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릉의 이성계의 건원릉 봉분에는 억새풀이 무성하다
벌초를 안하는게 아니라 고향을 그리워하여 그곳에
묻히기를 원했던 태조를 태종은 동구릉에 모시면서
대신 태조의 고향 영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다
봉분에 심었다 한다
제릉(齊陵) (신의 왕후 神懿王后 1337-1391)
신덕왕후(神德王后) 태조의 계비 강씨
후릉(厚陵) 정종과 정안왕후(定安王后1355-1412)릉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가 묻힌 헌릉 왼쪽이 태종의
무덤이고 오른쪽이 원경왕후의 무덤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2009년 6월27일 스페인 세고비아에서 열린 유네스코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조선왕릉 40기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혰다
중국의 황제의 능이 거대하고 웅장하지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지 않았다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anding Universal Value)가 있어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
조선왕릉의 탁월한 가치가 있어 세계 유산으로 등재한 것이다
1392년 개국 1910년에 패망 하기까지 무려518년 동안 왕조를 유지한
역사성과 27명의 왕과 왕비의 능이 지닌 문화사적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총44기의 왕실무덤 중 세계유산에서 제외된 4기는 북한에 있는 태조왕비
신의왕후 (제릉),정종 정안왕후(후릉)과 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 묘와
광해군묘다
연산과 광해 는 죽어서도 묘로 감등되어 유네스코에서 제외된 것이다
왕릉이라 함은 임금님의 무덤이다 그러나 일반인의 죽음을 서거(逝去)
또는 졸(卒)이라 하는데 비해 임금의 죽음을 붕어(崩御) 승하(昇遐)라
하듯이 무덤의 명칭도 다르다
왕족이라 해서 릉이라 하지 못하고 오직 왕과 왕비의 무덤 만이 릉이라
칭한다
왕과 왕비를 포함한 왕족의 무덤은 신분에 따라 다음세가지로
구분한다
능(陵) 왕이나 왕비의 무덤
원(園) 세자나 세자비 또는 임금의 아버지나 어머니 비(嬪)의 무덤
묘(墓) 기타왕족이나 일반인의 무덤
연산군과 광해군은 묘라 하여 왕릉에서 제외되었다
2기는 현재 북쪽에 소재하고 있는데 유네스코에서 지양하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닌 유형무형의 문화유산에 미달되었는지
세계문화 유산에서 제외되었다
후릉 제릉(해동지도 경기도)47.5☓30 cm
18세기 중엽
제릉(齊陵)
제릉은 (신의 왕후 神懿王后 1337-1391)은 태조 이성계의
원비인 신의황후 한씨 릉이다 현재 황해북도 개풍군 대현리에
있으며 후릉 등과 함께 북한에 있는 조선왕릉 중 하나이다
본관은 안변(安邊)이고 성은 한(韓)씨이다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의 딸이다 이성계의 첫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는
고려말 고려동북지방의 밀직사부사증영문화부사 였던 안변의 여식이다
신의왕후는 1337년 음력 9월 고려(高麗)의
동북지방 영흥(永興)의 호족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다.
15살이 되던 1351년에 비슷한 호족 신분의 2살 연상인
이성계 (李成桂)와 혼인을 하여 6남 2녀를 낳았다.
그중 방과는 제2대 정종 이며, 방원은 제3대 태종이다.
큰 아들 방우, 둘째 방과, 세째 방의 네째 방간
다섯째 방원,
여섯째 방연과 경신공주 경선공주 를 낳았다.
한씨는 조선 개국 1년 전인 1391년 음력9월12일
위장병의 악화로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로 인해 신덕왕후 강씨가 태조의 정비가 되는데,
이는 왕자의난의 원인이 된다.
한편 한씨는 태조 2년 1393년 음력9월18일 절비(節妃)로
추존되었고, 그로부터 7년 후에 정종 원년 1398 음력11월11일
신의태왕후(神懿太王后)로 추존하였다.
능호는 제릉(齊陵)이며, 수도 천도 이전에 만들어진
능묘이기 때문에 개성에 위치하고 있다
후릉(厚陵) 정종의 릉
정종의 가게도
주요 정치사
1.태조의 세자 책봉과 왕자들의 빈발
2.제1차 왕자의난
3.정종의 등극과 퇴위
4.정종실록 편찬
후릉(厚陵) 정종의 릉
정종(1357~1419)은 조선 제2대 왕(재위 1398~1400)으로 제1차
왕자의 난이 수습된 뒤 태종 이방원에 의해서 허수아비
왕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재임 2년 후 보위를 이방원에게
양위하였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태조의 둘째 아들로 비는 김천서의 딸인 정안왕후입니다.
정종은 성품이 인자하고 용기와 지략이 뛰어나서 고려 때
아버지를 따라 많은 전공을 세웠다.
조선 개국 뒤 영안군에 책봉되었다.
1398년(태조 7)에 제 1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로 책립되었습니다.
태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는데 새로운 수도인 한양에서의
골육 상쟁인 제1차 왕자의 난을 상기하여 개경으로 돌아갔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이 수습된 뒤 동생 정안군인 이방원을
왕세제로 삼고 왕족과 권신 등이 기르던 사병을 폐지하여
삼군부에 편입시켰습니다. 하륜의 건의에 따라 관제를
개혁하고, 한양의 5부에 각각 학당을 설립하였다.
정종의 정치는 거의 이방원의 뜻에 따라서 이루어졌습니다.
정종은 재위 기간동안에 정무보다는 격구 등 오락에 심취하였으며
그의 이런 행동은 이방원을 안심케하는 효과가 있었다.
즉위한 지 2년 만에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추대되었는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조치였습니다.
왕위에서 물러난 뒤 인덕궁에 거주하면서
사냥과 격구 및 연회와 온천여행 등으로 세월을 보내다
1418년 6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습니다. 정종은 사망 후
묘호도 없이 공정대왕으로 불리다가 1681년(숙종 7년)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았습니다. 능은 북한 개풍군에 있는후릉(厚陵)이다.
정안왕후(定安王后1355-1412)
조선제2대 정종의 비
본관 경주 성 김(金)월성부원군 김천서(金天瑞)의 딸
1396년 테조7년 남편 영안군(永安君:방과)이 세자가 되면서
세자빈이 된뒤 덕빈(德嬪)에 책봉되었다가 정종이 즉위하자
덕비(德嬪)로 진봉되었다
야사에서는 정안왕후가 잠자리에서 정종에게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을 권하였다 한다
1400(정종2년) 정종이 세제(世弟) 방원에게 양위하자
순덕왕태비(順德王太妃)의 존호를 받았다
소생은 없으며 1412년 58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681년 (숙종7년) 온명장의(溫明莊懿)의 존호가 추상되었다
릉은 개풍군 후릉(厚陵)이다.
신덕왕후(神德王后) 태조이성계의 계비
고려 문양
신덕왕후 정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포함되어 있다
릉은 병풍석과 무인석이 없다 방원이 원한으로 병풍석을 뜯어다
청계천 광교에 설치하고 많은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하였다 한다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
능호 : 정릉
위치 : 서울 성북구 정능동 산87-16
지정번호 : 사적 제208호
조성시기 : 1409년(태종 9)
정릉은 단릉으로 조성된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이다. 처음에는
현재 영국대사관 자리에 능역이 조영되었으나, 태조가 승하한 후,
원비의 태생인 태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신덕왕후는 평민으로 강등되고,
현재의 위치로 천장되었다. 따라서 왕릉제인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봉분에서
사라지고, 4각 장명등, 고석, 상석 등만이 원래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 장명등은 고려시대 공민왕릉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조선시대 능역의
가장 오래된 석물인 동시에 예술적 가치가 높다. 정릉의 공간은 일반 왕릉의 영역이
직선축을 이루는 데 비해, 자연 지형에 맞추어 절선축으로 조성되어 있다. 능역 입구
금천교의 모습은 우리나라 자연형 석교의 조형기술을 볼 수 있으며 재실터 양 옆으로
서 있는 느티나무의 보호수도 살펴 볼만한 가치 있는 역사경관이다.
능의역사
극진히 사랑했던 현비가 갑자기 승하하자 태조는 도성 안인 현 덕수궁
뒤편 현재 영국대사관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능역을 조성하고 강씨 봉분
우측에 훗날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함께 마련하여 능호를 정릉으로 정하였다.
아울러 능의 동편에 흥천사(興天寺)라는 절을 지어 재궁으로 삼고 능침사찰로 하였다.
그러나 잘 조성된 정릉은 신덕왕후의 왕자인 방번과 방석이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살해되고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의 다섯 번째 소생인 태종이 즉위하면서부터 푸대접을 받았다.
태종은 정릉의 능역 100보 근처까지 주택지로 정하여 세도가들이 정릉 숲의 나무를 베어
저택을 짓는 것을 허락하고, 청계천 광통교(현재의 광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으며, 그 밖에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 데 쓰게 하도록 하였다.
정릉이 있던 이 일대는 지금까지 정동(貞洞)으로 불리고 있다.
그로부터 260여 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 신덕왕후는 현종에 의해
복권되면서 그 능이 현재와 같이 재조성되었다.
이상은 문화재청 홈피에서 인용함
연산군묘(燕山君墓)는 조선 제10대 연산군(1495∼1506 재위)과
거창군부인 신씨(居昌郡 夫人愼氏)(1476 ∼ 1537)의 무덤이다.
중종 8년 1513년 에 조성되어,1991년 10월25일
사적 제362호로 지정되었다.
왕 또는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고 하지만 연산군은
그 지위가 군(君)으로
강봉되었기 때문에 묘(墓)라 하였다.
그 후 중종 7년(1512) 12월 부인 신씨가 상소하여 묘를 강화에서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선영(先塋)이며 연산군의 사위와 딸의
무덤이 있는 양주군 해등면 원당리(현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하기를 청하여, 이듬해(1513) 2월 왕자군(王子君)의 예(禮)로
이장하고 양주군의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묘의 시설은 대군(大君)의 예우로 장례하여 무덤, 곡장(曲墻),
묘비(墓碑) 1쌍, 혼유석(魂遊石) 1쌍, 망주석(望柱石) 1쌍,
장명등(長明燈) 1쌍, 향로석(香爐石) 1좌, 재실(齋室)은
갖추어져 있으나, 병풍석(屛風石), 석양(石羊), 석마(石馬),
사초지(莎草地), 문인석(文人石) 등은 세우지 아니하였다.
연산군의 묘비 앞면에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무덤이 만들어진 연월인
'정덕팔년이월이십일장(正德八年二月 二十日葬)'이라 새겨져 있다.
광해군 묘
광해군(光海君)은 선조(宣祖)와 공빈김씨(恭嬪金氏, 1553∼1577)
사이에서 1575년에 태어나 판윤 유자신(柳自新)의
딸과 결혼을 하였다.
정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가 아들이 없었으므로
조정에서는 공빈의 장남인 임해군(臨海君, 1574∼1609)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성격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선조 또한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장남인 신성군(信城君, 1578∼1592)을
총애하여 세자 책봉이 지연되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피난을 떠난 선조는 평양에서
서둘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의인왕후의 승하로 왕비가 된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가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을 낳자 왕위계승을 둘러싼
붕당간의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광해군은 적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적자인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을 것을 주장하는
소북파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가 크게 대립하였다.
그런 가운데 병이 위독해진 선조가 어쩔 수 없이 광해군에게
선위하는 교서를 내렸으나, 소북파인 영의정 유영경이
교서를 감추었다가 대북의 정인홍 등에게 발각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어 1608년 2월 2일에 즉위한
광해군은 왕권강화를 위해 천성이 난폭하여 백성들에게
패악을 끼치면서 끊임없이 왕권을 노리는 임해군을
진도로 유배시켜 사사하고, 인목왕후의 부친
김제남(金悌男, 1562∼1613)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한다는 이유로 처형한 후 부관참시까지 하였다.
1614년에는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하였다가
사사하였고, 능양군(綾陽君, 인조)의 동생 능창군을
폐서인하여 유배지에서 목을 매어 자결하게 하였다.
1618년에는 인목왕후를 폐위하여 경운궁에 유폐시키는
일을 저지른 일이 인조반정의 결정적인 명분을 제공하게 된다.
1623년(광해군 15) 3월 13일 이서, 이귀, 김유 등 서인일파가
주동이 되어 광해군을 폐위하고,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능양군이 직접 이끈 병사들이 창덕궁을 쉽게 점령하였다.
인목왕후는 광해군이 “일국의 국모를 지낸 자신을 유폐하고,
가족은 처형하였으며, 형제를 죽이고, 무고한 백성들을 죽였고,
민가 수천 호를 철거시켜 궁궐을 창건하는 토목공사를 일으켜
부역이 많고, 수탈이 극심하여 백성들을 어렵게 만드니
국가의 위태로움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는 등의 죄상 36개 항목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왕조실록이
전주사고 본만 남고 전소되자 선조의 지시로 다시
인쇄하여 춘추관, 마니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에
보관토록 하였는데, 광해군은 후금(淸)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묘향산 사고에 보관중인 실록을 적상산성
내에 실록전을 건립한 후 옮겨 보관하도록 하였으며,
전쟁으로 없어진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 여러 서적을 다시 간행하였고,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게 하는 공물제도가 부담이
불공평하고 수송과 저장에 불편이 많아 쌀로 납세를
하게하는 대동법을 제정하였다. 또한 호패법과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재원확보에 노력했으며,
선조 말에 시작한 창덕궁 재건공사를 1608년에 끝내고,
경덕궁, 인덕궁, 자수궁을 중건하여 전쟁으로
파괴된 도읍지를 복구하였다.
외교 면에서도 만주에서 크게 성장한 후금의 존재를
인정하는 중립외교정책을 편 점 등은 현대에 와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부분이다.
왕위에서 쫓겨난 광해군과 세자 부부는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문성군부인 유씨가 그 해 10월 8일
화병으로 승하하자 양주 적성동(현, 남양주 진건읍 송릉리)에
같은 해 윤10월 29일에 장사(亥坐巳向)를 지냈다.
한편 제주도로 유배지를 옮긴 광해군은 1641년(인조 19)
7월 1일 67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제주도에 안장하였다가,
1643년 10월 4일 생모 공빈김씨의 무덤이 바라다 보이는
문성군부인 오른쪽으로 이장(亥坐巳向)을 하였다.
광해군 무덤역시 연산군과 마찬가지로 왕을 지냈지만
폐위되었기 때문에 왕자군의 예로 장사를 지내 능호가 아닌
묘호를 사용하여 광해군묘라 하고, 석물도 일반
서민의 무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설치되어 있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조선왕릉의 명칭
조선왕릉의 세부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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