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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의 경제활동(폼페이52부)

이모르 2021. 2. 7. 07:18

폼페이의 프레스코화  

 

 

폼페이의 프레스코화

 

 

폼페이는 당시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경제 중심지로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거리에는 많은 상점과 여관이 있었다

농산물은 물론이고 수공예품은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었다

모든 산물은 폼페이로 들어오면 그 처리에 있었다

예를 들어 모든 지역에서 들어오는 산물들은 spinned 염색 세척

하였다 비누를 사용하지 않는물 소다 및 소변으로 만든 탈지

액체가 발생하였다

폼페이 주변필드에 오일 와인 시리얼 과일과 야채의 질좋은

상품이 생산되었다

고급 오일 프레스와 맷돌등 폼페이에 주요상품이었다

폼페이는 바다에서 멀지 않았고 강은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종의 물고기가 유통되었고 garum 거위 모든시기에 사용되는

소스를제조하였다

 

고기 잡는 사람들 폼페이 타일 모자이크화

폼페이 물고기 화석

 

폼페이 에서 발굴한 어구

 

그것은 그물과 후크 등의 낚시에 사용되는 도구들이 미조리 폼페이에서

발견되는 증거를 제시한다

많은 상인들은 다른도시에서 폼페이로 도착하였다 폼페이는 사실

여관이나 주점 매춘이 많은 활기차고 친절한 도시였다

 

루파나레 벽화

 

 

루파나레 벽화

 

외국인들은 언제고 마음만 먹으면 와인을 살수 있었다

그리고 룸 물로 포도주를 혼합하는데 사용하는 뜨거운 물도 마셨다

그들은 먹고 마시며 때로는 여성 노예와 성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루파레나("Lupanar)는 에로틱한 그림으로 치장하여 유명세를 탓다

폼페이 주민들은무엇을 먹었을까?

일상 생활에서 풍물과 도시의 유적을 보여주는 그림 덕분에 주민들은

야채 과일 빵 올리브 치즈를 많이 먹은 것으로 보여진다

렌즈 콩 병아리 넓은콩 과 멜론의 씨앗이 발견되었다

일부 주택에서는 아몬드 견과류 개암 탄 유골이 발견되었다

생선과 고기는 비싸기 때문에 대부분의 폼페이 로마인들은 먹을수

없었다

기록으로 남은 루시우스(Caecilius Jucundus 20-62AD)는 폼페이에

살았던 상인 조합 은행의 최고의 영향력있는 사람으로 아직도

폼페이 도시의 유적들 사이에서 그의 집을 볼수 있다

 

 

 

 

수익은 나의 즐거움‘ 이것은 목수가 살던 평범한

안마당에 설치된 빗물받이 가장자리에 새겨진 명문이다.

상업의 신, 머큐리의 모습은 여인숙 계산대, 모직물 표백공장

담벼락, 선술집 현관 등 어느 곳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술집(thermopolia)과 상점이 즐비하게 들어차 있는

거리들은 폼페이의 왕성한 상업활동을 말해준다.

그런데 놀랍게도, 도시 한가운데에 아직도 시골풍경을

간직한 구역(I 지역)이 남아 있었다. 그곳에는 야외용

식탁을 차려 놓은 전원풍 정원과 포도밭이 있었고,

포도밭에서는 포도주를 만들어 직접 팔기도 하였다.

 

유산계급의 토지수입

 

옛날부터 캄파니아는 농업의 천국이었다. 신비의

별장 주인 같은 포도원 소유자들은 부유해질 수 있었다.

신비의 별장에는 포도압착기와 수확한 포도주와 기름을

담아 보관하는 저장실이 있어 특산품을 생산했다는 증거가 된다.

목축업도 번성했는데, 중앙대광장에 건물을 가지고 있던

에우마키아는 목초지와 양때를 소유한 사람과 결혼하였다.

사업가이자 여사제인 에우마키아를 기념하는 건물이

중앙대광장에 자리잡고 있다. 토지수입은 소수의 명사

손에 집중되었고, 그 결과 경제력과 정치권력이

그들에게 독점되었다.

 

중요한 식품산업, 빵과 가룸(생선 소스)의 생산

 

빵공장 소유주는 대부분 중간계급이라 할 수 있는 장인이었다.

가룸의 생산은 초기 투자규모가 컸기 때문에 몇몇

부유한 가문에 독점되었다. 목양업은 양모산업을 촉진시켰다.

양모산업 또한 특권 가문의 수중에 장악되었고, 실 잣는 사람,

표백장이, 염색장이와 같은 기술자들은 모두 그들에게 고용되었다.

 

(1) 상업의 신 머큐리의 모습이 흔하게 등장하는

 것은 상거래가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표시이다.

 

(2) 염색업자 베레쿤두스의 염색작업장 모습

일꾼들이 염색통에 옷감을 담갔다가 꺼내어 염색이

잘 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판정하고 있다

(3) 일꾼 하나가 엉겅퀴 가시와 바늘이 달린

기구로 천의 보풀을 세우기 위해 빗질을 해대고 있다.

오른쪽에 보이는 버들가지로 만든

종모양의 초롱은 황으로 표백하거나 건조시킬 때

천의 수축을 방지하려는 기구이다. 초롱을 뒤집어쓴

일꾼은 타고 있는 황이 든

그릇을 가지고 있다

부의 집중

62년의 지진 발생 후 시급했던 도시의 재건에는 재원확보가 필요했다.

수출품인 포도주와 가룸(생선 소스)의 수출에 필수적인 암포라의

생산도 크데 증가했다.

이는 단기간 안에 소수에 의한 부의 집중 현상을 가져왔다.

 상업은 황금기를 맞았고 지주들은 잉여농산물을 수출했고,

사르노강을 통해 해외산물이 들어오기도 했다. 지중해 연안에

튼튼한 상업망을 구축한 폼페이 상인들은 오리엔트, 이집트,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에까지 손길을 뻗쳤고, 그들의

대상행렬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항구와 알렉산드리아까지 이르렀다

 

폼페이의 은행가

 

스타비아나 거리 동쪽에 있는 은행가 L. 카이킬리우스

유쿤두스의 집에서 서판 150여 점을 찾아냈다. 유쿤두스는

도매업자에게 자본을 빌려주고 수수료를 받았고, 대출을 받은

사람이 발행한 영수증도 발견되었다. 그는 식민지로부터

세금을 걷어 로마에 바치는 청부업자이기도 했다.

귀족계급은 아니었지만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는

부유한 계층에 속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은행가는 장부계산을 위하여 얇은 밀랍을 입힌

 단단한 나무판이나 마찬가지로 밀랍을 입힌 접이식

서판을 이용했다.

가운데 있는 둥근 상자에는 피피루스

두루마리를 보관해 두곤했다

 

 

 

 

 

노동자, 공장고용인, 가게점원 들

 

노예나 해방노예들은 포도 재배, 농사일에 종사했고,

다른 근로자들은 빵공장, 가룸 공장, 표백공장에 고용되어 있었다.

 금고, 거울, 화로와 같은 일용잡화의 생산이나 건축기구, 측량도구,

외과의사의 치료기구, 장신구의 세공등을 담당하는 근로자들과

광고꾼, 의사, 화가, 음악가, 학교 선생들도 존재했다.

거지와 장애인도 있었으나 공공의 자선에 힘입어 기본적

필요를 충당해 주었다고 한다

 

베티의 집에서 발견된 큐피드가 등장하는 벽화는

폼페이 장인들의 다양한 활동을 상징하고 있다.

 

 

(1) 약사를 나타내는 큐피드는 유리병 속에든

조제약을 흔들고 있다.

약국의 약장 속에는 위험한 약이 보관되어있다

 

 

(2) 대장장이 큐피드는 집게를 화로 속에 넣고, 피리처럼

생긴 관으로 바람을 불어 불을 일으키고 있다. 화로

오른편에는 또 다른 큐피드가

금으로 만든 커다란 쟁반을 마무리 하고 있다.

 

 

 

(3) 목수가 끌을 망치로 쳐서 목제에 홈을 파고 있다.

개인자격이건 조합의 구성원이건 목수는

 건물을 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평화가 깃들인 도시

 

폼페이 인구는 대략 20,000명으로 추정된다 노예가 8,000명,

자유민이 1만 2000명으로, 6할이 자유인, 4할이 노예들이었다.

노예들은 대부분 동방 출신으로 교육수준도 높았다.

오히려 주인보다 더 높은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폼페이에서는

수세기 동안 그리스인, 에트루리아인, 오스크인, 라틴인 들이

그리고 부자와 빈자가 행복하게 뒤섞여 살았다. 그곳에는

게급투쟁, 인종차별이 없었다. 해방노예와 노예도 주인의 재산

일부를 나눠 받을 수 있었으며 경제적 상호의존성이 평화를

유지시켜 준 듯하다.

 

 

 

 

 

 

참고자료

Robert Etienne지음/주명철 옮김.

 폼페이최후의 날, 시공사,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