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모음

연산군의시모음(장녹수)

이모르 2021. 2. 18. 14:18

 

 

연산군 11년(1505년)11월 7일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장녹수의 위세가 하늘 을 찌를 때였다 연산군의 유흥을 위해 동원된 기생 중에서도 하급인 운평에 속하는 옥지화 라는 기생이 연산의 후궁인 장녹수의 치마를 밟은 사건이 발생했다

 

장녹수가 연산군에게 일렀는지 왕은 신하를 불러 모아 옥지화를 처벌토록했다 그러자 영의정 좌의정 좌찬성 우찬성 각조 판서와 대사헌까지 나서서 옥지화의죄가 참으로 크니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이구 동성으로 진언했다. 이 말을 들은 연산의 답변이 걸작이었던지 “연산군일기”는 그대로 기록하고있다.

 

아주 천한 것이 질그릇이나. 이것으로 요강을 만든다면 진실로 천하지만 만약 어전에 쓸 물건을 만든다면 천하게 여길수 없다. 옥지화와 같은 운평(하급 궁중 기생)이 숙용(종3품 후궁)이나 숙원(종4품 후궁)에 대해 감히 저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해조금이라도 능멸함이 있다면 불경하기가 그지없으니 이런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벌로 다스려야한다. 노비 출신이었던 장녹수를 염두에 둔 말이다 옥지화는 치마 한 번 밟은 죄로 결국 참형 되었다 출처: 조선야사

 

 

중종반정 

1506년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晉城大君)왕으로 추대한 사건. 1506(연산군 12)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낸 성희안(成希顔)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박원종(朴元宗)재위 12년간 폭정으로 국가의 기틀을 흔들어 놓은 연산군을 몰아낸 사건이다. 연산군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키면서 많은 선비들을 희생시켰고, 자신의 행동을 비판하는 세력을 축출하였으며, 경연의 폐지와 대간들의 직언을 금지하게 하는 신언패(愼言牌)의 실시, 성균관의 연락(宴樂) 장소화, 도성 밖 30내의 민가 철거, 언문 도서의 폐기, 사대부 부녀자의 농락,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인한 정치의 파탄 등 수많은 악행과 폭정을 거듭하였다. 이에 훈구세력을 중심으로 연산군의 폐위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다.

 

성희안과 박원종 등은 연산군 폐위를 밀약하여 당시에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柳順汀), 연산군의 총애를 받고 있던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신윤무(申允武) 등의 호응을 얻어 왕이 장단(長湍) 석벽(石壁)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 계획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유람이 중지되면서 거사에 차질을 빚을 뻔 했으나 호남지역에서 연산군 폐위의 거사 격문이 ] 서울에 나돌게 되면서 당초 계획을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1506 9 1, 박원종 ·성희안 · 신윤무를 비롯해서 전 수원부사(前水原府使)

장정(張珽),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박영문(朴永文),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홍경주(洪景舟) 등이 무사를 훈련원에 규합하였다. 그들은 먼저 궁금세력(宮禁勢力)으로 권력을 쥐고 있던 임사홍(任士洪) 신수근(愼守勤)과 그 아우 신수영(愼守英) 임사영(任士英)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궁궐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반정에 성공한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경복궁에 들어가서 성종의 계비이며 진성 대군의 어머니인 대비 윤씨의 허락을 받아 연산군을 폐하여 강화도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인 9 2일 진성대군을 맞아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르니그가 조선왕조 제11대 왕인 중종이다. 이 정변을 중종반정이라고 한다.

 

 

연산군은 재위 12년인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지금의 연세대학교 자리 연희궁에서 하루 자고 다음 날 교동도로 유배되었다. 그 후 두 달 뒤 11월 8일에 죽으니 두 달 전까지 멀쩡하게 잘 놀던 31세 청년의 죽음 치고는 자못 의아하다. 실록에는 그 죽음을 ‘역질로 인해 죽었다(因疫疾而死)’라 했는데 11월에 역질로 죽었다는 것도 석연치 않다.연산군은 자식 복이 없어 많은

자녀가 어려서 죽었다. 몇 명 남아 있던 대군(大君)과 군(君)은 반정이 일어난 그 달에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때 그 애들의 나이가 10살 안팎 어린 것들이었는데….묘역에서 나누어 주는 연산군 묘 관람 자료에는 자식에 대한 애틋함을 담은 연산군의 시(詩)가 실려 있다.

 

 

 

宗社幽靈不念誠(종사유령불염성)

如何忍頑我傷情(여하인완아상정) 

連年四子離如夢(연년사자이여몽)

哀淚千行便濯纓(애루천행변탁영)

 

종묘사직 영혼이 내 지성을 생각지 않아 어찌 이다지도 내 마음이 상하는지 해를 이어 네 아들이 꿈 같이 떠나가니 슬픈 눈물 줄줄 흘러 갓끈을 적시네. 연산군은 타고난 감수성이 좋아 수백편의 시를 남겼는데 반정 후 모두 없어지고 실록에 100여 편만 남아 있다 한다.폭군으로만 알려진 연산군의 숨은 얼굴이다.

 

한편 연산군은 죽은 뒤 유배지에 쓸쓸히 묻혔는데 7년 뒤에 그 부인 거창 신씨가 중종에게 탄원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폐비 신씨는 임영대군의 외손녀이니 외할아버지의 땅에 비록 폐주이지만 남편을 이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부부란 그런 것인가? 방탕하던 연산군은 죽을 때 한 마디를 남긴 것으로 실록에 기록돼 있다. ‘ 죽음에 임해 다른 말은 없고, 단지 신(愼)씨가 보고 싶다(欲見愼氏)’ 였다는 것이다.

 

흥청(興靑: 궁중에 들여 온 기생)들과 신나게 놀다 이렇게 쓸쓸히 죽으니 망청(亡靑)이 되고, 결국 흥청망청인 것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중종반정이 일어난가장 결정적 사건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보자. 미망인으로 지내던 큰 어머니를 겁탈했다는 것이다.

최근의 소설, 연속극에서도 연산군이 큰어머니를 겁탈하자 큰어머니가 목을 매 자살하는 패륜과 정절(貞節)의 극치를 보여 준다. 연산군의 기록인 ‘연산군 일기’ 는 중종4년에 편찬되었으니 반정세력들이 4년을 주물럭거린 뒤에 나온 결과다.

 

연산군이 쫓겨나기 50일 전인 연산군 12년(1506년) 7월 20일 기록을 보면 ‘월산대군 이정의 처 승평부부인 박씨가 죽었다. 왕에게 총애를 받아 태기가 있자약을 먹고 죽었다고 사람들이 말했다

(月山大君?妻 昇平府夫人朴氏卒 人言; 見幸於王 有胎候 服藥死)’는 부분이 있다.

 

 

 

 

 

절세미인 궁녀 누리던 31세 연산군이 52살 큰어머니를 임신시켜 왕에서 쫓겨났다고 실록에 기록돼 있는데, 믿을 만한 얘기일까?

 

 

 

 

 

 

이 글을 보면 석연치가 않다. 이런 엄청난 사실을 ‘人言(사람들이 말했다)’라고 무책임하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소문이라는 뜻이다.승평부부인 박씨는 연산군의 큰어머니로 당시 52세, 연산군은 31세 청년이었다. 지금도 52세면 임신하기 쉽지 않은 나이인데 평균수명이 40살도 안되던 당시에 52세 여인이 임신을 했다? 궁중에 젊고 예쁜 궁녀들이 들끓는데 52살 큰어머니를 간통했다? 혹시 이긴 자들의 일방적 기록은 아닐까?

 

 

 

 

 

 

착잡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고 묘역을 내려온다.오른 쪽에 원당샘(元堂泉)이 있다. 이곳에는 파평 윤씨 집성촌이 있다. 들리기로는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네 일가가 연산군 묘가 이곳으로 이장하자 돌보기 위해 옮겨 왔다고도 한다. 이한성 동국대 교수

 

 

소재지 :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77사   적 : 제 362 호  

 

 

燕山君墓의 특징

조선조(朝鮮朝) 최초의 폐왕(廢王)인 연산군(이융; 1476-1506, 재위12년)과 폐비(廢妃) 부인 거창군 신씨(愼氏; 1472-1537)의 연산군묘는  유배지 강화도 교동(喬桐)에서 31세의

나이로 사망한 연산군을 그곳에 매장했다가, 1512년(중종 7년)에 폐비 부인 신씨의 상언(上言)으로 양주군(楊州郡) 해촌(海村)-{현재의 위치}에 이장(移葬)하여 왕자군(王子君)의 예우로  개장(改葬)했습니다. 그 후 1537년(중종 32년)에 부인 신씨가 사망하자 쌍분(雙墳)의 형태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왕자군의 예우로 조성되었기에 곡장(曲墻)과 상석(上石),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 만으로 조촐하게 설치했지만, 그 보다는 폐위된 왕이었기에 봉분 앞의 비석 전면의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는 비명과 봉분을 호위하고 있는 문인석의 얼굴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애처로움이 느껴집니다.  더욱이 길 건너편에 조성된 세종의 셋째 딸 정의공주묘역보다 더 협소한 크기를 보면 그 안타까움은 더 커집니다. 묘역의 아래에는 궁인인 의정궁주조씨(義貞宮主趙氏)의  묘와 연산군의 딸, 사위 구문경(具文景)의 묘가 함께 조성되어 있습니다.

 

 뒷 이야기

성종(成宗)의 장남으로 태어나 1483[성종 14년]에 세자에 책봉되고 왕위까지 오르지만 재위 12년만에 성희안, 박원종 등에 의해 성종의 둘째 아들인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추대하고 연산군을 쫓아내는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되고 맙니다. 이러한 연산군에 대한 평가는 실록<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등에서 자세하게 서술되어 포악한 성격에 거듭된 실정(失政)과 폭정 등이 나열되지만 당대의 무오사화(戊午士禍)나 갑자사화(甲子士禍) 등에서 보이듯이 권력의 암투 속에서 괴로워했던  한 인간으로 본다면, 더욱이 자신의 어머니{성종비에서 폐위된 윤씨(尹氏}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당사자라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연산군에 대한 평가가 객관적으로이루어져야 함은 당연합니다.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 이야기

거창군부인 신씨(재세 : 1476년 음력 11월 29일 ~ 1537년 음력 4월 8일)는 본관이 거창인 거창부원군 신승선과 중모현주 이씨의 딸로 1476년(성종 7)에 태어났다.1488년(성종 19)에 왕세자빈에 책봉되었고, 1494년에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거창군부인으로 강봉되어 궁 밖 정청궁(貞淸宮)에서 기거하였다. 1537년(중종 32)에 61세로 세상을 떠났다.중종반정(中宗反正)에 의해 연산군과 함께 폐위되었고 자신의 두 아들 또한 유배지에서 사사(賜死)되는 불우한 일생을 마감한 비운의 여인이라 할것입니다

 

 

 

 

 

연산군 시모음

 많은 근심

 

기침은 심하고 근심은 많으니

지친 마음 그치지 않아

이리저리 뒤척이며

밤새 잠을 못 이루네

간관들은 종묘사직 중한 것은

생각지도 않고

소장이란 소장마다

경연에만 나오라네

 

1499 3 3 (24)

어찌 이 날

어찌 이 날 술 내리기를

사양하리잔뜩 취해 오거든

나를 위로하여라

 

1499년 12월 1일 (24세)

 

기쁜 마음

 

기한제 끝났으나

센 바람 불어오네

하늘이 정성에 감동하여

곧 보답하시리

내 술과 안주로

기쁜 마음 표하노니

얼근하게 취하거든

내 시에 화답하오

 

1499 12 31 (24)

 

어진 정승들이여

길은 멀고 땅은 미끄러워

다니기 어려운데

충성심 가시지 않아

대궐에 나왔구려

비노니 어진 정승들이여

나의 잘못을 살펴주고

복령과 대춘처럼

오래오래 사시오

 

1500년 3월 3일 (25세)

 

삼짇날 승정원에

 

삼짇날 봄바람 부는 서울 거리에

새 날고 물고기 놀며 온갖 꽃 향기롭네

난정의 놀이를 뉘라서 좋다는고

은대에서 어사주로 취함만 하리

 

1500 3 3 (25)

 

서울에 봄바람 부니

때는 삼짇날새 날고 고기 노니

온갖 꽃 향기롭네

난정놀이를 뉘라서 좋다

하는가은대에서

어사주로 취함만 못 하리

 

1500년 6월 22일 (25세)

 

고요한 은대에 낮이 더디기만 한데

승지들은 무더위로 졸고만 있네

연꽃을 꺽어 은근히 주리니

붉은 소주 가득한 잔 마다치 말게

 

1500 6 27 (25)

 

대궐 안 찌는 듯 더워

흐르는 땀 장물 같고불같은 해

타는 구름에 낮이 더욱 지겹구나

향기로운 한잔 술 마실 수가 있으니

오히려 더운 곳이 서늘해지네

 

1500년 8월 1일 (25세)

 

밝은 달 깊은 시름 비 개고 구름 갇혀

밤 기운이 맑으니 달 밝은 윤각에 꿈 이루기 어렵구나

해마다 좋은 때를 구경할 수 없으니 어옹의 한 평생을

지남만도 못하네

 

1500 10 25 (25)

 

노을

바람 맑은 동해에는 푸른 노을 자욱하고

비 어두운 서산에는 해가 침침하네

 

1501년 1월 22일 (26세)

 

사계화 한 분으로 이슬에 젖은 붉은 꽃이

푸른 잎 속에 짙고 누각에 향기 풍겨

훈풍에 취하네

구경만 하라고 은대에 내리는 것이 아니라

적적할 때 보고 천지조화를 생각하라는 뜻이지

 

1501 4 22 (26)

 

 

철쭉꽃 향기

 

은대에 일은 없고 해는 길기도 한데

다들 책상 앞에서반은 벽에 기대어 있구나

취한 뒤 졸음 오면 마음이 고달프니 어찌 선온과 함께

꽃향기 감상을 사양하리오

 

1501년 5월 10일 (26세)

 

술과 작약

꽃을 주고 술을 줌은 가까이 있는 까닭인데

즐거움 속에도 근심이 있음을 뉘라서 알겠는가

 

1502 9 5 (27)

 

어제 효사묘로 나아가 어머님을 뵙고

술잔 올리며 눈물로 자리를 흠뻑 적셨네

간절한 정회는 그 끝이 없건만

영령도 응당 이 정성을 돌보시리

 

1503년 10월 14일  (28세)

 

들국화 시들었는데

집국화는 난만하고

붉은 매화 떨어지자

흰 매화 한창이네사

물을 감상하며 하늘 이치 안다지만

임금의 도는 우선 화목한 정치에 있네

 

1504 10 15  (29)

 

간신이 악의를 품고도 충성한 양하여

임금을 경멸하여 손아귀에서 희롱하려 하도다

조정에서는 폐단을 한탄하나 배격될까 두려워

다투어 서로 구제하는 못된 버릇 일으키네

 

1504년 12월 16일  (29세)

 

비단 소매엔 향기가 없고 거울엔 먼지 끼니

한 가지의 꽂이 여위어 봄 모양이 아니네

십 년 동안 군왕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니

비로소 아름다움으로 잘못 살았음을 알겠노라 

 

1505 1 19  (30)

 

풍속이 바뀌고 고쳐져 참으로 밝은 때로세

봄빛이 화창해 감싼 경치가 기이하구나

이로부터 태평세월 조야가 엄숙하니

 술 옆에 차고 꽃가지 꺾음이 제일 좋으리

 

1505년 4월 3일  (30세)

 

백성에게 잔학한 자로 짐과 비교할 자 없는데

내시가 위를 범할 줄 어찌 생각조차 했으리요

부끄럽다 못 해 통분하기 그지없다는

온갖 생각을바닷물에 씻고자 하여도 그 한을 풀지 못하리

 

 1505 8 13  (30)

 

특별히 정자에서 구경하기 허락하니

싸늘함이 비를 타고 맑은 가을 재촉하네

온화 위엄 양립해야 참 왕도일세

충성 다해 은혜 갚을 신하 누구뇨

 

1505년 8월 17일 (30세)

 

태평한 때 가을 관광 꺼리지 마오

국화 떨기 금빛 품고 향기 아직 안 토했네

푸른 술 향기로워 궁온에 띄우니

서리 내린 후 온 가지가 누렇다 할 것 없네

조야가 편안하여 태평한 이때

잔치를 허했으니 취할 만하오

언제나 용렬한 짐 덕이 없어 부끄러운데

오늘은 인재들 많아 되레 즐거워라

큰 은혜 깊이 느껴 즐기기를 꺼려 마소

낮닭이 한창 조니 해가 어찌 기우랴

대궐 술 다시 받기 사양치 마오

호방한 임금 나라 편케 하도록 힘쓰면 되네

 

1505 8 27 (30)

 

조정에서 존호를 받으니 부끄럽고 황망할 뿐

돕는 힘 버리지 않으면 국세는 날로 퍼지리

성대한 오늘 잔치 보기 드문 경사이니즐거이 취하기를

달빛 볼 때까지 하여라

 

[연산군일기 1505년 9월 16일] 30세

 

너무 애달파 눈물 거두기 어렵고슬픔이 깊으니 잠조차

오지 않네마음이 어지러워 애끓는 듯하니이로 해서

생명이 상할 줄 깨닫네

 

1506 2 25 (31)

 

가벼이 대답함은 서로 깊게 믿음을

알고사사로이 말함은 두터이 친하기 때문일세

호기를 내는 것은 천성을 따른 것이고

미친 짓 하는 것은 천진난만함에서 오니

군신이 해학하며 노는 것을 말하지 말라

나무라고 비웃음은 나라를 어지럽히는 것이니

덧없는 인생을 뉘라 애석해하지 않으리

봄을 핑계하여 취하는 것을 어찌 마다하랴

 

1506년 3월 8일  (31세)

 

색이란 하루아침의 일 공덕은 만고에 남으니

미녀 데리고 즐겨 놀 생각일랑 하지 마오

 

1506 3 19 (31)

 

동산에 가득한 봄빛은 햇빛이 찬란한데

꽃바람이 새로 단장한 옷자락을 나부끼고

짙은 녹색 연분홍 화려하기도 하네

그 누가 청광을 위해 이슬향기 가져왔나

 

1506년 3월 20일  (31세)

 

대궐 안에서 꽃과 달의 시구를 누가 가르쳤던가

두고 읊으매 생각이 간절하여 정분만 더하네

다시 보매 밝은 햇살이 도리를 감쌌구나

내가 바로 삼한 제일의 호걸임을 문득 알았네

 

1506 3 29  (31)

 

특히 어질고 뛰어난 이를 뽑아

서호로 보낸 뜻은참으로 충성한 자 구함이지

속이는 자 구함이 아니오

바람은 아지랑이 빛을 끌어

푸른 물결에 더하고

경지는 화창한 빛으로 옮겨져

맛 좋은 술병 띄웠네

길을 막아 있는 화류는 아리따움을 다투고

정자에 가득한 여인은 날씬함을 겨루누나뉘 알리요

넓은 은혜와 정성으로 내린 술이취중에도

나라 보전에 더 힘쓰란 것인 줄

 

1506년 6월 1일 (31세)

 

국가에 소홀하고 군왕을 속인 죄를 어찌 용서할까

몸을 아끼고 명예를 구함은 간흉들의 짓이로다

누가 능히 단심의 정성을 가져다 바쳐큰 은혜 갚으며

태평세월 즐기게 하려는가

 

1506 7 1 (31)

 

고요한 밤 대궐 뜰 오동잎에 비소리만 싸늘한데

귀뚜라미 귀뚤귀뚤 이내 수심 일으키네

한가로이 거문고에 새 곡조를 올려보니

한없는 가을 시름 흥과 함께 굴러가네

 

1506년 7월 14일  (31세)

 

영화는 초방 벼슬 은혜로 시작하여

소임이 승지니 총애가 번성하다 하겠네

순수한 뜻 돌려 도우려는 생각 싫어하지 마오

그르치면 면하기 어려워 그땐 패망하리

 

1506 7 28 (31)

 

주름진 얼굴 구부러진 허리에

쑥대머리를 홑뜨리고찬마루에 구부려 자며

옛날 놀던 일 생각하네 남들이 비웃으며 주렴

제치고 보는 줄 알지 못하고 누가 짐의 호기 당하리

웃음 치며 과시하네

 

1506년 7월 30일  (31세)

 

푸른 이슬은 밤에 맺혀 비단치마 적시고

가을바람은 소슬하여 앳된 간장을 녹이누나

난간에 기대 기러기 소리 들으니 달빛은 차갑고

눈물 가득한 눈시울엔 슬픈 마음 메어지네

 

선능의 성종대왕묘

 

 

 

서삼능 의 폐비 회릉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77번지에 사적 제362호인 제10대 폐왕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

 

선릉과 같이 있는 정릉 중종릉 선릉과 같이 있는 정릉 중종릉

< 중종의 정릉(靖陵) > - 서삼릉 능역 내 희릉에 있다가 계비 문정왕후에 의해 지금 자리로 옮겨졌다.

 

 

 

 

 

 

 

 

 

 

 

 

 

 

 

 

 

 

 

 

흥청망청(興淸亡淸) 뜻

 

흥청망청이라는 뜻은 누구나 알고 있을거에요 아마 사자성어인지 모르고 사용하는 분들도 계실 수 있을만큼 우리 실생활에서 굉장히 많이 사용되는 사자성어에요

흥청망청의 한자 구성으로는 일어날 흥(興) 맑을 청(淸) 망할 망(亡) 맑을 청(淸) 이에요

 

이 사자성어는 우리나라 연산군 때 유래가 시작되었는데 연산군이 채홍사(採紅使)를 파견하여 전국의 용모가 수려하고 아름다운 처녀를 뽑고, 우수한 성적을 올린 채홍사에게 큰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 기생들을 관리하게 되는데, 이 기생의 명칭이 흥청(興淸)이라고 했어요 이렇게 전국에서 모은 미녀들과 향락을 즐기던 연산군은 중종반전으로 인해 실각하게 된다고 이미 역사시간에 배웠죠?? 연산군이 폐위 한 후에 사람들이 말하길 흥청(興淸)이 망청(亡淸)이 되었다. 라고 하여 이 말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거에요

 

 

 

 

 

採紅使

 

채홍사(採紅使)는 1504년의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이 미녀를 뽑기 위해 전국에 파견한 임시 관원이다. 『연산군일기』에는 미녀와 함께 좋은 말을 징발하려는 목적의 채홍준사(採紅駿使)라는 명칭이 좀 더 많이 나온다.채홍사는 연산군 때 이후에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연산군의 폭정과 황음(荒淫)이 극도로 치달은 1504~1506년에 한정되어 운영된 이례적이고 비정상적인 관직이었다.

 

 

 

채홍사

채홍사는 말 그대로 예쁜 여성들을 뽑아 궁에 데려오는 관헌을 말했다.연산군이 채홍사를 전국에 파견하여 미녀들을 한양으로 불러들였는데,연산군의 패악을 지적할 때 단골로 언급되는 단어이며그의 종말을 함축하는 말이기도 하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11년(1505) 8월 10일의 기록에 따르면 “채홍준 체찰사(採紅駿 體察使) 이계동이 미녀 63인과 양마(良馬) 1백 50필을 바쳤는데, 연산군이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며 곧 내전(內殿)에 불러 술을 주고, 노비(奴婢) 10구(口)를 특별히 줬다.”라고 기록했다.

 

8월 11일에는 “채홍준 체찰사 임숭재에게 이계동의 사례에 따라 노비 10구를 주었다”라고 했다. 연산군이 채홍사에 대한 관심을 담고 있는 기록이다.<조선왕조실록>, 연산군 12년(1506) 9월 2일의 기록을 보면 궁궐에 필요한 다양한 여성들을 뽑아 들인 것이 1만여 명이라고 되어 있지만 그 채홍사가 연산군에만 그치지 않았던 점을 주목할 일이다.


 

영화간신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