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화와자연생물

소백산의전설(소백산 주현미)

이모르 2020. 12. 21. 15:33

 

 

200664

 

심스클럽에서 소백산을 가기로 하였는데 등산이 목적이 아닌 관광 차에 예약이 되어있는 것을 모르고  갔기 때문에 소백산 입구 희방사 주변에서 야생화 탐방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태백산 소백산에 오면 생각나는 단종애사에 얽힌 이야기가 있지요 단종은 죽어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고 세종의6번째 적자 며 단종의 숙부였던 금성대군은 단종을 복위 시키려다 사사 당해 소백산 산신령이 되었다는 역사 적 전설과 실존의 추모 비각들이 있는곳 애잔한 구절은 단종을 죽음으로 인도 하였던 의금부도사 완방연의 시 와 전해오는 전설에 있습니다

 

 

태백산 단종비각

 

산신각 태백산과 소백산을 가르는 고치령 정상에 있는 산신각- 단종과 그의 삼촌인 금성대군을 모신 산신각이다

한성 부윤 이였던 추익환이 영월에 있는 단종에게 자주 머루 다래를 진상했다. 어느 날 먹을 것을 진상하려고 영월로 향 하던 중 잠간 졸고있던차에 백마 탄 단종을 만났다. 황망히 묻기를 "어디로 행차시오니까??" 단종이 말하기를  "나는 태백산 산신령이 되려고 간다." 하였다

 추익환은 꿈이 괴이해 황망히 영월에 도착 하여 보니 이미 그 시각 단종은 죽임을 당하였다. 한다. 단종을 옹위하던 세조의 형 금성대군은 참형 후 소백산 산신령이 되고 단종은 태백산 산신령이 되서 있다 한다.

 

태백산 누각은 단종의 영혼을 위로 하기 위하여 1955년 비각인근에 위치한 망경사의 막묵암 스님께서 건립하였다 하는데 누각앞에 안내입판에 써있는 내용이다

 

모셔온 소백산 사진들
희방사

 

희방폭포

 

백두대간을 따라 태백산에 오르기 전 만나는 고개 중의 하나가 고치령이다. 그곳에는 영험하기로 소문난 산신각이 서 있다. 그런데 이 산신각 안을 들여다보면, 산신령 옆에 단종(端宗)이 말을 탄 미소년의 형상으로 그려져 있다. 우천(愚川) 추익한(秋益漢)이 산머루를 따다가 단종에게 진상하는 모습이다.

 

1455년 윤6.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찬탈하려고 하자, 세종(世宗)의 여섯째아들이자, 세조(世祖)의 아우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이를 극력 반대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모반혐의를 뒤집어쓴 채, 지금은 경기도 연천이 된 삭녕(朔寧)으로 유배되었고, 다시 광주(廣州)로 옮겨졌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단종은 마침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어 수강궁(壽康宮)으로 옮겨 살았다. 이듬해에 성삼문(成三問)과 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死六臣)의 주도로 이루어진 단종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금성군은 이에 연루되어 순흥(順興)으로 이배(移配) 되었다.

14576월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격하시킨 뒤, 영월의 청령포(淸泠浦)로 유배 아닌 유배를 보냈다. 그러자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군사와 향리(鄕吏)를 모으고 도내의 사족(士族)들에게 격문을 돌렸다. 의병을 일으켜 단종의 복위를 꾀하는 한편, 사람들을 시켜 청령포의 단종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도록 한 것이다.

이로부터 많은 심부름꾼들이 고치령을 넘었다. 그들이 의로움을 다시 세우자고 굳게 결의하였기에, 고치령은 한동안 건의령(建義嶺)으로도 일컬어졌다. 그러나 이들은 9월에 결국 관노(官奴)의 고발로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모두 죽음의 길로 떠났다. 서글픈 정축지변(丁丑之變)’이었다. 단종은 일단 서인(庶人)으로 더 격하되었다가, 그해 10월에 세상을 떴다. 도호부(都護府)로 일컬어지던 순흥도 이때부터 폐부(廢府)가 되어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후 단종은 태백산 산신이 되고, 금성대군은 소백산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산신도(山神圖)에 등장하는 추익한은 세종 5(1423)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하다가 1434년 영월로 귀향한 인물이다. 그런데 단종이 청령포로 유배되었다가, 2달 후 가을장마로 인해 관풍매죽루(觀風梅竹樓)로 옮겨 외롭게 지낼 때다. 추익한은 늘 단종을 찾아가 함께 시를 읊으며 단종의 아픔을 달래주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단종이 좋아하는 산머루를 따다가 바쳤다.

14571024일의 일이다. 날씨가 몹시 차가웠지만, 추익한은 머루를 구하려고 지금의 영월읍 연하리(蓮下里)에 해당하는 두평리 산골짜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뜻밖에 단종이 백마를 타고 이곳까지 행차하신 것 아닌가? 추익한이 황급히 달려가 어찌된 일이냐고 여쭙자, 단종은 지금 과인은 태백산으로 가는 길이오.”라는 대답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추익한은 꿈인지, 생시인지 의심스러워 부랴부랴 단종의 처소로 달려갔다. 그런데 단종은 벌써 사약(死藥)을 받았고, 단종의 모시던 시녀와 궁녀들도 모두 단종을 따라 낙화암 절벽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것 아닌가?

이때 갑자기 뇌성벽력과 함께 폭우가 쏟아지면서, 강풍에 나무가 뿌리째 뽑혀나갔다. 그리고 먹구름이 시커멓게 몰려와 천지를 뒤덮었다. 추익한은 단종이 떠났다는 태백산을 향해 단숨에 달려갔으나, 끝내 만나 뵙지 못하였다. 그는 애통하게 임금을 부르짖다가 두평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훗날 단종이 복위되자, 영월사람들은 추익한의 충성심을 경모하여 영월읍 관내에 소재한 성황당의 그림들을 보완하였다. 추익한이 곤룡포를 입고 백마를 탄 단종의 행차 앞에서 산머루를 바치는 형상으로 바뀐 것이다.

박달령의 산신각에도 단종이 모셔졌다. 전설에 따르면, 박달령은 단종이 청령포로 가기 위해 넘었던 고갯마루라고 한다. 지금도 매년 사월초파일마다 마을사람들이 제를 지낸다고 하는데, 이는 사길치에 있는 산신각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단종에게 사약을 가지고 온 금부도사는 왕방연(王邦衍)이었다. 그는 단종을 청령포까지 모시고 왔던 인물이기도 하다. 직책이 직책인지라 왕명을 거역할 수 없던 그는 그때 청령포에 단종을 남겨두고 되돌아가야 했다. 그는 발걸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아 자꾸만 뒤돌아보다가, 마침내 어느 시냇가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한 수의 시조를 서글피 읊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온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의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사약을 내리던 날. 왕방연은 단종을 차마 마주볼 수 없어, 엎드려 땅바닥만 쳐다보고 울었다. 단종은 죽음이 닥쳐왔음을 알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때 단종이 죽지 않으려고 몸을 피한다고 생각한 관노 하나가 급히 뒤에서 활시위로 단종의 목을 졸랐다. 공을 세워 상을 받으려는 속셈이 그에게 따로 있었던 것이다. 야사(野史)에 전하는 이야기다.

아무튼 17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뜬 단종의 시신은 강가에 버려졌다.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세조의 명령 때문에 누구도 돌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사흘이 흘렀다. 마침 영월에서 호장(戶長)을 지내던 엄흥도(嚴興道)가 나섰다. 그는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더라는 나는 마음에 달게 여기리라.[爲善被禍(위선피화), 吾所甘心(오소감심)]”라는 말을 남긴 뒤, 어머니께 쓰려고 준비해둔 관으로 단종을 모셔다가 동을지산 자락에 묻었다. 그리고는 주변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한밤중에 처자식을 이끌고 영월 땅을 떠났다.

그 후 영월 사람들은 엄흥도의 충성심에 깊이 감동하여 단종을 모신 산신각 주변마다 빠짐없이 엄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가시 돋은 엄나무는 엄흥도의 성()과 함께, 절개를 상징하는 탓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청령포에 가면 단종의 처소를 바라보며 자라는 소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이 나무 역시 엄흥도 소나무라고 부른다.

그 후 오랫동안 단종의 묘는 역사 속에 묻혔다. 그러다가 1541(중종36) 영월군수 박충원(朴忠元)이 묘소를 찾아내 묘역을 정비했으며, 1580(선조13)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 등을 세웠다

 

영월과 태백을 잇는 화방재는 어평재라고도 부른다. 영월에서 유명을 달리한 단종의 혼은 태백산의 산신이 되어 백마를 타고 이 고개로 왔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내 땅이다.”라고 명하였기에, 어평재(御坪峙)라는 이름을 얻었단다.

인근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도 전설은 살아있다. 소수서원은 중종38(1543)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서원이다.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라서 더욱 뜻 깊은 곳이다. 죽계천 바위에 새겨진 백운동(白雲洞)’은 퇴계(退溪)의 글씨라고 전해오는데, 그 아래 붉은색의 ()’ 자는 주세붕 선생이 직접 써서 새긴 것이라고 한다. 이 고을 사람들이 정축지변(丁丑之變)을 당한 뒤, 밤마다 이곳에 수장(水葬)된 원혼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으므로, 그들의 넋을 달래주기 위해 새겼다는 전설이다.

당시 참화를 당한 사람들의 피가 죽계를 따라 10여 리를 흘러가 멎은 곳을 지금도 피끝 마을이라고 부른다. 인근에는 무참하게 도륙 당한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을 비롯해 순절의사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금성대군 신단과 수양대군이 금성대군을 격리시켰던 위리안치지등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그러나 뒷날 세조의 손자 성종(成宗)은 할아버지가 서인으로까지 강등 시켰던 단종을 내심 다시 왕으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금성대군 이유(李瑜)에게 제사를 올리면서, 다음과 같은 제문으로 그의 의기와 충절을 찬미하였다.

 

노릉지를 읽을 때

눈물 흘리지 않으면 사람 아니니

사육신과 생육신은

신하 되어 그 본분 다했다네

종실의 공자로 떨친 사람은

금성대군이 열렬하였으니

노나라와 위나라처럼 형제 관계로

백이와 숙제 같은 절의 있었다오

 

변방에 버려져 귀양 떠나니

큰 고개의 남쪽으로

황혼에 달 바라보면

하얀 달이 높았다오

산호 달린 긴 갓끈에

녹로의 짧은 칼 차고

누가 나를 따라

함께 거사할 것인가

태수 이보흠은 공을 사모하여

병기를 가슴에 감추고서

피를 뿌려 글을 쓰니

달도 어두워지고 별빛도 흐려졌다오

화가 급박하여 옥에 갇히게 된 것은

담장에 귀대고 엿들어 변고 일어남이니

천하의 운세에 어두웠던 것 아니라

다만 우리 임금만 계심을 알 뿐이었네

의관 가다듬어 영결의 절 드리기를

서쪽으로 향하지 않고 동쪽으로 향했으니

처음엔 의에서 일어나고

마침내 충에서 죽었다오

망제의 넋은 새가 되어 절규하고

왕손의 한은 풀이 되어 푸르니

오호라, 죽계에는

언제나 구름 둘렸도다

후손 오도록 해

벼슬로 대우하고

이 한 잔 술 권하면서

두 마음 품은 사람 부끄럽게 하노라

 

성종의 이런 의식(意識)은 뒷날의 숙종(肅宗) 보다 200년가량 앞선 것이었다. 공식적으로 따져, 숙종은 서인으로 내쳐진 단종을 1681년에 비로소 노산대군으로 다시 추봉(追封)하였으며, 1698(숙종24) 11월에 마침내 단종으로 복위(復位) 시켰기 때문이다. 능침(陵寢)도 이때 처음으로 장릉(莊陵)’이란 칭호를 얻었다.   

/유영봉<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2767번길 28 (순흥면)

 

영주 금성대군 신단은 사적 제49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 세조 때 단종임금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무참히 화를 입은 금성대군(錦城大君:이름 , 세종임금의 여섯째 아들,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의 넷째동생)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 및 그 일에 연루되어 순절한 의사들을 제사 드리는 곳이다.

조선 세조 원년(1455) 단종임금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 일파는 금성대군에게 모반의 누명을 씌워 삭령(朔寧)으로 유배시켰다가 다시 광주(廣州)로 이배(移配)시켰었다. 이듬 해 성삼문 (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이 상왕 복위운동에 실패하여 참혹하게 희생되자 그 일에 연루되었다 하여, 금성 대군은 다시 이곳 순흥으로 유배,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금성 대군은 당시 순흥부사 이보흠과 의기가 통하여 단종복위를 위한 격문을 짓게 하여 은밀히 순흥고을로 모여들게 하였다.군비를 모으고, 무기를 장만하고, 군사를 조련하여 영월에 유배되어 있던 단종임금 복위를 꾀하는 거사가 무르익어가던 세조 3(1457) 가을 어느날 밀의를 엿들은 순흥부의 한 관노의 밀고에 의하여, 관군의 습격을 받은 순흥 고을은 온통 불더미에 피바다를 이루는 도륙을 당하면서 폐부 (廢府)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200여년이 지난 숙종 9(1683)에 순흥은 명예가 회복되고, 이어 숙종45(1719) 고을사람 이기륭(李基隆)이 부사 이명희(李命熙)에게 알려, 단소(壇所)를 설치하게 된 것이다. 금성대군 신단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영조 18(1742) 경상감사 심성희(沈聖熙)의 소청에 의하였으며, 단소를 정비하고 중앙에 금성대군 위(), 오른쪽 편에 부사 이보흠 위(), 왼편에 무명 의사 위()를 모시고 순의비(殉義碑)를 세웠다.

 

* 금성대군 신단(사적 제491)이 곳은 조선 세조2(1456)에 성삼문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순흥에 위리안치되어 있던 세종 여섯째아들 금성대군이 순흥부 이보흠 및 향중 유림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실패하여 순절하자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마련된 제단이다.단종복위운동이 실패되자 순흥부는 폐부되었다.

 

그 후 숙종 9(1683) 순흥부가 복원되고 순절 의사들이 신원 되자 동와 45(1719)에 부사 이명희(이명희)가 단소를 설치하였으며, 영조18(1742) 경상감사 심성희가 단소를 정비하고 위를 모시고 순의비를 세워 매년 봄·가을로 향사를 지내오고 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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