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세계가 감탄한 터키 포로들의 정신력

이모르 2021. 1. 22. 17:22

세계가 감탄한 터키 포로들의 정신력.

        

       

지난 4월, 6·25특집 TV 프로에서 터키 참전 용사인 슐레이만
비르빌레이라는 분이 60년 만의 한국 방문을 앞두고 자신이
한국 근무시 딸처럼 살피던 
한국인 여자 고아를 찾는 사연이
보도되었었다.

 


술레이만 씨와 어린 아일라 [지금의 김은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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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혈전장 평북 군우리 근처에서 부모를 잃고 떠도는
이 어린아이를 구한 25 세의 술레이만은 아이에게 아일라 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한국 파병 기간동안 친 딸처럼 길렀다.


1952년 한국 파견 기한이 다 된 술레이만은 아일라를 터키로
데려 가기 위해서 
여러 방법을 모색해 봐도 잘 되지가 않자
할 수없이 아일라를 
터키군이 수원에 세운 고아원
‘앙카라 학원’에 맡기고 떠났었다.

 


술레이만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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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참화 속에 엮어진 휴머니즘의 이야기는 술레이만이
어쩔 수없이 
귀국하여야하는 시점에서 영원히 헤어지는 것으로
끝날 것이었다.

그러나 부녀 이상의 정이 든 두 사람은 그 긴 세월을 서로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를 앙카라로 방문했던 방송국의 협력으로 아일라라고 불리던

한국 고아를 찾을 수가 있었다.
이미 손자들을 둔 아일라는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할머니가 된 아일라 김 은자 씨가 북받치는 울음 속에
슐레이만 씨와 부등켜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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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방문한 술레이만 부부는 방송국의 주선으로

여의도 앙카라 공원에서 
60년 만에 옛 아일라였던 김 은자씨와
눈물의 재회를 했다.

그 장면은 나에게 가슴이 뭉클한 감동을 주었다.

이 상봉을 계기로 참전 터키군의 활동을 테마로 글을
써보려고 했으나 
기회가 잘 되지 않았다.
오늘 그 기회를 가져본다.


터키 군은 6·25전쟁에 5,000명 규모의 여단을 파병해서
한국 방어의 일선에서 싸웠다.


터키군들은  군우리, 금량장, 퇴계원 등의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전사를 뒤져 보면 6·25전쟁 참전 터키군은 특히 백병전에
강한 것으로 
명성을 날렸었다.

 


한국 참전 터키 여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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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어키 군은 돌격 선에서 총검을 번득이며 적진으로 돌격해서

온전한 생존자는 물론이고 부상자 한 명 없이 섬멸해버리는
가공할 육박전 능력을 발휘했었다.


그러나 터키 군이 세계에 그 용맹함과 함께 이름을
드높게 날린 것은 
포로 생활이라는 극한 상활에서
발휘한 강철 같은 
군기와 강인한 정신력이었다.


한국 파병 터키 군은 1950년 10월 유엔군이 한창
북상할 때 
한국에 도착했었다.
그러나 타이밍이 안 좋았다.

 


1950년 10월 부산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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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북쪽으로 이동해서 미군 25사 예하 부대로서

전선에 
배치되었던 터어키 군은 11월 26일부터 12월 6일까지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연달아 격렬한 전투를 했다.

 


터어키 군 -참전국중 제일 많은 병사들이 콧수염을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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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의 한국 전투에서 터키 군은  와원, 신림리,
군우리 협곡,
그리고 선천등에서 연달아 벌어진 네 번의 전투에서 
잘 싸웠지만 
218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포로가 되는
큰 타격을 입었다
[매복을 당한 군우리에서의 피해가 제일 컸다,
 보유장비의 70%를 손실했다.]

 


터어키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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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말 초전 기습에 재미를 보아 다수의 포로를 획득했던
중공군의 이들 유엔군 포로 취급은 교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지금도 군사 심리전에서 연구되고 있는 차원 높은 특유의
세뇌 기술이 
적용되었다.
대륙에서 일본군과 장 개석군들 포로를 취급하면서
축적한 중공군의 노우 하우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던 것이다.
중공군의 미군 포로들과 터어키 영국군등의 포로들은 1950년울
지나 1951년도 중반까지도 그들의 수용소가 있었던
‘지옥의 골짜기’에서 엄청난 고초를 치렀다.

포로들은 추위로 지옥 같은 고통을 받았고 환자는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 나갔다.
식량이라고는 귀리나 옥수수 따위 곡물을
자루 채 던져주고 먹으라고 했으나 양이 형편없이 부족했다
굶고 병든 포로들을 중공군들이 중국에서가져 온 장 티프스가
파도처럼 덮쳐서 한 수용소의 미군 포로들이 절반이나
사망하기도 했다.

 

 

 

 

 

돼지는 구룹책임 사육제로 보급하였다

포로들에게 부식 조달이 좋아진 것은 1951년 여름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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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이 고착된 1951년 여름부터 보급도 좋아지고
병원 서비스도 
개선되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물질적인 상황을 개선하고 나서부터 중공군은
포로들을 ‘인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비인간적인 고문이나 지나친 강제 노동도 없었고 심지어
중공군이 
운영했었던 압록강가 벽동 포로 수용소는
보초병은커녕 울타리도 없었다.

 


압록강변 벽동 포로 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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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인도적인 처우 뒤에는 중공군이 노리는 목적이

숨겨져 있었다.

포로들은 하루 여섯 시간 씩 영어를 잘하는 강사로부터
정치 강의를 들으며 
미국 사회 구조의 차별성과 자본주의
비인간성을 강의 받으며 모국을 미워하는 심리를 가지게 되었다.

반면 세계 최대 빈국이었던 중국은 인간미 넘치는 이상사회라는
거짓된 이미지가 세뇌되었다.

 


지루하고 따분한 공산주의 선전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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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서 중공군은 미군 포로 사회에 끊임없는 동요를 일으켰다.

중공군의 교묘한 갈등을 부채질 하는 음모는 포로와 포로들
사이에서도 공작
되었다.
포로들의 조직 통제 기능을 무력화 시키는 조처로서 장교들의
특권을 모두 무시하는 관리 지침이 하달되었다.

“여기는 계급이 없는 사회다. 너희들은 모두가 평등하다! ”
이 조처에 철없는 미군 사병들은 당장 반응을 보이며 환호했다.

그들은 그 때까지 상관으로 모셨던 장교들의 등을 툭 치며
야유를 보냈다.
“어이-! 잭!”
선임하사님이나 소대장님 그리고 중대장님의 호칭은
땅 속으로 
버려져야 했다.
간부들에게는 은연중 굴욕적인 천하고 더러운 일을 시켜
사병들에게 경멸 당하게 만들었다.
포로들 자치 회장 격에는 자기 계급을 상사라고 거짓말한
질 안 좋은 일등병이 명색 '선거’로 임명되었다.
계급의 무시는 조직의 통제 내지 관리를 마비시켰다.
사회적 규범이나 개인적 염치를 챙기기 힘든 극한적인
포로생활에서 
각 인간들은 묶는 끈이 다 끊어지다 보니
미군 포로들 집단들은 
완전히 콩가루 집안이 되었다.
서로 의심하고 반목하며 갈등하는 오합지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중공군은 이를 바라보며 내심 흐뭇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세계 최강국의 포로들이 자기들이 손을 좀 쓰니 콩가루가 되었고
콩가루들은 자기들의 밥이었다.

중공군의 단수 높은 포로 관리에 미군들은 중공군의 의도대로
심리적으로 각개 격파가 되었다.
물론 풀려날 때까지 꿋꿋이 버틴 미군들도 있었다.
그러나 같은 포로들과는 갈등하면서도 중공군들에게는
협조하는 
병사들은 훨씬 더 많았다.
몇몇 미국인들은 자신의 동포에 대하여 법죄적인 행위를,
그리고 
매우 소수는 반역죄를 저질렀다.

 

 


벽동 포로 수용소의 터키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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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포로 관리의 노회함은 결국 전쟁이 끝나고 21명의
세뇌된 
미군들이 조국인 미국으로 가기를 거부하고
당시 세계 최저 
빈국(貧國)의 하나인 중국행을 택하게 만들었다.

미군으로 보면 반역자가 양산된 것이다.
전쟁 후 미국 관련 당국에서 중공군에게 휘둘려 포로들이
콩가루 집안이 되어 질시하고 반목하였던 이 포로들의
행태가 논란이 되었었다.

더구나 포로 신세가 되고 보급이 형편없는 식사와
전염병으로 다수의 
미군들이 힘없이 사망했던 사건도
문제로 다루어 졌다.

최악의 상황에서 군인이 발휘해야 하는 강인성이
결핍된 사실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사실 옥수수나 콩 또는 귀리나 조 따위만 배급되었으니
어떻게든 이 알량한 음식이라도 악착같이 먹어서 체력을
조정해야 하는데 
미군들 중에 이런 가축에게나 먹이는
사료를 먹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삶은 물만 마시는
철부지도 많았었다.
이렇게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허약해져
죽는 병사들이 많았었다.

 


벽동 포로 수용소의 터키군 포로들,
그들은 먹을 것이 없으면 들의 풀을 뜯어 먹는 강한
생존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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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미군의 개탄스런 포로생활의 진상을 조사하던 미군당국은

포로 생활에서 송환 된 미군들로부터 같은 수용소에서 생활을 했던
터어키 군 포로들이 어떻게 이 고된 생활을 극복해냈는지를 듣고
경탄했다. 미군의 경탄은 바로 언론을 통하여 세계로 퍼져 나갔다.

 


포로 수용소의 터키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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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6·25전쟁의 고전 작품이 된

‘This kind of War.'의 저자 T.R,페렌바크는 죽음의
계곡 수용소와 벽동 포로 수용소에서 
생활을 했던
슐리히터 상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쓰고 있다.

“ 여러 가지 사실 가운데 한 가지 뚜렷한 사실은 미국인
포로중에 
50 퍼센트가 죽고 영국군 포로의 사망률이
영국 정부에 중대한 
관심사가 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인 포로는 별 고통을 
느끼지 않았고 터어키 포로들은
단 한사람도 죽지 않았다.“


터키 군들은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지만 초지일관
터키 군인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비록 포로의 몸이 되었지만 터키 군인들은 전투중의
명령체계를 
단단히 고수했었다.


미군처럼 중공군에게 아부하던 병사가 선거로 자치 회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포로 중 가장 계급이 높은 터키 장교가 당연히
포로들의 지휘를 맡았다.
포로가 되었지만 장교는 장교였고 부사관은 부사관이었고
사병은 사병이었다.
명령은 명령이고 복종은 복종이었다.


페렌바크는 계속 써내려갔다.
터키군의 대장은 매일의 근무표를 작성했다.
따라서 누가 나무를 하고 물을 길며 병자를 간호하는가를
대해 
조금도 분쟁이 없었다.
그러나 미군의 부사관이나 군의관, 그리고 군목은
병자를 간호하고 
혼수상태에 빠진 자의 옷을 빨아 주며
불을 때는데 쓸 나무를 
하도록 사병들에게
사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간부들이 사정을 하면 사병들은 “제길할 ----너는 뭔데?”
하고 빈정댔다.

 

 

벽동 포로들은 대부분 온돌을 사용하는 민가에 수용되었기
때문에 대량의 장작을 만드는 것이 이들의 큰 업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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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포로들의 최고 책임자가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다가

중공군 
관리병들에게 반항했다는 죄로 붙잡혀 갈아 치워져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제 3, 제 4의 선임자 또는 그 아래의 책임자가 줄줄히 터키군
지휘를 맡아도 그들이 하는 터어키 포로들을 통솔하는 방법이나
형식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어떤 터키 포로가 지나치게 중공군과 친하게 지내면
군법회의가 
열리고 슐리히터는 방청하도록 초청되었다.


선임하사가 심판관으로 앉고 법정은 열렸으며
논고와 증언이 속행되었다.


그 터어키 사병이 적과 내통하고 있다고 유죄 판결을 받으면
그는 
개같이 두들겨 맞았다.

그의 변호인도 그런 반역자를 감히 변호했다고 해서 얻어맞았다.

슐리히터가 물었다.

“그런 짓을 두 번하면 어떻게 하는가?”
질문에 터키군 간부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런 때는 죽여 버린다.“


중공군은 세뇌시키려 든 대상에 물론 터키 포로들도 있었다.

그러나 매일 6시간씩 포로들을 화장실도 못 가게하고 실시하던
정치 교육
이나 숱한 공산주의 선전물이나 영화 상연의 홍수에도
이들 중에 마음이 변심하여 조국 터어키을 버리고 중공으로
간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미군들을 콩가루 집안으로 만들어 놨던 중공군의
인간적인 대우에도 터키 군들은 그 뒤에 숨어있는 흉계를
경계하며 
마음가짐을 단단히 가졌다.

 


지루한 정치 교육후 형식적인 자체 분임 토의 시간.
영어를 모르는 터어키 군과는 관계없는 시간이었다.
터어키 포로는 이런 시간에는 몰래 코란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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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박한 농촌 출신이 다수였던 터키 포로였지만

터어키 인들이 제일 증오하는 원수인 소련의 이데오르기가
공산주의였으니 그들이 본능적으로 거부했던 것은 당연했다.


터어키 포로들이 중공군이 떠벌리는 공산주의 세뇌교육에
눈길을 
주지 않았던 것은 그런 헛 눈길은 자기의 사망 선고문에
스스로 
도장을 찍는 행위였었기 때문이기도 했었다.
중공군이 뭐라 하루 종일 떠들어도 그들에게는 오직
알라 
신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페렌바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학자나 군인이나 의사들은 오랫동안 미국인들이 
 왜 공산군의 
포로 수용소에서 그렇게 많이 죽었는가, 
 왜 어떤 자는 죽고 
어떤 자는 살아남았는가? 캐물을 것이다.

 그 답은 명쾌히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나 그것은 계산기로 튕길 수 있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력에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


그는 터키 군 포로들의 행태가 답을 주었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터키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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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전쟁중에 1만 5천여 명의 터어키 군이 참전해서 2,000여 명이

부상하고 168명이 실종했으며 721여 명이 전사했다.
그 중 462명이 그들이 목숨을 던져 지켜 낸 한국 남쪽
부산 재한 유엔 기념공원에 
잠들어 있다.

터키 여단은 전쟁이 끝나고 1960년까지 한국에 주둔했었다.

 


462명의 터키 전사자가 잠든 재한 유엔 기념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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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이 앞에서 소개했던 술래이만 씨와 아일라와의

재상봉 장면에 어떤 한국 방문 UN군 장병들의 휴만 드라마보다도
한층 더 진한 감동을 받았던 것에는 그 배경이 있었다고
하겠다.

 

 

 

중공군 장교가 촬영한

유엔군 포로 생활

 

여기 보시는 사진들은 1951년 압록강변

평북 벽동에 있었던

중공군의 유엔군 포로들의 사진들이다.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근무하던 중공군 관리 장교
왕 나이 큉씨가 직접 촬영하거나 포로수용소 사진사가
촬영한 사진들이다.

왕씨는 은퇴한 직업 군인으로 현재 중국의

샹하이에 거주하고 있다.

 

 

촬영자 왕 나이 진씨와 당시 친하게 지냈던 포로 미군의 왕씨 방문 장면.  

 

 시대 공감에서 모셔와 편지뱄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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