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한국전쟁의유엔군

이모르 2020. 12. 14. 17:43

 

 

 

 

6.25전쟁 당시 참전국은 1951

초까지 총 16개국이었다.

군대파견을 신청한 국가 21개국 중 실제로 파병을 한

16개 국가의 분포는 미국, 캐나다 북미 2개국,

콜럼비아 남미 1개국,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아시아 4개국, 남아공화국, 에티오피아

아프리카 2개국, 영국, 벨기에, 프랑스, 그리스,

룩셈베르그, 네덜란드, 터키 유럽 7개국 이다.

 

이들 참전국들은 유엔이 요구하는 최소규모인

1개 대대 병력( 1,200) 이상을 파견하였다.

주요 참전병력은 1953년을 기준으로

영국 약 1 4,200, 캐나다 약 6,100여 명,

터키 약 5,500여 명, 호주 2,200여 명 등이다.

1953년까지 한국전에 참여한 연합군은 미국을 제외하고

 39천여 명에 이르며, 미국을 포함할 경우

 34 1천여 명에 이른다.

또한 유엔 결의문에 따라 회원국 및

국제기구들이 각종 지원을 하기

시작했는바, 5개국(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이 병원 혹은 병원선

등 의료지원을, 그리고 40개 회원국과

1개 비회원국(이탈리아) 9개 유엔전문기구가

식량제공 및 민간구호 활동에 참여하였다.

중국의 개입이후 미국은 나토(NATO) 증강 등의

약속에 비추어 유럽국가와 기타 회원국들의

참전을 요청하였으나, 중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의 참전은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필리핀, 태국 등 4개국에 국한되었다.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은 그들이 집단안보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참전 여건이 되지 못하였다.

유엔은 또한 1951 8월 총회 결의 제500호를

통해 중국과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를 채택하는 등

다각도의 전쟁지원책을 강구하였다.

개전 초기 미군을 중심으로 각국 참전병력은

한국군과 함께 전투에 임했다.

하지만 전선은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가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9 15일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을 발판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낙동강 전선에서의 총반격작전과

인천상륙작전으로 9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10 1일에는 38선을 돌파하여 이후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중국(중공군)의 전면적 개입으로

1951 1월 연합군은 다시 남쪽으로

후퇴하였고 서울이 다시 북한군의

수중으로 들어가기도 하였으나 3

15일 다시 수복하였다. 이후 전쟁은

점차 소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위키백과)

 

 

유엔기

 

 

 

 

 

미군

한국 전쟁(韓國戰爭, 6·25 전쟁 북한  조선 전쟁/조국해방전쟁

 영어 Korean War, 중국어朝鮮戰爭, 朝戰 일본어 朝鮮戦争

러시아어Корейская война)은 이승만 정부의 대한민국과김일성이

내각총리였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자 자기 주도의 민족통일을 이루고자

다툼이 있을 때, 38선 부근에서 간헐적으로 국지전을 벌이다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대한민국에 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습적인 침공을 감행하면서 한반도를 전장으로 하는 전면전으로 확대되다가,

1953년 7월 27일에 채결된 정전협정으로 휴전 중인 전쟁이다.

휴전 이후로도 현재까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의 물리적혹은

심리적인갈등은 지속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공산·반공 양대 진영으로 대립하게 된

세계의 냉전적 갈등이 폭발한 대표적 사례로, 냉전(冷戰)인

동시에 실전(實戰)이며, 국부전(局部戰)인 동시에 전면전(全面戰)이라는

복잡한 성격을 가졌다. 이는 UN 군과 의료진을 비롯해 중국과소련까지 참전한

제3차대전에 가까운 전쟁이다.

 

한반도 를 지나는 북위 38도선이북 지역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38도선 이남 지역을 대한민국이 각각 점유하고 있었는데,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뚱과 소비에트 연방

스탈린의 협의와 지지를 얻어 치밀한 계획하에 남침을 준비한 북한의

김일성은 소비에트 연방에서 지원한 전차를 앞세워 조선인민군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38도선과 동해안 연선(沿線)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대한민국을 기습 남침하였다.

북한의 남침은 때마침 냉전으로 긴장되어 있는 전 세계에 미친 바,

파문은 참으로 전에 없던 것이었다. 유엔은 미국을 주축으로

바로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결의82호를 의결하고 이 전쟁에서

한국을 원조하기로 결정하고 파병하였다.

7월 7일 더글라스 맥아더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다

 

.북한군은 중부지방과 호남지방을 모두 휩쓸었다.

이에 한 · 미연합군은 낙동강방어선에서 최후의 결전을 전개하였다.

한 · 미연합군은 더글라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평양에 이어 압록강 부근까지 점령했으나,

중국인민지원군이 개입하여 전세가 요동치게 되었으며, 그 와중에

거창양민학살사전 국민방위군사건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3년 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수많은 군인 및 민간인이

사상하였고, 대부분의 산업시설 들이 파괴되는 등

양측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그 결과로 남·북 간의 적대적 감정이

커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정전협정으로 인하여

군사분계선 을 사이에 두고 양측은 전쟁을 중단하였다. 현재까지

서류상으로 정전 상태지만, 정전 이후에도 쌍방 간에 크고

작은 국지전인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

2013년 10월 24일 평화문제연구소 창립 3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에서

청샤오허(成曉河) 중국인민대학 교수에 의해 김일성은

1965년 제2차 한국 전쟁을 계획했지만 중국 공산당이 거부했다는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의 기밀해제 문서(No.106-01480-07)가 공개되었다.

 

 

 

 

카나다군

1. 개요
올해는 한국과 캐나다간 수교 40주년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캐나다군의 한국전 참전 역사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역사적으로 캐나다사람들이 한국에 가장 많이 갔던것은 한국전쟁당시이다.

6.25동란 기간중 50년 7/30일 해군 참전을 시작으로 53년 휴전시까지

총 26,791명을 파병하여 UN 깃발아래 참전한 16개국중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은 수의 군대를 파병한 나라가 되었고

휴전후 55년까지는 약 7000명이 추가 파병되었다.

2. 전사자 516명
캐나다는 한국전에서 516명의 희생자를 냈다. 전사자

중 378명은 부산의 UN묘지,

16명은 U.N묘지내 무명용사묘역 그리고 24명은 일본 오끼나와의

영연방 전쟁묘지에, 93명은 캐나다 전역에 묻혀있으며 나머지

5명은 해상에서 실종된것으로 종결되었다.
캐나다군은 해군. 공군. 육군순으로 파병됐다. 해군은 7/4일

유럽순방을 준비중인 함대에서 구축함 3척을 선발, 극동으로 출동시켰다.

이플함정은 긴 항해끝에 진주만을 경유해 7월 30일 한국해역으로 진입.

미 극동해군에 배속되었다.
 

캐나다 구축함이 한국으로 항해하고 있을 무렵인 7월 중순경

캐나다정부는 UN사무총장의 추가파병 요청을 수락했다.

이에 따라 공군은 7/21일 제 426항공 수송대를 파병.

미국과 일본사이를 왕래하면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도록 했으며,

공중전 경험이 있는 조종사 22명을 선발해 미공군에 파견했다.
그러나 캐나다는 7/20일 미국으로 부터 1개여단 규모의 지상군

파병요청을 받고 난관에 봉착했다. 당시 캐나다는 3개보병 연대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실제 각연대의 병력은 1개대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캐나다는 8/7일 지상군 파병을 결정하고

다음날부터 지원자를 모병한 결과, 11월 초순 3개연대에서 각각

1개대대를 차출하여 11월21일 25여단이 창설됐다. 제25여단이

출동준비에 바쁠무렵, 북진중인 유엔군이 한.중 국경선 부근까지

진격하자 종전을 예상하고 참전을 보류했다.
그러나 이어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하게 되어

11/25일 PPCLI (Princess Patricia Canadian Light Unfantry)

제 2대대의 참전을 결정했다. PPCLI 제2대대는 파병결정과

동시 씨애틀항을 출발, 23일간의 긴 항해끝에 12/18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로써 캐나다는 비록 소규모이지만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어 세번째로 육해공 삼군을 한국전쟁에 파견한 나라가 됐다.

사실 50년 6월25일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국과 UN이

북한의 남침을 막기위한 조치를 강구하자 UN회원국중

가장 먼저 이를 적극지지하고 나선 나라가 캐나다였다.

3. 캐나다군 전투상황
1951년 4월 하순 서울을 향해 진격하던 중공군은 가평강

양쪽 가파른 고지를 방어하던 캐나다군과 호주군을 공격했다.

미군탱크와 뉴질랜드 포대의 지원을 받은 호주군은 용감히 싸웠으나

워낙수적으로 열세, 4/24일 저녁 철수하고 말았다.

그러자 중공군은 캐나다 PPCLI 제2대대를 공격목표로 삼았다.

24,25일 저녁 중공군 약 6천명이 캐나다군을 공격해왔다.

캐나다군은 박격포와 포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진지를

사수했으나 10명의 전사자와 23명의 부상자를 냈다.

캐나다군은 한때 적군에 완전히 포위당해 비행기가

낙하산으로 떨어뜨린 식양과 탄약으로 버티며 싸움을 계속했다.
26일 미군이 위기직전의 캐나다군을 구했다. 캐나다군은

중공군의 주요공세(춘계대공세)를 막는데 기여했다.

오타와의 전쟁박물관(Canadian War Museum)내 한국관(Korea Gallery)과

한국용산 전 육군본부 부지에 소재한 전쟁박물관의 가평전투

설명에 의하면 가평은 캐나다 육군이 밀려오는 중공군과의

격전을 벌인 여러 중서부 지역중 대표적인 곳이다.

한국군전사와 UN군전사에 의하면 캐나다군은 이 전투로 중공군의

춘계대공세를 저지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이 공로로 부대표창을 받았고 가평에 세워진 참전비도

이를 기념하기 위해 박정희 전대통령 집권당시 6.25동란기념

16개국 참전기념 유적비 건립사업 일환으로 세워진 것이다.
오타와에 소재한 전쟁박물관 3층에 설치된 한국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가평 전투부스(booth)다. 이곳에는 당시

소총이 진열되어 있고 벽에는 위생병이 부상병을 치료하는

모습이 담긴 그림이 있다.

한국관에서 특히 시선을 끄는 전시물 중 하나는 중공군이

사용하던 소련제 OSHK 중기관총 (heavy machine gun) 이다.

50년 11월 노획된 이 기관총을 솜누비옷 군복을 입은

중공군이 손질하는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프랑스군

 

유엔군 프랑스 대대(프랑스어Bataillon français de l'onU; BF-I'onU)는 한국전쟁 

당시 프라스가국제연합결의에 따라 대한민국을 지원하기

파견한 1개 대대 규모의 지상군이다.

주로 미국2보병사단 23 연대에 배속되어 전투를 치렀고,

추가로 한국인 들로 구성된 1개 중대를 배속받았다.

이외에 프랑스는 구축함 1척을 파견하였다

 

프랑스는 7월 22일 극동함대소속 구축함 1척(La Grandiere)를

먼저 파견하였다.

이 함정은 7월 29일 한국 해역에 도착했고, 미국7함대에 배속되었다.

8월 25일, 프랑스 정부는 구축함 외에 지상군의 파견도 결정하여

1개 대대 규모의 지상군을 파견하기로 하고,

현역병과 예비역 중에서 지원자를 모집했다.

편성은 9월 18일에 끝났고, 3개 소총 중대와 본부중대 지원 중대로 구성되었다.

소총중대는 1중대가 주로 해병대 출신으로, 2 중대는 파리경비대 출신,

3중대가 공수부대와 외인부대 출신으로 구성되어 각기 다른 특성을 보여주었다.

총 병력 수는 약 400명이었다.

프랑스 대대는 10월 25일 프랑스 본토의 마르세유에서

출항하여 11월 29일 부산에 도착했다. 약 2주간에 걸쳐

현지 적응 훈련을 마친 프랑스 대대는 미국2보병사단

 예하 23연대에 배속되어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활동

미 2사단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는 1951년 1월 1일,북한5군단 의

신정공세 저지를 위해 강원도 횡성북쪽 전투에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이후 프랑스 대대는 주로 중부 전선에서 고지전에 투입되어 격전을 치렀으며,

특히 자평리 전투가 유명하다.

이 전투는 2월 11일 지평리에 고립된 미 2사단 23연대와

프랑스 대대가 3일간 계속된 압도적인 중공군의 포위 공격을 저지하고

지평리를 사수하여, 중국군의 의도를 분쇄한 전투였다(당시

중국군은 지평리-여주 선을 점령하여 유엔군을 동서로 분단하려 하였다

 

이 부분의 본문은 지평리 전투 입니다.

지평리 전투 후 프랑스 대대는 부대를 재정비하고,

홍천북쪽 자은리에서 홍천-인제간 도로 방어 임무에 투입되었다.

5월 17일 이른바 부채살 계곡에서 중국군의 5월 춘계 공세를 저지하려다

퇴로가 차단되어 적중에 고립되었다. 대대는 미 23연대와 함께 중공군의

차단선을 돌파하고 5월 21일 한계리 남동쪽 643고지 부근으로 철수하였다.

후방으로 물러나 재정비와 휴식을 취한 프랑스 대대는

단장의 능선 전투 에 투입되었다.

 미 23연대가 공격에 실패하고 물러난 탓에 프랑스 대대가 투입된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대대도 9월 15일과 26일 공격에서 1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능선 점령에 실패했다. 부대를 재정비한 프랑스 대대는

10월 6일 931고지, 10월 13일 851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고, 단장의 능선 전투는 종료했다.

 

 

 

그리스군

 

그리스는 지리적으로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로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이 때문에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 소련과 그 위성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는

국내 공산당과 내전을 치르기도 했다. 그리스는

한국과 유사한 면이 많이 양국의 우호관계는 밀접했다.

 

그리스는 한국전에 지상군 1개 대대와 수송기 1개 편대를 파병했다.

그리스 대대는 1950 12 9일 부산에 도착해 적응훈련을 마치고

미 제1기병사단에 속해 격전을 치렀다. 대대는 이천 부근 381고지

방어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려 전투력을 인정받았으며, 이후 적의 주요

거점인 임진강 부근 고양대, 대노리고지를 놓고 수차례 공방전을 거듭했다.

그리스 제13수송편대(C-47 7) 1950 12 1 DFL본에 도착한

이후 장진호 전투를 지원했으며, 미 해병사단을 직접 지원해 전

,사상자를 후송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제13수송편대가

이용한 활주로는 고토리와 하갈우리에 설치된 것으로,

모든 면에서 아주 열악했다.

그리스는 당시 안으로는 소련의 힘을 받은 공산세력과

내전을 벌였으며, 밖으로는 국경지역에서의 터키와의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수차례의 내전은 잠잠해질 무렵 내전으로 다져진 실전강한

병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파병을 하려고 했는데, 당시 먼저 파병한

터키의 큰 규모에 발끈해서 실제 계획보다 많은

규모를 파병하게 되었다고 한다.

 

 

 

영국군

 

“감개무량하다. 마음이 심하게 동요되고 있다.

” 235m 높이 언덕의 산비탈을 올려다 보며

해리 호크스워스(영국인, 83세)가 말했다.

이 언덕은 한국과 북한의 경계인 비무장지대에서 남쪽으로 불과

수마일 떨어져 있는 시골 마을에 위치해 있다. 그는 “미안하지만

마음이 벅차 올라서 차마 설명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인 호크스워스가 이렇게 감개무량해 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1951년 4월 그의 부대는 1945년 베를린 함락

이래 최대 규모로 꼽히는 중공군 공세에서 전멸했다.

한국군사사연구소에서

‘아마게돈 노스 오브 서울(Armageddon North of Seoul)’이라고

명명한 중국-북한 합작 대공세는 한국전쟁에서 한방에 승리하기

위해 계획된 것으로, 중공군 백만명 중 3분의 일을

전선에 투입한 중공군 공격이다.

중공군의 목표는 영국군 진지를 점령하고,

미군 부대의 동쪽으로 잠입하며,

한국에 배치된 UN군을 싹쓸어 버려 5월1일 노동절까지

서울을 함락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전쟁 승리 작전이었다.

하지만 영국군과 벨기에군으로 구성된

글로스터 연대(보병 29여단)이 전략적 입지인 임진강 유역에

배치돼 있다는 사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작전이었다.

7 대 1이라는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글로스터 4개

부대는 중국의 육군 24개 대대로 이루어진

제63보병부대를 3일 동안 막아냈다.

이는 유엔연합군이 확대 군사 활동선까지

후퇴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여주었다.

호크스워스의 부대가 없었다면 후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언덕을 통과하는 핵심 경로를 지키고 있던 글로스터는 적군에 포위됐다.

살아남은 군인들은 4월 24일 언덕235에서 다시 뭉쳐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들은 탄환이 바닥날 때까지 싸우다가 적군이 들끓는

시골 마을을 통과해 탈출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부대는 전멸했다. 군인 622명이 사살되거나 포로로 붙잡혔다.

호크스워스는 중국의 정치 수용서에서 2년간 수감 생활을 했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글로스터’ 최후의 전투는 전설이 됐다.

글로스터의 전투는 그리스군의 전설적인 최후 전투인 테르모필레 전투와 비교됐다.

유엔군 사령관인 미국의 제임스 반 플리트 장군은

이 전투를 “현대전에서 용감한 부대의 가장 훌륭한 본보기”라며 극찬했다.

 

 

참호를 파는 호주군

 

 

무공훈장 수여자

패트릭 존 오코넬 하사

호주군

 

호주군은 해체 및 1945년 이래 재정상의 제약으로

호주 육군은 전선에 배치될 준비가 된 부대가 없었다.

1950, 일본의 영연방 점령군에 배속된, 인원이

부족한 호주 부대가 한국의 위기에 대처하도록 동원될 수 있는

유일한 병력이었다.

입대 조건상의 제한 및 점령군 병사들의 많은

수가 불충분한 준비 상태여서 전선에 즉시 배치될 수

있는 병사들은 거의 없었다. 준비되지 못한 소규모의 병력을

전투에 투입하는 것을 주저한 호주 육군은 여러 달 동안

한국으로의 군대 파병을 보류하였다. 한편 그 사이에

호주 육군 사상 최초로 정규 보병 부대들이 창설되었고,

그 중 제3대대(3RAR)가 한국전쟁에 파병되어 임무를

수행할 부대로 선발되었다.

3RAR의 병사들은 대부분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로,

모두 한국전쟁 참전에 자원하였다. 1950 10,영연방

제27여단의 필수적인 부대로 운용되던 3RAR

부산 방어선 반격후 와해된 북한 육군을 추격하는

임무에 참여하였다.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자 3RAR과 다른 모든

유엔군은 힘든 전투를 치러야 했다.

1951 7, 영연방 제1사단이 창설되었고,

호주 육군은 이 사단의 제27여단에 2개의 보병 대대를

기여하였는데 나중에 제27여단은 제28여단으로 다시 조직되었다.

무엇보다도 한국전쟁은 노련한 병사들로 구성된 호주군 대대들이

일관된 능력으로 전투에 참여한 보병의 전쟁이었다.

 비록 호주군에게 더 높은 작전 지휘의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지만,

호주 육군은 한국 내 영연방군 지도부에 호러스 로버트슨 중장을

선두로 한 총 4명의 호주군 중장들을 참여시킴으로써 가장

높은 통솔권에 지도자를 기여하였다. 3년에 걸친 한국전쟁 동안

호주 육군은 10,657명의 병사들을 전선에 배치하였다.

이 중 276명이 전투 중 사망하였고, 16명이 다른 원인으로

사망하였으며, 1210명이 전투 중 부상당했고 23명이

전쟁포로가 되었다. 한 명은 전쟁포로로

억류되어 있는 동안 사망하였다.

 

 

 

 

 

위는 121명의 사망한 참전용사의 이름입니다.

참전용사 중 총 121명이 사망하고 536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이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이 땅의 평화와 자유가 있었을까요

이티오피아군

 

1951 5 6일 머나먼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서 동양의

작은 나라의 평화를 위해서 그들은 목숨을 걸고 한반도로 오게 됩니다.

머나먼 아프리카에서 왜 그들은 이곳까지 파병을 왔을까요?

1930년대 에티오피아는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해 국제연맹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무위로 끝나게 되었고 결국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에 의해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쓰라린

역사의 경험으로 비록 자신들은 도움을 받지 못하였지만,

자신들의 경험을 겪게 하지 않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파병을 결정하게 됩니다.

에티오피아는 6·25 전쟁 기간 동안 총 6,037명을 파병하였고,

253회 전투를 치렀습니다. 강뉴 부대는 전쟁 기간 중 253회를 전부 승리하였고

또한 단 한 명의 포로도 발생하지 않은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활약은 위에 보이는 참전군인이 기증한

기념메달과 훈장을 통해서 볼 수 있는데요. 파병 온 에티오피아

부대들은 미합중국 대통령 부대표창과 2번의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았고 일부 장교들은 미합중국과 대한민국으로부터

따로 훈장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위는 121명의 사망한 참전용사의 이름입니다. 참전용사 중

 121명이 사망하고 536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이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이 땅의 평화와 자유가 있었을까요

 

 

16연대에 속한 사격 162중대의 마오리 족 포수들이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짓고 있습니다

(출처: The Encyclopedia of New Zealand).

 

뉴질랜드군

 

6·25전쟁 당시 한국을 돕기 위해 참전한 유엔군 중, 뉴질랜드 군은 약 6천명이었습니다.

뉴질랜드 내에서는 6·25전쟁 때 한국에 파견된 뉴질랜드

육상 부대를 K Force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오리 족이 전쟁에 참전한 것은 6·25전쟁이 처음은 아니었는데요.

1865년에 뉴질랜드에서 자원부대를 모집할 때, 이들 중 일부는 마오리 족이었으며.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에 자원하여 파견된 J Force라는 이름의 뉴질랜드 군 중

마오리 족은 별도의 분대를 구성하기도 했지요.

 

세계2차 대전 이후로는 교외, 지방에 살던 마오리 족의 많은 인구가

도시로 이주해오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에 유럽과 마오리 족의, 분리되어 있던

사회가 전체적으로 점점 통합되어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마오리 족의 고유한 전통 문화는 뉴질랜드의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요.

아무튼 이렇게 많은 마오리 족이 도시로 이주해오는 경향은 군대에 더 이상

마오리 족만을 따로 편성하지 않고 정규군에 하위 집단으로서

편입되어가는 배경이 됩니다.

 

이제 그들의 더 이상 소()문화(sub-culture)가 아니게 되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국가를 위해 싸우는 일에도

더욱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된 것 같습니다.

1950년의 마지막 날, 뉴질랜드의 K Force는 부산에 상륙했습니다.

북한의 남침을 유엔군과 함께 저지하기 위해서였지요. 처음 뉴질랜드 군이

한국에 참전했을 때 마오리 족의 비율은 불과 7.5%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도착한 추가 병력에서는 4명 중 1명이

마오리 족이었을 정도로 그 비율이 매우 높았지요.


마오리 족은 6·25전쟁이 진행되어 가며 여러 연대에 하위 집단으로서

편입되어 가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예를 들면 16연대의 포수반,

운송 10중대의 수송 소대에 속해서 자신들의 역할을 완수했지요.

또한 일부 소수의 마오리 족은 해군의 호위함의 선원이었다고도 합니다.

앞서 언급했듯, 갈수록 추가병력에는 마오리 족의 비율이 높아져서,

전체적으로 봤을 때 6·25 전쟁에 참전한 마오리 족은 전체 병력의

 7분의 1에 달했다고 합니다. 당시 마오리 족은 전체 뉴질랜드

인구의 6%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많은 마오리 족

분들께서 한국을 도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한국으로 달려온 것이지요.

 

마오리 족의 활약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마오리 담당 부서가

발행하는 ‘Te Ao Hou’라는 정기 간행물 6(1953년 발행)에 실린

다음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콜럼비아군

 

콜롬비아 작가 모레노 두란(1946~2005)의 소설 <맘브루>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콜롬비아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전쟁에서 죽은 장교의 아들인 역사학자가 아버지의

동료 군인들을 만나 증언을 듣는 형식이다.

소설이 시작되면 역사학자 비나스코는 비르힐리오 바르코 대통령이

탄 전용기에 동승해 서울로 향한다. 태평양 상공 1만 미터

가까이를 나는 비나스코의 눈에 36년 전 콜롬비아 병력을 태우고

부에나벤투라를 떠나 부산으로 항해했던 에이킨 빅토리호의 환영이 보인다.

소설은 참전 군인들의 증언과 비나스코 자신의 서술이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비행기 안에서 이루어지는 현재의 공간적 이동과 병사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 과거로의 시간 여행은 크고 작은 두 개의 목적을 지닌다.

좁게는 정확히 어떤 상황에서 죽었는지를 모르는 아버지의

사인을 확인하고자 함이고, 넓게는 콜롬비아군의 한국전 참전을

둘러싼 진실을 밝히고자 함이다. 물론 둘 다 공식 역사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을 가리거나 왜곡한다는 것이 비나스코의 생각이다.

그 진술을 통해 드러나는 진실은 참전 동기에서부터 공식

 역사와는 차이를 보인다. 증언자 한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유가 범죄인데 머나먼 아시아 국가로 가

자유를 위해 죽으라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파병 당시 제 나라 국민의 자유를 금기시하던 독재자

대통령은 “미국의 압력과 매카시 상원의원의 히스테리”에

굴복해 4천명 넘는 병력을 한국전쟁에 몰아넣었다.

전쟁터에서는 콜롬비아군이 용맹하게 적군 방어선을 뚫어

놓으면 탱크를 앞세운 미군이 뒤에서 치고 나와 전공(戰功)을 가로챈다.

고지를 점령한 콜롬비아군 두 중대가 교대를 준비하던 중 중국군이

기습 공격을 가하자 “혼란의 와중에 아군끼리 서로 총질을” 해대는

일도 벌어진다.

갖은 희생을 무릅쓰고 간신히 고지를 점령하자마자

기지로 후퇴하라는 명령이 내려오기도 한다.

이런 전투 상황의 혼란보다 소설에서 더 강조되는 것은

젊은 병사들의 들끓는 성욕과 그를 해소하기 위한 몸부림들이다.

 

 

 

 

 

 

 

터키군

터키는1949 8 13일 대한민국 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였고

1950 7월에 한국전 참전을 결정하였다. 터키는 한국전쟁 시,

미국 다음으로 큰 규모로 파병하였고, 희생자도 미군 다음으로 컸다.

1980년대에 터키는 대한민국과일본 같은 동아시아의 경제 강국과 자동차나

고속 열차같은 운송 장비의 공동 생산에서 전자 제품, 가전 제품,

건설 자재, 군사 설비에 이르기까지

여러 산업 분야에서 점차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모두 2,837 (재외국민 2,820 , 시민권자 17 )

한민족들이 터키에 거주(2010 12월 기준)하고 있다.

또한 터키와 대한민국은 "피로 맺어진 형제,

한국"(칸 카르다슈 코리아)라고 부르면서

서로의 동맹과 돈독한 우정을 중요시하고 있다.

 

 

룩셈브르크군

룩셈부르크 소대는 유엔 참전국 중에서 규모가 가장 작았던 

미니 부대였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는 이 유엔 사무총장과

미 국무부는 참전을 희망하는 국가라 할지라도 그

 병력은 작전에 기여할 수 있는 정도로 최소 1천 명은 돼야 한다.”

입장을 전달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런 견해는 유엔 회원국들에도 전달됐다.

이 최소 기준에서 예외가 된 국가가 룩셈부르크였다. 룩셈부르크는

인구가 20여 만 명에 불과한 까닭에 많은 병력을 파견하기가 곤란했으며,

사전에 벨기에와 협의해 벨기에 대대에 1개 소대 병력을 포함시켜

참전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였다.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 룩셈부르크 소대는 전쟁

기간 내내 48명의 병력을 유지하며, 벨기에 대대에

소속돼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태국군

 

태국의 한인들은 해마다 910월엔 눈코뜰 새 없다.

9월말 추석 잔치, 101일 국군의 날, 3일 개천절,

22일 태국군 한국전 출정 기념 행사, 전사자묘소 참배,

참전협회 방문, 용사 자녀 위로와 장학금 전달 등으로 마치 한국전

파병 전야와 같은 숨가쁜 행사들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마침 북한이 잠수함을 침투시켜 무력 도발을 자행한 요즈음이기에

·태 교류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금년의 이런 행사들은 더욱 뜻이 깊다.

태국군은 연 15천여명이 참전,

138명이 전사하고 469명이 부상 했다.

 52 111일부터 12일간 중공군과 벌인

폭찹(PORKCHOP)전투에서 는 전사에 기록을 남기고 작은 호랑이

별칭을 얻기도 했다.

태국군은 휴전 뒤에도 56년까지 대대 병력이 전후

복구를 지원했고 72 5월 중대병력이 최종 주둔지에서 철수,

장장 22년간에 걸친 파병을 끝냈다.

한국전 참전협회 회원 면면을 보면 그들이 과연 최정예

엘리트 장교라는 말이 실감난다. 타놈 키티카초른, 크리앙사크 초마난,

차티차이 춘하반 등 총리 세 명과 현 부총리 차발리트 용차이유트와

솜분 리홍 등 부총리 다섯명이 나왔고, 국방장관 네 명,

차관급 이상 각료 20여명,장성급 인사 178명과 대령급 인사 40여명을 냈다.

또 현재까지도 장성 30여명이 현역 복무하고 있으며

육해공군 사령관 급장군 12명이 최근 군 인사가 있을 때까지

근무하고 전역했으나 앞으로 23명 이상 더 배출될 전망이다.

 

정치, 경제, 언론, 외교 무대에서 약 50명이 활약하고 있고,

특히 117일 있을 총선에서 차발리트 용차이유 트현 부총리와 차티차이

춘하반 전총리가 차기 총리 물망에 올라 참전협

회회원으로 4번째 국가 수반이 나올 전망이다.

 

부산항에 도착한 필리핀군

필리핀군

 

필리핀군은 1950 9 20일 미국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이때는 915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대반격 작전이

수행되면서 병력 수요가 급증하던 시기였죠.

필리핀 대대는 10여일 간의 적응 훈련을 마치고

후방지역에서 공산 게릴라 소탕작전을 벌였고,

14후퇴 뒤 전열을 정비한 유엔군의 반격작전이

다시 전개되자 서부전선을 중심으로 큰 전공을 세웠습니다.

필리핀군은 특히 전곡 진상리 전투(51 4 11),

연천 율동 전투(51 4 22), 적성 설마리

글로스터대대 구출작전(51 4 24),

철원 에리고지 전투(52 5 18), 양구 크

리스마스고지 전투(53 7 15)에서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벨기에

 

벨기에 대대는 1951년 초부터 미 제2사단에

소속된 영국군 제29여단에 배속돼 작전을 수행했다.

벨기에 대대는 수많은 전투에서 그들의 전문적인

전술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2월 공세 때 벨기에 대대는 임진강 북쪽의 중요

감제고지인 금굴산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좌측으로는

영국군 푸질리어 대대와 우측으로는 임진강의 가파른

단애를 사이에 두고 미 제3사단 제65보병연대와 접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벨기에 대대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좌측의 영국군 푸질리어 대대가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자칫

고립될 위기에 빠진 것이다.

이때 대대를 지휘하던 크레하이 중령은 당황하지 않고

금굴산을 지키면서 철수로를 확보했다.

그의 시의적절하고 침착한 지휘하에 벨기에 대대는

전차부대에 의해 확보된 도감포 교량을 통해 동쪽

미 제65연대 지역인 전곡으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벨기에 대대는 2일 간 금굴산 진지를 방어하며

중공군의 진출을 저지함으로써 서측 영국 제29여단의

철수를 도왔으며, 큰 인원손실 없이 위기를 벗어났다.

이 전투로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는 미국 대통령,

미 제8군사령관, 벨기에 국방장관의 표창을 받았다.

 

 

네델란드군

 

국방부에서 한국전쟁 참전국에 대한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1975 3 25~929일 사이에 6.25 한국전쟁 당시 가장 격렬한

전투를 치룬 네덜란드 군768명의 고귀한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빛나는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 영동고속도로 새말 인터체인지변에

 건립하여 1975 1029일 내무부로 이관 본 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네덜란드 육군은 1950 11 13일부터 1954215일까지 횡성,

원주,양구,금화지구 등의 전투에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고 귀국하였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에프타운 참전기념비

남아프리카 공화국 참전기념비/평택

 

세계 2 차 대전 당시 서베를린 봉쇄를 뚫는 데에 크게 기여한

남아공 공군은 1년 후, 이번에는 아시아 지역으로 참전 요청을 받게 된다.

 1950 6 25일 북한군이 대한민국을 침범하여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UN 에서는 미국의 제의를 받아들여 남한 측에 군사 지원을 동의한다.

1950  8  12 일 남아공 정부는 "하늘을 나는 치타" 로 불리는

남아공 공군 제 2 전투 비행단을 UN 에 제공하기로 발표했다.

이에 따라 1950 9 26 49명의 장교와 206명의 자원병이

 더반 항을 출항하여 한국전에 배치되기에 앞서 일본 요코하마의

존슨 공군기지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동부 아프리카 및 이디오피아,

이탈리아 시실리와 중동 등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조종사와 기술병들이었다.

 2 전투 비행단은 F-51D 무스탕 전투기와 이 후에는 F-86F

세이버 전투기를 이끌며 눈부신 성과를 기록했다 .

그들의 주요 임무는 미 공군 제 18 전폭격기 비행단

소속으로 편성되어 적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한 폭격 및

지상 목표 공격이었다.

1950 11 16 4 대의 F-51D 무스탕이 한국으로 출발하였고

3 일 후 부산 수영 비행장 K9 에서 첫번째 작전상 출격을 시작했다.

당시 UN 군 전선은 진격해오는 적에 밀려 퇴각 중이었다.

평양 동부 비행장 (K-24) 에서 수원 비행장 (K-13) 

진해 비행장 (K-10) 그리고 마지막에는 미 공군 18 전폭격기

비행단의 폭격기 기지가 된 오산의 K-55 공군 기지로

이동하며 살을 에는 듯한 한국의 매서운 겨울 날씨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남아공 전투기는 계속 임무를 수행했고,

혹한을 견디며 전투기를 정비하고 무기를 장착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오산에서 남아공 비행단은 캐나다 F-86F 전투기로 기종을 바꿨다.

1953  3  11  F-86F 세이버의 첫 출격이 있었다 .

남아공 비행대대는 이제 지상 목표 폭격 뿐만 아니라 압록강을

연하여 적 후방 지역 공중 차단과 정찰 임무를 수행하였다.

마침내 1953 7 27일 오전 11시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남아공 공군 비행단은 한국전 기간 중

 12,067 회 출격하는 기록을 세웠다.

UN 한국참전국 협회에 의하면 총 826명의

남아공인이 한국전에 참전했다.

243명의 공군 장교를 비롯하여 545명의 사병이 한국전에서

활약하였으며 38명의 육군 장교 및 사병은 영연방 사단으로 참가하였다.

37명의 남아공인이 한국전에서 목숨을 잃었고 포로 8명은 후에 귀환되었다.

이 중 11명의 유해가 부산 UN기념뵤지에 안장되어 있다.

전쟁 기간 중 97대의 무스탕 전투기 중 74대와

 4대의 F-86 전투기의 손실이 있었다.

1953 10 31일 남아공 공군은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위키백과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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