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압지에서 포석정 을 가려고 하였으나
시간상 도저히 관람 할 수 없었습니다
고교 수학여행 포석정에 왔을때 신라
55대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다
최후를 맞았다
들어서 다시 한번 꼭 가보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아 안타까웠습니다
여기 포석정과 경애왕에 대한 자료를
종합해 편집해서 아쉬움을 달래 보고자
합니다.
경애왕(景哀王
성씨:박(朴)
휘:위응(魏膺)
생몰년도:음력870-927년11월
재위기간:음력924-927년11(4년)월
신라제 55대 왕. 신덕왕의 아들이자
경명왕의 동복동생이다.
신라 박씨 왕조의 마지막 왕이며 동시에
후임 경순왕 시대에는 신라의 통치력이 경주 바깥
어느 곳에도 미치지 못하는 도시국가 정도의
안습한 상태까지 떨어졌으므로 실권과 영향력이
어느정도 있었던 실질적인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볼 수도 있다.
굴욕적인 일화인 포석정의 삽질로 신라 말기
왕 중에서는 꽤 인지도가 있으며 동시에
비극적인 삶을 산 인물이다.
본명은 박위응(朴魏膺), 경명왕 때 상대등을 역임했다.
원래 사위가 물려 받으면 그 직후엔 다시 김씨가
하는게 원칙인데, 경명왕이 즉위했다는 것은
박씨가 상당한 세력을 확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표적인 세력가가 바로 박위응,
즉 경애왕으로 추측되고 있다.
萱又縱其兵, 剽掠公私財物略盡, 入處宮闕, 乃命左右索王.
王與妃妾數人在後宮, 拘致軍中.
逼令王自盡, 强淫王妃, 縱其下, 亂其妃妾.
견훤이 또한 병사를 풀어 공사의 재물을 모조리
노략질하고, 궁궐에 들어가 좌우에 명해
왕을 찾도록 하였다.
왕과 비첩 수명은 후궁에 있다가 군사들에게 붙들렸다.
이에 왕을 협박하여 자살하도록 하고,
왕비를 강간하였으며, 아랫사람을 풀어
경애왕의 비첩들을 강간하도록 하였다.
ㅡ《삼국사기》경애왕본기
명종이 중흥전(中興殿)에 불러 접견하고
물품을 내려 주었다.
강주 관할의 돌산향(突山鄕) 등 4개 향(鄕)이
태조에게 귀순하였다.
가을 9월에 견훤이 고울부(高鬱府)에서 우리 군사를
공격하였으므로 경애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장군에게 명하여 굳센 군사 1만 명을 내어가서
구원하게 했는데, 견훤은 구원병이 미처 이르기
전인 겨울 11월에 갑자기 서울에 쳐들어갔다.
왕은 왕비와 궁녀 및 왕실의 친척들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베풀며 즐겁게 놀고 있어,
적의 군사가 닥치는 것을 깨닫지 못하여 허둥지둥하며
어찌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왕은 왕비와 함께 후궁(後宮)으로 달아나 들어가고
왕실의 친척과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사녀(士女)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하여 숨었다.
적병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놀라 식은 땀을 흘리며
엉금엉금 기면서 종이 되기를 빌었으나 화(禍)를
면하지 못하였다.
견훤은 또 군사들을 풀어 놓아 공·사(公私)의
재물을 거의 모두 약탈하고, 궁궐에 들어가 거처하면서
좌우의 사람들에게 명하여 왕을 찾도록 하였다.
왕은 왕비와 첩 몇 사람과 함께 후궁에 있다가
붙잡혀 군대의 진영에 이끌려 왔다. [견훤은] 왕을
핍박하여 자살하도록 하고 왕비를 강제로 욕보였으며,
그 부하들을 풀어놓아 궁녀들을 욕보였다.
이에 왕의 족제(族弟)를 세워 임시로 나라 일을
맡아 다스리도록 하니, 이가 경순왕(敬順王)이다.
이에 대한 반론은 이러합니다
927년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다 후백제
군대에게 붙잡혔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삼국유사등을 토대로 볼때, 신빙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어서, 신뢰하기 어렵다.
첫 째로 삼국유사에 따르면, 당시를
음력 11월로 기록하고 있는데, 음력 11월이면,
양력으로는 12월에서 1월 정도에 해당하므로
초겨울 또는 한겨울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누가 보더라도, 그런 엄동설한에 야외에서
주연을 즐겼다는 내용은 말이 되지 않는다.
둘 째로 화랑세기에 따르면, 지금의 포석정이라고
불리는 곳은 본래 포석사라는 사당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이 곳은 원래 화랑이었던 문노의 화상이 모셔진
사당이라고 전해지는데, 문노의 화랑도는
호국선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셋 째로
역사는 승자의 입장에서 기술된다는 것이다
(위키백과)
박씨 임금 셋이 나란이 누워있는 삼릉
삼릉은 경애왕릉에서 북쪽 50m 에 있다
삼릉은 8대 아달라왕(154-184년재위)
52대 신덕왕(912-917)
경명왕(917-924)들 무덤 뒤로 남산이 보인다
경주 경애왕릉(慶州 景哀王陵)은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에 있는 신라 55대 왕인
경애왕(재위 924∼927)의 무덤이다.
1971년 4월 2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22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55대 왕인 경애왕(재위 924∼927)의 무덤으로,
경명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재위 4년이 되던 해에 포석정에서 잔치를 베풀고 있을 때,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서 비참한 최후를 마친 왕이다.
무덤은 삼릉계곡 입구의 소나무 숲 안에 있으며,
일반무덤와 같아서 별다른 특징은 없다.
신라왕릉으로는 빈약한 편이며 발굴된 적은 없다.
『삼국사기』에는 경애왕을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냈다고 되어있다.
해목령은 경애왕릉에서 떨어져 있어서 맞지 않으며,
해목령 가까이에 있는 지금의 일성왕릉을
경애왕릉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위키백과)
용장사 삼층 석탑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은 경북 경주시에 있는
‘경주 남산 용장계 지곡 제3사지 삼층석탑’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935호로 지정했다.
이 탑은 전탑형 석탑으로 8개의 커다란 사각석재를
기단으로 구축하고 옥개석(屋蓋石, 지붕돌)이 하나의
석재로 이루어졌으며 별다른 장엄장식이
전혀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과는 다르다.
그 세부를 살펴보면, 7매의 석재로 이루어진
지대석(地臺石, 바닥의 받침돌) 위에 8매의
기단석이 상·하 2단으로 나누어져 각각 4매씩 올라와 있다.
상층 기단석 위에는 3단의 탑신(塔身) 받침이 있는데,
하단 모서리가 깨진 상태다.
이 탑신받침 위에 1매의 석재로 된 1층 탑신석이
올려 있고 그 위에 올린 옥개석 전각의
네 모서리에는 풍탁(風鐸)이 달려있던 구멍이 뚫려있다.
2층 탑신석 역시 1매의 돌로 이루어졌다.
3층 탑신은 2층 옥개석 낙수받침의 상단과
3층 옥개석의 하단이 맞닿아서 이어진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이 계곡을 발굴 조사할 때 용장사라고 쓴
기와조각이 발견, 확인되었다.
이 절은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서 유가종(瑜伽宗)의
고승인 대현(大賢)이 살고 있었는데,
그가 이 절에 있는 장륙상(丈六像)의 주위를 돌며
예배하면 불상도 그를 따라 얼굴을 돌렸다고 한다.
또, 조선 초기에는 말년에 승려가 된 김시습(金時習)이
이절에 기거하면서 『금오신화(金鰲神話)』를 썼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용장사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이 절터에는 보물 제187호인 석불좌상,
보물 제186호인 삼층석탑, 보물 제913호인
마애여래좌상 등 중요한 문화재들이 산재하고 있다.
이 중 석불좌상은 자연석의 기단부 위에 연화(蓮華)를
양각한 3층의 원형좌대를 탑의 옥개석과 같이 놓고
그 위에 불상을 안치하였다.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의 고승 태현(太賢)이
이 불상 주위를 돌면서 참배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삼층석탑도 자연석을 지대석으로 이용하고
그 위에 석탑을 올린 것으로 용장사 주위의 계곡
어디에서나 이 탑을 볼 수 있게 건립하였다.
불상보다 더 높은 위치에 탑이 세워진 것은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이며,
탑과 대좌가 자연석을 기단으로 한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또, 원형불상대좌 옆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은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수려한 작품이다.
상호(相好)는 단아하고 머리에는 나발이
선명하며 의문(衣文)은 가는 평행선으로 음각하였다.
이 밖에도 삼층석탑의 위쪽에는 폐탑(廢塔)이 있으며,
용장사계가 끝나는 산꼭대기 바위에는
거대한 불좌(佛座)가 있다.
자연암석 위에 연꽃을 새긴 것으로 지름 1.5m, 둘레 5.5m이다
국보 30호 분황사 석탑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慶州 芬皇寺 模塼石塔)은
경상북도 경주시 분황사에 있는, 삼국시대에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석탑이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30호로 지정되었다.
탑이 세워진 시기는 분황사 창건 때인
신라 선덕여왕 3년(634)으로 보고 있다.
현재 3층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임진왜란 때 반쯤 파괴되었는데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 수리할 때 2층과 3층
사이에 들어 있던 사리함을 꺼냈는데,
함 안에는 각종 옥류, 가위, 은바늘 및
숭녕통보(崇寧通寶), 상평오수 등
고려시대의 중국주화가 발견되었다.
분황사 석탑은 현재 남아 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신라 선덕(善德)여왕 3년(634)에
안산암(安山岩)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모전(模塼)석탑이다.
기단의 규모나 탑의 형태로 보아 7층이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임진왜란때 외병에 의해
허물어지고 그뒤 분황사 승려가 개축하려다
허물어 뜨렸다고 하며, 1915년에 일본인이 허물어진
것을 해체·수리 하였다.
1층 몸체돌의 사방에는 쌍여닫이 돌문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감실(龕室)이 있고 감실 양쪽으로
불법을 지키는 인왕상(仁王像)이 돋을새김되어 있으며
안쪽에는 다른곳에 가져다 놓은 머리가 없는 불상이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자연석으로 된 기단
위에는 네 마리의 석사자(石獅子)를 배치하였다.
(위키백과)
국보 312호 경주 남산 칠불암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
(慶州 南山 七佛庵 磨崖佛像群)은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 칠불암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마애불상군이다.
암벽에 삼존불상이 있고 그 앞 바위에 사방불이 있다.
삼존불은 모두 당당한 체구와 높은 조각법을
보이고 있어 석굴암과 비슷한 시기인 8세기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칠불암 마애불상군은 경주 남산에 있는 수많은 불상
중에서 대표적인 마애불상군이다.
넓은 면의 암벽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본존과
입상의 두 협시보살상을 높은 부조로 표현하였고,
그 앞쪽 사면석주의 각 면에는 비슷한 크기의
불좌상을 부조하여 모두 일곱 구(軀)로 구성되어 있다
삼존불은 본존불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협시보살을 두었다.
높이 5미터, 너비 8미터쯤 되는 바위의
동쪽 면에 고부조로 새겨져 있다. 본존불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좌상이며 양쪽
협시보살은 본존을 향해 서 있다.본존불은 수인이
항마촉지인인데 8세기 들어 유행하는 항마촉지인의
초기적 양식을 대표하는 중요한 작품이다.
협시 보살상의 감각적인 착의형식과 자연스러운
삼굴(三屈) 자세는 8세기 초에 국제적으로 유행하던
양식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특히 삼존상은 절제된 얼굴표정, 적합한 신체
비례와 탄력 넘치는 양감, 그리고 유려한 선 등에서
통일신라시대 전성기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조각
기술과 예술적 감각, 그리고 종교적인
숭고미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위키백과)
사진은 외국포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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