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은 아는바와 같이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릉인데
그는 정도전등과 합세하여 자신의 두 아들중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자의난을 일으킨 방원(태종)으로부터 미움을사서
사후 두 아들과 사위까지 죽임을 당하고 방원이 정동에 있던
계비강씨의 무덤을 지금의 정릉으로 이장 하였고
태종은 능을 옮긴 지 한달이 지난 후에는 봉분을 깍아 버리고
정자각을 헐어냈으며 석물들을 모두 땅에 묻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해 여름 흙으로 만든 청계천 광교가 무너지자
12신상 등의 석물을 옮겨 돌다리를 만들게 하고 그밖의 석재나
목재 들은 태평관을 건립할 때 부속재로 사용하였다 이로부터
정릉은 돌보는이 없어 황폐화 되었다
170년 지난 선조때 신덕왕후 후손인 강순일이 군역을 면제
받기 위해 조정에 소청하자 무덤을 찾아 아차산일대를
수색하였으나 찾지못하고 조선초 태종때 변계량이 하늘에
제사 지낸 祭文 속에서 정릉에 관한 구절을 찾아내어 정릉의
위치를 확인할수 있었다
이에 정릉 능침을 수봉(修封)하고 한식에 제사 지내는 것만으로
그쳤다 그후현종10년(1669)에 송시열의 계청으로 신덕왕후는
200년만에 비로소 종묘에 배향되고 능묘로 봉심(奉審)하기로 하였다
또한 이경석등의 계청으로 능을 수리하고 재실을 중건하여 수호군을
정해 주기에 이르렀다
이릉의 관리를 위하여 영(令)1원과 참봉1원을 두었다
이 때에 현종은 10월2일 교서를 발포하고 과거(科擧)를
특별히 설정하여 성대하게 경축하였다
봉릉(封陵) 설재하던 날에는 비가 정릉동 일대에만 만이 쏟아졌는데
그당시 주민들은 이 큰 비를 가르켜 억울한 원을 씻는 비라해서
세원지우(洗寃之雨)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에 복원사업을 계속하고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선정된후
재실 복원사업을 벌리게 되어 오늘 완공식을 가지게 되었다
2015년3월25일
까치울음 소리 요란한
정릉 산책을 갔는데 마침재실 복원 완공식이 열려
지역주민과 내와빈이 참석한 가운데 조철한
기념식이 있었다
해설하는 교수는 정릉의 복원 사업중 현종때의 기록을
완전 재현하였고 다만 릉 아래쪽에 연못이 있었다 하고
그 또한 복원이 되는 것을 소망한다 말하였다
정릉은 아름다운 곳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로 펼처지는 아름다운 사계의
풍경은 서정적이다
조선 최초의 릉인 정릉과 오늘 복원완공식을 가진
정릉 재실과 거기서 생활하던 능참봉에 얽힌 이야기를
백과사전을 통해 알아본다
문화재 해설자
명종시대의 고증그대로 재실을 복원하였다 하고
다만 연못이 있었는데 그것이 복원되기를 기대한다고 하였다
외국 대사관 측 인사들
국악 연주
정릉 어머니회 합창단의 창
정릉
재실 발굴터
순종의 유릉을 조성하고 있는 사람들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 왕후 강씨의 무덤이다. 1970년
사적 제208호로 지정되었다. 신덕 왕후는 황해도 곡산부
강윤성의 딸로, 이성계와 만나
2남 1녀를 낳았다. 그리고 1392년(태조 즉위년)에 현비로
책봉되었고, 1396년에 이득분의 집에서 승하하였다.
신덕 왕후를 사랑하던 태조와 공신들은 국모(중전)를
높이는 뜻에서 현재의 중구 정동에 공신수릉제를 채용하고,
능역을 황화방북원에 만들었고 동편에는 정릉의
원찰인 흥천사를 세웠다. 그러나 태종이 왕위에 즉위하자
1405년(태종 5년)에
의정부에서 왕의 무덤이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정릉만이
도성 안에 있고, 무덤이 크고 넓다는 논란이 있어서
도성 밖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이렇게 능이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진 시기는 1409년이며, 이것은 태조가
신덕 왕후의 소생인 제8왕자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데
대해 태종이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태종은 능을
옮긴 지 한 달이 지나자 봉분을 깎고
정자각을 헐고 석물을 모두 땅에 묻어 버렸다. 또한
광교에 있던 흙다리가 무너지자 십이지신상 등의 석물을 실어다
돌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이후 정릉은 돌보는 사람이 없어
오랫동안 왕후의 능이라기보다 주인 없는 무덤에
불과할 정도로 황폐해졌다.선조 때 신덕 왕후의 후손인 강순일에 의해
정릉의 위치가 확인되었다. 그 후 1669년(현종 10년)에
송시열의 상소로 비로소 종묘에 배향하고 능묘로
봉심(奉審)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경석 등의 상소로 능을 수리하고,
재실을 중건하여 수호군을 정해주기에 이르렀다.
출처 눈높이 백과
우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정릉
홍살문
신도와 어도
릉참봉
조선 왕조의 벼슬자리 가운데 하나.
종9품으로, 제일 낮은 벼슬이다. 왕의 무덤인 능을 지키고
보살피는 것이 주 업무.
물론 보통은 능참봉이 양반 벼슬아치 체면에 직접 손수 벌초같은
육체노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아랫사람으로서 능에 소속된 수복이나
수호군[1]이 있어서 이런 사람들을 관리하는 일을 맡는다. 능에서
제사를 지내면 준비를 하는 일도 맡는데, 대략 한달 전에 한양에
올라가서 축향(祝香)을 받아와야 했다. 왕이 능행을 오면
마중도 나가야 한다.
왕릉의 수리공사를 할 때 관리 감독도 맡았다.
선왕의 무덤이니 만큼 잘못 관리하면 목이 달아난다. 큰 나무
한 그루를 손상시키면 3년간 유배, 두 그루를 손상시키면 천리
밖으로 귀향간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따라서 능 수호군을 시켜서
벌목을 막는 것도 능참봉의 일이다.
비록 미관말직이지만 임금의 능을 관리한다는 상징성이
매우 컸기 때문에, 나이가 어린 사람보다는 연륜이 있는
사람이 임명되었고 장래 경력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녹봉은 매달 쌀 열말에 콩 닷 말. 그리 많지는 않았기 때문에
빚을 지기도 했다.
초야에서 이름을 떨치던 남명 조식이 처음으로 받은 벼슬이다.
물론 죽어서 추증받은 벼슬은 영의정 .
능보다 격이 낮은 원(園)에는 역시 종9품인
수봉관(守奉官)이 지키게 되었다.
참봉의 권력
"참봉어르신"
조정에서는 쳐주지도 않을 만큼 매우 낮은 미관말직이지만,
이것도 벼슬은 벼슬이며 왕릉을 관리한다는 특성상 지역 사회에서는
대단한 권위를 가지고 뻐길 수 있게 되는 벼슬이다. 일단 벼슬자리에
있는 만큼 동네 양반들인 진사 생원과도 격이 다르다
일단 사후에는 자기 신위에 "학생부군신위"에서
"학생" 대신에 "능참봉"이 붙게 된다.
일단 왕릉 주변에서는 완장 질이 가능하다. 왕릉 근처에서
사냥이나 나무베기 같은 짓을 하다가 걸리면 그 자리에서
그냥 치도곤을 때릴 수 있었다. "네, 이놈! 네놈이 감히
선왕을 모신 능에서 뭐하는 짓거리냐! (내가 다음에 임금님
왔을때 일러바쳐 줄까?)"라고 버럭! 하면 어지간한 인간은
오금이 저려서 벌벌 떨 것이다. 뭐 이런거 감시하는게
바로 능참봉의 업무지만.
능참봉은 짭짤한 재미가 적지 않았다. 왕릉에는 효행사찰이라
하여 왕릉에 묻힌 왕과 왕후의 명복을 비는 절 이 딸려 있으며
절에서 제사에 소요되는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서 토지도 딸려 있다.
이런 땅은 문전옥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감독하려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보내야 한다.
이렇게 관리를 담당하는 효행사찰의 추수관을 임명하는 역할은
능참봉에게 있다. 이 추수관이 되면 소작인들의 대접, 선물,
그리고 은근슬쩍 떼어먹는걸 할 수 있고, 아무튼 이것도
여러가지로 해쳐먹을게 많다. 그렇다보니 능참봉에게 아부를
하는 사람이 수없이 쌓이게 되는 것이고, 추수관이
떼어먹은 것의 일부는 능참봉에게 돌아오게 된다.
능참봉의 고생
여담으로 왕이 효성이 깊으면 깊을수록 고생하는 벼슬이다.
이런걸 빗댄 말로 "(모처럼) (여든에, 칠십에) 능참봉을 하니까
거둥이 한 달에 (열아홉, 스물아홉) 번이라."는 속담이 있다.
늙은 나이에 마침내 능참봉 벼슬이나 해서 드디어
벼슬자리에 올랐는데 왕이 한달에 스무번도 넘게 능행을
했으니 얼마나 고생이 심하겠는가? 이처럼 실속없이
고생만 하는 일을 빗댄 말이다.
이 말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을 자주찾아 수원
지역에 나돌게 된 말이라고 한다.
능참봉에 얽힌 민화
정조는 "수원 능참봉[3]은 한 끼에 닭 한 마리"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그래서 사도세자의 무덤을 돌보던 능참봉에 관한 민담이 생겨났다.
왕씨 성을 가진 능참봉이 지나가던 과객에게 관상을 보았는데
며칠 뒤에 죽을 상이라는 이야기를 들어, 또는 밤중에 꿈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타나 사도세자능을 껴안고 있으라는
말을 들어서 능참봉은 비오는 가운데 묘지를 껴안고 있었다.
그런데 궁궐에 있던 정조가 문득 비가 오는 것을 보고
"내 아버지는 비오는데 추운 무덤 안에 누워게시는데
능참봉이라는 놈은 따뜻한 방 안에 있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선전관을 보내 "능참봉에 방 안에 가만히 누워있으면
죽여버려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선전관이 와서 보니
능참봉이 기특하게 비를 맞으면서 무덤을 지키고 있기에,
돌아와서 보고를 하였고 정조는 무척 기뻐하며 상을 내렸다고 한다.
다른 버젼의 전승도 있다. 비가 억수로 오던날 박경인이라는
능참봉이 잠을 자다 조상님의 꾸중을 듣고 사도세자 능에
나가 보니 억수비에 뗏장이 벗겨지고 흙이 패여나가는 중이었다.
사람을 모을 틈도 없이 미친놈처럼 밤 새도록
능을 끌어 안고 있었는데, 마침 폭우에 아버지
무덤이 걱정된 정조가 선전관을 보냈다나 뭐래나.
폭우에도 자기 몸 안 사리고 관리하는 것에 감동한
정조가 수원 능참봉만 특례로 종6품으로 대우해주었다고 한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쪽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아무리 왕이
최고 지존이라 하더라도 조선은 나름 법치가 확립된
나라라 군주가 신하를, 혹은 양반이 노비를 마음대로
죽이거나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정조.의 효성과 잦은
능행이 만들어낸 전승중 하나.
여기까지 봤으면 알겠지만 이런 아들을 둔 사도세자는
죽어서나마 호강했지만 그 능참봉은 고생길 훤했을
거란 건 알 수 있을 것이다.
영조 역시 어머니 숙빈 최씨의 소령원(昭寧園)을 능으로
승격시키고자 했지만 아버지 숙종 이 후궁을 왕비로 추증하는
것을 절대 하지 못하도록 유명을 내렸기 때문에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에 대한 야사가 있다.
영조가 백성들과 대면해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나무꾼을 만났다. 나무를 어디서 베었냐고 하자
"소령릉이 있는 곳 근처에서 베어 왔습니다요."라고 말하였다.
나무꾼이 일자무식해서 원과 릉을 구분하지 못하고
임금의 어머니 묘이니 릉이라고 생각한 것. 그러자
영조는 자신의 어머니를 존대해줬다며 크게 기뻐하면서
그 나무꾼에게 상금과 소령원 수봉관 벼슬을 내렸다는 이야기.
현대의 능참봉
현대에야 당연히 없어졌지만, 빗대어 말하기도 한다.
조선왕릉 이외에도 삼국시대, 고려 등 역대 왕가들의 왕릉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을 문중에서 능참봉이라 불러준다.
이 경우에는 대부분 문화재청 소속 공무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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