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에페소스는 B.C11세기에 건설된 소아시아의 정치 경제
상업 문화가 통합된 교통의 중심지였다 로마제국 당시
아시아 지방의 수도로서 소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가장 번성했을때 인구는 25만명었다.
이 25만명이 생활하자면 당연 衣食住가 해결되었어야
한다 큐레띠 거리 옆으로 화려한 모자이크 인도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 옆으로 로마시대 로마권의 아파트 인술라
라고 짐작되는 상가가 형성 되어있었다
이곳에서 크레오파트라가 자주 쇼핑을 즐겼다 하는데 !!!!
큐레띠 거리
에베소의 주택내부
에베소의 공중화장실
에베소의 주택
에페소 로마시대 주택내부
이 인술라는 보통1층은 상가가 들어서고 2층부터 주거공간이었다
2-3층 까지는 벽돌로 만든 건축물인 경우가 많았고 4층부터는 중량을
줄이기 위해 목재로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
현대로 치면 주상복합아파트 가 당시 인술라의 일반적인 형태였다
당시 인술라 아파트는 2층이 가장고가로 거래되었다 한다
이유는 2층건물은 계단을 많이 오를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정원 중간에 돌로 만든 원형의자 쉼터
폼페이 유적발굴을 참고하여 복원시킨 로마시대 도무스
도무스(domus)는 여러 가구가 살 수 있도록 지은 인슐라나
공동주택단지와는 달리 1가구만 수용하는 주거이며
아트리움(atrium 中庭)과 페리스타일(peristyle 列株庭)이라는
주요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가족의 대외적인 기능과 활동이 이루어지는 아트리움은
일반적으로 정사각형이나 정사각형이다
대화와 휴식을 위한 성격이 서로다른 여러 개의 공간이
그 주변으로 나누어져 있다
아트리움은 현관통로인 프로티룸(prothyrum)을 통해 거리와
이어진다 아트리움과 페리스타일 사이에는 타불리눔(tablinum)이라는
트인 거실이 있는데 바깥사람들에게는 보이지않도록 할수도
있다 복도인 바우케스(fauces)는 타블리룸의 한쪽편에 위치해
쉽게 페리스타일로 통 할수 있다
당대 로마는 최대의 도시로 인구는 백만 명에 이르렀으며(이는
19세기에 당대 최대의 도시였던 런던의 인구와 맞먹는다) 최대
추정치는 140만 최소45만 명이다 로마의 공공 장소는 발걸음 소리와
마차바퀴가 덜컥거리는 소리(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낮에는 도성에 마차가
드나들지 못하도록 금한바 있다)로 시끄러웠다
역사가의 추정에 따르면 고대 로마의 인구20%
가 도심지에 살았으며 로마는 콜로세움 트라야누스 포륨 판테온
등 거대한 건물이 많았다
이스탄불에서 본 로마시대 수로시설
로마 트레비분수
분수에는 수백마일 길이의 수도관을
타고 운반되어온 신선한 식수가 솟았으며 극장 체육관 그리고
도서관과 가게 시장 상하수도를 갖춘 로마식 목욕탕도 있었다
로마카라칼라 공중 목욕탕
에페스의 공중변소
공중 변소에서 담소를 나누며 볼일을 보았다
에페소의 스콜라스티카 공중목욕탕
과 연결된 공동 수세식 변소 페수를 이용한 기발한 발상
고대 로마의 지배 영역은 전원 별장(vila)과 같은 가옥구조를
볼 수 있었다 팔라티누스 언덕의 궁궐이 있었으며 하층 평민이나
중류 기사 계급은 도심지의 아파트(insulae)에 살았다 이런곳은
상류층 지주들이 임대료 수입을 얻기 위해 지은 곳이다
그렇다면 이 인술라는 어떤 형태였을 까요? 대부분의 인술라는
보통 3층 이상 7층 이하의 건물이었다 당시는 철골콘크리트가
아니라 7층 높이로 제한되었는데 9층이상의 집도 있었다 허나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네로 황제 시절을 거치면서 대략17-20미터
정도로 제한되었다 그것은 벽돌 구조는 고층으로 올라가면서 상층의
압력을 부담하지 못하여 구조 자체가 붕괴되는 위험성이 있었고 또 위로
올라가면 다른 조건들(바람 지진등) 때문에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은
더욱더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
물론 집주인들은 더 높게 층수를 올려 더많은 수입을 원했다
그것은 아파트가 붕괴 인사사고가 난다 한들 책임을 지지 않았기
때문이 었다 로마의 유명한 법률가 이자 웅변가인 키케로는
자신의 저서에서 악덕건축업자가 부실로지은 인술라가 무너지자
그 자리에 새 건물을 올려 더 많은 월세를 받아야 겠다며 기뻐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고 있다.
로마식 "개조심" 경고문" 모자이크 그림은 지금도 생동감을 준다
로마의 주택: 1. Domus(도무스, 단독주택)
도무스는 로마의 일반적인 단독주택으로 중상류 이상의 시민이 살았다. (아래 그림에 보이듯)왼쪽 대문의 양쪽에 가게를 만들어 세를 받기도 했다. 대문을 들어서면 아트리움(안뜰), 중간에 타블리움이라 불리는 서재가 있고, 그곳을 지나면 페리스타일이라 불리우는 기둥있는 포치로 둘러싸인 정원이 있다.
1. 왼쪽 아래의 대문을 들어서면 지붕없는 아트리움(Atrium) 즉 안뜰이 있다.
그림속에 보이는 아트리움, 안뜰 (바자니의 그림)
천정이 뚫려있고 그 아래에 물받는 시설, 임플루비움이 있다.
이곳이 밝아서 가족들의 생활의 중심지였다.
2. 네모난 저수조는 임플루비움(Impluvium)으로 비가 오면 물을 받아 모아,
아래에 있는 물탱크로 보냈다.
안뜰 가운데 있는 낮은 저수조 임플루비움. 여기 고인 물은 작은 구멍을 통해 지하의 물탱크로 들어간다. 아랫 사진은 저수조 밑에 있는 물탱크를 보여준다. 그 물이 필요하면 저수조에서 작은 뚜껑을 열고 우물처럼 물을 퍼올려서 사용했다.
3. 그 주변에 작은 방들은 침실인데, 주로 창문없이 침상만 놓인 간단한 형태로
그야말로 잠만 자는 곳이었다
부자들이 시골에 지니고 있던 빌라에 속하는 화려한 침실.
보통 창이 없어 어두웠기에 벽에 벽화를 그려넣어 장식했다.
발굴된 로마 주택 침실에 있던 침대의 흔적
4. 타블리눔, 즉 가장의 서재가 한가운데 놓여 집안 전체를 살펴보게 되어있다. (윗 그림의 왼쪽 아래)
5. 그곳을 지나면 페리스타일(Peristyle), 즉 기둥이 둘러선 포치가 있어 가운데에 정원이나 채마밭이 있고,분수로 멋을 내기도 했다. 그 주변으로 대,소 식당, 부엌, 목욕탕, 방들이 놓였다.
<발굴된 로마의 주택들>
이런 집에서 몇 대에 걸친 대가족이 가장의 감독아래 같이 살았다. 로마에서 아버지의
권한은 막강하여심지어 원하지 않는 자식(주로 딸)은 죽일 수 있는 권한까지 지녔다.
복원중인 페리스타일.
발굴되고 있는 로마 시대 주택지.
위와 아래의 그림은 발굴되었던 염색공장을 도면화한 것. 천을 넣고 색색으로
염색하고, 2층에는 염색된 천을 내다 말리는 시설도 되어있고 얼마나 전문적으로
장사했는지 엿볼 수 있다.
그 뒤로는 안채로 살림집으로 쓰는 페리스타일이 보인다.
'터키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톱카프 박물관삽화(터키여행53부) (0) | 2021.04.02 |
---|---|
톱카프궁전(터키여행52부) (0) | 2021.04.02 |
에베소의뱀조각(터키여행50부) (0) | 2021.04.02 |
도미티아누스동전발견(터키여행49부) (0) | 2021.04.02 |
하드리안신전 터키여행48부 (0) | 2021.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