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들이 자발적으로 하알빈역에 안중근 의사의
기념관을 만들었다 자랑스런 우리의 영웅
그들은 몹시 못마땅 하다
일본식으로 한다면 독일은 히틀러 총통 기념관을 만들어야 한다
그들은 극에 달한 질투심에 안중근 의사를
범죄자라 칭한다 세계 피압박 민중의 독립 투쟁을
어느 나라에서 범죄자라 칭하는가??
하다못해 난징 대학살도 부정하는 파렴치한 사람들이다
1414년(세종 1) 음력 6월 19일 거제도 남쪽 주원방포를 출발하여
20일에 쓰시마 섬에 도착하였다. 이종무는 도주 종정선에게
항복을 권하였으나
대답이 없자 왜구를 수색하여 1백여 명을 참수하고
2천여 호의 가옥을 불태웠다. 131명의 명나라 포로를 찾아내었다.
29일에는 가옥 70여 호를 태우고 명나라
사람 15명과 조선인 8명을 구출하였다.
이종무 장군은 좌군과 우군에게 두지포에 포진하라 명령하고 자신은
음력 7월 3일에 주력함대(舟師)를 이끌고 거제도로 철수했다.
대마도에 하륙한 지 13일만이다. 정벌군 지휘부를 일단 빼낸 태종은
병조판서 조말생으로 하여금 대마도 도주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내도록 했다.
선지(宣旨)하노라. 대마도라는 섬은 경상도의 계림(鷄林)에 예속했으니,
본디 우리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분명히 상고할 수가 있다.
다만 그 땅이 심히 작고, 또 바다 가운데 있어서, 왕래함이 막혀 백성이
살지 않는지라, 이러므로 왜인으로서 그 나라에서 쫓겨나서 갈 곳이 없는
자들이 다 와서, 함께 모여 살아 굴혈을 삼은 것이며,
때로는 도적질로 나서서 평민을 위협하고 노략질하여,
전곡(錢穀)을 약탈하고, 마음대로 고아와 과부, 사람들의 처자를 학살하며,
사람이 사는 집을 불사르니, 흉악무도함이 여러 해가 되었으나
우리 태조대왕(太祖大王)께서는 지극히 어질고 신무(神武)하시므로,
하늘 뜻에 응하여, … 대마도의 작은 추한 놈들을 섬멸하게 하니,
마치 태산이 까마귀 알을 누르는 것과도 같고, 맹분(孟賁)·하육(夏育)같은
용사가 어린아이를 움키는 것과도 같으나, 우리 태조께서는 도리어 문덕을
펴고, 무위(武威)를 거두시고, 은혜와 신의와 사랑과 편안케 하는
도리를 보이시니, 내가 대통을 이어 나라에 임한 이래로 능히 전왕의 뜻을
이어서, 더욱 백성을 측은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비록 조그마한 공손하지
못한 일이 간혹 있어도, 오히려 종정성(宗貞盛)의 아비 종정무(宗貞茂)의
의를 사모하고 정성을 다한 것을 생각해서, 범하여도 교계(較計)하지
않았으며, 통신하는 사신을 접할 때마다
사관(使館)을 정하여 머물게 하고, 예조에 명하여 후하게 위로하고,
또 그 생활의 어려움을 생각하여, 이(利)를 꾀하는 상선(商船)의
교통도 허락하였으며, 경상도의 미곡을 대마도로 운수한 것이
해마다 대개 수만 석이 넘었으니, 그것으로 거의 그 몸을 길러
주림을 면하고 그 양심을 확충하여, 도적질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천지 사이에 삶을 같이할까 하였노라.
나의 용심(用心)함도 또한 부지런히 하였더니, 뜻밖에도 요사이
와서 배은 망덕하고 스스로 화근을 지으며, 망함을 스스로 취하고 있으나,
그 평일에 귀화한 자와 이(利)를 얻으려고 무역하거나 통신 관계로 온 자와,
또 이제 우리의 위풍(威風)에 따라 항복한 자는 아울러 다
죽이지 아니하고, 여러 고을에 나누어 두고서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어서
그 생활을 하게 한 것이며, 또 변방 장수에게 명하여, 병선을 영솔하고
나아가서 그 섬을 포위하고 모두 휩쓸어와 항복하기를 기다렸더니,
지금까지도 그 섬 사람들은 오히려 이럴까 저럴까 하며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내 심히 민망히 여긴다. 섬 가운데 사람들은
수천에 불과하나, 그 생활을 생각하면, 참으로 측은하다.
섬 가운데 땅이 거의 다 돌산이고 비옥한 토지는 없다. 농사하여
곡식과 나무를 가꾸어서 거두는 것으로 공(功)을 시험할 곳이 없으므로,
장차 틈만 있으면, 남몰래 도적질하거나, 남의 재물과 곡식을 훔치려
하는 것이 대개 그 평시에 저지른 죄악이며, 그 죄악이 벌써부터 가득차
있는지라,
어두운 곳에서는 천지와 산천의 신이 묵묵히 앙화를 내리고,
밝은 곳에서는 날랜 말과 큰 배며, 날카로운 병기와 날쌘 군사로써
수륙의 방비가 심히 엄하니, 어디가서 주륙(誅戮)의 환을
만나지 아니할 것인가.
다만 고기 잡고, 미역 따고 하여 매매하는 일은 이에 생활의
자료가 되는 바인데, 이제 와서는 이미 배은하고 의를 버려
스스로 끊는 것이며, 내가 먼저 끊을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세 가지를 잃은 자는 기아를 면치 못할 것이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니, 이에 대하여 계책하기도 또한 어려운 일이다.
만약 능히 번연(飜然)히 깨닫고 다 휩쓸어 와서 항복하면,
종정성은 좋은 벼슬을 줄 것이며, 두터운 녹도 나누어 줄 것이요, …
이 계책에서 나가지 아니한다면, 차라리 무리를 다 휩쓸어서 이끌고
본국에 돌아가는 것도 그 또한 옳을 일이어늘, 만일 본국에 돌아가지도
아니하고 우리에게 항복도 아니하고, 아직도 도적질할 마음만 품고
섬에 머물러 있으면, 마땅히 병선을 크게 갖추어 군량을 많이 싣고
섬을 에워싸고 쳐서 오랜 시일이 지나게 되면, 반드시 장차 스스로
다 죽고 말 것이며, 또 만일 용사 10여 만명을 뽑아서 방방곡곡으로
들어가 치면, 주머니 속에 든 물건과 같이 오도가도 못하여,
반드시 어린이와 부녀자까지도 하나도 남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육지에서는 까마귀와 소리개의 밥이 되고, 물에서는 물고기와 자라의
배를 채우게 될 것이 의심 없으니, 아, 어찌 깊이 불쌍히 여길 바 아니겠는가. …
이제 선지(宣旨)로써 일의 마땅함을 자세히 알게 하노니, 잘 생각하라.
— 세종대왕실록 4권 1년 7월 17일 (경신)
귀화한 왜인 등현(藤賢)이 항복 권고문을 가지고 대마도로 떠났다.
대마도는 예부터 조선의 땅이었으니 본국으로 돌아가든지 항복하라는 것이다.
위기를 느낀 대마도 도주가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에게 신서(信書)를 보내어
항복하기를 빌고 인신(印信)을 내려 줄 것을 청원했다.
대마도를 다녀온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가 수강궁에 무릎을 꿇고 대마도
도주의 항복을 전했다. 태종은 항복을 가납하고 교유했다.
사자(使者)가 서신을 전해 너의 항복의 뜻을 알았노라.
본도인(本島人)을 돌려보내는 것과 인신(印信)을 내려달라는 것이
가상하다.
너희들이 작은 섬에 모여들어 굴혈을 만들고 마구 도적질을 하여
자주 죽음을 당하는 바 이는 하늘이 내려 준 재성(才性)이
달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작은 섬은 대개 다 돌산이므로 토성이 교박(磽薄)해서 농사에
적합하지 않고 바다 가운데 박혀 있어 물고기와 미역의 교역에
힘쓰나 사세가 그것들을 대기에 어렵고 바다 나물과 풀뿌리를
먹고 사니 굶주림을 면하지 못해 양심을 잃어 이 지경에
이르렀을 뿐이니 나는 이것을 심히 불쌍하게 여기노라.
이제 너희들의 소원에 따라 비옥한 땅에 배치해 주고 하나하나에
농사짓는 차비를 차려 주어 농경의 이득을 얻게 하여 굶주림을
면하게 하여 주리라. 마음을 돌려 순종하고 농상(農桑)을 영위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섬의 행정을 관리할 자를 나에게 보내와 내 지휘를
받도록 할지니라.
— 세종대왕실록 5권 1년 10월 18일 (기축)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를 대마도로 돌려보낸 태종은
정벌군의 전면 철수를 명했다. 두지포에 진을 치고 있던 좌군과
우군이 철군했다. 이후 대마도는 조선의 정치질서 속에 편입되어
조선 국왕이 관직을 내려주는 통치권속에 예속되었다.
동해 라 표기 하는 우리 동쪽 바다 이제야 해도에 올리는 것도 원통한데 그들은 집요하게 회방을 놓는다 동해 전체가 일본해라 칭하여야 된다는 도둑놈들 같은 억지다
누가 감히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생떼 인가? 아베 인가 하는 군국주의 망상의 정신병자의 헛 소리 로 과거를 반성하지 못하는 민족의 미래는 하늘에서 단죄 될것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민족 은 야수 같은 침략근성에 부드럽게 타이른다 아름다운 우리 가곡 그네를 들으며 착하게 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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