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우들과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강화도 나들길(둘레길)을
가기로 하여 사전지식을 얻기위한 컴 싸이트를 뒤지고
있었지만 정확한 정보를 구할 수가 없어서 애를 먹다가
다음 여정으로 즐거운 여행을 할 수가 있었다.
이글은 강화도 나들길을 대중교통을 이용하고자 하는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지하철 5호선 송정역1번출구밖에서 9시 미팅 88번 8번 일반버스
3000번 좌석버스 승차
(그러나 이 노선은 잘 몰랐을때 이야기이고 신촌에서 출발 한다는
것을 서울로 회귀할때 알았다 다만 예전처럼 시외버스 정류장이 아니고
옛 신영극장앞 중앙차로에서 있었다)
강화대교 건너자 마자 강화 청소년 수련장앞정류장 하차
갑곳진을 거처 강화나들길 제1코스로 내려선다
요즘은 강화군에서운행하는나들길 강화 전코스를 운행하는 버스가있다
나들길을 가다가 지치게 되면 이런버스나 강화읍 터미널로 운행하는 강화시내
버스를타고 터미널에 오면 서울로 오는 버스가 많다
2011년 10월 23일
갑곳진 부터 광성보까지 9km
사랑하는 친우들 4쌍 8명이 강화대교 건너 강화청소년 수련장앞에서 하차하였다.
이제것 자가용을 이용하여 강화도를 다녔으나 강화 나들길이 생겼다는 말에
대중교통을 이용 이곳에 왔다 날씨는 더없이 좋았다.
우선 갑곳진으로 가기위하여 길을 건너 행군하는데 길옆으로 거두지 않은 유실수 들이
상품가치를 상실했는지 방치된 체 그대로 있었다
위키백과 인용
순무는 쌍떡잎식물 양귀비목 겨자과의 한해살이풀 또는 두해살이풀로 중국에서 처음 도래되었다. 순무는 봄에 노란 꽃이 총상(總狀) 꽃차례로 피고 뿌리와 잎에 많은 비타민을 함유한 채소이다. 잎은 긴 타원형이며, 품종에 따라 바소꼴, 무잎 모양의 깃꼴의 모양이 있다. 뿌리의 크기나 모양 또한 품종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팽이 모양의 둥근형이다. 그냥 무와 확연히 다른 점은 뿌리의 색인데, 색이 그냥 무와 달리 자줏빛을 띄고 있다. 맛은 매콤한듯하나 고소하며 겨자향의 인삼맛이 난다. 순무는 무를 재배하는 방법으로 재배하면 되지만 늦여름에 파종하고 늦가을에서 초겨울에 수확하는 것이 많다.
실제 이는 식물분류학상 염색체수가 배추와 같은 n=10 이며, 무는 이와는 달리 n=9
이기 때문이다.
강화지역에서 재배되는 순무의 맛은 일반적으로 달면서도 겨자향의 인삼맛이 나며,
한편으로는 배추뿌리의 진한 향수를 느끼게도 한다 강화도에서 순무는 대표적으로
봄철과 가을철에 생산되며 이들은 모두 같은 맛과 효능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강화도
특산물중의 하나인 밴댕이젓, 새우젓 등을 넣어 담근 온갖 순무 김치들은 그 맛이 가히
일품이라 할 수 있다.
정겹게 강화 특상품 순무 와 고구마를 수확하는 모녀가 있어 매매를 하는거냐고 춘성짝
이 물었다 그들은 판매하는것이 아니라며 굳이 고구마를 나누어준다 관광지 인심이
야박하다 고 만 생각하였던 우리 일행은 너무고마워 하였다.
죽산 조봉암 선생의 추모비를 지나게 된다
갑곳진 정문안에 세계 금속활자에대한 전시회와 탑이 세워져있었다
금속활자에 대한 역사스페셜에 따르면 16세기 독일의 구텐베르그
가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전세게적인 문화혁명을 이르켰다 하는데
우리는 그보다 78년 앞선 고려때 였으나 그당시 한문으로
알파벳의 편리함보다 뒤져 잘알려 지지 못하였다.왜 더빨리 한글이
창제 되지못하였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공민왕21년 (1372) 백운화상이 법맥을 계승하고자 제자
석찬과 달담이 비구니 묘덕의 시주를 받아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
7월에 금속활자로 만든책 “직지심체요절”은 2001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제 되어있다.
강화지역의 옛 고울 수령들이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픈
사람들의 공덕비가 있었다
포대로 가기위해 가다 좌측 계단앞에 천연기념물 78호인
수령 몇백년이 될법한 탱자나무가 있었다 탱자나무를 심는것은
성벽밑에 적병이 접근못하도록 심었다한다.
누각안에 있는 대포는 실제 사용하던 포였다
양인들의 포탄은 날라와 폭발 하였는데 비해 우리의 포는
쇠덩어리만 날라가 폭발 하지 않는 구식으로 도대체 비교가
않되는 열세의 무기를 가지고 조선군은 고전분투 하였다
갑곳진에서 보이는 염화강의 아름다움
갑곳진에서 보이는 강화대교
수로에 있는 백로
옛날 갑곳진 안 엔 역사 박물관이 있어 아이들 어렸을때 같이
왔던생각이 났지만 요즘은 고인돌있는 쪽으로 이전하였다 한다
인공호수를 지나 갑곳진을 나와 나들길 1코스로 접어든다
오늘 몸 컨디션 이 좋지 않아 출장하지 않으려 했다는
김여사를 비롯하여 여성분들 모두 꽃과 바다를 보며 탄복하여
가로되 이런 풍류는 아무나 할수 있는것이 아니라 우리는 선택받은
사람들이라 하여 즐거워 하였다
쉬어가기를 옥수수와 커피를 나누니 자연속에 행복하기만 하였다
우리가 걷는 이 나들길은 고려때 축조된 외성으로 대몽 항전의
의지를 보는것 같았다 주성군이 삼별초의 항전에 대하여 설명을
하였다
의병 모집과 의병에 참여한 기독교인 삼형제의 일제에 의해
처형당한 터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항상 불의에 항거하는
것은 종교인 들이었다.
바다 낚시에 여념없는 강태공들
황금빛 추수안한 벼와 만추의 낙엽로 를 지난다
행길옆 자전거 도로로 행군하다 뚝방길로 가기위해
추수한 논을 가로지르는데 어릴때 추수할때의 바가지에
비벼먹던 비빔밥생각이 나는데 춘성이 말하기를
이질죽한 논을 파면 미꾸리가 있을것이라 장담한다
갑곳진에서 출발 4km 쯤 전진하였는데 용진진이 나왔다.
쓰러져 있는 령기를 바로 세우고 있는 춘성군은 언제나
티없이 맑은 얼굴을 하고있다
용진진의 해설을 찾아보면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천도 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강화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의 일부분이다.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만들었는데, 선원면 용진 지역에 위치한다.
용진진은 본래 병마만호의 관리하에 있었고 군관 24명, 사병 59명,
군 18명 도합 101명의 병력이 주둔하였으며, 포좌 4문, 총좌 26개소의 시설물이
있었다고 한다. 용진진은 북쪽의 가리산돈대, 바로 옆의 좌강돈대,
남쪽의 용당돈대를 관리하였는데, 세 돈대 모두 배가 닿는 곳이다.
연못이 있고
주목나무의 빨간 열매와 염화강이 어우러진 뒷배경 앞에 앉아
6천원짜리 바지락 칼국수와 막걸리로 점심 식사를 하였다
춘성짝은 주목의 열매를 따서 가져와 항암제라며 권한다 맛이 달가웠다..처음먹어보는 맛이었다
방아깨비는 계절에 따라서 보호색으로 변한다 여름엔 초록색 풀색 가을엔 가랑잎색으로 변신되에 가만히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녀석은 초비상상태에서는 비행하기도 한다 보통으로는 뒷다리로 넓게 건너뛰고 기어다닌다 어릴때 뒷다리를 잡고 있으면 방아찧듯이 몸을 상하로 움직인다. 방아깨비는 강한 덕으로 풀잎을 잘게 썰어 먹는다.
갈대와 억새가 함께 감상할수 있는곳은 여기 뿐일것이다
화도돈대로 오르는 언덕엔 야생들국화가 무리지어 피어
그향이 형용 할 수 없이 그윽하여 여인들은 떠날줄을 모른다
감나무와 은행나무가 멋지게 어울린 화도돈대는 숙종 5년 (1679)에 유수 윤이제가
해안방어를 튼튼히 하고자 축조한 돈대이다. 화도돈은 경작지가 되어 있어서 원형
추정이 불가능하다. 돈대 주위로 외성이 축조되어 있었다.
이 돈대는 석벽터를 기준으로 볼 때 방형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서쪽에는 새로이
쌓은 이질적인 석축이 있는데, 이것은 원래의 돈대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돈대지 남서쪽에 화도수문개축비가 있다.51) 과거에는 이 수문을 통하여 큰 배가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2002년 육군박물관에 의뢰하여 발굴조사를 실시
외적의 침입이나 척우활동을 사전에 관찰하고 대비할 목적으로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에 흙이나 돌로 쌓은 소규모의 방어 시설물을 돈대라고 한다. 강화지역에는
숙종 5년(1679년) 강화 전해안을 하나의 방위체제하에 운영하고자 돈대를 설치
운영하게 되었다. 오두돈대 역시 강화해협을 지키는 조선시대의 중요한 요새로서
화도돈대, 광성돈대와 함께 1658년에 설치되었다. 지형의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자라의 머리와 같은 지형에 설치되어 있으며,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지름이 31미터에 달한다. 광성보의 각 돈대는 신미양요때 파괴되어 1976년에
복원되었다.
철없는 뱀딸기가 많았다
갈대숲속을 걷는 행복한길
하수아비를 패트병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풍향따라 멋지게 돌았다
농민들의 아이디어로 보는 예술성에 춘성과 탄복하였다
작은 저수조 에 앉은 여성 조사는 고기를 많이 잡아놓았다
설치미술가들이 갯벌에 예술품을 설치해놓았다
처음 계획은 초지진 까지 가기로 하였으나 모두 힘들어 하므로 광성보를
보고 강화읍으로 가기로 하였다.
하늘에서 구구소리나는데 를 보니 대장기러기가 선두에서 리더하며 귀가를
서두루고 있었다 우리도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기러기떼의 비행법
기러기떼의 비행법을 알면
많은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추운 겨울 달밤 남쪽 나라를 향해 날아가는 기러기 떼는
항상 "V" 자형으로 줄 지어서 납니다.
그런데 왜 하필 V자형으로 날아가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기러기들의 지혜가 숨겨져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새들이 날기 위해
날개를 퍼덕이면 뒤에 있는 새에게는
양력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양력은 날개를 위로 올려주는 힘입니다.
기러기들은 이 양력을 이용해서
먼 거리를 함께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V" 자형으로 줄 지어서 날면
뒤에 있는 새는 힘을 덜들이고도
같은 속도로 날 수 있게 됩니다.
기러기 떼가 V자형으로 날면,
전체 기러기 떼가 혼자 날아가는 것보다
71%나 더 멀리 날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V자형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는
서로 협력하는 데 천재적입니다.
V자형의 가운데에서 앞서 날던 기러기가 지치면
뒤에 있는 기러기와 자리를 바꿉니다.
그리고 뒤에서 나는 기러기들은 우는 소리를 냅니다.
이 소리는 앞서 날아가는 새에게
속도를 떨어뜨리지 말라는 격려의 응원입니다.
만약 한 기러기가 병이 들거나 총에 맞아
대열에서 떨어지더라도
기러기들은 동료를 혼자 버려두지 않습니다.
기러기 두 마리가 함께 대열에서 이탈하여
상처가 난 기러기를 보호하고 돕습니다.
함께 날지 않고서는 목적지에 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기러기들처럼
서로 도우면서 함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은 혼자 사랑이 아니라 서로 사랑입니다.
- 톰 워샴의 기러기 이야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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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읍으로 들어가는 1번버스에 승차터미널 2층에서 음식점 에서 맥주 막걸리
여인들은 갈치조림 남자들은 아구탕으로 요기하고 3000번에 승차하였더니
1시간내에 서울에진입 집까지 1시간20분에 올수있었다
대중교통은 편리하지만 단점은 여러군데 다닐수없는것 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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