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여행

폼페이 도예(폼페이40부)

이모르 2021. 2. 6. 19:39

 

폼페이에서 발견된 아름다운 순수한 청동꽃병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소장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매몰된 폼페이와 다른 도시의 발견은

유럽인의 취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발굴 소식은 고대에 대한

열광을 불러일으켜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755년 나폴리로 첫 여행을 했던 저명한 독일의 고전학자

요한 요아힘 빙켈만의 찬사와 잠바티스타 피라네시의

에칭들이 발굴을 널리 알리는 데 큰 몫을 했다.

 

영국 방문객들의 '대유럽 여행'에서 나폴리·폼페이·헤르쿨라네움은

중요한 체재지가 되었으며, 당시 나폴리 왕실의

대사(1764~1800)로 있던 윌리엄 해밀턴 경은 박식한

아마추어 고고학자 겸 열정적인 안내자로서,

그의 2번째 부인인 엠마 해밀턴 여사는

매혹적인 안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해냈다.

 

미술가·건축가·도예가, 심지어 가구제조업자들까지

폼페이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동시대의 내부 채색

장식은 발굴된 프레스코에서 착안되었다. 18세기

영국 건축가들인 로버트 애덤과 제임스 애덤은 비슷한

주조(主調)의 회반죽칠을 유행시켰다. 유명한 도예가

조시아 웨지우드는 작품 양식을 바꾸는 한편, 폼페이가

에트루리아인의 도시였던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자신의

도자기 공장을 '에트루리아'라고 이름지었다.

 

프랑스에서는 폼페이 양식과 결합된 루이 16

양식으로 퐁텐블로 궁전에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방들이 장식되었고, 이 양식은

유럽 전역에서 유행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와 그의 제자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도 발굴에서 작품을 위한 영감을 얻었다. 실제로

폼페이 발굴이 자극한 신고전주의 양식은 로코코

양식을 대신하여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의

예술 양식이 되었다.

   

원문출처:다음백과사전

 

 

폼페이 신비의집에서 발굴  B.C 50 나폴리 박물관 소장

 

폼페이 발굴 파란유리 꽃병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소장

 

디오니소스 꽃병 대영 박물관 소장

 

 

 폼페이에서 발견 결혼을 나타내는 화병

폼페이 발굴 화병 트로이 전쟁에 대해 ToList

 

폼페이에서 발굴한 화병

 

 

 

폼페이에서 출토된 은제 공에품  

 

 

 

포틀랜드 꽃병 도자기 Portland Vase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로마의 유물 중에 최고의 보물로 여겨지는

포틀랜드 꽃병은 1세기 로마시대의 카메오 글라스(Cameo Glass)입니다.

높이 24.5cm, 지름 17.7cm의 감청색의 유리제품으로

유백색의 조각이 둘러져 있습니다. 유백색의 조각 부분에는

7개의 신이나 인간의 형상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 내용으로는 그리스 신화라는 견해, 또는 알렉산더 대왕의 탄생

이야기라는 의견,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이야기라는 의견 등이 있으며,

용도는 결혼 혼수품이었을 거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16세기 처음 발견이 되었으며, 바르베리니

가문에서 소유하고 있다가 (바르베리니 꽃병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18세기에 포틀랜드 공작이 소유하게 되면서, 포틀랜드 꽃병으로

불리었습니다.

 

이 꽃병은 지금까지 널리 복제되었는데,

특히 빅토리아 시대에 성행하였습니다. 특히 조시아

웨지우드와 존 노스우드의 복제품이 유명한데, 조시아 웨지우드는

1790년에 포틀랜드 꽃병을 복제한 재스퍼 웨어를 만들었고,

존 노스우드는 1876년에 유리제품을 완성하였습니다.

 

원래의 포틀랜드 꽃병은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중

1845년에 한 술취한 청년이 파손을 하게 되어

200조각으로 부서지게 되는데, 오랜 복원 작업을 거쳐

1987년에 다시 전시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