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조지훈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섬긴별이
하나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뒤에
머언산이 다가서다
촟불을 꺼야하리
꽃이 지는데
꽃지는 그림자
틀에 어리어
하이안 미닫이가
우련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마운 마음을
아는이 있을까
저어 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청록파 시인 조지훈(芝薰) 선생의 본명은 동탁이다.
선생은 천수를 다 누리지 못하고 48세에 이슬처럼 떠났다.
하지만 짧은 생애임에도 겨레에게는
주옥같은 글을 제자들의 마음속에 '참 선비 상’을 남긴 분이다.
선생의 강의는 동서고금의 이야기가 산만한 듯하면서도
조리가 있고, 우스개 소리임에도 해학과 지혜로움이 있었다.
그 분의 강의에는 음담패설도 자주 등장했다.
다음은 . . .
號인 지훈(芝薰)의 유래에 대해 선생이 스스로 밝힌 내용.
내 호가 처음에는 지타(芝陀)였지.
마침 여학교 훈장(경기여고)으로 갔는데,
내 호를 말했더니 학생들이 얼굴을 붉히더군.
그래서 곰곰히 생각하니. . .
<지타>라는 號야 아주 고상하지만,
성과 합성하니까, 발음이 <조지타>가 되는데
걔네들이 내 호에서 다른 무엇(?)을 연상했나 봐.
그래서 할 수 없이 "지훈" 으로 고쳤어."
다음은 선생이 강의 중에 든 예화이다.
옛날에 장님 영감과 벙어리 할멈이
부부로 살았는데, 마침 이웃집에 불이 났어
할멈이 화들짝 방으로 뛰어 들어 오자,
영감이 “무슨 화급한 일이냐?”라고 물었어.
할멈은 영감의 두 손으로 자기 젖무덤을 만지게 한 후,
가슴에다 사람 인(人) 자를 그었대.
그러자 영감이 “불났군?”하면서
“누구네 집이야?”라고 다급하게 물었지.
그러자 할멈은 영감에게 입맞춤을 했대.
그러자 영감은
"뭐? 여(呂)씨 집이!"라고 하면서 놀란 후,
"그래, 어느 정도 탔나??" 라고 물었다나.
할멈은 영감의 남근(男根)을 꽉 잡았대.
그러자 영감은
"아이고, 다 타고 기둥만 남았군."했다더군.
그러면서 선생께서는
학생들에게 한자의 파자에 대해 질문하셨다.
" 달밤에 개가 징검다리를 건너는 글자는?"
“그럴 ‘연(然)’자입니다.”
“나무 위에서 ‘또 또 또’ 나팔부는 글자는?”
“뽕나무 ‘상(桑)’자입니다.”
“그럼, 사람이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글자는?”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 자네도 참, 그렇게 쉬운 글자도 모르다니...
그건 말이야 . . .
.
한글 '스' 자라네."
조지훈 趙芝薰 (1920.12.3~1968.5.17)
정 의:시인(詩人), 학자(學者), 지사(志士)
자 호:본명(本名)은 동탁(東卓)
생 애:1920-1968 해산(海山) 조헌영(趙憲泳)의 둘째 아들
활동사항:한글학회 국어 교본 편찬원, 진단학회(震檀學會)
구사 교본 편찬원, 한국 문학가 협회 창립위원, 사상계(思想界)의
편집위원
시 집:[청록집(靑鹿集)](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공저),
[풀잎단장], [역사앞에서], [여운(餘韻)], 시론집: [시의 원리],
[시와 인생], 번역시집: [당시선(唐詩選)]
저 서:[한국 문화사서설], [한국 독립 운동사], [지조론]
관향은 한양이요 본명은 동탁(東卓)이다. 제헌(制憲) 및 2대 국회의원이며
한의학자인 해사 조헌영(海山 趙憲泳)선생의 둘째 아들로서
1920년 일월면 주실(注谷洞)에서 태어났다.
전통있는 선비의 가문이라, 한문과 국문을 배우기 시작한
어릴 적부터 문학예술을 갈고 닦아 온누리를 빛내리라는
큰 뜻을 품고 글짓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9세에 벌써 시를 지었다 한다.
워낙 빼어난 재질이며, 게다가 얽매이기 싫어하는 소탈(素脫)한 성격이라,
왜정하의 학교 교육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중학 과정을
통시강의록으로 독학, 전문학교 입학 자격 검정 시험에 합격하여
혜화전문학교(東國大學의 前身)에 입학, 문과를 졸업하였다.
1939년, 10세에 문장(文章)지에 3번의 추천을 받고
문단에 데뷔한 천재적인 시인이다.
그러나 시 [석문(石門)]에 “원한도 사모칠량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읍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년(千年)토록 앉아서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가는 돌문이 있습니다”나라 빼앗긴
민족의 하늘에 사무치는 원한과, 왜경(倭警)의 눈총을 맞고
박해 받는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에게는
정녕 하루가 천년 같은 암흑기(暗黑期)였으니까.
한동안은 오대산(五臺山) 월정사(月精寺)에 들어가서
수양 겸 숨어 지낸 적도 있었다.
민족 문화를 뿌리 채 없애려고 혈안(血眼)이 된
왜정(倭政)이 수많은 조선 문인들을 일본 제국주의에
아부하는 어용문인으로 별절시켰을 때에 지훈은 징용이나
징발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끝내
왜적 앞에 굽히지 않아 젊은 선비의 절개를 맑게 지키었다
.
1945년 8월 15일 조국 광복을 맞이하여 시인(詩人)다운
유난한 감격으로 말살(抹殺)당한 민족 문화를 되살리기 위하여,
명륜전문학교 강사 직책과 아울러 한글학회 국어 교본 편찬원,
진단학회(震檀學會)구사 교본 편찬원으로서, 해방전에 이미
조서어학회 큰 사전 편찬원을 지낸 경험이 있는 만큼 잃었던
국어와 국사 교육의 기초를 닦기에 힘을 기울였다.
1946년 경기여고 교사로 지내던 중 그해 가을에 고려대학교
물리과대학 조교수에 취임하여 부교수를 거쳐 교수에 이르렀다.
이처럼 육성(育成)에 힘쓰는 한편 해방 후 이른바
“조선 문학가 동맹”이라는 좌익계열의 문인 단체가
문학을 정치 도구화 하려고 자못 맹렬한 기세를 올려
문학청년들을 유인할 때에, 이에 대결한 지훈 시인은 문학
동지인 김동리(金東里), 조연현(趙演鉉) 그 밖에도 많은
문사들과 함께 “한국 문학가 협회” 창립위원이 되어 문학의
순수성과 민족 문학의 수호 육성(育成)에 힘썼다. 여러해 동안
여러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시(詩)부문 심사위원이었으며,
교양종합지인 사상계(思想界)의 편집위원이기도 했었다.
시(詩) 창작(創作)을 계속하여, 청록집(靑鹿集)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공저(朴木月, 趙芝薰, 朴斗鎭 共著) 풀잎단장,
역사앞에서, 여운(餘韻) 등 4권의 시집이 있으며, 시의 원리
시와 인생, 2권의 시론집과, 당시선(唐詩選)이라는 번역시집이 있다.
1956년 자유 문학상을 받았으며, 1961년에는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 시인회의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 후에 한국 시인
협회장. 한국 신시60년기념 사업 회장을 역임하년서 한국
시단을 위해 지도 역할을 한 공로자였다. 강개(慷慨)한 시정신이 스민
가사(歌詞)도 많이 지었으니, 사육신 추도가, 인촌 조가(仁村 弔歌),
해공 조가, 유석 조가, 영양군민의 노래, 영양중학교가등
그밖에도 많이 지었다.
선생은 독특한 지훈시의 취향을 풍기는 일류 시인인
동시에 독실(篤實)한 학자이기도 한다. 한국 문화사서설,
한국 독립 운동사, 신 채근담(新 菜根潭) 이라는 무게있는
저서를 간행하여 학계에 공헌한 바 크며, 민족 문화의
집대성(集大成)과 민족정신 문화진흥에 불멸의 업적을 쌓았다.
고대(高大) 한국 고전 국역 위원장, 고대 민족 문화 연구소장,
민족문화추진 위원회 편집위원으로서 민족 문화의 내실을 다져
꽃피우고 열매 맺히기에 정열과 힘을 기울였다.
선생의 열렬한 애국심은 6.25동란 중에 문총 구국대 기획
위원장, 종군 문인단 부단장으로서 전투하는 국군 대열에
참가하여 평양까지 다녀왔으며, 전란이 끝난 후에는 공명선거
추진 위원회 중앙위원으로서 우리나라의 고질인 부정 선거를
버리고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 요건(基本要件)인 공명정대한
선거가 실시되도록 하기 위해 애를 쓴 우국지사(憂國之士)이기도 하다.
그리고 역대의 집권자와 정치인들의 정치 철학이
없음을 한탄(恨歎)하였다.
나아가서는 철인 정치의 차원을 넘어 시인 정치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술회(述懷)하기도 했다.
지조론(志操論)이라는 저술을 펴낸 선생은 50평생
절개를 맑게 지킨 생애였으니. 왜정시대엔 일제(日帝)를
배척했으며, 해방후에는 좌익세력의 발악을 물리치려고 경륜(經綸)있는
논객(論客)으로서 바르고 날카로운 논핑을 폈다.
그후 자유당 독재 정권에 저력있는 저항을 계속하였으며
5.16후에 취고회의의 고문으로 추대되었으나 불의가
열보이자 박차고 나와 이에 대항한 인품이니, 세상에 허다한
아세군상(阿勢群像)과는 생리적으로 반대인 맑고 곧은 지조있는
대인군자(大人君子)이다.
지훈이 매천(梅泉 黃玹)과 만해(萬海 韓龍雲)를
사숙(私淑)함은 두 분의 탁월한 재질보다도 강직한
성격과 대쪽 같은 절개를 흠숭(欽崇)함이었다. 흔히
강직한 사람에게 따르기 쉬운 편협(偏狹)이나
완고(完固)함이 전혀 없으니,
천지 호연지기(天地 浩然之氣)하는 문자 그대로 도량이
크고 넓으며, 정 많고 한(恨)이 많아 유교와 불교의 교양
바탕에 서구(西歐)의 자유 민주주의 이념을 조화(調和)하여
보다 높이 승화(昇華)시킨 것이 시 예술의 아름다운 정서와
융합하여 이뤄진 민족의 전형적(典型的)인
인간상(人間像)이라 하리라.
숙환(宿患)으로 1968년 5월 17일 새벽에 별세하니 향년 49세이다.
21일, 문총(文總) 주최의 성대한 문인장(文人葬)을 엄수(嚴修)하였다.
1972년 서울 남산에 조지훈 선생 시비(趙芝薰 先生 詩碑)가 건립되었다.
1982년 8월 15일 37회 광복절, 내고장 영양 소년 지훈이 즐겨 놀며
시심(詩心)을 키우던 주실쑤 울창한 숲에 지훈시비(芝薰詩碑)가
문하생(門下生) 들의 정성으로 건립되었다. 500여명이 모인 성대(盛大)한
제막식(除幕式)에 뚜렷하게 우뚝 세워진 “빛을 찾아 가는 길”의
끝련(終聯)에 “빛을 찾아 가는 길의 나의 노래는
슬픈 구름 걷어 가는 바람이 되라” 나라 선비(國士)인 지훈 선생의 50평생은
어둠침침한 근역강토(槿域疆土)에서 빛을 찾아 가는
“돌뿌리 가시밭에 다친 발길의” 고행(苦行)의 생애(生涯)였으며,
님의 노래는 비단(非但) 시가(詩歌)만이 아니라. 그의 학문(國學)과
논객(論客)으로서의 강개(慷慨)한 외우침이 어느 것 하나인들
민족의 슬픈 구름-모든 되와 허물과 불행-을 걷어 가 버리게
하려는 정성이 깃든 것 아님이 없었다. 님은 갔으되 님의 노래의
유풍 여운(遺風 餘韻)은 언젠가는 삼천리 강토에서
슬픈 구름을 걷어갈 날이 오리라.
연 보
1920 경상북도 영양군 출생
1939 [고풍의상], [승무], [봉황수] 등이
정지용에 의해 [문장]지에 추천되어 등단
1941 혜화전문 문과 졸업, 오대산 월정사 불교강원 외전강사
1946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집 (을유문화사) 간행
1948 고대 문과대 교수
1952 첫 시집 [풀잎단장] (창조사) 간행
1953 평론집 [시와 인생] (박영사) 간행, 평론집
[시의 원리] (산호장) 간행
1956 시집 [조지훈 시선] (정음사) 간행 자유문학상 수상
1959 시집 [역사앞에서] (신구문화사) 간행
고대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
1962 수상집 [지조론] (삼중당) 간행
1964 시집 [여운] (일조각) 간행, 수필집 [돌의 미학]
(고대출판부) 간행, 평론집 [한국문화사서설] (탐구당) 간행
1967 한국시인협회 회장
1968 사망
1973 [조지훈전집] (일지사) 전7권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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