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팜므파탈 이야기

이모르 2020. 12. 24. 17:24

고금을 통해 여자가 남자를 파멸로 이끈예는 많다.프랑스어인 팜므 파탈(femme fatale)의 사전적 의미를살펴보면    femme은 여인   fatale“치명적”이라는 뜻의 형용사 이다. 팜므 파탈의 어원은 “숙명적인 운명을 지시하는 그리스의 운명의 여신(디케)에게서 찾아볼수 있다

 

 

 

터키 에페스의 히드라인 신전 에 새겨진 디케 부조

 

팜므 파탈은 19세기 낭만주의 작가들에 의해 문학작품에 나타나기 시작한 이후미술 연극 영화등 다양한 장르로 확산되어 상대남성을 죽음이나 고통등 치명적상황으로 몰고가는 “악녀 요부 를 뜻하는 말로까지 확대 변용되어 사용되고있다삼손을 죽음에 이르게 한 데리라. 요한의 목을 요구한 살로메. 홀로페르네스의 목을자른 유디트적장  게야무로 로쿠시케 를 죽음에 이르게한 논개의 이야기를 명화와 함께 한다

 

 

페테르 루벤스/삼손과 데리라

 

신으로부터 怪力을 받은 삼손은 팔레스티나인의 지배로부터 이스라엘민족을구하지만 팔레스타인의 딸 데릴라 의 유혹에 빠져 힘의원천인 검은 머리를 잘려 포로가 된다 두눈이 뽑히고 노예로 전락 가진 수모를 받지만마지막에 신에게 기도를 드려 괴력을 회복하여 신전의 돌기둥을 무너뜨려 적과함께 자멸하는 성경의 이야기다

 

 

장 베너(Jean Benner)그림

 

 

살로메 세례요한의 죽음 Death of John the Baptist 1899

 

 

귀도 레니 (세례 요한의 머리를 받아 든 살로메)

 

 

마치 기념사진 찍듯이 요한의 목을 들고있는  살로메의 그림은 잠피에트리노.가 16세기 초에 그린것이다

 

 

1900.Oil on canvas,127*148 cm Museum der Bildenden Kunste,Leipzig,Germany

 

 

세례 요한이 독살스럽고 표독한 살로메의 제물이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은것은 그녀의 어머니 헤로디아 때문이다. 헤로디아 안티파스왕은 동생 필립보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다. 이런 부정한 행실을 맹렬히 비난한 탓이다 세례요한의 독설과 인신공격에 앙심을 품은 헤로디아는 딸을 부추겨 요한을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헤로데의 생일을 맞아 연회가 베풀어 지고 아름다운 살로메가 춤을 춘다 헤로디아는 남편 헤로데가 의붓딸 살로메에게 홀딱 반한 사실을 이용하였다

헤롯은 아름다운 살로메의 춤추는 모습만 보면 넋이 나가는데 그것을 이용하여 딸에게 왕이 소원을 들어준다는 약속을 할 때만 춤을 추라고 압력을 넣었다 어미의 지시대로 관능적이고 간드러진 매혹의 춤을 춘 살로메는 계부에게 춤을춘댓가로 요한의 목을 달라 요구한다.”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네에게 주겠다(마르코 6.23)고 말한다 그러자 그녀는 “세레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 주십시오(마태 14.8)라고 청한다 뒤늣게 자신의 섣부른 맹세가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깨달은 헤롯은맹세를 거둬줄 것을 요구했지만 살로메는 요한의 목을 줄뜻을 굽히지 않았다.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 요한의 목을 벤후,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처녀(살로메)에게 주니 그녀가 제어미(헤로디아)에게 가져가니라마태복음 14장 10-11절 얼마 후 더운 피가 흐르는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담겨져 살로메에게 전해진다세례요한은 사악한 헤롯과 냉혹한 요부 살로메의 음모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세례자 요한의 참수) 12세기 산 제노 바실리카 베로니  

 

12세기 제작된 베로나의 산 제노 바실리카의 청동문에는 신구약 성서의 일화18장면 등장하는데 그 중에 “세례요한의참수” 가 조각되어 있다거부조로 청동조각인 이 작품의 왼편엔 거대한 탑이 등장하는데 중세시대에는세례자 요한이 갇혔던 감옥이 거대한 돌로 만들어진 탑으로 묘사된다.화면 가운데 세례자 요한이 등장하는데 그의 목은 바로 앞에있는 시종이 헤롯 왕에게 가져가고 있다 세례자 요한의 몸은 머리가 베어진 다음에도 그대로 손을 아래로 떨어뜨린 채 그대로 서있는데 종종 자율신경계가 목이 베어진 다음에도 그대로 ㅠ작용하기 때문에 참수형에서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인데 그러나 중세에는 과학적인 근거보다는 표현의 미숙함이나 기적의 발현으로 이러한 표현이 등장하곤한다.목이 잘린 세례자 요한과 시종사이에 삼각구도를 이루는 사형집행인은 참수때 사용한 칼을 칼집에 다시 꽂고 있는 중이다.홍성욱 (2011년10월29일 에 작성한것을 인용한것입니다)

 

 

 

 

유디트는 예루살렘 인근의 베틀리아(Bethulia)성에 살았던 여인이다 베틀리아성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있었다.만일 페틀리아성이 적군에게 함락된다면 그것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 땅이함락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유디트는 이스라엘 군대의 용맹스런 전사의 남편이 전사하자 재혼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녀와 함께 살고있었다 유디티는 아름답고 정숙하며 경건한 여인이었다

 

 

앗 시리아의 유적

 

그때에 앗수르(앗시리아 북부 메소포타미아 전체 이집트 아나톨리아까지 지배하는대제국 아시리아 본토는 메소포타미아 북부전체 남부는 바빌로니아에 해당하며 니네베를 수도로 하였다 아시리아인의 고향은 티그리스 강에서 아르메니아에 이르는 산악지방이며 아슈르 산(Mountains of Ashur) 라고 불리기도한다.) 의 느브갓네살(Nebuch anezzar)왕이홀로페르네스(Holofernes)장군에게 명하여 페틀리아 城을 함락토록 지시하였다.페틀리아는 바람앞에선 등불처럼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예루살렘과 온 이스라엘 땅이 적군의 발에 짓밟히게 될 운명이었다베틀리아의 백성들은 강대하고 횡폭한 홀로페르네스 장군에게 대항할수없으므로 성문을 열고 항복하자고 주장하였다. 다만 제사장만이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려 보자고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긴박한 상화에서 유디트가자원하여 적진에 들어가 홀로페르네스에게 중요한 거짓 정보를 전달하고자기만 살아보겠다는 암시로 미인계를 써서 홀로페르네스 장군의 마음을삿다. 그리고는 연회를 벌려 술을 잔득 먹이고 잠자리에 든 다음 격렬하게성욕을 채우고 잠에 떨어진 다음 그의 목을 잘라 베틀리아 성으로 돌아왔다.

혼란에 빠진 앗수르 군대는 퇴각하였고 이스라엘은 유디트의 헌신적인 행동으로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후 유디트는 평생을 미망인으로 살았다한다.이스라엘의 애국여인인 유디트를 주제로 한 예술 작품은 많이있다 아름다운 유디트가 흉폭한 적장 홀페르네스(Holofemes) 의 머리를 들고 있는 장면은 수많은 조각가와 화가들의 소재가 되었는데 여기 일부분을 올려보려 한다.

 

 

 

 

 

 

 

 

유다트상은 도나델로의 작품으로 원래는 시뇨리아 광장에 있었지만 1980년에 베키오 궁전의알현방에 이관되었다 1986년에 수복하기위해 다시 그장소로 바꾸었지만 현재 이 브론즈상은 베키오 궁전내 살라 디 지릴 로옮겨 완벽하게 보호되고 있다도나텔로는( 1386-1466년 12월13일) 이탈리아 피렌차 출신의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가이다얕은 돋을 새김 조각으로 유명하다  로마에서 고대 조각을 연구하고 일직부터 명성을 얻었다.작품경향은 중세적 자연주의의 전통과 고전의 형태미에 의하면서 차츰 새로운 힘찬사실주의로 발전하였다 특히 원근법을 써서 입체감을 나타내어 있는 그대로의 사실주의적인 표현에 힘썼다 . (가티멜라타의 기마상)은 특히 뛰어나 르네상스 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가베르티.브루넬레스코.와더불어 르네상스 초기의 3대 조각가로 불린다대표작으로 (성조르조상  과 다비드 상) 등이 있다. 

 

 

 

시스타나 예배당

 

 

 

 

시스타나 예배당의 천장화  중 유디트/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 디 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 1475-1564년2월18일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의 대표적 조각가 건축가 화가 그리고 시인이다 1508년 바디칸궁의 시스타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위촉받고 비들기 같이 허리가 꺽이는  듯한 고통에도 4년만에 완성하였다.1520년 메디치가 예배당의 묘비를 10년에 걸처 조각하는 한편 산로렌초 성당 부속 도서관 입구를 건축하였으며1529년 독일 카롤5세 군의 피란체 포위때 방위위원으로 뽑혀 성을 쌓았다.카롤5세의 이탈리아 공격당시 미켈란제로는 사로잡힌 친구가 처형된 사건때문에도망가기도 했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돌아와 방위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카롤5세에의해 도시가 점령된 후에도 예술가를 우대하는 카롤5세의 배려로 미술을 계속했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든 유디트/리치아노 1515년

 

홀로페르네스의 목을든 유디트/  Philip van Dijk  1726

 

 

홀로페르네스의 목을든 유디트/카바라조 1598

 

카바라조 풍의 자연주의는 남부 이탈리아의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카라바조가 죽은후에 작품은 논란의 대상이 된다.원작을 모사한 그림들에 있어 카라바조가 직접 모사한 작품인지 그를따르는 이의 모사작인지 여전하게 문제로 남는다 위그림에서 유디트는 굉장히 소녀적인 인상이 강하다그녀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더 강조하기 위하여 옆에 늙은 하녀를 그려냈다

 

 

 

유디트 1500년 /조르조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아르메데시아 진탈레스키 /1612-1621

 

그림에도 드러나듯이 아르메데시아 가 몰두한 주제는 성폭력에 대한

증오심이다. 그녀가 17살 때 아버지의 친구이자 자신의 스승이던

타시에게 1년간 성폭행을 당해오다 법정에 고소하게 되면서

여론의 질타를 받기도 하는데 이사건은 화가가 고소한 로마의 최초의

성폭행 관련 소송이 되었다. 그림에서 홀로페르네스를 타시로

묘사 분노의 표출 자신을 유디트로 형상화 하지않았나 생각한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아르메데시아 진탈레스키 /1612-1613

 

이제 살인이 끝나고 목을 밖으로 가져가는 그림이다.대담하고 침착한 동작이 잘 묘사되어 있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든 유디트/크리스토파노 알로리 1619-29

 

 

크리스토파노 알로리는 아르데미시아 젠틸레스키와 동시대의 피렌체에서 유명한 화가로서 아르메데시아젠틸레스키에게 연정을 품고 강력하게 지원했지만  둘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고 크리스토파노 알로리는 실연의 아픔을 유디트로 형상화 했다한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들고 있는 유디트는 아르메데시아 젠틀레스키를 그린 것이고 홀로페르네스는 자신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크리스토파노 알로리의 유다트는 매우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인반면 아르데미시아 젠틸레스키가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유디트는 여전사로서의 강인함을 지녔다  

 

 

 

Giuseppe Cesari_Judith with the Head of Holoferne

 

 

유디트/베로네세 1500년

 

 

 

슈트크 (Franze Von Schutuk) - 유디트

 

 

 

베툴리아로 돌아오는 유디트/보티첼리 1472

 

 

Lucas Cranach the Elder -Judith with the Head of Holofernes

 

 

 

Tintoretto--Judith and Holofernes

 

 

 

 

Valentin de Boulogne--Judith

 

 

 

 

Baglione Giovanni--Judith

 

 

Jan Sanders van Hemessen--Judith

 

 

 

 

Sandro Botticelli--JJudith Leaving the Tent of Holofernes

 

 

 

Massys Jan--Judith

 

 

 

Paolo Veronese--Judith mit dem Kopf des Holofernes

 

 

 

Rubens--Judith with the head of Holofernes

 

 

 

Sandro Botticelli--Judith

 

 

Leon Francois Comerre--Judith

 

 

 

클림트의 .유디트(Jvdith 1)

크림트의 대표작은 키스이지만 유디트가 유명한것은 기묘한 표정때문

홀로페르네스에 대한 유디트의 살해 행위에 대한 고통은 없고 매혹적인

관능적인 표정은 승리감에서 오는것 인듯

그림을 보고있자면 얼굴 표정으로 유혹당하는 느낌을 준다

 

구스타프 클림트 --유디트2(살로메)

 

 

클림트가 죽은후 유디트2 로 알려졌지만 그림을 자세히 보면

이그림은 춤을 추는 살로메이다. 살로메는 어머니 헤로디아의 간교로 헤롯뢍의 생일

파티에서 춤을 추고 그대가로 세례요한의 머리를 잘라받았다 헤로디아는 원래

헤롯왕의 제수 였는데 동생이 죽은후 시숙과 함께 사는 부정한 생활을 세례요한이

비난했기 때문에 원한을 품은 헤로디아가 복수를 한것이다  

 

 

 

크림트의 자화상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년 2월6일 오스트리아 화가다.

관능적인 여성의 육체를 주제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1897년 빈 분리파 를 결성하여

반 아카데미즘 운동을 하였다.

1906년에는 오스트리아 화가 연맹을 결성하여 전시활동을 시작하였다

반 아르누보 운동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미술가이다.

 

 

논개 .한지 비단 모시 안료 염료 콩즘 /정종미

 

義士 논개님은 진주성을 지키던 장수의 아내로 1593년 2차 진주성짜움에서 이긴왜군들이 진주 촉석루에서 자축연을 벌일 때

 

 

 

게야무로 로쿠시케

 

 

왜장 게야무로 로쿠시케를 남강변으로 유인하여 끌어안고 강물에 투신하여 왜장을 죽이고 순절하셨다.논개님은 진주성을 지키던 장수의 아내였고 진주성이 함락되어 남편이 죽게되자 논개는 기생복장을하고 왜군수장을 죽이려고 계획하고 실천했다.그러나 기생으로 오인해서 壬辰倭亂중 충신.효자.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이름이 오르지못하고 있다가경종1년(1721)공식적으로 비번사에서 그녀의 순국사실을 국가가 인정하고영조16년)1740)년 사당이 의암부근에 세워지고 매년 논개님의 추모제가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