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선덕여왕
신라 27대 왕으로서 성은 김(金)이고, 휘(諱;임금의 이름)는 덕만(德曼)이며,
호는 성조황고(聖祖皇姑)이다. 시호는 선덕이다.진평왕 의 맏딸이며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이다.
진평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백성들의 옹립으로 632년 왕위를 계승하였다.
632년 2월 대신 을제(乙祭)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5월부터 가물다가 6월
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10월에 왕은 각지로 사람을 보내어 홀아비와 홀어미,
고아와 자식없는노인 등 혼자 힘으로 생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문하고 구제하여
주었다. 12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633년 정월에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지내고, 크게 사면하였으며 여러 주·군(州郡)
의 1년간 조세[租調]를 면제해 주었다. 2월에 서울에 지진이 일어났다. 7월에 당나라
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8월에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634년 정월 연호를 인평(仁平)이라 고치고 분황사(芬皇寺)를 창건하였다.
3월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밤만 하였다.
635년 당나라가 사신을 보내 부절(符節)을 가지고 왕을 주국(柱國)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책봉하여 아버지의 봉작(封爵)을 잇게
하였다. 영묘사(靈廟완성되었다. 10월에 이찬(;2등급) 수품(水品)과 용수(龍樹)
<또는 용춘(龍春)이라고도 하였다.>
를 보내 주·현을 두루 돌며 위문하였다.
636년 정월에 이찬(;2등급) 수품을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3월에 왕이 병들었는데,
의원을 불러 약을 쓰고 기도를 올렸으나 효력이 없었다. 황룡사에
백고좌회[百高座會;《인왕반야경
(仁王般若經)》을 읽으면서 국가의 안위를 기원하는 불교 법회를 말함]를 마련하고 중
을 모아 인왕경을 읽게 하였으며, 1백 명의 사람들에게 중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5월에두꺼비와 개구리가 떼를 지어 궁성의 서쪽 옥문지(玉門池)로 모여들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신하에게,"두꺼비와 개구리는 눈의 생김이 성난 것 같으니,
이것은 군사들의 모습을 닮은 것이다. 내가 일찌기 서남쪽 변방에 옥문곡이라는
골짜기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들의징조를 보니 반드시 백제군이 몰래 그곳에
침범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장군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이를 수색하여 무찌르게 하였다.
알천 등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보니, 과연 왕의 말과 같이 백제의 장군
우소(于召)가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기 위하여 5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옥문곡에
숨어 있었다. 알천 등은 적을 습격하여 이를 쳐부수었다.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불법(佛法)을 배우러 당나라에 들어갔다.
637년 정월에 이찬(;2등급) 사진(思眞)을 서불한(舒弗邯)으로 삼았다. 7월에
알천(閼川)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638년 3월에 칠중성(七重城) 남쪽의 큰 돌이 저절로 35보(步) 옮겨갔다. 9월에 누런
꽃이비처럼 내렸다. 10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칠중성을 침공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놀라고동요하여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왕이 대장군 알천(閼川)에게 명하여 그들을 안정시키게 하였다.
11월에 알천(閼川)이 고구려 군사와 칠중성 밖에서 싸워 이겨,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639년 2월에 하슬라주(何瑟羅州)를 북소경(北小京)으로 삼고 사찬(;8등급) 진주(眞
珠)에게 명하여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7월에 동쪽 바닷물이 붉게 되고 또 더워져
물고기와자라가 죽었다.
640년 5월에 왕이 자제들을 당나라에 보내 국학(國學)에 입학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이때[당] 태종(太宗)은 천하의 이름난 유학자를 많이 불러 모아 학업을 가르치는
관원(官員)으로 삼고, 자주 국자감(國子監)에 들러 그들로 하여금 강론케 하였다.
학생으로서 대경(大經) 가운데 하나 이상에 능통한 사람은 모두 관직을 맡을
수 있도록 하고, 학사(學舍)를 1천2백 칸으로 늘려 지었으며 학생을 늘려
3,260명에 차게 하니, 사방에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경사(京師)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에 고구려, 백제, 고창(高昌), 토번 역시자제들을 보내 입학시켰다.
642년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7월에 백제의 의자왕에
게 미후성 등 40여 성을 빼앗겼다.
이어 8월에 백제가 고구려와 모의하여 당항성(唐項城)을 빼
앗아 나당(羅唐)의 통로를 끊어버리자 여왕은 이 사실을 당나라에 호소하였다.
그리고같은달에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를 이끌고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도독 이찬(;2등급) 품석(品釋)과 사지13등급) 죽죽(竹竹)·
용석(龍石) 등이 죽었
다. 겨울에 왕이 장차 백제를 쳐서 대야성에서의 싸움을 보복하려고 하여,
이찬(;2등급)
김춘추 金春秋 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를 청하였다. 처음 대야성이
패하였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이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얼마가 지나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하고는
,
곧 왕을 찾아 뵙고 “신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게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라 말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고구려 왕 고장(高臧)[보장왕은
평소 춘추의 명성을 들었던지라 군사의 호위를 엄중히 한 다음에 그를 만나 보았다.
김춘추가 말하였다
.
"지금 백제는 무도하여 긴 뱀과 큰 돼지[長蛇封豕]가 되어 우리 강토를 침범하므로,
저희 나라 임금이 대국의 군사를 얻어 그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그래서 신하인
저로 하여금 대왕께 명을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고구려 왕이 말하였다.
“죽령(竹嶺)은 본시 우리 땅이니, 그대가 만약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내보낼 수 있다.”
춘추가 대답하였다
"신은 임금의 명을 받들어 군대를 청하는데, 대왕께서는 어려운 처지를 구원하여 이
웃과 친선하는 데는 뜻이 없고 단지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 줄 것을 요구하십니
다.신은 죽을지언정 다른 것은 알지 못합니다."
고장(高臧)[보장왕이 그 말의 불손함에 화가 나서 그를 별관(別館)에 가두었다.
춘추가 몰래 사람을 시켜 본국의 왕에게 알리니, 왕이 대장군 김유신(金庾信)에게
명하여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 유신이 행군하여 한강(漢江)을
넘어 고구려남쪽 경계에 들어가니
고구려 왕이 이를 듣고 춘추를 놓아 돌려 보냈다. 유신을 압량
주(押梁州) 군주로 삼았다.
643년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3월에 당나라에 들어가 불법
(佛法)을 배우던 고승 자장(慈藏)이 돌아왔다. 9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구려와 백제가 저희 나라를 침범하기를 여러 차례에 걸쳐 수십 개의 성을 공격하
였습니다.
두 나라가 군대를 연합하여 기필코 그것을 빼앗고자 장차 이번 9월에 크게 군사
를 일으키려고 합니다.
그러면 저희 나라의 사직은 반드시 보전될 수 없을 것이므로, 삼가 신하
인 저를 보내 대국에 명을 받들어 올리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약간의 군사를 내어
구원해주십시오.태종(太宗)이 사신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의 나라가 두 나라로부터 침략받는 것을 매우 애닯게 여겨 자주 사신을
보내 너희들 세 나라가 친하게 지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는
돌아서자마자 생각을 뒤집어 너희 땅을 집어삼켜 나누어 가지려고 한다. 그대
나라는 어떤 기묘한 꾀로써 망하는 것을 면하려고 하는가?
사신이 대답하였다.
“우리 왕은 일의 형편이 궁하고 계책이 다하여 오직 대국(大國)에게 위급함을 알려
온전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에 황제가 말하였다
"내가 변방의 군대를 조금 일으켜 거란과 말갈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곧장
쳐들어가면그대 나라는 저절로 풀려 1년 정도의 포위는 느슨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후 이어지는 군대가 없음을 알면 도리어 침략을 멋대로 하여 네
나라가 함께 소란해질 것이니,그대 나라도 편치 못할 것이다.
이것이 첫번째 계책이다. 나는 또한 너에게 수천 개의 붉은 옷과 붉은 깃발을
줄 수 있는데, 두 나라 군사가 이르렀을 때 그것을 세워
진열해 놓으면 그들이 보고서 우리 군사로 여겨 반드시 모두 도망갈 것이다.
이것이두번째 계책이다. 백제국은 바다의 험난함을 믿고 병기를 수리하지 않고
남녀가 어지럽게 섞여 서로 즐기며 연회만 베푸니, 내가 수십 수백 척의 배에
군사를 싣고 소리없이 바다를 건너 곧바로 그 땅을 습격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대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고 있으므로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게 되고, 임금의 도리를 잃어 도둑을불러들이게 되어 해마다
편안할 때가 없다. 내가 왕족 중의 한 사람을 보내 그대 나
라의 왕으로 삼되, 자신이 혼자서는 왕노릇을 할 수 없으니 마땅히 군사를 보내
호위케 하고, 그대 나라가 안정되기를 기다려 그대들 스스로 지키는 일을
맡기려 한다.
이것이 세번째 계책이다. "
그대는 잘 생각해 보라. 장차 어느 것을 따르겠는가?
사신은 다만 “예”라고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황제는 그가 용렬[庸鄙]하여 군사를
청하고 위급함을 알리러 올 만한 인재가 아님을 탄식하였다.
644년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태종이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을 보내 조서를 가지고 가서 고구려에 주어 말하였다
신라는 우리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기고 조공을 빠뜨리지 않으니, 너희 백제는 즉시
군사를 거둠이 좋을 것이다. 만일 또 다시 그를 공격한다면 내년에 반드시 군사를
내어 그대 나라를 칠 것이다.
그러자 [연(淵)]개소문(蓋蘇文)이 현장에게 말하였다.
고구려와 신라가 원한으로 사이가 벌어진 것은 이미 오래 되었다.
예전에 수나라가
잇달아 침입하였을 때 신라가 그 틈을 타서 고구려의 500리 땅을 빼앗고 성읍을 모
두 차지하였으니, 땅을 돌려주고 성을 반환하지 않으면 이 전쟁을 아마 그치지 않을
것이다.
현장이 “이미 지나간 일을 어찌 거슬러 올라가 논할 것까지 있습니까?”라고
말하였으나, 연개소문은 끝내 따르지 않았다. 9월에 왕이 김유신(金庾信)을
대장군으로 삼아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쳐서, 크게 이겨 일곱 성을 빼앗았다.
645년에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유신이 백제를 치고 돌아와 아직
왕을 뵙지도 않았는데, 백제의 대군이 또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왕이 명하여 막게 하였으므로 유신은 마침내 집에 이르지도 못하고 가서 이를
공격하여 깨뜨리고 2천 명을 목베었다. 돌아와 왕에게 복명하고 아직 집에
돌아가지 못하였는데,
또 백제가 다시 침입해 왔다는 급한 보고가 있었다. 왕은 일이 급하다고 여겨
[유신에게]말하였다.
“나라의 존망(存亡)이 공(公)의 한 몸에 달렸으니 수고로움을 꺼리지 말고 가서 이를
도모 해 주시오.” 유신은 또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밤낮으로 군사를 훈련하여 서쪽으
로 가는길에 자기 집 문 앞을 지나게 되었다. 집안의 남녀 사람들이 멀리서
바라보며 눈물을흘렸으나 공은 돌아보지 않고 갔다. 3월에 황룡사탑을
창건하였는데, 이는 자장(慈藏)의요청에 따른 것이다.
여름 5월 [당] 태종(太宗)이 몸소 고구려를 정벌하였으므로
왕이 군사 3만 명을 내어 그를 도왔다. 백제가 그 빈틈을 타서 나라 서쪽의
일곱 성을 쳐서 빼앗았다.
11월에 이찬(;2등급) 비담(毗曇)을 상대등 으로 삼았다
.
647년 정월에 비담(毗曇) ·염종(廉宗) 등이 여왕의 무능을 구실로
모반하였으나 곧 진압했다. 그리고 정월 8일 여왕이 신병으로 후사없이 죽어,
유언에 의해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
그 뒤를 이어 선덕여왕의 4촌이며 진평왕(眞平王:재위 579-632)친동생
갈문왕 국반(國飯)의 딸이 진덕여왕 이 되었다.
조선 문정왕후
인종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의 장남으로 장경왕후 윤씨의 아들로 재위
기간이 겨우 8개월에 불과했다.인종실록에는 "인종이 부왕의 죽음을 너무 슬퍼한 나머
지 병을 얻어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그러나 많은 사가들은 인종이 독살됐다고 주
장하고 있고 그 범인으로 문정왕후를 지목하고 있다.
문정왕후는 누구인가?
문정왕후는 인종의 계모로 조선역사상 최고의 여성 독재자로 잘 알려져있다.
문정왕후가 아들을 낳았을 때는 이미 인종이 장성해 있던 상태였다.
특히 문정왕후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소윤은 인종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대윤과 사사건
건 대립하던 사이였고, 인종이 왕위에 오른 후 문정왕후의 세력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그러나 인종이 왕위에 오른지 8개월만에 후사도 없이 사망하고 문정왕후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그 때 왕위에 올랐던 명종의 나이는 불과 12세였고, 문정왕후는 수렴
청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죽을 때까지 아들이었던 명종을 휘어잡고, 조선
의 정치를 좌지우지하게 된다.
문정왕후는 을사사화를 일으켜 정적을 제거했고,
당시 조선의 기본 기조였던 숭유억불 정책을 뒤업고 불교를 중흥시키는 정책을 펼치기
도 한다.특히 관노의 딸이었던 정난정에게 정경부인의 작호를 내린 것은 문정왕후가
얼마나 큰 권력을 가졌는지 알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렇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문정왕후에게 역사의 평가는 냉혹했고, 인종실록에
있는 정황을 근거로 인종의 독살설은 끊임없이 재기된다.
문정왕후 통치시절 조선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고, 문정왕후 사후 명종
다음 왕이었던 선조때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도 한다.
외적 임꺽정이 활약했던 시절이 이 시절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문정왕후의 평가는 냉혹하기 그지없다.그러나 문정왕후 시대 때
가 조선 불교의 최대 중흥기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문정왕후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보우대사는 봉은사 주지를 맡으며 불교중흥을 이끌어 낸다. 문정왕후
시기 강제통합되었던 선종, 교종을 부활시켰으며, 도첩제에 따라 2년 동안 4,000여
명의 승려를 뽑아 관직에 앉힌다. 특히 보유가 주지로 있는 봉은사 근처로 중종의
능을 이장시키면서 불교 중흥의 정점을 찍는다. 이 도첩제로 임진왜란의
영웅이었던 사명대사가 뽑히기도 했다.
이러한 문정왕후가 정말로 인종을 독살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문정왕후가 피를
많이 묻히면서 권력의 정점에 섰고, 그 가능성에 무게를 둘 뿐이다.
그리고 인종이 일찍 죽지 않았다면 조선이 강력한 국가가 되어있었을까?
어쩌면 문정왕후가 그 권력을 조선의 국력을 강화하는데만 썼더라면 그렇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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