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길상사의꽃무릇

이모르 2022. 3. 3. 15:02

 

2021923

선운사 꽃무릇을 보러 갔던 산 친구가 문자가 왔어요 이곳 꽃무릇이 너무 좋아요 어르신 께서도 근처 길상사에 한번 가보세요 거기도 이루지 못한 사랑의 전설 때문에 꽃무릇이 심어져 아름답게 핀 꽃들이 있습니다 

 

 

r길상사 꽃무릇

 

923일 아내와 함께 길상사에 갔습니다 꽃무릇은 시들어 가고 있어 꽃지고 나는 잎이 나 있었는데 색 바랜 꽃과 비()오신 뒤라 폭포 같이 쏟아지는 경내옆 계곡물이 꽃 무릇과 어우러져 멋진 운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꽃무룻(상사화)이 심어져 있는 사연을 보면 당연 절터의 사연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꽃무릇과 상사화는 다른 꽃이지만 꽃이 피고 진다음 잎이 나는 같은 종으로 여기서는 상사화 로 그 사연을 찾아 올려 보겠습니다

 

꽃무릇
상사화

 

길상사의꽃무릇

김영한과 백석시인
20살의 진향(김영한) 장발화백 그림
김영한의 공덕비 길상사

 

김영한 (金英韓) 진향 (眞香) 자야 (子夜) 길상화 (吉祥華), 1916-1999

1916년 서울 관철동 출생 할머니와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

1932년 가정형편으로 조선 권번애 들어가 기생이됨(진향)

대원각 밀실 요정 경영 

김영한은 승려 법정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1987년 법정스님에게 요정 터 7,000여 평과 40여 채의 건물을 시주하니 절을 세워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법정은 처음에 사양하였으나, 결국 1995년 이를 받아들여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의 말사로 등록하여 길상사를 세웠고, 이전 길상사의 창건 법회에서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습니다.

 

 

 

길상사는 한() 많은 한 여인이 평생 모은 재산을 무소유의 실천을 행함으로써 맑고 향기로운 근본 도량으로 태어났습니다.

그 여인이 바로 김영한(19161999)입니다그는 열다섯 살에 결혼했으나 남편이 우물이 빠져 죽어 청상이 됐습니다갈 곳 없는 영한은 권번 기생으로 나섰습니다. 영한은 계란형의 미인으로 가무는 물론 시, 서화가 뛰어나 곧 최고 기생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당연히 당시의 많은 지식인이 그녀를 연모했습니다. 스무 살 되던 해 그는 뛰어난 재주를 아까워하던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 일본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를 후원하던 사람 중의 한 명이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되자 2년 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함흥으로 돌아왔습니다. 은인을 옥바라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였던 백석(백기행) 시인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습니다.

 

둘은 만난 지 하루 만에 동거를 시작해 석 달 간 꿈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에 백석의 아버지는 아들을 영한으로부터 떼놓고는 다른 여자와 강제 혼인시켰으나, 백석은 혼인날 밤 도망쳐 먼저 서울로 와 있는 영한과 다시 만나 한동안 동거했습니다.

 

그러나 영한은 젊은 백석의 앞날을 걱정해 헤어지자고 했고, 그런 영한에게 백석은 러시아로 떠나자고 졸랐습니다. 이에 영한이 숨어버렸습니다마침내 백석은 혼자 러시아로 떠났고 둘은 영영 생이별해야 했습니다.

 

해방된 다음 백석은 북한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새 영한은 서울에서 요정을 열어 큰돈을 벌었습니다. 이후 영한은 대원각을 열어 1960, 70년대 막후에서 '요정정치 시대'를 펼쳐갔습니다. ‘대원각은 당시 서울의 3대 요정 중 하나였고 지금의 길상사입니다. 영한은 살아 생전 매년 백석의 생일인 71일 하루 동안 곡기를 끊고 방 안에 앉아 불경을 외우며 그를 기렸다고 합니다.

 

또한 수억 원을 쾌척해 백석문학상을 제정, 문학도를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말년에 백석과 다하지 못한 이승의 사랑을 저승에서 잇고자 소원했습니다.

 

 

무소유의 실천, 그리고 맑고 향기로운 사찰 길상사

1987년 영한은 미국에 있던 법정 스님을 찾아 그의 전 재산을 쾌척하겠다고 했다. 당시 가격으로 1천억 원이 넘었다. 그러나 무소유의 삶을 살던 법정 스님은 이를 거절했다이후 무려 10년 동안 이어진 무소유의 실천 의지로 결국 대원각은 법정 스님이 머무는 암자의 본사인 송광사에 희사되었고, 길상사로 개사하기까지 송광사 서울분원이 되었다.

1997년 길상사 개사식에서 영한은 "천억 재산이 어찌 백석의 시 한 줄에 비할 수 있으랴"고 고백함으로써 세기의 로맨스가 마침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길상사라는 이름은 개사식 때 미국에서 돌아온 법정이 영한에게 선물한 '길상화 보살'이라는 법명에서 유래한다.

길상화 보살(김영한)은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인 19991114일 목욕재계 후 길상사 절에 와서 참배하고 길상헌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는 자신이 죽으면 화장해서 "첫눈 오는 날 길상사 마당에 뿌려 달라"고 유언을 남긴다.

시와 그리고 사람을 온 가슴으로 사랑할 줄 알았던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화장되어 백석이 사랑한 자야를 노래한 시처럼 하얀 겨울에 눈이 내리던 날 길상사 마당에 뿌려졌다.

2010년 법정 스님도 여기서 입적했다. 법정 스님이 처음 출가하신 사찰인 송광사의 옛 이름이 길상사. 출가한 사찰과 한때나마 같은 이름을 사진 사찰에서 입적하니,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까.

지금 길상사에는 길상화 보살의 공덕비가 있고, 사당에 김영한의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진영각에 법정의 영정과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이 김영한을 위해 쓴 )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출처 시니어매일 오주석기자

 

 

백석의 다른 詩

 

힌 바람 벽이 있어/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쓰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

 

 

길상사 꽃무릇/비발디 여름

 

부처님 마음

 

우리도 부처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