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을 지나 중간지점에 높이20m가 넘는 벼랑 암벽에 약사전이
있으며 그안쪽 암벽에 부처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것이
마애여래입상(전라남도유형문화제220호)이다
원효대사가 손톱으로 새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런 기암절벽을 백제시대에 건축하였다 하니 놀라웠다
사성암을 설명하는 안내 입간판의 내용을 적어보았다
백제 성왕22년(544년)에 연기조사가
세웠다는 사성암 그특색있고 고색찬란한
사찰은 기암절벽에 세워졌다
여기서 우리나라 쟁쟁한 고승들이 수도 정진
하였다하니 고승들은 명당이라 생각하였을까?
원효대사 같은분은 소요샨에도 근거가 있다
걸어서 여러 곳을 다녔을 수도승들의 애환이
어떠하였을까??
허나 혜초같은 분은 천측국(인도) 까지 가시지
않았던가???
사성암에서 수도 맹진 하였던 고승들을
알아보자
연기조사
화엄사의 창건주는 연기조사다. 1979년에
(新羅白紙墨書大廣佛華嚴經)’이라는 사경이 발견되면서 화엄사의
창건연대와 창‘신라백지묵서대광불화엄경건주가 분명하게 밝혀진 바 있다.
이전까지만 해도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됐으며 연기조사는
인도의 승려라는 설이 전해져왔는데, 사경의 발문 덕분에 연기는 황룡사
출신 승려이며 경덕왕(742~765) 때의 인물이라는 사실이 고증된 것이다.
한동안 인도 승려로 잘못 알려져
1936년에 편찬한 ‘대화엄사사적’을 보면 인도의 고승 연기조사가
화엄사를 창건하고 장죽전에 차를 심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인도의 고승’
이란 기록은 틀린 부분이고, ‘장죽전에 차를 심었다’는 구절이 눈길을 끈다.
연기는 의상의 제자로서 중국에 들어가 화엄학을 공부하고 돌아오면서 차 씨를
가져와 절 주위에 심었을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흥덕왕 3년(828)에 사신 대렴(大廉)이 중국에서
차 씨를 가져와 지리산에 최초로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막연하게
지리산으로 기록되어 시배지 논란이 일고 있는 것 같다. 장죽전에
차 씨를 심었다는 근거는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道寺舍利袈裟事跡略錄)’
에 나와 있는 ‘대렴이 중국에서 가져온 차 종자를 장죽전에 심게 하였다’
라는 기록이 유일하다
국보195호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원효대사
원효는 삼국시대와 신라의 고승이자 철학자, 작가, 시인, 정치인이다.
원효는 법명이고, 속성은 설, 속명은 사, 서당 또는 신당이며,
별명은 모, 호는 화정이다.
아버지는 내말 설담날이며, 태종무열왕의 둘째 사위이고 설총이 그의 아들이다.
별명은 소성거사이며 이외에도 서곡사미, 백부논주, 해동법사, 해동종주라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원효보살, 원효성사라 존칭되고, 화쟁국사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위키백과
원효의 법구
심생즉 종종법생(心生卽種種法生)
심멸즉 촉루불이(心滅卽촉루不二)
삼계유심 만법유식(三界唯心萬法唯識)
심외무법 호용별구(心外無法胡用別求)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법이 일어나고마음이 사라진
즉 해골도 없어지니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이
오직 인식인 것을 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어찌 따로 법을 구하겠는가.
원효대사
대신기승론
도선국사
도선은 신라 말기의 승려이며 풍수설의 대가이다.
속성은 금씨이다. 통일 신라 시대 김천 지역의 청암사를
창건한 승려로 도선국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도선의 사후
신라 효공왕은 요공선사라는 시호를 내렸고, 제자들이 스승을 기념하여
옥룡사에 세운 탑은 증성혜등이라 명명되었다. 고려 숙종은 도선을
대선사로 추증하고 왕사의 호를 추가하였다. 고려 인종은 도선을
선각국사로 추봉하였으며 고려 의종은 비를 세웠다.
신라말의 승려이며 풍수설의 대사. 성은 김씨. 영암출신.
왕가의 후예라는 설도 있다.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華嚴寺)에서 스님이 되었다.
도선국사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불교설화),
그뒤 유명한 사찰을 다니면서 수행하다가, 846년(문성왕 8)에
곡성 동리산(桐裏山)의 혜철(惠徹)을 찾아가서 무설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의 법문을 듣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
850년에는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운봉산(雲峯山)에 굴을 파고 수도하기도 하였으며,
태백산에 움막을 치고 여름 한철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전라남도 광양 백계산 옥룡사(玉龍寺)에 자리를 잡고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언제나 수백명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도선은 당나라로 유학가서 밀교승려 일행(一行)으로부터
풍수설을 배워왔다고 한다.
그러나 일행은 당나라 초기의 승려이고 도선의 생몰년은
당나라 말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연대에 모순이 있고,
도선이 당나라에 유학하였다는 것도 신빙성이 없다.
도선은 승려로서보다는 음양풍수설의 대가로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역사가 신라 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도선의 생존연대가 그때였기 때문이다. 그뒤부터 도선 하면 비기(秘記),
비기 하면 풍수지리설을 연상할 만큼 도선과 풍수지리설
사이에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맺어졌다.
그리고 언제나 도선이 풍수지리설 같은 주술적 언어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는 역사적 실재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신화적 존재로 파악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도선이 역사적으로 유명해진 것을 고려 태조에 의해서였다.
875년(헌강왕 1)에 도선은 "지금부터 2년 뒤에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
"고 하였는데, 그 예언대로 송악에서 태조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 예언 때문에 태조 이후의 고려 왕들은 그를 극진히 존경하였다.
태조는 도선으로부터 직접 설법을 들은 일은 없으나 사상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도선의 나이 37세 되던 해,
그는 옥룡사에 머물면서 입적할 때까지 제자들을 양성하였는데,
당시 제자의 수가 수백 명이라는 점에서 옥룡산문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도선은 옥룡사에 머문 지 35년이 되는 때인 898년(효공왕 2)에
세수 72세로 입적하였다.도선의 저서라고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도선비기>,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등이 있다.[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도선국사
도선국사의 풍수지리설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1178∼1234)
고려 중기의 고승. 성은 최씨. 자는 영을(永乙), 자호는 무의자(無衣子).
나주 화순현출신. 완(琬)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배(裵)씨이다.
어머니가 하늘의 문 이 열리는 꿈을 꾼 다음 그를 낳았다.
어려서 아버지가 죽자 출가하기를 청 하였으나 어머니는
허락하지 않고 유학(儒學)에 힘쓰라 하였다.
그러나 항상 불경을 생각하고 주문을 외워 힘을 얻었다.
무당집과 사당을 허물기를 좋아 하고,
가끔 사람들의 병을 다스리면 효험이 있었다.
1201년(신종 4)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들어갔으나,
어머니의 병보(病報)를 받고 고향으로 돌 아와 인척형인
배광한(裵光漢)의 집에서 시병(侍病)할 때 관불삼매(觀佛三昧)
에 들었는데, 어머니는 그 꿈에 여러 부처와 보살들이
사방에 두루 나타나는 것을 보고 꿈을 깨자 병이 나았다.
묻노니 그곳은 어떠한 곳인가? 크게 고요한
열반의 문이니 라(衆若不到處別有一乾坤 且問是何處大寂涅槃門).
" 하며 얼마 뒤 열반할 것임 을 시사하였다. 1234년 6월 26일에
문인들을 불러 여러가지 일을 부탁한 뒤 마곡( ;谷)에게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오늘은 너무 바쁘다."하였다. 마곡이 그 까닭을 묻자,
다시 "이 늙은이가 오늘은 너무 바쁘다."하였다. 마곡이 멍 하니 있을 때
빙그레 웃으며 가부좌한 채 앉아서 입적하였다. 나이 56세, 법 랍 32세였다
시자 부르는 소리
송라(松蘿)에 낀 안개 속으로 떨어지고
차 달이는 향기는 바람에 풍겨
돌길을 내려 오네.
흰구름 낀 산밑에 접어든 것 뿐인데
이미 암자에 들어가
노스님을 뵈었네.
呼兒響落松蘿霧
煮茗香傳石俓風
才人白雲山下落
已參庵內老師翁
*진각선사(眞覺:1178~1234)-보조국사에게
출가하여,그의 법맥을 이은 고려 스님.
.
저서에는 <선문염송집(禪門염頌集)>30권,
<심요>1권, <조계진 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
1권,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 論)>1편,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2권, <금강경찬(金剛經贊)>1권,
<선문강 요(禪門綱要)>1권이 있다
진각국사 혜심
혜신고신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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