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조선의교통수단

이모르 2020. 12. 14. 15:54

 

 

 

조선의 교통수단

 

1.말(馬)은 양반이 아니라면 절대로

타지 못하였는데 국법인 경국대전으로 철저하게

금지 했기 때문이다

말 뿐만 아니라 나귀 노새도 기본적으로는

양반이 아니면 타서는 아니되었다

만약 일반백성이나 천민이 소나 말을 타게 되면

가축을 압수당하고 장80대를 치게 하는등 경국대전

에 못박아 놓았는데 장80대면 맞다가 죽는 경우가

허다하여 그만큼 중형에 해당되었다

다만 기생들에게 만은 말을 타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기생은 비록 신분은 천하지만 직업상 몸치장과 기동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세조때 예조 정량 우계번은 주사가 있어 화를 당하게

되는데 술에 취하여 영접도감사 조숙생의 처를 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평소 술만 먹으면 개가 되는 우계번이

잔뜩 만취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길에서

말을 타고 오는 여인과 마주치게 된다

술김에 보아하니 기생년이 분명한데

말에서 내려 인사를 않하고 지나치는 고로

말고삐 잡은 종놈에게 이르기를

저년 잡아와라 그리고 말에서 끌어 내어 꿇려라!!”

종놈이 가서 확인 하니 기생이 아닌 양반댁 마님이라

황급히 와서 아뢰기를 소인이 가서 보아하니

기셍이 아니었습니다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화가난 우계번이

말군(양반가에서 말탈 때 입는 부플은 옷

기생들은 착용 하지 않았습)

도 입지 않은 주제에 어찌 기생이 아니라 한단 말이냐

하면서 머리채를 잡고 끌어내려 채찍으로 매질을 하였다

이에 조숙생의 처는 기절하고 말았다

우계번은 의금부로 끌려가 매질을 당하고 귀양길에 나선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우계번(禹繼蕃)이 처음에 호조(戶曹) 의막(依幕)에 모였을 때 동료(同僚)

정랑(正郞) 안관후(安寬厚), 좌랑(佐郞) 권득경(權得經권윤(權綸),

병조 좌랑(兵曹佐郞) 김겸광(金兼光), 호조 정랑(戶曹正郞) 남질(南軼),

한산 군사(韓山郡事) 하길지(河吉之), 내섬시 소윤(內贍寺少尹)

신숙(辛肅), 한성 소윤(漢城少尹) 김효급(金孝給)과 더불어 기생을

불러다가 술을 마셨으니, 청컨대 아울러 국문(鞫問)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숙생이 아뢰니, 임금이 의금부(義禁府)에 명하여 이를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그때 조숙생의 처가 매를 맞게되자 정신을 잃어버리고 오랫동안

기절하였다가 깨어났다.

임금이 내의(內醫)와 여의(女醫)를 보내어 간호하고 보살펴주라고 명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옛날 풍속에 부인(婦人)들이 나갈 때는 도자(兜子)를 타고 바깥으로

휘장과 장막을 드리워서 바깥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엿보지 못하게 하였다.

그 말을 타는 자도 또한 면사(面紗)를 드리우고 말군(襪裙)으로 묶었는데,

지금의 사람들은 으레 간략한 예법에 따라서 종종 옷을 간편하게 하고

면사(面紗)를 말아 올리고도 뻔뻔스럽게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유속(流俗)의 폐단이 하나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조숙생의 처를 욕보인 것이 우계번이 술에 취하였기 때문만은 아니고,

실은 조숙생의 집에서 스스로 욕을 부른 것이다.”

하였다. 우계번이 일찍이 문송수(文松壽)와 더불어

실세(失勢)하는 모양이 서로 엇비슷하여, 하나가 서용(敍用)되면 하나는

파출(罷黜)되었다.

이보다 앞서 문송수가 벼슬에 등용되니, 우계번이 말하기를,

문송수가 나왔으니, 나는 마땅히 조심해야겠다.”

하였으나, 얼마 아니되어 이러한 일이 있으니,

사림(士林)에서 비웃었다.

 

 

 

정조 대왕 반차도 나타난 궁인들

혜원 신윤복 <연소답청(젊은이들의 봄나들이)>

종이에 채색 35.6 x 28.2cm  간송미술관 소장

 

봄소풍에서 돌아오는 기생들을 양반들이 장난스레

말고삐를 잡고 있고 맞은 편에는 장옷입은 양반댁 사대부가의

여인이 조우하고 있다 

당시 양반행세의 필수품 말이 꼭 필요했다

요즘 세태로 자가용이 없으면 체면이 않선다 라는 말과

같다 말은 편리한 교통수단이기도 했지만 품위유지에 필수품이 엇다

구한말 서양인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인들은 가마나 말을 타지않으면

주위 사람들이 업신여긴다 라 기록했다

또 당시 양반들이 외출 할 때는 품격의 필수 품으로

6(六足)필요 하다 했으니 육족이란 다리넷 달린 말과

다리 둘 달린 말구종을 갖추고 다녀야 함을 뜻했다

 

김홍도의 풍속화 나귀를 탄 양반과 아기를 안고 장옷을 쓴 양반가

여인이 남편의 보호를 받으며 가고있다

처자식을 보호하려는 남편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

 

 

 

2.가마

 

우리가 일반적인 상식으로 조선에서 여자들이

외출할 때 주로 가마를 타고 다녔다 생각한다

근대에 이르기 까지 농촌에서 혼인식을 할 때

신부는 의식상 가마를 타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서민들은 걸어 다녔으며 양반 부녀자들은

말을 타고 다녔다

가마는 농업생산에 투여되는 소중한 노동력을

낭비하기 때문에 금지시켰다

고로 남자들의 경우는 과거에 급제한 관료들에게만

허용되었고 여자들의 경우는 3 (당상관)의 고위관료

식솔들 에게만 허용되었던 귀한 운송 수단 이었다

간혹 지방 수령들이 권세를 이용해서 중잉 정부 몰래

가마를 타기도 해서 수령들 중에 음반 출신이 많아

그들은 가마를 타면 않되어서 발각되어 파직되고

유배당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마는 주로 권위 있는 상류 계층이 사용했던 만큼 가마를

타고 지나갈 때는 위세를 더하기 위하여 하인들이 목청을

가늘고 길게 빼어 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급속하게 신분제도가 무너지는

동시에 일반인도 가마를 탈수 있게 되었는데

가마를 타고 가다가 맞은편에서 맞은편 에서 낮선 가마가

오게되면 길을 비키지 않고 서로 실랑이를 벌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떤 때는 가마끼리 맞대고 밀어 붙이며 싸움을

벌리고는했는데 기세에 밀리거나 싸움에 지면 가마에 타고

있는 사람의 운수가 사납고 불길하다는 생각이 었다

 

 

 

가마

조선시대에는 주로 신분 이 높은 사람이 타고

다니던 주요한 이동 수단이었다.

대개 조그마한 집 모양인데 보통 네모난 상자 모양의 커다란

몸채가 있고 이 위를 지붕으로 덮었다.

몸채 앞에는 문을 내고 사람이 이 문으로 들어가 그 안에 앉는다.

몸채의 밑 부분에는 가마채라고 하는 두 개의 긴 막대를 나란히

 덧대어 두 사람 또는 네 사람이 이 막대를 손으로 들거나

끈으로 매어 가마를 운반한다.

가마는 주로 권위 있는 상류 계층이 사용하였던 만큼 가마를

타고 지나갈 때는 위세를 더하기 위하여 하인들이 목청을

가늘고 길게 빼어 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18세기 이후 신분제도의 급격한 붕괴로 일반인도 가마를 타고

다녔는데  일반 민간에서는

가마를 메고 가다가 맞은편에서 낯선 가마가 오게 되면 길을 비키지

않고 서로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떤 때는

가마끼리 맞대고 밀어붙이며 싸움을 벌이고는 했다.

기세에 밀리거나 싸움에 지면 가마에 타고 있는 사람의 운수가

사납고 불길하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습이 발달하여 한국인의 민속놀이 가운데 하나인

가마싸움이 만들어졌는데 추석이 되면 수십 명의 청년들이 한 팀이 되어

기를 앞세우고 상대편의 가마와 맞부딪쳐

먼저 많이 부순 팀이 이기는 놀이였다.

가마는 전통적인 한국 사회의 모습이 다분히 반영되어 있다.한국인들은

체면과 품위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는데 그것을 유지하며 고고한 자세로

생활했던 그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가마에 녹아 있다.

 

가마의 종류

 

 

 

연과 가교: 임금이  타는 가마로 좌우와 앞에 구슬을 달아 만든 주렴이 있다.

연은 가마채가 아주 길게 되어 있고, 가교는 두 마리의 말과 사람을 앞뒤에 두고

가마채가 흔들리지 않도록 되어있다

 

 

 

자궁가교.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홍씨가 탄 연

규장각 정조대왕 반차도에 나타난 연 (청계천 모자익 타일화)

.

 

정조대왕 두 동생의 연

 

이 행차의 주인공 혜경궁이 탄 가마 등장, 협련군과 근장군사 등의 삼엄한

경호를 받으면서 화려하게 등장한다. <> 정조가 탄 좌마가 30명의

협마무예청과 30명의 협마순노 등의 호위 아래 혜경궁 가마 뒤를 바짝 따르고 있다.

이번 행차는 어머니를 모시고 가기 때문에 일부러 가마를 타지 않았다.

말 위에 왕이 보이지 않는 것은 왕의 실제 형상을 그리지 않는 관례 때문이다.

 

왕이 궁중에서 타고 다니던 어가

 

 

왕의 수레가마인 명차

 

 

 

 

향정(용정자(龍亭子)

 은 향로와 향합을 싣고 다니던 조그마한 가마로

향정자라한다 이 향정은 1872년 태조어진을 어인할 때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4면이 개방되어 있으며

4면이 개방되어 있으며 지붕아래는 공포를 장식하였다

지붕은 팔작 지붕으로 구성한후 녹색으로 칠하였으며

추녀하부에는 금칠을 한 풍경을 달았다 고종9년

 

 

 

: 공주나 옹주가 타는 가마

1.임금이 타는 연 2. 옹주등이 타는 덩.3봉교

 

 

가교: 임금과세자가 타는 가마로 좌우와 앞에 구슬을 달아 만든 주렴이 있다.

 연은 가마채가 아주 길게 되어 있고, 가교는 두 마리의 말과

사람을 앞뒤에 두고 가마채가 흔들리지 않도록 되어있다.

 

사인교 : 판서와 같은 고위 관리가 타거나, 혼인날에 신부가 타고

친정에서 결혼식장으로 갈 때 타는 가마

 

 

 

 

김홍도가 1786년에 그린 안릉신영도(安陵新迎圖) 에

일부분 쌍가마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의 기록화 중 반차도 형식들 띤 그림으로서 요산헌(樂山軒)

부친이 1785년 황해도 안릉의 신임 현감으로 부임하는 광경을 묘사한 그림이다.

요산헌의 부탁에 따라 1786년 김홍도의 나이 42세때 가을에 제작했다. 

번기를 든 기수를 비롯하여 호위병, 아전과 노비, 악대, 아녀자, 말을 탄 기녀,

바퀴가 하나 달린 남녀(藍輿), 개떼 등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후대의 모본으로 추정된다.

 

 

 

규장각 정조대왕 반차도에 나타난 쌍가마(청계천 모자익타익화)

쌍가마(䉶駕馬)는 가교(駕轎) 쌍교(雙轎)쌍마교(雙馬轎)쌍가교(䉶駕轎)

라고도 하는데 앞뒤 말2마리가 엎 뒤채를 메고 가는 가마로

조선 후기에 등장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원칙적으로 외국에 나가는 사신 감사(監司)

2품 이상 관찰사 의주부윤(義州府尹)등만이 탈수 있었으나

승정원 승지를 지낸 정3품 수령은 예외로 탈수 있었다

특히 정2품 지방관은 지방에서만 타고 서울에서는 타지 못하였다

이런 법령이 잘 지켜지지 않아 고을 수령들이 임지에 부임할 때나

도성의 문을 나서자 마자 감시가 허술해지면 스스로 상가마를

타고나 아니면 어머니나 처자를 태우고 다니는 일 잦았다

이런 풍조가 점점 번져서 당시 여인들 은 쌍가마 타는 것을

평생 소원으로 삼기도 했다

 

기산 풍속도중 수령행차가마를 타고 고을을

행차하는 모습이다

독일 함부르크 민족학 박물관

 

기산 풍속도중 신행 혼례를 치룬 신부가 가마타고 시집가고 있다

독일 함부르크 민족학 박물관

 

 

 

삿갓가마: 상례 때에 쓰는 흰 휘장이 둘러진 삿갓 모양의 가마

뚜겅이 없는 초교(草轎) 단 상주가 초교를 탈때는 위의 큰 삿갓가마를

타고 다녔다 상주는 하늘을 볼수 없는 조인이라는 뜻에서 걸어 다닐

때는 방갓을 쓰고 다녔듯이 가마에도 삿갓을 씌운 것으로

삿갓가마는 가장자리에 흰 휘장을 두루고 위에 큰 삿갓을 덮은 것

처럼 지붕르 한 보교이다

 

 

임당 백은배(白殷培)의 초헌

 

 

 

초헌 (軺軒) 2품의 관리가 타는 외바퀴가 달린 가마

조선은 신분제 사회였다. 신분에 따라 사회역할은 물론이고 입는 옷,

탈 것 등에 제한이 있었다. 초헌은 조선시대에 정2품 이상의 관리가 타던 수레로,

명거 (命車), 목마 (木馬), 초거 (軺車), 헌초 (軒軺)라고도 한다.

고위 관리의 위세를 상징하였던 초헌은

던 수레로, 명거 (命車), 목마 (木馬), 초거 (軺車), 헌초 (軒軺)라고도 한다.

고위 관리의 위세를 상징하였던 초헌은 가마와 비슷한 형태이지만 채가

아주 길며 외바퀴가 밑으로 달려 있어서, 보통 다섯 사람에서 아홉 사람이

한 조를 이루어 움직였다. 초헌은 좌석이 높게 올라 있어서, 초헌을 타는

관리의 집에는 솟을 대문과 함께 문턱을 없애 초헌을 타고 쉽게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덮개가 없는 남여

 

 

 

 

남여:  2품 이상의 관리가 타는 가마(의자 모양

 3품의 승지와 각 관청의 참의 이상이 탈수 있었으며

포장이나 덮개가 없는 작은 가마다.

가마가 타고 내리기 불편하고 사방이 막혀 덥기 때문에 비가 내리거나

바람이 몹시 불거나 추운 겨울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탁 트인 남여를 타고 다녔다.

남여는 끌채가 앞뒤로 길게 뻗어 있고, 발디딤판과 함께 등받이와

팔걸이가 있는 가마이다.

 

 

 

임당 백은배(白殷培) 여인이 탄 남여

 

 

독교(獨轎)

소나 말등에 고정하여 휘장을 두른 가마를

얹어 원래 관찰사등 2품이상의 지방관들이 타고 다녔는데

쌍가마에 비해 심하게 흔들려 불편한 점이 많았다

가마를 메고갈 교군이 없을 때 보교(步轎)를 소의 등에

싣고 사람을 보교에 태운후에 보교의 뒤채를 소모는

한사람이 잡고 균형을 잡으면서 길잡이를 하며 가는

가마이다 포장을 하기 때문에 장독교(帳獨轎)라고도

한다 뒷면 전체가 벽이고 양옆에는 창을 냈으며

앞쪽에는 들창처럼 버티게 문이 있다

뚜껑은 지붕처럼 둥그스름하게 마루가 지고

네 귀가 추녀처럼 되었으며 바닥의 바탕에는

살을 대었는데 전체가 붙박이로 되어있어 다른 가마처럼

떼었다 붙였다 할수 없다

 

 

옥교(屋轎)는 덮개가 있어 벽체와 지붕이 가려져 있는

가마로 3품 이상 관리의 어머니, , , 며느리 외에는 탈 수 없으며 이를

어길 때에는 장 80대에 처하도록 법전에 규정되어 있었다.

옥교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숙종 때 훗날 장희빈으로 널리 알려진

소의 장씨가 왕자를 낳았다. 이때 장씨의 어머니가 산모를 보살피기

위해 입궐하였는데 여덟 명이 메는 옥교를 타고 들어왔다.

그러자 지금의 검찰 겸 감사원 격인 사헌부의 관리가 관속들을 보내 가마를

압수하고는 종을 잡아다가 죄를 다스렸다.

소식을 들은 숙종은 노발대발하며 사헌부

관속들을  매 때려 죽이라고 하였다.

신하들의 만류로 관속들이 풀려나기는 했지만 두 명은 매를

너무 맞아 곧 죽고 말았다. 사건의 발단은 장씨의 어머니가

3품 이상 관리의 부녀자에 해당되는 여자만 타는 옥교를 탄데 있었다.

 

 

 

노년의 원로대신이 탄 평교자

 

 

 평교자(平轎子)는 덮개없이 사방이 트인 가마로 조선 초기 양반

부녀자들이 대개 이 평교자를 타고 다녔다.

양반들이 타고 다닌 평교자와는 다르다.

그런데 평교자는 가마꾼과 가마타는 사람이 격리되지 않아 옷깃이나

어깨가 서로 닿기도 하므로 가마꾼들이 양반 부녀자를 업수이

여기고 희롱하기까지 한다는 이유로 조선 태종 때는

옥교를 타고 다니도록 하였다.

 

 

 

장보교: 네 기둥을 세우고 사면에 휘장을 두른 뒤

자유롭게 꾸몄다 뜯었다

할 수 있도록 만든 가마

 

 

 

정자 모양의 보교

 

 

보교(步轎)는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멜빵을 이용해 둘이서 맸다

 

채여 :물건을 나를 때 사용하던 가마

정조47년의 채여

 

 

가자(架子)

신주를 모시는 신여(神輿) 요여(腰輿) 장례를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에 신주(神主)와 혼백(魂帛)을 모시고

돌아오는 작은 가마인데 앞뒤에 한사람씩 두사람이

가마채를 잡고 운반한다 영여(靈與)라고도 한다

 

3.우마차

 

 

고구려 벽화 우차

 

백제의 우차

 

달구지라는 말의 어원은 대체로 달+구지로 보는데 달은 둥글다는

의미이고 구지는 바퀴를 의미해 둥근 바퀴로 굴러가는 수레라는

의미로 정착되었다고 본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농가에서 말보다는

소를 더 잘 썼기 때문에 소달구지가 일반적이었다.

 

4륜우차

 

북한식 1륜차

 

 

 

달구지는 남한식과 북한식 두종류로 나눠는데 남한식은 소에 멍에

씌우고 틀 앞쪽에 두 가닥의 쳇대를 따로 붙인다음, 이를 소 등에

얹은 길마에 연결해서 소가 몸으로 끌게 되어 있다. 북한식은 틀과

 한몸을 이룬 쳇대를 소의 목에 얹은 멍에에 연결하여 달구지를

목뼈의 힘으로 끌게 만들었다. 따라서 틀 길이가 56m에 이르며,

바퀴도 매우 커서 지름이 1.5m나 되는 것이 보통이다

 

   구한말 사진

 

 

 

 

 

관레를 치룬 궁녀와 생각시

 

 

구한말 궁녀들

 

 

 

 

 

기생 연수생 들

 

 무당 무희들

서당

 

약방

 

전당포

 

악사와 무희들

 

여 궁수대회

 

남 궁수대회

 

외출하는 여인들

 

 

굿당

양반 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