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띠아이 쌈레(Banteay Samre) (앙코르와트)
주달관은 원나라 관원이었다 역사기록이 전무한 캄푸차에 파견된 그의 견문록으로 그때의 생활상을 보게된다 이 국가는 예부터 중국과 왕래해 왔다. 원나라는 하늘의 명을 받아 사방에 있는 여러 국가를 멸망시켰다. 이들을 점령한 다음에 점성에는 사도원수가 파견되어 행정기관을 설치했고, 크메르에는 한 사람의 호부만호나 금천패호를 파견하여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이들 장수들이 부임 도중에 잡혀서 그 후로 소식이 단절되었다.
이에 따라서 원나라 1295년 6월 성종이 사신을 파견하여 이들을 외교적으로 굴복시켰다. 그리고 이듬해 2월에는 나를 사절단에 수행케 하였다. 1296년 명주을 떠나 2월 20일 온주항을 출발 하여 3월 15일에 버트남 중부에 도달했다. 도중에 역풍을 만나는 불행을 겪은 끝에 가을이 시작되는 7월에 캄부자에 들어서서 (원나라에)복종하도록 했다. 1297년 6월에 배를 되돌려서 8월 12일 사명에 정박하였다. 이 국가의 풍토와 국사에 대해서는 짧은 기간동안 체류하였기 때문에 비록 상세히 기술할 수는 없지만 주요 특징을 개괄적으로 정리할 수는 있을 것이다.(진랍풍토기 중에서)
11월 19일 아침
어제밤 캄보디아 씨엠립 공항에 도착하여 숙소로 이동하는데 가로등이없다 이곳은 베트남으로 부터 전기를 수입 하기 때문에 전력사정이 좋지 않다고 한다 캄캄한 밤중에 에 들어 주위 환경을 보지 못하였다 아침 아름다운 새소리로 잠에서 깨어 호텔을 보니 너무나 아름다웠다
호텔 로비에서 전통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 캄보디아에 상주하는 우리나라 가이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걸하는 아이들 에게 절대로 돈을 주지마라 공부 안하고 구걸만 한다. 차라리 의복이나 생활 용품을 선물하라 어느 관광객이 통조림을 주었는데 오픈을 못해 애써서 따주었더니 가족에게 달려가 함께 먹 더 라며 우리들이 느끼는 행복 지수 보다 이곳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 지수가 더 높다고 한다.
영양상태가 좋지않아 이나라 평균수명은40세라 거리에는 노인들이 없다한다 그래서 그들은 조혼을 하는데 여자 14세에 대개는 결혼을 한다나 따지고 보면 우리네 일정치하 에서 이상이나 김유정 같은 분들이 30을 갖넘어 타계하셨지 않나 그때 우리네 평균수명이 30였다 하니 감회가 새롭다
드디어 앙코르 톰(거대한 도시 라는 뜻) 입구에 도착하였다 오는 도중에 눈에들어오는 진풍경은 우리나라 자가용차 들이 번호판을 달지 않고 운행하고 있었다 그럼 사고 처리는 어떻게 하는걸까????
모델 1인당 1천원씩 주어야한다 입구에서 적극적인 앙코르 관광에 앞서 모델들이 기념사진 을 유도한다 복장은 힌두교 적인것 같은데 이채로 웠다 외국인들도 우리나라에 오면 한복에 관심이 많을것이다
크메르 제국의 크메르 왕조는 9세기부터 15세기 까지 인도 차이나 반도를 다스린 왕국이다 이 어마 어마 한 역사적 예술품을 보면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이드의 설명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건축 공법이 똑 같고 태양을 깃점으로 한 수학적 오차가 거의 없는 것은 불가사의 한일이다 하였 자야바르만2세(802년 - 854년)는 프놈쿨렌에서 즉위하여 쟈와를 대상으로 한 독립 선언이 앙코르 왕조(크메르제국)의 시작이다.
9세기 말 야소바르만1세가 앙코르에 수도를 건설했다. 113년 수르야바르만2세가 즉위 하여 국내를 통일하고 베트남 남부에 있는 참파 왕국과 베트남의 리왕조 를 공격하였다. 크메르 제국은 영토를 계속 확장하여 왕국의 범위는 타이 중부, 말레이 반도, 베트남 남부에 달하였다. 수르야바르만 2세는 사원 건축에도 열정으로 관심하였는데 크메르 미술의 최고 걸작이고 자신의 무덤이기도 한 앙코르왓트를 시작해 트마논, 반테이 삼르를 비롯한 힌두 사원을 건축했다. 수르야바르만 2세 사후 왕위 쟁탈전이 계속된 데다 1177년에는참파의 대군이 수도인 야소다르프라를 공격하여 파괴했다.
1181년 참파에 원정하던 자야바르만7세(1181년 - 1220년?)가 귀국해 즉위했다. 그는 끈질기고 나라 만들기를 진행시켜 1190년에는 숙적 참파를 항복시켰다. 또한 앙코르돔을 도시로 건설했다. 열렬한 대승불교의 신자인 자야바르만 7세는 앙코르 톰을 중심으로 바이욘 을 건설해 반테이 끄데이,타 프롬 , 프리야 칸 등의 불교 사원을 건설하였다. 또 자야바르만 7세는 국내에 102개에 이르는 병원과 주요 가도에 여인숙을 건설해 서민의 생활도 중시했다. 그러나 대규모 사원건설과 영토 확장을 위한 원정 때문에 그의 사후 국력이 쇠퇴했다고 추측되고 있다. 13세기에 들어 원나라의 침공이 시작되었고, 13세기 후반에는 타이의 아유타야왕조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당시의 포냐얏트 왕은 1431년에 샴(현재의 타이)에서 가까운 앙코르를 방치하였고, 다음 해 샴족이 수도를 점령하게 되자 앙코르의 영광의 시대는 그 종말을 맞았다. 그 후 수도는 현재의 프놈펜이 있는 체드목크 방향으로 천도했고, 앙코르는 유적으로만 남게 되어 밀림에 묻혀 갔다. 앙코르 돔과 바이욘사원 그리고 앙코르와트 14세기 이후 밀림에 묻혀 잊어진 궁전은 주민들에게 거기들어가면 저주가 따른다는 속설이 있어 출입이 금기시되다가 1850년6월 프랑스 신부 뷰오가 발견할 때 까지 정글속에서 잠자고 있었다 발견후에도 프랑스인들이 많은 약탈이 행하여져 옛 영화의 찬란한 문화는 빛을 잃어갔다
거대한 자야바르만 얼굴 조각상 서기 802년(우리나라로 치면 통일신라 중기해당) 자바에서 15년간 인질로 있다가 풀려 난 자야바르만 2세가 수진합.옥진랍 두 개의 진랍국을 병합한 후 최초의 앙코르제국을 건립한다 타국의 침략에 대비해 4곳의 도읍지를 정하고 그 중한곳인 마헨드라 파르바타(지금의 프롬꿀렌)에서 왕은 신이고 신은 곧 왕이다 라는 (데마리자 Devaraja)의식을 거행해 국민들의 지지와 결집을 모아 앙코르 최초 통일 국가를 세운다
이 왕의 재임시의 활동과 국정운영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이 없고 비문에 나타난 내용을 토대로 추정할 뿐이다 850년 앙코르제국의 도읍지인 하리할랄리아(지금의 롤로스유적군) 에 돌아와 숨을 거둔다 850년 앙코르제국의 다음 도읍지인 하리할랄리아(지금의 롤로스유적군) 에 돌아 와 숨을 거둔다.
앙코르 톰은 9km²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며 자야바르만과 그 후대의 왕에 의해 건설된 여러 유적군들이 자리잡고 있다 앙코르 톰의 중심에는 자야바르만의 상이 있는 바이온 사원이 있고 그 위쪽으로 빅토리광장 주변으로 주요 유적군이 자리잡고 있다 주위의 유적군과 함께 세계문화유산 으로 들록되어 있다 앙코르는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로 “도시”라는 의미이다
또한 톰은 크메르어로 “크다”를 의미한다 앙코르톰은 주변 3Km 의 수로와 라테라이트로 만들어진 8m 높이의 성벽에 둘러 쌓여있다 외부에는 남대문 북대문 서대문 사자의문 그리고 승리의문 다섯 개의 문으로 연결되어있다 각성은 탑이되고 있고 동서남북 사방에는 관세음보살이 조각되어있다 또 문으로부터 수로를 연결하는 다리의 난간에는 나가의 상이 조각되어 있고 이나가를 당기는 아수라와 기타 신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앙코르 톰의 중앙에는 바이욘 사원이 있고 그 주변으로 코끼리 테라스 문둥왕의 테라스 프레아피토우등의 유적이 남아있다
피미아나까스(Phimeanakas)
10세기 후반-11세기 초반 라젠드라바르만 2세가 축조하였다 이곳은 아늘위의 왕궁이라는 뜻으로 왕궁내부의 왕실을 위한 사원이었다 원나라의 사신이었던 주달관(周達觀) 기록에 의하면 이사원의 꼭대기 에는 황금으로 만든 뾰족탑이 있었다 한다. 이곳은 다른사원에 비해 작지만 매력적인 건물로서 주변에 아름다운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다
라젠드라바르만 2세가 건축을 시작하여 그 다음대의 왕에 가서도 계속 건축되었던 것 같으며 11세기의 수리아바르만1세에 와서는 가장 중요한 사원이되었다
이사원에는 9개의 머리를 가진 뱀의 정령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이뱀이 여자로 변신하여 왕이 그의 황후와 후궁들과 동침하기 전 이뱀의 정령과 동침하였다는 것이다 만일 하루라도 빠트리는 일이 있으면 죽게될것이라 믿었다 이렇게 하여 크메르 왕가의 혈통에는 신성한 뱀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전해져왔다
피미아나까스는 동쪽에 코프라(입구탑)가있다 이입구의 기둥에는 크메르 제국에 대한 충성 서약의 글이 자세하게 음각되어 있다 조금더 서쪽으로 들어가면 층을 이룬 피미아나까스 사원이있다 사원은 벽으로 둘러져 있고 해자도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상인방의 중앙에는 “깔라”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으며 창문틀에는 글이 새겨져있다 피미아나까스의 북쪽 옆에 왕과 왕비를 위한 목욕탕이 나온다 주변에 나루다 다가와 조각상이 있다
3단(층) 라테라이트 층위에 1개의 탑이 서 있는 중앙사원은 사방에 높고 가파른 계단이 있다 이 계단들은 한계단에2개씩의 돌출된 사자형상이 새갸진 벽으로 싸여있다 기초부분의 코너에 있는 보도에는 사암으로 만든 코끼리가 있었다
꼭대기의 테라스에서 웅장한 바푸원 사원의 모습이 보인다 상층테라스의 갓 부분에는 창문과 난간이 있는 사암으로 만든 회랑이 있는데 매우 독특한 건축기법으로 평가된다고 한다 코너에는 별채정자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터만 남아있다
바이욘(Bayon)은
캄보디아 앙코르 유적군 중의 하나로, 힌두교 불교 혼합의 사원유적이다. 앙코르 톰의
중앙 부근에 자리잡고 있다. 바이욘의 호칭은 여러 가지로 불리고 있지만, 크메르 발음으로는 바욘 쪽이 더 가깝다. 바는 '아름답다'는 의미이고, 욘은 '탑'을 의미한다. 바이욘은 앙코르에서 세운 마지막 국사이자,대승불교 의 사원으로 부처에게 봉헌된 유일한 사원이다. 이곳 바이욘은앙코르 왕조의 중흥을 주창한 자야바르만7세가 참파에 대한 전승을 기념하여 12세기 말부터 조성에 착수했다고 추측된다.축조된 돌이나 여러 흔적에서 여러 왕 대에 걸쳐 조금씩 건설되었다고 추측된다. 당시는 대승불교 사원이었지만, 후에 앙코르 왕조에 힌두교가 유입되면서 사원 전체가 힌두교화 되었다.
이것은 건축물 부분에 불상을 제거한 흔적이나 힌두교의 신상 등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1933년 프랑스 극동학회의 조사에 의해 중앙 사원에서 부처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자야바르만 7세는 거대한 건축군들을 세웠는데, 그 중심이되는 것이 바이욘이었고, 성벽과 나가가 있는 앙코르톰의 다리와 프레아칸의 사원군과 타 프롬, 반테이 끄데이 등의 사원을 세웠다. 사원의 탑에 있는, 200여개의 거대한 얼굴상들의 유사성은 자야바르만 7세 자신의 얼굴이라는 추측하고 있다.
혹자는 관세음보살의 얼굴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바이욘사원은 불교양식에 의해 지어진곳이고 설립목적이나 설계 건축 장식에 있어 뚜렷한 차이점을 가지고 지어졌으므로 바이욘과 앙코르와트를 잘비교해 보면 불교와 힌두교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바이욘 사원을 건축한 자야바르만7세 앙코르 왕가 출생이며 자야라자데비 공주와 결혼했다. 그녀는 신심이 깊고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로 자야바르만 7세가 왕위에 오르기 전과 재위 초에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가 죽자 자야바르만 7세는 그녀의 언니와 결혼했다. 언니 역시 신심이 깊었으며 학식이 있어 이전에 그녀는 불교사원의 수석교사로 임명된 적이 있다. 자야바르만 7세의 어린시절과 청년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현재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참파 왕국 근처에서 살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의 아버지 다란인드라바르만 2세(1150~60 재위)가 사망했을 당시 그는 참파에서 군사 원정중이었으며 그의 형(사촌인 듯함) 야소바르만 2세(1160~66 재위)가 즉위하자 자야바르만 7세는 참파에 그대로 남았다. 뒤에 그는 궁정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캄보디아로 돌아왔으나 너무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트리부바나디티아바르만(1166~77 재위)이 야소바르만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막지 못했고, 고향에 머물면서 왕위를 계승할 기회를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약 12년 후 자야바르만 7세가 50대 후반이 되었을 때 참파 왕국이 침입하면서 그 기회가 생겼다. 참파의 침입으로 트리부바나디티아바르만은 죽고 앙코르는 약탈당했으며 참파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자야바르만 7세는 독립을 위한 투쟁을 전개했고 5년이 채 못 되어 침략자를 내몰았으며 캄보디아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1181년 그는 드디어 61세의 나이로 그는 재건된 크메르 제국의 왕위에 올랐으며 30년에 걸친 황금의 치세가 시작되었다. 이 기간에 제국은 그 영역 판도나 왕실 건축 분야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건설사업 자야바르만 7세는 재위 동안 정복사업을 계속 벌여 참파, 남부 라오스, 말레이 반도와 미얀마 일부를 그의 지배하에 두었다.
그러나 그는 점차 자신의 정력이나 조직 능력을 선대의 왕들이 해왔던 종교적·정치적 건설사업에 쏟았다. 그는 바욘을 비롯한 많은 멋진 사원을 새로 건립했다. 사원은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대승불교식 피라미드 사원으로서 왕실신앙의 중심점이자 자야바르만
자신의 능묘로 지은 대승불교식 장례사원으로 자야바르만의 부모에게 헌정되었다.
수많은 지방 사원에는 부처의 상징과 함께 자야바르만 7세를 묘사한 왕실 불상의 축소 모형을 두었는데, 그 원형은 바욘에 안치했다. 그는 현재의 앙코르 톰인 앙코르 시를 재건했고 간선도로도 확대하여 도로는 바욘과 왕국으로부터 각 지방으로 뻗어나갔다.
이 도로들을 따라서 100개 이상의 휴양소가 지어지고 100개 이상의 병원이 만들어졌다.
자야바르만 7세는 왕국의 전역에 병원들을 설치하고 질병을 치료하는 위대한 부처인 바이샤지아구루 바이두리아프라바의 가호 아래 두었다. 그의 시대에 건설된 사원들에서 치밀하지 못한 부분이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자야바르만 7세는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건설사업을 진행하는 데 집착했던 것 같다. 어떤 학자들은 자야바르만 7세가
사원 건설에 조급한 마음을 가졌던 이유는 그가 많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부족한
시간이나마 효율적으로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한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또다른 학자들은 대부분 불교건축물인 방대한 건설계획은 불교, 특히 불교사원 건축에 큰 노력을 기울였던 아내 자야라자데비와 그녀의 언니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자야바르만 7세가 나병환자로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학자들의 추측이 맞는다면 자신의 죄를 덜고 공덕을 쌓음으로써 두려움을 이겨내겠다는 마음이 그의 신심과 종교적 열정에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의 진짜 동기가 무엇이었든지 자야바르만 7세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후손에게 물려줄 유산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크메르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도 자야바르만 7세가 이룩한 정도의 업적을 남긴 왕은 거의 없다. 현대의 명성 앙코르 왕국의 역사에서 자야바르만 7세가 그토록 중요한 인물이었는데도 후대 캄보디아 역사책에는 그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근대에는 그의 치세에 해당하는 시기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가 흥미를 끌면서 자야바르만 7세는 모범적인 민족영웅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캄보디아 국가 영토를 가장 넓게 확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불교의 영향으로 복지국가를 건설하여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캄보디아인들의 욕구를 충족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야바르만 7세에 대한 학자들의 평가는 보다 공정하다. 학자들은 자야바르만 7세가 성취한 거대한 업적을 인정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왕조의 인적·물적 자원을 과도하게 소모했기 때문에, 이후에 크메르 제국이 창조성을 상실하고 마침내 몰락하게 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코끼리 테라스는 사원과 황제가 군대를 사열하던 연병장을 가로질러 직선으로 태국까지 대군단과 전차가 달릴수 있는 고속도 같은 길이 관통하는 광장이 있었다
코끼리 테라스의 사자상 황금은 어디로?? 황제옥좌 를 보좌하는 사자상이 위용을 자랑하는데꼬리가 없다 황금으로 치장되어 프랑스 사람들이 모두 약탈하여 갔기 때문이란다
코끼리 테라스(Terrace of the Elephants)
코끼리 부조가 실제 크기로 약 300m 정도 부조되어 있는 코끼리 테라스는 왕이 외국 사신을 만나거나 전쟁을 나가는 군인들의 출정식을위한 사열대와 환영 행사, 코끼리 부대의 설전 훈련 등 국가의 공식적인 행사를 하던 곳이다. 그래서 중앙 테라스에는 나상, 사자상, 가루다가 왕을 호위하듯 새겨져 있다. 지금은 기단만 남아 있지만, 300m 정도 되는 테라스를 따라 코끼리가 부조되어 있어 코끼리 테라스라고 부르고 있다. 코끼리 부조는 실제 크기로 매우 사실적으로 부조되었다. 코끼리 테라스 중앙에 있는 동쪽문은 피미아나카스라는 왕궁 사원으로 통하는 주 출입문이었다.
12세기 후반에 자야 바르만 7세가 바이욘 양식으로 만들었다. 끝없이 무리지어 행진하는 코끼리떼를 따라 마냥 쪼옥 뻗은 길다란 테라스는 왕궁의 주 출입구인 동문 바로 바깥에 위치하며 이곳 역시 왕궁에 부속된 로열 가든이었다. 동시에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테라스 앞은, 길 건너 까마득한 저편 쁘라삿 수오르 쁘랏까지 넓은 평지가 펼쳐진다."왕의 광장"이라 불리는 이곳은 평소에는 정원으로 사용되지만 외국 사신을 영접하거나 국가의 공식행사, 군대사열, 전투에 출정하는 군대를 전송하거나 귀환한 군대를 환영하는 등 왕이 일반 군중과 접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신에게 바치는 서사시부터 국왕의 행렬 전쟁의 기록 힌두교 신화까지다양한 철학과 역사가 새겨져잇는 앙코르와트의 벽면은 존재 그자체만으로도거대한 역사서와 다름이없다 그내용을 천천히 보아도 화려했던 왕조의 과거가 그려진다
Terrace of the Leper King (레퍼)와의 테라스는 코끼리 테라스의 북쪽에 위치한다 크메르 신화인 문둥이(라이왕)의 주인 조각상을 모신것에서 이런 이름을 붙혔다 전설에 의하면 어떤왕이 밀림에서 뱀과 싸우다가 피가튀어 문둥병에 걸렸다고 한다 이족각은 복제품이고 진품은 프놈펜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오른손과 왼발이 온전치 못한 것이 문둥병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레퍼왕의 테라스 [Terrace of Lepper King] 코끼리테라스의 북쪽에 위치한다. 크메르 신화인 '문둥병(라이) 왕'의 주인공 조각상을 모신 것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전설에 의하면 어떤 왕이 밀림에서 뱀과 싸우다가 피가 튀어 문둥병에 걸렸다고 한다. 이 조각은 복제품이고 진품은 프놈펜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오른손과
왼발이 온전치 못한 것이 문둥병자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코끼리 테라스의 부조가 실물크기의 거대한 조각이라면 문둥왕 테라스의 부조는 아기자기한 멋이 있다. 7단의 벽돌을 쌓아 올린 벽에는 양각 기법의 섬세한 부조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데 인체의 굴곡이 확연하고 악마나 인간, 압사라(천녀)들의 표정 또한 희노애락의 감정이 분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선명하다. 어느 하나 동일한 것이 없는 부조 감상은 즐겁다. 대개 힌두 신화에 등장하는 나가(뱀), 가루다(독수리), 악마, 칼을 든 무시무시한 인상의 악마, 육감적인 여인, 압사라 등등을 볼 수 있다.
코끼리 테라스에서 앙코르 왕조의 찬란한 영광에 감탄할 때 함께 느끼는 감정은 구걸하는 애처러운 연약한 아이들이다 소매를 잡고 애원하는 피골이 상접한 아이는 물이라도 달란다. 벌린 입속으로 물을 먹이는데 보석이 외쳤다 통째로 주세요 그냥 주세요 !!통째로 주었다. 아!!!!! 그 위대한 영광은 어디로 ??????????? 폴 포트의 잔인한 학살로 6백50만 인구 중 3백만을 죽였다한다.
관광객을 위한 코끼리 행진 12세기 그 영토가 어디까지 인지 조차 분명치 않다는 대단한문명은 기후조건이 항상 일정하여 그림으로 그려진 조각하나 하나가 너무나 선명하다 약방과 시장 전투 천국과 지옥 罪와罰 대한 너무나 생생한 문양들은 12세기에 사람들과막 대화를 하는 기분이다 거대한 유적 대부분 보석으로 빛났으나 목이 잘려나간 좌상들이 많다 그것은 프랑스 사람들이 탈취해서 르브르 박물관을 치장한 때문이다.
웅장한 유적지중 쟈야바르만 7세가 문둥 병 걸린 어머니를 위해 신축했다는 궁전은 자연이 유적을 어떻게 파괴해 나가 나를 적 나라 하게 보여주는 곳이다
궁전 내부에서 보는 하늘빛 문둥병 어머니를 위한 궁전이라 햇볕이 골고루 들어오게 하였다 유네스코에서 이곳은 복원을 안 하고 그대로 방치하기로 했단다. 입구에서 팔다리 짤린 장년들이 그들의 악기로 아리랑을 연주하고 있었다. 앞엔 부상당한 군인들 이란 명패를 한국어로 부착 한 채로
수리야바르만 2세
12세기 초 롭부리Lopburi지방에서 왕족으로 태어난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지혜롭고 총명했고 용맹했다. 거기다 장차 이 나라의 왕이 되겠다는 야망도 있었다. 1113년, 드디어 쿠데타를 일으켜 그의 백부인 다닌드라바르만 1세 (Dharanindravarman I )를 죽이고 17세 어린나이에 명실상부한 통일 크메르제국의 군주로 등극한다. 역사는 조카가 백부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그날의 참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코끼리에 올라 왕을 살해했다. 가루다Garuda가 뱀을 습격하여 살해한 것과 같았다>. 이 젊은이가 바로 앙코르왕조의 수리야바르만2세 (재위 1113~50경)이다.
왕이 된 그는 이제까지 모시던 힌두의 시바Shva 신 대신, 비슈누Vishnu 신을 모시고, 비쉬누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강력한 신권정치로 나라를 평정해 나가기 위해 위대하고도 불가사의하며 세계 최고의 아름답고 웅장한 사원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그 대역사는 30여년에 걸쳐 그의 재위 시대를 지나 다음 왕 시대에 완공 되었다. 최초 그 사원의 힌두의 신 비쉬누에게 봉헌 되었으나 나중에는 불교 사원으로 사용 된다. 그 사원이 바로 인류가 남긴 위대한 건축물 유산인 앙코르왓트 사원이다. 앙코르 왕조는 890년경 야소바르만 1세가 수도를 앙코르로 옮긴 때부터 13세기초까지 앙코르의 왕들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끝 부분에서 북쪽으로 윈난까지, 또 베트남에서 서쪽으로 벵골만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이곳 앙코르와트가 있는 앙코르 시는 크메르 제국의 중심지인 이곳은 동남아시아 역사상 가장 크게 번성하고 발달한 왕국이었다. 크메르 민족의 독특한 문화양식으로 전성기를 이룬 고대국가 앙코르는 1431 년, 타이 아유터이왕조의 침략으로 400여년이 넘게 역사의 중심에서 사라지게 된다.
돔에서 약 1.7km 떨어진 앙코르 왓트 (도시의 사원이라는 뜻) 는 12세기에 건축 되었고 불교와 힌두교 를 병행하며 사원으로 써서 섬세하고 정교한 예술적 미적 감각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거대한 곳이 어떻게 긴 시간 잠자고 있었을까?? 그것은 현지인들에겐 들어가면 죽음을 뜻하는 전설로 이어져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란다. 정글에 갇혀 있던 이거대한 사원은 프랑스인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되는데
가이드가 호수의 다리를 건너기전 하는 말이 불순한 기운을 쫒기위해서 신발을 벗고 땅에 세번을 두둘기고 들어가라는 말에 일행들은 그의 말에 순종하였다
커다란 돌 하나로 만들어진 뱀신 “나가”는 머리부터 꼬리까지 하나의 돌로만들어 졌다나가는 인도 신화에서 대지의 보물을 지키는 반(半)신격의 강력한 힘을 소유한 뱀이다 나가는 산스크리트어로 뱀 특히 코프라등 맹독을 가진 독사를 가르키는 말이다 앙코르 제국의 종교는 힌두교로 힌두교의 신은 3억3천만명으로 추정 하고 그중 힌두교의 3대 주신은 창조의 신인“브라하마”유지의신“비뉘스” 파괴의신 “쉬바”가 있다 인간은 태어나서 창조 즉 브라하마 신에 의해 살아가다가 생을 유지하는 “ 쉬누“ 신을 만나고 이어 죽음을 맞는 파괴의 신 “쉬바”를 만나다고 이들은 믿었다 이중 파괴는 불교의 윤회의 원리와 같이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다
앙코르 왓트 전면 내면으로 들어가면 불상도 같고 힌두교 다신같은 불상 들이 모셔져있고승려 들이 곳곳에 붉은 승려복을 입고 서있다
우측 옆 회랑을 도는데 긴 복도에 조각된 수많은 부조가 나타났다. 천국과 지옥 죄와벌 그중 혀를 뽑는 형상 긴 전투장면은 12세기의 대서사시 였다 지금은 비록 칙칙한 회색으로 퇴색되어 있지만 수세기 동안 화려한 금과 화려한 오색으로 천장과 기둥 벽화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하니 그화려함과 웅장함이 가히 짐작이 되었다
힌두교 적 문양이 새겨져있는 부조와 조각상은 신에게 바치는 서사시부터 국왕의 행렬 전쟁 기록 힌두교 신화까지 다양한 철학과 역사가 새겨져잇는 앙코르와트의 벽면은 존재 그자체만으로도 거대한 역사서와 다름이없다 그내용을 천천히 보아도 화려했던 왕조의 과거가 그려진다
앙코르 와트 후면
오로지 신만을 위해 지어진 사원은 70도 경사 게단 13m 쯤되는 까마득한 높이 3층으로 오르는 길은 직벽 과도 같아서 지원자만 올랐다 바위를 탈 때 보다 더 공포가 엄습 해 왔다. 계단 폭도 좁고 미끄러워 힘드는데 의외로 여성분들과 고령의 노신사가 오르기를 지원한다 신과 가까워 지려면 험란한 계단을 올라야한다 제일 상층엔 기도실 안에 붉은 승려복장의 몇명의 승려들이 수련을 하고있다
앙코르 왓트 정상 기도실 에서
좌측 계단을 타고 내려온다 그또한 급경사로 순례를 마치고 나니 다리가 후들거렸다그 옛날엔 나같은 평민은 감히 꿈도 꾸지 못했을 신과의 만나는 최고 높은 기도실을 보았던 것이다
앙코르와트 뒷뛸 은 너무나 서정적이여서 기도실오르기전 우리일행들이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인도 차이나 반도를 주름잡던 대제국 뒤에 철저히 몰락해 간 크메르인 들을 보며 내 인생의 한올의 삶속에 부질없는 욕심과 욕망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일까!!!!! 나의 삶은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들은 어디로 살아졌나???? 이 건물을 지은 사람은 수야바르만 2세라 한다. 榮華 그들은 어찌 이토록 처절하게 몰락했을까?? 이들의 역사는 기록이 없는데 가이드들은 어찌 아는가?? 원나라 사신 주달간이란 사람의 견문록에서 근거로 했다한다.
眞臘風土記 에 기술된 내용은 때로는 충격적이다 그시대 흥미 진진한 풍속 중 사람의 쓸개를 채취하는 장면이다 오로지 의식적인 왕에게 바치기위한 쓸개채취 거리를 헤메는 밤길 여지없이 검은 보자기에 쒸워저 쓸개가 빨린다........ 문둥병이 성행한 그곳 민약 처방이었을까????????
초등학교 시절 보리밭에 숨어 있다 쓸개를 빼간다는 무서움에 ??
떨던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다............2시간 거리로 이동하였다
앙코르 돔 에 입장할때 팔 다리가 부상당한 퇴역 군인들이
우리나라 아리랑을 연주하며 온정을 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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