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야화 191 풍각쟁이
남의 집 앞에서 각설이타령을 해 주고 동냥을 받는
젊은 풍각쟁이가 평안도 정주 땅 외딴 산골짝 조그만 동네
우물가에서 물 긷는 처녀에게 물 한바가지를 얻어 마셨다.
“물로 목을 축였지만 까치고개를 넘어오자면 몹시
시장하실 텐데 저희 집으로 가시지요.”
초가삼간 처녀의 집에 가서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보리밥 한그릇을 비우고 나니
처녀의 부모가 삽짝문을 열고 들어왔다.
처녀의 부모는 유장(柳匠)이었다.
버들가지 껍질을 벗겨내고 알맹이로 고리짝이나
바구니를 짜서 파는 천민으로,
사람들은 고리백정이라 불렀다.
개울가에 움막을 지어 놓고 거기서 일하다가
저녁때가 되면 집으로 돌아왔다.
풍각쟁이는 처녀의 부모에게 인사하고 떠나려는데
처녀가 사립문 밖에 따라 나왔다.
“마땅히 밤이슬 피할 곳이 없으면 저희 움막에서 주무십시오.”
배는 해결을 했는데 잘 곳 걱정을 하던
풍각쟁이는 귀가 번쩍 띄였다.
움막에서 하룻밤 잘 잔 풍각쟁이는 이른 아침,
떠나기 전에 인사나 하고 가겠다고 우물가로 가서
기다리자 처녀가 물을 길러 왔다.
“정해진 곳이 없으면 부모님 일을 도우며….”
그는 너무나 반가워 처녀의 두손을 덥석 잡았다.
“이 은혜 잊지 않겠소이다.” 그날부터 풍각쟁이는
유기장 일을 거들게 되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어느 날, 밤은 깊어 삼경일 제
소쩍새 울음소리에 풍각쟁이는 잠 못 이루고 있는데
처녀가 불쑥 움막 속으로 들어왔다.
도롱이를 벗고 들고 온 보자기를 풀자
삶은 닭과 청주 한 호리병이 나왔다.
그날 밤 움막에서 풍각쟁이는 처녀의 옷고름을 풀었다.
오랜만에 기름진 음식을 포식하고 술 한병을 비우고
얌전한 처녀를 품었으니 당연히 기뻐야 할 터인데,
웬일인지 풍각쟁이의 두눈엔 눈물만 쏟아졌다.
격렬한 운우가 지나고 풍각쟁이의 품에 안긴 처녀가 물었다.
“서방님, 무엇 하시던 분입니까?”
“나는 풍각쟁이요.”
처녀는 뾰로통해서 돌아갔지만 며칠마다
깊은 밤이면 움막을 찾았다.
날이 갈수록 처녀도 음양의 이치를 깨우쳐
등줄기엔 땀이 나고 고양이 울음소리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처녀가 입덧을 하며 풍각쟁이는 꼼짝없이
이 집 사위가 됐다. 장인 장모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하며 외동딸을 나무랐다.
“이것아, 네가 눈으로 보면 알 것 아니냐.
네 어미 아비는 손이 부르트도록 일해도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데 저 솜씨 없는 풍각쟁이를
짝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무슨 수로 살아갈 테냐.
풍각쟁이로 나가거라.”
처녀의 어미는 손바닥으로 딸의 등짝을 때렸다.
풍각쟁이는 밥만 축냈다.
버들을 베어 오라면 손을 베어 피범벅이 되어 들어오지,
바구니를 짜라면 울퉁불퉁 버들가지만 축내지….
장인 장모는 구박이 심해도 신부는
신랑을 하늘처럼 받들었다.
어느 날 아침, 난데없이 초래 소리가 들리더니
정주 사또가 육방관속을 데리고 유장집 삽짝을 열고 들어왔다.
풍각쟁이는 엉겁결에 부엌 짚풀더미 속에 숨었다.
사또와 육방관속이 마당에 엎드렸다.
“참판 나리, 조정에서 모셔오라는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폐위되고
세상이 바뀐 것을, 갑자사화로 억울하게 귀양 가다가
도망쳐 풍각쟁이로 변장해 숨어 지내던 젊은 참판
박중권은 몰랐었다.
부엌에서 기어 나온 풍각쟁이(?)는
사또가 가져온 사모관대를 입고 사또의
큰절을 받으려다 뒤돌아 손짓했다.
“부인도 와서 내 옆에 앉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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