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보의불수 등산 권유를 뿌리치고 안방거사 노릇중 네이버에서 귀한 사진을 발견 옮겨 오려니..
관촌의 말대로 네이버 사람들 호환이 전혀 안되게.. 한시간 가까운 시간을 써서 간신히 옮겨 봅니다
영은문 전경 1900년
영은문은 중국사신을 환영하기위해 세워진 것이다,
영의문은 개화기때 애국지사 로부터 사대주의 표본이란 비난을 받아 철거되고
지금은 기둥 두 개만 남아있다
(오른쪽전주는 당시 중국 사신과 연락 수단에 사용됨)
독립문 모화관 주변
독립협회는 중국사신을 영접했던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고쳐 부르고
그일대를 독립공원으로 꾸몄다.
독립문
조선시대 중국 명(明)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慕華館) 앞에 세웠던 문.
1407년(태종 7) 송도의 영빈관을 모방하여 서대문 밖에 모화루를 세웠다가
1430년(세종 12) 모화관으로 개칭하여 그 앞에 홍살문을 세웠다.
1537년(중종 32) 김안로(金安老) 등 3정승이 계(啓)하여
모화관 남쪽 홍살문을 개축하여 영조문(迎詔門)이라 하였다가
1539년 영은문으로 고쳤다.
1896년 모화관은 사대사상의 상징물이라 하여 독립관(獨立館)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는데, 이때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
영은문의 기둥을 세웠던 초석은 사적 제33호로 지정되어 독립문 바로 앞쪽에 남아 있다
주초석은 방형의 배흘림 장초석(長礎石)인데 4방의 모를 죽여 8각같이 보이고
위에는 가구구조(架構構造)를 고정시켰던 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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