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여행기

에베소의문명(터키여행9부)

이모르 2021. 3. 19. 17:24

 

 

 

에페소스는 B.C.10세기에 소 멘데레스 강이 바다와합류하는곳에 건설된 에게해 연안의 항구도시이다 에페소스는 히타어트어로 아파사스로 알려져 있다. B.C.7세기경 킴메르레르에게 B.C.6세기 중엽에는 리디아에게 지배를 받는다.B.C.546년에 페르시아 B.C.334년 마케도니아제국 B.C.323년에 셀레우코스라트.B.C.190년에 베르가마왕국 B.C.133년에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았다. 로마시대 가장융성했던 에페스는 당시20만인구를 자랑했으며 기독교 시대에는 중요한 사건의무대가 되었다 6세기경 멘데레스 강의퇴적로 항구가 매몰되고 7세기아랍의 침입으로 셀측군내인 아야솔록 테페로 이주하였다 셀주크시대를거처 오스만시대에는 그중요성을 상실했고 에페스는 처음1869년 에 영국인 고고학자 J.T.우드가 탐사를 펼처 고대7대불가사의 건축물중하나인 아르데미스 신전터를 발굴해냈다

 

 

 

아데미 여신상 (바티칸 박물관 소장)

 

아데미 여신상 (바티칸 박물관 소장)

 바울사도가 은세공업자 들에게 돌팔매질 당한 아데미상은 세공 업자들이 대량생산해 집집마다 모셔져 있던 아데미신상은 바울의 우상숭배라는 설교로 인하여 생존의 위협을 느꼈다  차내에서 사도바울의 행로를 이야기 하다가 드디어 에베소 정문에 왔다 착한 그리스도인 도암은 에베소와 사도바울의 고난의 행군을 들려주었다 나는  모르는 질문을 해대었다 바울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고색찬란한 에배소 문턱에서 가슴이 뛰었다 가이드는 설명을하고 었었지만 설명을 들으면 사진을 찍지 못한다 보석은 내게 계속 설명에 집중하라 이르지만 귀에 들어올 리가 만무다..

 

 

 

에페소 평면도

 

 

 

 

입체도

 

 


정문엔 삼성에서 우리말로 안내 입간판을 세워놓았다 리시마쿠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원정중 대왕의 경호 장교 였다 전투에서 공을 인정받은 그는 알랙산더의 후계자로 인정받다가 트라키아와소아시아의 마케도니아의 왕이되었다 (기원전306년)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들 카산더의 군대에 의해 억압되어 소아시아로 들어갔다 기원전301년 알렉산드로스대왕 휘하 장군으로 후에 바빌로니아를 장악하고 왕국을 세운 셀레우스쿠와 합세하여 입수스 전투에서 싸워 전투에진 안렉산드로스의 뒤를이어 마케도니아 왕국을 세운 안티고누스를 처형하게 된다.

그의영토는 승자들이 나누어 가지게 됐는데 리시마쿠스의 몫은 리디아 이오니아 프리기아 그리고 소아시아의 북쪽해안이었다 현재 우리가 보고있는 고색 찬란한 피온산 기슭에 건설된 에페스 도시는 B.C4세기경 리시마쿠스가 건설한 신도시에 해당된다.

 

 

 

바리우스 목욕탕

매표소와 삼성안내입간판이 있는초입에 있다 남성전용 목욕탕으로 전형적인 로마형식의 냉 온탕 사우나실 열탕 탈의실 등이 있었다고 하고 로마에서 최고의 오락실은 이와같은 목욕탕이라하고 이 바리우스 목욕탕은 3층으로 되어있었다 하고  2.3층은 휴트니스실이 있어서 몸을 풀고 만들고 땀을 흘리고 때로는 체육관으로도 불리었다 한다

 

 

 

 

 

 

박해가 심할 때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서로 알리기위한 암호 였다는데 더발전해서 메달을 해달고 다녔다  한다 입구에있어 가이드는 그림을 분필로 덧칠 해가며 설명을 했다

 

 

 

 

 

 

 

로마문명이 어떻게 보면 목욕문화에서 망했다는 설도 있지만 토관은 2200년전 사용했던 수도관인데 굻기에 따라 세금을 더물렸다한다

 

  바실리카 대성당

 

 

 바실리카 대성당

오데온의 좌석에 앉으면 무대 뒷 편으로 두 줄의 기둥이 서 있는 곳이 바실리카이다. 지금은 그 기둥의 온전한 모습을 알 수 없고, 기단과 기둥의 일부 만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곳은 화폐를 교환하는 곳으로서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고 한다.

 

 

 AD 1세기에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165m에 이른 건물이 있었다고 하며, 그 기둥의 머리는 황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한다

 

 

 

바실리카(성당)

 

 

 

 

 

 

오데이온과 국영 아고라 사이에는 바실리카(성당)의 흔적이 있다 이곳에서 아우쿠스투스 황제와  아내의 석상이 발견되었는데 그시대의 북쪽 국영 아고라 의 광장문이던 곳이 바실리카가되었다

 

 

 

 

 

 

 

 

 

 

 

에베소 황소의 머리 동상.황소는이 이후 헬레니즘 또는 그레코 - 로마의 유적으로, 히타이트 족과 초기 청동기 시대에서 고대 아나톨리아와 소아시아의 의식이나 희생의신성한 동물, 그리고 미노아의 크레타 조기 오래된 그리스 문화였다.

 

 

 

 

 

오데온으로 오르는길

 

 

 

 

 

오데온 출입문

 

 

 

 

 

오데온 극장 계단옆에는  그리핀의 발이조각되어 있었다 그리핀(또는 그리폰)는 사자의몸과 머리와 독수리의 날개 부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핀은 생물의 왕과 그 땅의 지배와 하늘에 대한 상징적 의미로 생각되는 것은 지상파 짐승과 공중의 새의 조합이기 때문에 인간과 모두를 표현한 것이다. 그리핀이 가장 열중하는 일은 산에서 금은 보석을 찾아내서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핀은 본능적으로 금이 매장되어 있는곳을 안다 때문에 금과의 파수꾼 역할을 하며 금을 빼앗으러 오는 자들과 전력다해 싸워 지켜낸다한다 보통 사자를 짐승의왕 독수리를 하늘의왕 으로 취급하므로 그리핀은 이둘의 힘을 합친힘세고 당당한 동물로 묘사된다

그훌륭한 모습 덕분에 제우스나 아폴론이  하늘을 돌아 다닐 때쓰는 2륜전차뿐 아니라저주의 여신 네메시스의 마차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차를 끌었다는 전설도 있다 로마제국에서는 그리핀을 보석을 지키는 파수꾼으로서 경계 정의의 보복 보호의 상징으로 채택하였다 기독교에서의 그리핀은 악의 형상으로 인간의 영혼을 운반해 가는 악마나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자를 상징한다 그러나 훗날 단테는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갖고 있는 예수 또는 종교적 권력과 세속적 권력을 함께 갖고 있는 교황의 역할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리핀을 사용하였다

 

 

좌상:베니스에있는 세인트 마크 성당에서 그리핀의 동상.

좌하:코린트 박물관 현관에 걸린 기원전 4세기경 남성 아파트 바닥에 그려졌던 그리핀 모자이크(men s apartment griffin mosic floor) 우상:아폴론 신전의 그리핀부조 우중:고대 에베소 그리핀 우하:그리핀을 보여주는 실버 로마 공화국의 옛 로마의 은화.

 

 

오데온(Odeion)

 

 

오데온(Odeion)

목욕탕 옆으로 보이는 작은 원형 극장과 같이 생긴 곳이 오데온이다. 아늑한 분위기로 객석에 둘러 앉았다  2세기에 세워진 이곳은 도시의 행정관들인 상원의원들의 집회 장소였다. 계단형으로 된 객석은 에페소의 의원 부유층이 함께 모여 회의를 하고 시의 주요 계획안을 만들고, 가끔 씩 휴식을 겸해 음악을 감상하는 곳이라고 한다. 오데온은 2단으로 구성되었는데, 밑 부분은 13, 윗 부분은 10줄의 좌석을 배치했으며, 1500여명 정도가 앉을 수 있다고 한다. 오데온 위로는 천장을 만들어 햇빛을 피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그 흔적조차 알 수 없고, 마치 작은 원형 극장의 모습이다. 이 오데온은 수

차례에 걸쳐 개보수를 거쳤기 때문에 시대 변화에 따른 각기 다른 건축의 흔적을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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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건축양식 우측부터 1.도리아식 2.이오니아식 3.코린트식.4.이오니아식

 

 

 

 

 

 

프리타네이온(Prytaneion) 의 잔해.

 

프리타네이온(Prytaneion) 의 잔해.

프리타네이온은 회의와 접견의 장소로 3세기경 세워지고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완성되었다.  꺼지지 않는 성스러운 불을 있던 곳으로 아르테미스  신상이 발견된 곳이다.

 

시청사 터

 

시청사 터

AD3세기에 완공되었다 아고라 행정관 대성전 아래에 위치, 시의 공식적인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에비우스 기념비

 

에비우스 기념비

도미티우스 광장의 산기슭에는 100년 경 비우스의 가족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기념동상이 보인다

 

도미티아누스 신전 앞 의학표지 부조물

도미티안 신전은 헤르메스와 카두세우스 (의학의 상징으로써 뱀들이 서로 꼬여 있는 모양의 지팡이) 부조물로 장식된 2개의 동상 받침대 앞에 있다 히포크라테스의 병원 분점이 있었던 곳,지금도 이 표시는 의사를 상징하는 마크로 사용중이다. 히포크라테스 [BC 460?~BC 377?] 그리스의 의학자. '의사의 아버지'. 인체의 생리나 병리를 체액론에 근거하여 사고했고'병을 낫게 하는 것은 자연이다'는 설을 치료 원칙의 기초로 삼았다.

기원전 460년 에게해 남동쪽 코스섬 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집안은 대대로 전해지는 마술사 집안이었다. 아버지에게서 의학의 실제에 대하여 배웠으며 성장하면서 소아시아 그리스 · 이집트를 여행하여 견문을 넓혔다 인체의 생리나 병리(病理)에 관한 그의 사고방식은 체액론(體液論)에 근거한 것으로, 인체는 불··공기·흙이라는 4원소로 되어 고, 인간의 생활은 그에 상응하는 혈액·점액·황담즙(黃膽汁흑담즙(黑膽汁)의 네 가지 것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이들 네 가지 액()의 조화(調和)가 보전되어 있을 때를

그는 에우크라지에(eukrasie)’라고 불렀고, 반대로 그 조화가 깨졌을 경우를 디스크라지에(dyskrasie)’라 하여, 이때에 병이 생긴다고 하였다. 

 

 

 

 

 

 

 

 

 

 

 

 

 

 

 

도미티아누스 신전

 

저수 창고의 앞에 위치한 광장이 도미티아누스의 광장이다. 이 광장의 서쪽에는 서기 81~96년 사이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명으로 만들어진 신전이 있다. 이 곳에서 발굴된 도미티아누스의 동상 팔과 머리 부분은 현재 에페소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복원된 것이 당시의것과 다르지 않다면 이 신전은 완전히 기둥 위에 건축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신전 앞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제단은 에페소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좌측 폴리오 우물  우측 도미티아누스 신전

 

 

 

 

 

 

 

이 우물은 97년 재건축된 것으로, 에페소의 부자인 폴리오와 그의 가족의 후원으로 만들어졌다. 이 우물 앞에는 큰 분수대가 있었으며, 이 도시의 수도 공급지인 물저장 창고와더불어 기억할 만한 유적 가운데 하나이다. 이 곳에서는 트로이 전쟁 이후 오디세우스의포리펨 무리의 모험을 보여 주는 동상이 발굴되었다.

 

 

헤르메스의상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올림포스 12신중의하나 로마신화의 메리쿠리우스에 해당한다.주신제우스와 아틀라스의 딸 마이아 사이에 태어났고 가축의중식을 관장하는 부와 행운의신길을지배하는 길손의신 통역 상업 도적의 신 꿈을 옮겨다주고 경계를 지키는 신으로서 죽은자를 지하로 인도하는 신이기도 하다 지팡이와 신이 심볼이다

 

 

메비우스의 기념비의 측면

 

 

 

 

 

 

 

 

나이키 또는 니케(Nike) 여신상

나이키 또는 니케(Nike) 여신상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승리의 여신,로마신화의 빅토리아에 해당한다. 팔라스와 스틱스의 딸이다. 제우스와 아테네의 종자(從者)이며, 날개가 있고 종려나무 가지와 방패·월계관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전쟁의 여신 아테네와 모습이 비슷하다우리가 잘알고 있는 지금의 나이키의 로고가 바로 여신의 손 아래 있었다

 

 

 

 

 

 

 

귀족들의 쇼핑센터 안토니우스와 크레오파트라도 여기자주 들어 쇼핑을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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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주택 내부구조

 

 

 

 

큐레띠 거리

 

큐레띠 거리

멀리 보이는 셀소스 도서관쪽으로 내려다본 쿠레띠의 거리, (헤라클레스문  셀소스 도서관) - 꾸레띠란 로마 시대에 행정과 종교 업무를 맡던 사제들을 말함. 꾸레띠의 거리는 양 쪽으로 높은 기둥들이 세워저 있으며 에페소의 저명 인사들을 조각상에 표현하고 있었다.

 

 

크레오 파트라 와  안토니우스가  산책을 했다는 에페소 거리 지금은 벽에 멋진 선인장과의 꽃이 피었다 고대 그녀가 걸었을 거리같은 이곳에 이꽃이 피어있었을까??

 

 

 

안토니우스는

고대 로마의 정치가로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성립한 그는. 동방원정에 전념하여 여러 주를 장악하고 군사 ·경제적으로 막강한 세력을 쌓았다.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아내로 삼고 옥타비아누스와의 악티움해전에서 패하여 자살하는 그는 이거리를 자주 산책하였을 것이다

 

여의사 동상

여의사 동상

머리없는 동상은 에페소에 큰 공헌을 한 여의원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다고 한다

비잔틴 시대의 작품이다.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이런 동상들이 많이 있는데 동상이라고 모두 신을 형상화 한것은 아니다. 대부분 동상에서 신과 인간을 구분할 때 신은 나체나 반 나체로 신을 신고 있고 인간에게는 옷을 입혀 놓았다.

 

 

 

 

 

헤라클레스의 문

헤라클레스의 문

헤라클레스의 문-크레티아거리 입구 양쪽에 2층으로 된 대리석 문으로 평민과 귀족의 경계가 되는 문이다. 헤라클레스가 네메아골짜기에서 사자를 죽였다고 하여 대리석 받침대 좌우에 그 모습을 부조해 놓았다. 이 문 근처 메미우스 비 앞에는 니케의 부조가 있는데 원래는 헤라클레스 문에 있던 것이라 한다. 원래는 사자의 털가죽을 두른 헤라클레스의 동상이 있었다고 하여 헤라클레스의 문이라고 한다. 여기 조각물에 J자의 낚시 모양이 있는데 나이키회사에서 단돈 50달라에 매입하여 상표로 등록하여 사용한다 한다.

 

 

 

 

 

 

 

 

 

트라이아노(Traianus) 황제 기념 분수AD

트라이아노(Traianus) 황제 기념 분수AD

2세기초에 세워젔으며트라이아노 황제에게 바쳐진 기념 분수로 중앙 받침대 위에 서 있던 12m 높이의 황제동상 발목에서 물이 흘러나오도록 설계됐다. 물은 수로를 통해

귀족계층 가정과 목욕탕에 공급됐다고 한다. 지금은 받침대와 동상의 오른 발만이 남아 있다.

 

크레테스 거리

 

크레테스 거리

멀리 쉘수스도서관이 보인다.. 헤라클레스의문에서 도서관까지 연결돼는길이다..

왼쪽은 모자이크로됀 도로가있고..오른쪽으로는 하드리아누스신전과 스콜라스티카 목욕장이있다.. 길옆에는 에페소의 위인들 동상들이 세워져있다... 

 

 

 

 

 

 

 

 

 

 

 

 

 

 

 

 

 

신전내부엔 4명의 로마 황제 Diocletianus.Maximianus.Galerius.Chlorus의 상이 꼼꼼이 아름답게 부조되어 있다 신전의 내부는 아름다운  부조물이  들어차 있다

 

 

하드리아누스 신전은 에페소 유적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유적이다 최근에 복원된 이 신전은 신전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가면돌 담위에 신과 여신들의 부조가 가득하며 4명의 로마 황  Diocletianus.Maximianus.Galerius.Chlorus

상이 꼼꼼이들어차 있다 또한 신전 전면의

4개의 기둥 중 2개의기둥을 잇는 아치는

에페수스 유적지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들어가는 입구 아치위에

새겨진 인물의 모습은

첫 번째 문의 아치위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 데티스가 두 번째 문의 아치

위엔 마찬가지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뱀의머리 메투사의

모습이 부조되어 있고 행운의 여신

티케의 조각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하드리아누스 신전

 

 

하드리아누스 신전

하드리아누스 신전 2세기 경에 지어진 이 건물은하드리안 황제와 에페소의 시민, 아르테미스 여신을 위해 지어졌다. 건물은 다른 유적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부분  손실되었지만 남아있는 부분만으로도 그 아름다움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입구에 있는 기둥은 아치를 이루고 있는데 조각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안으로 들어가면 아테네, 아폴로신등 여러 신들이 조각되어 있으며 데오도시우스 황제와 그의 아버지, 아내, 아들도 조각되어 있다

 

그리스어 같은데 내용이 몹시 궁금하여 인터넷에 검색 하였으나 찾지못하였다 

 

 

 

 

 

 

 

 

 

 

 

 

스콜라스티카 공중목욕탕 

 

 

스콜라스티카 공중목욕탕 

 

테라스가 있는 집들은 (부유한 사람들이나 귀족들이 살던 집인 듯 함)거리 왼쪽에 모여 있고 그 반대편에는 하드리안 신전과 스콜라스티카 목욕탕(로마는 목욕탕을 가는 곳마다 지었고 목욕탕 때문에 멸망을 했다고 한다.)이 있다. 목욕탕에는 온탕, 냉탕, 체육관(체력 단련실)으로 구분되어 있고 사우나 시설도 완비된 목욕탕이었다는 걸 유적을 보고 알 수 있었으며  코스모스처 생긴 기름나무로 목욕탕에 불을 지폈다고 한다. 그 아래쪽에 는 수세식 공중화장실이 있는데 50여명이 동시에 볼일을 볼 수 있게 만들었는지 구멍이 50여개가 뚫려 있다. 공중화장실이 공중목욕탕보다 낮은 지대에 만들었는데 이는 공중목욕탕에서 쓰고 난 더운물이 공중 화장실로 흐르게 하여 뒤처리를 수세식으로 하게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수세식 화장실과 비데를 겸용한 화장실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공중목욕탕이나 공중 화장실이 모두 남성 위주로 만들어져 당시 여성들은 어디서 목 욕을 하였고 어디서 볼일을 봤는지 알 수가 없다. 화장실의 돌들이 모두 대리석이어서 겨울철이나 추운 날에는 돌들이 차갑기 때문에 미리 노예를 보내어 화장실에 걸터앉게 후 따듯해진 다음 주인이 볼일을 보게 했다고 한다

 

 

 

 

스콜라스티카 공중목욕탕  과 연결된 공동 수세식 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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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수세식 공중 변소 는 앞쪽으로 물이흘러 손을 씻게 되어있고아래쪽 또한 물이 흘러 임분을 제거한다에페소에서 가장 아름다운 쉘수스 도서관으로 내려간다

 

셀수스 도서관 (Celsus Library)   

 

 

셀수스 도서관 (Celsus Library)  

셀수스 도서관은 서기 135, C. Aquila에 의해 아시아 지역의 통치자(총독)였던 그의 아버지, 셀수스 폴레마이아누스(Celsus Polemaeanus)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

이 도서관에는 세개의 문이 있는데 각각의 상단은 지혜, 운명, 지식을 상징하는 정결한

여성상들로 장식되어 있다. 셀수스의 무덤은 중앙 적소 아래 지하에 위치해있다. 이 곳에는 일만 이천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도서관 터에 남겨져 있는 비문에 의하면 도서관을 지으라고 명한 C.Aquila는 이 건축물이 완성하기 전에 숨을 거두었고 이에 그의 후계자에 의해 건축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Aquila는 도서관에 소장될 서적 구입비로 25디나르를 남겨두었다고 알려져 있다 에페소는 사도바울이 서기 53년 부터 이곳에서 2년간 전도활동을 하며 강론을 펼쳤다는 사실로도 유명하다. 사도바울의 방문 이후,

이곳에는 교회가 부흥하였고, 이것이 성경상에 나타나 있는데 바로 사도바울이 로마에 투옥돼 에페소 교회에 보낸 편지들이 바로 '에베소서'이다. 에베소의 유적지에서 가장 아름답고 눈에 띠는 멋진 건물은 첼수스 도서관 . 이 건물은 135년 로마의 소아시아 총독을 지낸 가이우스율리우스첼수스 폴레마이아누스 (Gaius Julius Celsus Polemaeanus)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인 갈리우스 율리우스 아퀼라 (Galius Julius Aquila)가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도서관 앞쪽의 벽은 복원이 거의 완전하게 이루어졌으나 그 뒤에는 바닥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 바닥 밑에는 아버지 첼수스의 무덤이 있습니다. 이 도서관은 천장이 매우 높은 2층 건물로 세 곳의 출입구가 있으며 이 중에서 가운데 출입구가 가장 넓고 가장 높다기둥머리의 양식은 코린트식이며 입구 천장에는 아름다운 문양이 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도서관에는 30개 정도의 서가가 있고 전체 장서수는 12000권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문사이의벽에는 (Sophia), 미덕(Arete), 통찰(Ennoia), 지식(Episteme)상징하는 여신상이 있습니다. 이들 여신상은 진품이 아니라 복제품으로 1910년의 발굴 때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로 반출되었다고 한다. 지혜와 미덕을 상징하는 여신상은 머리 부분이 남아 있지만 통찰과 지식을 상징하는 오른쪽의 여신상에는

얼굴 부분이 남아있지 않다. 고대의 3대 도서관은 일반적으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버가모 도서관,  셀수스 도서관을 말한다. 1층계단 에 4명의 여신이 조각되어있는데 그밑에 써있는 희랍어를 보면  진실 덕성 사려 학술 등 뜻을 지닌 여신으로 묘사되어있다

 

 

 

예지 여신상

 

 

 

 

전면에 4명의 여신상이 보인다

 

 

 

 도서관 내부는 두루마리 서적(Roll book)을 온도 및 습도에서 잘보존하기위하여 책장뒤를 이중벽으로 만들었다 당시 12.000권의 방대한 서적을 보유하고 있던 셀수스 도서관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터키의 페르가몬 도서관과 함깨 세계3대 도서관의 하나의 학문의 중심지를 놓고 경쟁을 벌리기도 했다 성서에 사도바울이 강론한곳으로 두란노서원으로 등장하는 쉘소수도서관은 A.D 265년 고스(Goth)족의 침략으로 파괴되고 불태워진다

 

 

셀수스  도서관 덕성여신상 앞에선 친우들

 

 

 

 

 

마제우스 문 맞은편 부자 동네

 

 

 

첼수스 도서관 마주보고 좌측 귀족들의 집 출입

 

뒷편의 문은 마제우스 문

 

 

뒷편의 문은 마제우스 문

마제우스와 미트리아테스 도서관의 맞은편 오른쪽에 상업지역 아고라로 이어지는 곳에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노예였던 마제우스와 미투리아테스가 해방될 때 황제 일가에게

감사의 표시로 세운 것이다.

 

 

도서관의 남쪽에 자리하는 대리석 위에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아우구스투스 황제, 아비아 황비, 황녀 줄리아와 그녀의 남편 아그루파에게 감사의 뜻을 적고있다

 

 

 

앞에 보이는 마제우스 문은 마제우스는 노예로서.노예해방을 한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감사하는 표시로 당현히 온갖 칭송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우측 중앙 의 동굴은 사랑의 집으로 통하는 비밀 지하 통로도서관 건너편에는 유곽이 있어서 뱃사람들이나 귀족들이 즐겼다하는데 몇달 년년을 기다린 부인을 피하는 뱃사람 이라던지 귀족들은 체면상 지하통로로 기다싶이 하여 유곽에 갔다고 하는데 좌측하단 통로가 지하통로입구이다

 

 

 

 

 

 

스콜라스티카 공중목탕을 포함한 위의 건물들은 사랑을 파는  유곽으로 추측을 하고 있다는데 그 옛날에는  사창가 의집은거리의 가장 번화한곳에 기거를 하면서 정보를 수집하여 그 정보를 돈을 받고 파는일을 많이 했다고 한다  

발크기는 이정도의 맞지 않고 미달되면 미성년자로 간주 사창가로 입장할수 없다는 표식

 

 

 

대리석도로 (Marble Street)구레데스 리쉘수스 도서관을 거처 원형극장으로 이어지는 에페소의 중심거리 우측은 사창가

 

 

 

 

 

서민들의 아고라 시장  상점들

 

아고라

아고라 

도서관옆 마제우스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서민들의 아고라가 나온다 여기서 노예까지도 매매했다고 한다

 

 

 

 

 

 

 

대극장 출입문

 

대극장 출입문

복원 중이라 그런지 좌측 휀스가 너무 허술하다 트로이에서도 고적에 어울리지 않는 시설물의 초라함은 고색찬란한 유적들과 너무 어울리지 안았다

 

 

 

 

Cladius황제(A.D. 4154) 때 공사가

시작되어 Trajanghkd황제(A.D. 98117)때 완성되었다. 터키 전역에 산재한 노천극장 중에 가장 규모가 크다. 관중 약 25,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야외극장이다. 3단 구조이며 각 단은 22계단으로 되어있다. 사도 바울이 선교중  은세공장이들과 논쟁이 붙었던

곳이라 한다. 1964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하였으며 현재 많은 부분이 복원되었다. 피온산의 서쪽 기슭을  이용해 지은 이극장은 기원전 100년경에세워졌는데처음에는 현재 보는것보다 월씬규모가 작았던것으로 보이며 서기1세기에 대대적으로  증축된것으로 보인다 AD 2세기 초에 로마시대에 완공되었으며, 지금도 공연 장소로 이용되고 있어세계의

유명한 음악가들이 이무대에 서기를 원하고 소리의 울림을 과학적으로 설계하여 건축을 했기때문에 지금도그어떤 공연장보다 소리의 울림이 좋다고 한다 건축 초기에는 공연을 위한 곳으로만 이용되었지만 이후 로마제국의 유행(?)에 따라 검투사 혹은 맹수와의 결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한다.

 

 

가이드가 만남을 합창시켜 도암이 빽을 맞춰 화음이 훌륭했다 일행들은 도암의 바리톤에 놀라 솔로로 한곡뽑으라고 아우성이었다

 

열창하는 도암

 

 

아고라 연결된 항구거리는 대극장과 항구를 연결하는 거리이다 항구거리 양쪽에는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아르키디아 거리로도 불리우는  이거리는 바다로 이어지는 에페소의 현관이다 헬레니즘 시대에 처음 만들어진 이 도로는는 아르카디아(Arcadius) 황제(AD 395 - 408) 시대에 복구가 되었다. 총 길이 530미터,  11미터에 달하는 이 길을 따라 값비싼 물건을 파는 상점들과 화랑들이 위치해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 도로는 항구까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항구도로"라고도 부른다.

 

 

 

 

 

구레데스 거리 뒤로 보이는 원형극장

 

 

 

 

 

 

 

 

 

고대인들의 석관 [ sarcophagus , 石棺 ]

 

 

고대인들의 석관 [ sarcophagus , 石棺 ]

토장(土葬)에 의한 유체매장 때 사용된 석제의 관. 대리석, 석회암, 현무암, 화강암과

간혹 자반암을 사용하는 등 용재가 다양하다. 미라로 조치한 후 또는 재장(再葬)할 때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B.C. 3000년대 경부터 목제, 도제관을 사용하였으나 석관은 아시리아제국에 들어간 뒤부터이다. 특히 아슈르에서 출토된 기원전 9세기의 석관 그룹은 비문에 의하여 아슈르 나시르팔 2세의  것으로 판명된 석관 등도 있으나 장식은 없다. 그리스에서는 B.C. 7세기부터 석관을 만들었고 B.C. 6세기부터는 오리엔트의 영향에 의해서 건조물을 모방한 기념비적인 석관도 출현된다. 부조 등에 의한 장식이 있는 석관은 고전기에 들어와서부터이고 소아시아의 리키아, 갈리아 지방에서는 키아식 석관, 시다마라식 석관 등을 만들었다. 고대 로마인은 제정기에 들어가서 석관을 사용했다. 기원1세기의 예는 드물고 대부분이 2세기 이후이다. 아티카식 석관과 소아시아식 석관 등의 형식이 있으나 곧 각지에서 제작되게 되었고 루도비시의 대석관과 같은 고대 말기의 미술을 대표하는 석관도 로마에서 제작되었다 가이드가 가르키는 원형 극장 좌측의 부서진 석축은 A.D 1세기에 건립된 마차 경주장 검투사 들이 약7000명 관중앞에서 사투를 벌리던 곳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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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막 고대인들을 만나고 나오는 길이다 여러유적을 둘러보며 기원전 사람들이 어제의일인양 생생하게 다가왔다 유구한 세월 몇천년의 시간은 그렇게 날라가 버렸다 청난 토목공사로 천년을 살아갈것 같았던 그들도 한순간의 꿈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생항로의 한점 티끌같은 인생 천년을 살아갈 것 같이 아비규환속에 살아가는 내모습이처량하게 보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