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로마의 휴일은 참혹한비극

이모르 2021. 1. 21. 19:42

로마의 휴일은 참혹한 비극의 날이었다.

 

로마의 해변에 널린 욕망의 투피스

 

배꼽이 드러나게 옷을 입은 여성은 참 매력적이다. 동물이야 본래 그렇겠거니와 인간들도 그들이 만들어 입은 문명을 한 꺼풀 벗으면 자연에 가까워져서 벗으면 벗을수록 원초적 욕망은 강렬해진다. 그런 점에서 바캉스 시즌에 해변을 찾는 사람들은 무더위에 긴 피서객일 수도 있지만 본능적 욕망을 좇아 나선 사티로스(Satyros)나 판(Pan)일 수도 있겠다. 욕망의 해변에는 그들의 발가락을 간지럽히는 모래알처럼 많은 성적 욕망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이 욕망을 자극시키는 것들 중 최고는 여성의 비키니다.

 

 

로마시대 원피스

 

 

1946년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 루이 레아는 배꼽을 드러낸 새로운 여성용 수영복의 출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수영복을 만드는 옷감의 양을 `획기적으로’ 줄여줄 수영복의 디자인은 완성되었지만 정작 이름은 짓지 못하고 있었다. 발레리나의 롱스커트를 싹둑 잘라버린 `로맨틱 튀튀’만큼이나 충격적인 이 수영복의 이름도 꽤나 충격적이어야 했다. 상품의 이름은 판매량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준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비키니’였다.

 

1946년 미국은 또다시 핵실험을 하고 있었다. 불과 1년 전 일본에서 터뜨린 핵 2방의 맛에 중독되어 살가죽을 뚫고 히로뽕을 투약하듯 땅가죽을 뜯고 핵폭탄을 투하하고 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사 때문에 세계 언론의 눈을 피하기 위해 미국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태평양의 작은 군도(群島)에서 `그짓’을 했다. 미국의 핵실험장이 되어 사람이 살 수 없는 저주의 섬이 돼버린 곳이 바로 그 아름다웠던 `비키니 환초’다. 꿈의 낙원 비키니 섬은 그 후 지옥이 되었다.

 

태평양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진 프랑스였지만 루이 레아는 이것을 놓치지 않았다.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비키니’는 자기가 개발한 신제품의 이름에 너무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 더 이상 충격적인 일이 없는 가운데 일어난 `핵실험’과 `옷실험’은 충격이었고 대박이었다. 하지만 두 대박은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핵실험은 아름다운 자연을 파괴하고 원초적 생명력을 제거해버린 추악한 행위로 지탄받았으나 패션실험은 여성의 아름다운 몸매를 드러내어 원초적 생명력을 분출시켜 세상 남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제국의 뒷골목을 누비던 풍요로운 빈곤

 

사실 비키니는 20세기의 발명품이 아니었다. 지금은 사라진 고대 제국 로마의 작품이다. 벽화로 남은 그림을 보면 오늘날의 비키니와 흡사해서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다. 투피스 차림의 여성들이 비치볼을 하는 그림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지중해의 어느 백사장에서 유희를 즐기는 로마 여성들의 모습은 당시 로마의 한 단면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팍스 로마나’로 일컬어지는 강력한 로마의 우산 아래 이루어진 평화는 물질적 풍요를 가져와 사치와 향락을 누리는 호사를 맛보게 했다.

 

로마가 공화국을 그들의 정치체제로 삼고 있었을 때와 제정으로 바꾸었을 때의 사회상은 판이하게 달랐다. 로마의 전통귀족들은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지주층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전통적 부와 권력을 기반으로 사회지도층을 형성하면서 공화국 로마를 지배해왔다. 하지만 로마가 군사적으로 팽창하면서 제국이 되자 지배계층도 달라지게 되었다. 전통적 지주의 일부는 토지를 집중하여 대농장 경영주가 되었고, 식민지가 늘어나면서 새로운 신흥귀족이 탄생하게 되었다. 전쟁과 무역, 식민지 경영을 통한 새로운 상업귀족이 제국 로마의 지배계층이 되었다.

 

전통귀족과 함께 로마를 이끌던 평민은 제국 로마에서는 전혀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부와 권력의 쏠림 현상은 고대세계에서도 양극화의 길을 걸어 로마 평민은 몰락하게 된다. 토지로부터 분리된 그들이 설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들은 로마의 슬럼가에서 가난한 날품팔이와 룸펜 프롤레타리아가 되는 길 외의 다른 선택은 할 수 없게 되었다.

 

거대한 콜롯세움이 배출한 몽롱한 룸펜들

 

어느 시대 어느 사회건 빈민가의 룸펜들이 할 수 있는 건전한 일이라곤 거의 없다. 기껏해야 일회성 노동일 뿐 강도와 절도, 범죄적 서비스, 폭력과 매춘, 술과 도박 등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건강하지 못한 시민과 건전하지 못한 시민생활은 사회를 혼란스럽게 할 가능성이 크다. 제정 로마의 통치자들은 어떻게 로마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사실 `집단이성’을 마비시키는 3S 정책은 그 연원이 길다. 로마가 이 좋은 책략을 놓쳤을 리 없다.

 

 

콜롯세음의 사투

콜롯세움(Colosseum)은 거대한 원형경기장이다. `거대하다’라는 말 `콜로살레(Colossale)’가어원일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큰 경기장으로 수만 명이 동시에 관람할 수 있는 규모다. 그 규모와 시스템 면에서 오늘날의 초현대식 경기장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로마의 스포츠는 전투적이며 잔인하다. 콜롯세움 안에서 벌어지는 전투장면 시뮬레이션이나 검투사들의 잔혹한 살인게임은 술과 마약에 찌든 로마의 빈민들을 충분히 마비시키고 남는다. 수억 원에 달하는 초호화 고급승용차가 박살이 나는 전차경주는 로마 시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였다. 몽롱한 사람들이 들어가고 실성한 사람들이 나오는 곳이 바로 콜롯세움이었다. 콜롯세움은 `집단적 마약복용처’라 부를 만했다.

 

로마 시민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건 스포츠만이 아니었다. 지금의 스크린처럼 그 당시에도 스테이지 위의 연극은 인기가 많았다. 어디 그뿐인가? 네로처럼 정신나간 황제를 만나면 커다란 행운이다. 하층민이나 하는 연극을 황제가 직접 연출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황제가 몸소 출연하는 연극을 관람할 수 있는 행운도 거머쥘 수 있다. 네로의 정신상태가 좋지 않을 경우는 더 큰 기쁨을 기대해도 된다. 실감나는 연극을 위해 무대 위에서 사람을 기둥 위에 묶고 진짜로 몸에 불을 붙이는 `살인 실황중계’까지 볼 수 있다. 강력하고 매력적인 `히로뽕’이 아닐 수 없다.

 

로마 신흥귀족들의 3대 문화는 와인과 목욕문화, 그리고 섹스다. 이 세 문화는 사실상 하나로 묶여있어 따로 놀지 않는다. 가난한 로마 시민들도 값싼 와인을 마시고 매매춘의 향락을 누렸다. 와인 한잔 값을 지불할 수 있는 수요자가 있고 1%의 매춘세만 내도되는 공급자가 있었기에 로마의 홍등가는 늘 풍요로웠다. 귀족과 평민이 누렸던 사치와 향락의 비용과 질은 달랐지만 취하고 타락하는 정도와 방향은 서로 일치하고 있었다.

 

정욕의 만찬장에 널브러진 `정크푸들(junk poodle)’

 

로마의 졸부 신흥귀족들의 파티는 저 중국 하나라의 주지육림과 은나라의 포락지형을 떠올리게 한다. 먹어도 먹어도 끊임없이 들어오는 기름진 음식들은 또 다른 `욕망의 컨베이어 벨트’처럼 쉴 줄을 몰랐다. 파티의 에피타이저는 산쥐다. 배를 갈라 내장을 빼고 고기와 과일을 채운 다음 공작 깃털과 양귀비 씨에 굴려 구운 산쥐 요리는 파티의 입맛을 돋우는 데 일품이었다고 한다. 신선한 굴과 고기 먹는 달팽이와 플라밍고는 까다롭고 비싼 입들을 잠재웠다.

 

시장한 사람들은 로즈마리 양꼬치구이를 먹거나 북아프리카의 질 좋은 밀로 구운 따끈한 빵을 그리스의 와인에 찍어 먹었다. 음식에 질리면 아프리카산 무화과나 복숭아를 씹었다. 너무 먹어서 토하고 온 사람들은 살짝 부패해서 거무스름하게 썪은 고기를 썪은 향내와 함께 별미로 즐겼다. 인육을 먹어 살이 통통하게 찐 식인장어도 귀족들의 식탁에 자주 올랐다. 만찬장에서 토하는 건 무례한 일이 아니었다. 누구나 필수품으로 갖고 다니는 공작의 깃털로 목을 간지럽혀 게워내면 그만이었다.

 

로마 전체가 욕망의 만찬장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화산폭발로 묻혀버렸던 폼페이 유적에서 발견된 포르노 벽화와 `매춘전용 동전’ 속의 춘화는 당시 로마의 성도덕을 짐작케 한다. 검투사의 땀을 긁어모아 만든 최음제는 최고가로 팔리는 호사품이었다.

 

로마가 자랑하는 천재시인 오비디우스도 성적 유희에 자신의 재능을 보탰다. 그는 <사랑의 기술>이라는 저작을 통해 상대를 유혹하는 법과 각종 성애의 기술을 유포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동상 밑에서 성애하는 유희의 즐거움을 누리라고 선동하던 오비디우스는 급기야 황제의 손녀와 염문을 뿌리다가 원로원의 절반을 자신의 침실로 인도한 딸과 함께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귀족의 부인들도 이 욕망의 질주에 합류했다.

 

로마의 휴일이 부른 종말의 서사시

 

풍요에 넘쳐 사치와 향락이 판을 칠 때 타락의 서비스업도 그 도가 높아진다. 황제의 타락한 손녀 율리아는 얼굴의 기미와 반점을 없애기 위해 비둘기똥을 가공해서 화장을 했다. 얼굴의 주근깨를 없애는 데엔 값비싼 악어똥을 발랐다. 예뻐지기 위해 얼굴에 똥칠을 한 율리아는 오비디우스와의 부적절한 연애로 황제의 얼굴에 똥칠을 하고 말았다.

 

로마인들에게 도박은 수치가 아니었다. 노름은 여타의 오락이나 스포츠처럼 누구나 즐기는 국민놀이로 간주되었다. 도박에 미쳐 일을 하지 않아도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전 재산을 노름에 날려 가산을 탕진해도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식에게 물려줄 재산까지 날려야 비로소 약간의 수치와 질책을 받을 뿐이었다. 콜롯세움이나 전차경기장에서 배팅하는 로마인들은 마치 직업에 전념하는 평범한 시민들로 인식되었다.

 

화려한 로마에서의 잔혹한 일들은 모두 `로마의 휴일’에 일어났다. 로마의 휴일이 도대체 얼마나 되길래 `로마휴일 잔혹사’가 되었을까?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시절의 휴일은 75일이었는데 서로마가 멸망하던 5세기 말의 로마 휴일은 무려 176일로 불어나 있었다. 1년의 반이 휴일이었던 것이다. 하루걸러 놀던 그들에게는 충분한 오락과 유희가 준비되어 있었다. 콜롯세움에서는 노예 검투사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처참하게 죽어갔고 또 다른 날에는 기독교인들이 맹수의 밥이 되었다. 바티칸의 언덕과 야외극장에서 십자가로 처형되거나 인간횃불로 타들어가는 날도 로마의 휴일이었다. 전차경주에서 사람과 말들이 바퀴에 빨려 들어가 도륙되는 날도 그날이었다. 귀족들의 파티에서 흥을 돋우기 위해 물고기 밥이 되는 일도 그날에 벌어졌다. 로마의 휴일에 낭만은 없었다.

 

로마가 제국의 길로 들어서며 융성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로마의 도로’였다. 8000킬로미터에 달하는 로마의 길은 정복과 통치와 상업의 길로서 로마에 부를 안겨주었다. 예로부터 길을 장악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했다. 로마는 길을 만들고 길을 장악함으로써 제국이 되었고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는 세월이 흐르면서 그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모든 길은 여전히 로마로 통하고 있었지만 그 길의 성격은 달라져버렸던 것이다.

 

로마는 북유럽의 숲길을 통해 물밀듯이 들어오는 게르만의 길을 차단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만든 길에 중국의 보드라운 비단이 깔리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게르만은 새로운 길을 뚫어 로마로 입성했고 실크로드는 로마의 도로를 덮어버렸다. 그 와중에도 로마는 여전히 `타락의 길’만을 걷고 있었다. 로마의 길이 끊기는 순간 로마의 영광도 막을 내렸다. 비키니즘(Bikinism)의 해변을 뛰놀던 여자들의 원피스가 투피스로 끊긴지 채 2백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김용균 <지혜의숲아카데미 원장>

광주드림 / 기사 게재일 : 2013-01-21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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