미

 

 

 

100 Icons of Korean Culture Ep83C01 Illustrated for the Dead Goguryeo tomb mura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