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일본 제국의 전 총리이자
제1대 조선통감이었던 추밀원 의장 이토는
러시아의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Vladimir Kokovtsov)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 역에 도착했다.
이토가 오전 9시 15분 하얼빈 역에 도착해 차내에서
약 20분 정도 코콥초프와 대화한 후,
그의 권유에 따라 명예 사령관으로서
러시아 수비병을 사열하기 위해 열차에서 내렸다.
그가 수행원의 안내를 받으며 러시아 군대
앞을 막 지나가는 순간, 안중근이
총알을 발사하여 이토를 명중시켰다.
그 중 두발은 복부에 맞았다. 안중근은
혹시 이토 히로부미가 아닐 것을 대비해
다시 3발로 주위의 수행비서관 모리 다이지로,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川上俊彦), 만주 철도의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를 쏘았다.
블라디미르 코콥초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눈앞에서 일어난 사고에 당황하지 않고 쓰러진
이토를 부축했으며 이토는 그의 품에 쓰러졌다.
수행원인 무로다(室田義文),ririri
나카무라(中村是公) 등도 다급하게
이토를 껴안아 보호했다.
이때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안중근은 그 다음 러시아 말로
'까레이 우라(한국 만세)!' 를 두어 차례 외친 뒤
러시아 헌병에게 잡혔다.
이토는 "당했다"라고 한마디 하였다.
수행원들은 우선 이토를 차내로 옮기고
이토가 좋아하는 브랜디를 한잔 따라 건네주었다.
이토는 이때 지팡이를 꼭 잡고 있어서
무로다가 이것을 빼내고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잠시 신음하다가 피격 30분 뒤인
오전 10시경에 사망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은 1909년 10월 26일이고, 쓰러지는
그의 모습이 11월 7일자 이태리 신문에 실렸습니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하르빈 정거장
플래트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제거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직후부터 일제의 침략에
시달리던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대부분
그를 영웅으로 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영웅호걸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살붙이를 생각하게 마련이다.
서른한 살 한창 나이의 청년 안중근도
죽음을 앞에 두고 연로하신 어머니를 생각했다.
그리고 어린 자식들과 함께 살아갈 아내를 걱정했다.
안중근의 사랑을 독차지했을
맏아들 분도를 그리워했다.
안중근의유언
안중근은 안태훈(베드로)과 조마리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김아려(金亞麗,아녜스)와 결혼해서
2남 1녀를 두었으니, 장녀 안현생(安賢生)과
맏아들 분도, 둘째아들 준생(俊生, 마태오)이
그들이다.
안중근의 의거 당시 그의 부친은 이미 서거했지만,
모친이 생존해 있었다.
안중근은 죽기에 앞서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자신의 사촌인 안명근(安明根) 및
여러 숙부들에게 유서를 남겼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세례를 준 빌렘(洪錫九)
신부와 당시의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에게도 유서를 남겼다.
그의 친동생인 안정근(安定根)과 공근(恭根)은
여순 감옥에서 직접 만날 수 있었으니,
이들에게도 유사가 아닌 유언을 남겼을 것이다.
이때 안중근은 아무래도 눈에 밟히는
여섯 살 박이 맏아들 분도를 가장 많이 생각했고,
그에 관한 당부의 말을 특별히 남겼다.
그는 어머니에게 보낸 유서에서 장손 분도가
신부가 되어 자신의 일생을 천주님께
바치도록 교양해 달라고 부탁했다.
또한 안중근은 그의 아내에게도 다음과
같은 유서를 보내 이를 강조했다.
“찬미예수. 우리들은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천주님의 안배로 배필이 되고
다시 주님의 명으로 이에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멀지 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 영복의
땅에서 영원히 모이려 하오.
반듯이 육정(肉情)을 고려함이 없이
주님의 안배만을 믿고 신앙을 열심히 하고
모친에게 효도를 다하고 두 동생과 화목하여
자식의 교양에 힘쓰며 세상에 처하여
신심을 평안히 하고 후세 영원한 낙을 바랄 뿐이요.
장남 분도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나는
마음을 결정하고 믿고 있으니까
그리 알고서 반드시 잊지 말고 특히
천주님께 바치어 훗날에 신부가 되게 하시오.
허다한 말은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즐겁게
만나보고 상세히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바랄 뿐이오.”
현재 이 유서의 원본은 남아있지 아니하다.
그러나 이 유서는 거의 틀림없이 한글로
작성되었고, 이에 기초하여 일본어로 번역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안중근의 이 귀한 유서는
이 일본어 번역본을 중역한 것이다.
그런데 한글로 다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번역자가 범한 오류가 남아있고,
일본식 표현을 직역했기 때문에 현재의
번역본에는 문제가 많다
안중근의 가족
의거 이전에 안중근은 동료에게 자신의 가족을
국외로 불러오도록 부탁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안중근의 처와 자식들은 하얼빈 의거
전에 조선을 떠났고, 안중근의 의거가
단행된 다음날 하얼빈에 도착했다. 하얼빈에
뒤늦게 도착한 그의 처자식들은 유승렬의 도움으로
러시아령 연해주의 꼬르지포로 옮겨가 살게 되었다.
유승렬은 그 지역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재정적으로
안중근을 지원한 바도 있었다.
그의 아들 유동하는 안중근 의거 직후
함께 체포되어 재판을 받기도 했다.
안중근이 순국한 직후 연해주에서는 ‘
안중근유족 구제 공동회’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이 모임의 주선으로 1910년 10월경에
이르러 이곳에는 안중근의 어머니와 첫째 동생인
안정근 내외 및 안공근 등 안중근 일가 여덟 명이
모여 살게 되었다.
그 후 안중근 가족은 1911년 4월 경 꼬르지포에서
10여 리 떨어진 조선인 마을 목릉(穆陵) 팔면통(八面通)에
옮겨 살게 되었다.
안중근의 가족은 도산 안창호 및
이갑(李甲)의 도움으로 이곳에 이주하고 ‘
열여드레 갈이’ 농장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중근 가족에 대한 일제의 추적은
이 마을에까지 이르렀다. 1911년 여름
이 마을에서 안중근의 맏아들인 분도가
일제의 밀정에 의해서 독살 당해 죽게 되었다.
분도는 안중근이 그의 부인과 어머니에게 보낸
유서에서 신부로 키워달라고 부탁했던 아이였다.
안중근 가족은 1917년 7월 니콜리스크로
다시 이주하여 벼농사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연해주는 러시아 혁명의
큰 물결에 휩쓸리고 있었다. 이 와중에서
연해주의 동지들은 안중근 가족의
보호에 특별히 유념해야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당시 동양최대의
국제도시였던 샹하이(上海)로 이주해갔다.
안중근 가족 일행이 상해에 정착한 때는
1919년 10월이었다. 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출범한지 몇
개월이 지나서였다.
안중근의사 와 이등박문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 투옥돼 있던
시절 촬영한 사진엽서. 일제가 만든 엽서
하단에는 '이등박문을 암살한 안중근'이란
제목과 함께 '한국인은 예부터 암살의
맹약으로서 무명지를 자르는 오랜 관례가 있다'는
설명을 달아 안 의사와 한국인을 비하했다. /안중근 문집
안중근 하얼빈의 11일 하얼빈역에서 총성이
울리기 전 11일을 눈에 잡힐듯이 복원했다.
출생부터 순국까지 종합 보고서 '대한국인
안중근' 출간. 체포 직후의 안중근 의사.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된 안중근 의사. /
안중근의사숭모회 제공
이등박문 도착직전 삼엄한 경비 활빈역
안중근 의거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에서 내리는 모습
군악대의 연주 속에 자그마한 노인이 열차를 내려와
(가운데 모자를 벗는 인물) 의장대를 사열하자
러시아 병사들이 발을 구르며 경례를 붙였다. /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38
1914년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정근이 제작,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에 보낸 사진엽서.
1914년 안중근 의사 사진엽서
5종(不逞團관계잡건-조선인의 部 수록, 1914.2.24.)
저격
체포
여순 감옥 법정 이송
도도했던 이등방문
이등박문 장례식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체포된 직후 모습.
러시아 검찰이 찍은 이 사진에서 안 의사의
손은 뒤로 포박돼 있으나 얼굴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안의사의 외투 셋째 단추가 떨어졌고 바지
오른쪽 무릎 부분이 찢어졌으며 흙 자국도 보인다.
체포 당시 벌어진 몸싸움 때문이다.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 제공
이송 직후 쇠사슬에 묶인 안중근과 열사들
여순 감에서 이드악문의 죄목을 적은
저격이유서
저격당시 하알빈역
여순 일본 관동 두두 푸 법원
유동하 조도선 우덕순 안중근
판결문엔 정치적인 일체 언급없이 도적으로 적혀있다
두 남동생과 면회
사형집행 직전
2010년 10월 25일 남산에 위치한 안중근의사 기념관
개관을 하루앞두고 내부 전시물이 공개됐다. /정경열 기자
안중근과 아버지 안태훈 어머니 백천조(조마리아)
동생들
김구 주석과 함께한 동생
상해 임정시절 김구 선생등 요인들과
함께 찍은 안중근의 셋째동생 안공근
사진(뒷줄 왼쪽에서 4번째) 안공근은
1940년 중국에서 실종됐다.
그의 후손들은 북한에서 살고 있다.
© 단지12 닷컴
김구주석과 윤봉길의사
1945년 9월 2일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가 USS 미주리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시게미쓰 마모루는
윤봉길의사의 상하이 폭탄투척의거로 다리가 절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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