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윤봉길 기념관의 감동

이모르 2020. 12. 15. 14:24

 

2017 6 24

 

도선 인들과 서울둘레4길을 갔을 때

시간관계상 윤봉길 기념관 참관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평소 존경하던 윤봉길의사의 기념관을

다시찾은 것은 춘성 상훈 친구부부와

함께 한 6인이었습니다;

 

매헌 윤봉길 기념관 시청각실에서

해설사의 설명과 영상을 보면서 잘못된

상식중 하나를 깨닫게 되었는데 흔히 우리는

도시락 폭탄 투척으로 의거를 하였다 알고

있었으나 실지는 수통폭탄과 도시락폭탄

2개를 준비해서 수통폭탄을 투척하셨다 하는데

도시락 폭탄은 자폭용 이었으나 자폭전 체포

되셨다 하는 걸 오늘 알게 되었습니다

 

 

 

 

대한남아의

기개를 만방에 떨친

안 의사님의 유품들과

사진들을 보며 다시한번 큰감동을 받습니다

 

 

 

 

 

 

 

백범일지 속의 윤봉길

 

윤 군은 자기 시계를 나에게 꺼내어 주며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저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 밖에는 쓸 수가 없으니까요."

하기에 나도 기념으로 윤 군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윤 군에게 주었다.

식장을 향하여 떠나는 길에 윤 군은 자동차에 앉아서

그가 가졌던 돈을 꺼내에 내게 줬다.

"왜 돈은 좀 가지면 어떻소?"하고 묻는 내 말에

윤 군이 "자동차 값 주고도 5, 6원은 남아요."

할 즈음에 자동차가 움직였다.

나는 목이 메인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하였더니 윤 군은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나를 향하여 머리를 숙였다.

자동차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커우공원을 향하여 달렸다

 

윤의사는 역사적 의거일인 1932 4 29일 일찍

교포 김해산의 집에서 한인애국단 김구 단장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수통으로 위장된 폭탄 1개와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 1개를 김구 단장으로부터 받아

어깨에 메었습니다.

또한 의사가 가진 새 시계를 단장의 헌 것과 바꾸어 갖고

의거 준비금으로 받은 돈을 사용하고 나머지를

김구 단장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사람이 왜 사느냐 理想을 이루기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를 다짐하였다

나도 理想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한 사람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계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라고 말씀하신 그분은

丈夫出家生不還 장부가 출가하면

살아돌아오지 않는다 는 말을 남기고

 

중국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열린 일왕의 생일잔치에

축하객으로 꾸미고 들어간 윤의사는 미리 작정했던

후편 오른쪽 군중 속에 들어가 투척 장소와 시간을 맞추어

의거의 최후 준비를 하였습니다.

오전 11 20분경 그들 축하식의 제 1차 순서인

관병식을 끝내고 이어 제 2차 순서인 축하식순으로

들어가 일본국가가 제창되어 거의 끝날 무렵이었습니다.

드디어 역사적인 11 50분경, 윤의사는 17미터내외

떨어진 중앙 단상 위로 수통으로 된

폭탄을 투척하였습니다.

그 폭탄이 그대로 노무라와 시게미쓰 면전에

명중하면서 중국군이 막대한 희생을 내고도

이기지 못하였던 일본 침략군의 수뇌부를

폭파시키는 전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수통 폭탄투척으로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가와 요시노리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왑타 사다쓰쿠

를 죽였고 총영사 무라이는 중상

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은 실명

9사단장 우에다 갠키치 다리절단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르는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윤봉길의사의 거사에 대해 당시 중국 최고지도자였던

장제스는"중국의 100만 대군도 해내지못한 일을

한국의 용사1명이 단행하였다 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합니다

 

 

 

 

 

 

 

 

동상앞에서 기념사진 찍고 기념관에 입장합니다

태극기와 윤봉길 의사 흉상이 중앙에 위치합니다

 

 

역동적인 윤의사 금동상은 실물의 신장이나 모습을 담았다

합니다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영광의 순간입니다

 

윤봉길호로 명명된 대한민국해군 잠수함

 

훈장증서 입니다

 

윤봉길의사가 지은 한시입니다

 

 

 

 

윤봉길의사의 생가입니다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禮山 尹奉吉 義士 遺蹟)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 있는,

윤봉길의사가 태어나서 자란 곳입니다.

1972 10 14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29

매헌윤봉길의사사적지로 지정되었다가, 2011 7 28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김구선생이 1946 426일 윤봉길의사

생가를 방문하고 가족과 함께한 사진

앞줄 좌부터 조성환 김구 윤봉길 아버지 윤황

어머니 김원상 부인 배용순 장남 윤종

뒷중 왼쪽부터 큰아버지 윤경 종형 윤순의

셋째동생

 

 

윤봉길의사 생가앞에서 상해정부요원들과가족사진

 

 

1946년 조국으로 귀환한 윤봉길의사의

유해를 동생 윤남의선생이 품에안고 운구하고

있다 뒤에 김구선생이 따르고 있다

 

 

 

1946 429일 예산군에서열린 윤의사

기념비 제막식

 

 

1946 615일 부산공설운동장에서 거행된

유해 봉환 추도식

 

 

 

1946 76일 거행된 국민장 행렬 

 

 

윤봉길 의사 부친 회갑연

 

윤봉길의사 큰아버지 회갑연

 

윤봉길의사 부인 배용순 장남 윤종과담

 

 

1932년 윤의사 의거직후 가족사진

왼쪽부터 동생 성의 동생남의 모친 김원상

부인 배용순 차남 담 장남 종 부친 윤황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에 깃발을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孟軻)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어머니께 올리는 편지

 

 

윤봉길의사 친필유언 사본

 

 

 

의거 직전의 의전 행사

 

 

수통 폭탄 투척

거사 순간 부상자들을 옮기고 있다

 

 

의거 직후 체포 연행 되시는 순간

 

 

 

 

 

사형집행장소로 추정되는곳

 

마지막 까지 지니셨던 중국화폐

회중시계

 

해방 직후 백범 김구 선생은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윤봉길 의사의 생가를 찾아 윤 의사의 어머니(() 김원상

여사)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윤 의사와 맞바꾼 시계를 보여드리며

 아드님께서 정말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아드님 덕분에 광복이 이렇게 빨리 찾아왔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진 아들이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아들을 사지(死地)로 내몬 백범 선생이 원망스럽기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김구 선생은 깊게 탄식하고 회중시계를 도로

 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서거하는 날까지 그 시계를 항상 곁에 두었습니다.

김구 선생의 회중시계에는 아들을 나라에 바친

어머니의 아픔과 그것을 지켜보는 선생의 미안함이 함께

깃들어 있었던 것이었습다. 등록문화재 제441호인

이 시계는 서울 백범기념관에 보관되어 있고

윤봉길 의사가 김구선생에게서 받았던 시계는

보물 제568호로 지정돼 윤 의사의 다른 유물들과 함께

충남 예산군 충의사에 전시돼 있습니다

 

 

 

수통과 도시락폭탄 모형

 

의거당시 일본 상해총영사가 쓴 안경

총영사 후손이 1992년 기증한 현품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르는 윤봉길의거로

절름발이가 되었다 종전시 외무대신이었던 그가

미전함 미주리함에서

맥아더 원수가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효창동 백범 김구선생님 묘소

 

왜 김구 선생님의 묘는 국립현충원에 있지 않고

이곳, 효창공원에 있는 것일까요?

국립현충원은 1954 3 1일 착공하고 1956 1 16

무명용사를 최초로 안장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1949 6 26일 낮 1시 집무실인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피살된 후 7 5일 온

국민의 애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국민장이 치뤄진 후

유해는 효창공원에 안장됩니다.

국립묘지가 생기기 훨씬 전 효창공원에

안장된 것입니다
또한 효창동이 원래 김구 선생님이 살고 계셨던 곳이라서

그 곳 가까이 묘를 정하였다고 합니다

 

일인들도 무서워 하였던 백범 김구선생님을

한낮 가소로운 자들에 의해 서거 하셨습니다

 

 

 

 

위 사진은 안중근 의사와 삼의사(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 백정기 의사)

묘역입니다.

안중근의사의 묘는 유해를 찾지못하여 가묘입니다

일본인들이 협조하면 찾을수 있다 하는데 안타깝습니다

김구 선생과 함께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의거 활동의 주요 인물들이지요.

 과거 일제를 향한 날선 활동을 함께 했기에 효창공원에

나란히 안장되어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뭉클해집니다.

출처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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