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오르세 미술관의 로뎅

이모르 2020. 12. 24. 18:04

 

 

에펠탑에서 보는 파리의 석양

 

일몰후 점등한 에펠탑

 

 

파리가 왜 예술의 도시인가?

세느강을 사이에두고 유명한 박물관들 과 고풍스런 건물들이 줄지어 있고

예술적인 다리들이 낭만을 부른다 에펠탑에서 보는 파리의 일몰의 추억은

새롭기만하다 야경을 뒤로 유람선을 타고 가면 강변 따라 그룹지어 파리장들이

댄스 파티를 즐기는데 그룹 그룹이 저마다 여러가지 춤과  디스코 파티까지

즐기고 있었다

 

 

 

 

 

 

알렉산드르 3세 다리(Le Pont Alexandre )

 

알렉산드르 3세 다리는 19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조각과 장식으로 유명하다

특히 다리 양쪽 끝에 있는 화려한 아르누보

양식의 가로등과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여신과

페가수스 상이 금색으로 빛나고 있다

1897년에서 1900년 사이에 건축되었으며

1900년 만국 박람회 때 오픈되었고 1991년에

완전히 보수되었다 북쪽 강변은 샹제리제 거리와

연결되는 미술관으로 사용되는 쁘띠빨레와 컨벤션센타로

운영 되기도 해서 전시회나 박람회가 열리는

그랑 빨레와 마주보고 있다

남쪽 강변은 수목들로 들러 쌓인 넓은 잔디밭을

가진 나폴레옹 무덤이 있는 앵발리드로

연결되어 남북으로 파리의 가장 화려한 건축물을 보여준다

 

 

오르세 미술관의 세계 명작들 중 몇점을 소개해본다

 

 

 

1900년 개관 당시의 오르세 역의모습

 

 

 

 

 

 

 

 

 

옥외 조각상

 

 

 

오르세 박물관 내부

 

장 밥티스트 카프로(Jean Baptist Carpeaux) 천구를 지탱하는 네부분

 

 

그의 작품은 동시대의 전통적인 프랑스 조각에

대립되는 개념인 리듬과 다양함을 표현하며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을 예시했다. 한때 유명한 프랑스의 조각가

프랑수아 뤼드의 문하생이었다

 

1854년 로마상을 받은 뒤 로마에서 살았으며(1854-61)

그곳에서 미켈란젤로. 도나델로.베로키오. 등과같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조각가들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

 

파리의 틸리리 공원에 있는 극적인 청동상

(우골리노와 그의 아들들)로 명성을 얻었으며

나폴레옹3세의 궁정에서 총애를 얻어 많은 인물들의

흉상 제작을 의뢰 받았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The Dance 1869년 완성)

파리 오페라 극장 건물의 정면을 장식하기 위한 군상으로

화제를 불러 일으켰으며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의 작품들은 대개 악평을 받았으며 말년에는

더 심한 비난을 받았다

 

파리의 튈르리 공원에 있는 극적인 청동상

 

우골리노와 그의 아들들 Ugolino and His Sons(1861)

 

명성을 얻었으며, 나폴레옹 3세의 궁정에서 총애를 얻어

 

많은 인물들의 흉상 제작을 의뢰받았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The Dance(1869 완성)

 

파리 오페라 극장 건물의 정면을 장식하기 위한 군상으로

,

화제를 불러일으켰으며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의 작품들은 대개 악평을 받았으며, 말년에는

 

더 심한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부르델의 헤라클레스상

 

프랑스 조각가 부르델은 1889년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이

로뎅의 눈에 들어그의 제자로 (1893-1903) 관게를 맺게 된다

 

그러나 부르델은 스승이었던 로뎅과는 대조적으로 고대그리스와

로마의조각형식.그리고 전성기의 고딕조각 등을 연구하여

조각에 엄격한 형식미를 적용하였다

 

이러한 부르델의 작품은 감정과 내면을 표현하려고 했던 로뎅과는

달리 조각 자체의 견고함을 표현해 내려고 했다

 

1888년 첫 작품인 존경하는 음악가 베토벤상을 제작한후

만년에 이르기 까지 총 20여개에 달하는 베토벤상을

만들기도 했으며 1909년의(활을 쏘는 헤라 클레스)를 제작하여

획기적인 호평을 받았다

 

 

 

오르세 박물관의 조각

로뎅은 10세 부터 혼자 그림을 그리다가 청년기에 미술교육을 받고 누이의

구혼자를 소개하여주었는데 믿음직하지 못하여 누이가 수도원에서 사망하고

그 죄책감으로 조각을 그만두고 카토릭 교회에서 활동하는 신앙인이 되었는데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사제인 피터 주리안 데이말드(Peter Julian Eymard)의 설득으로

다시조각을 시작하는데 동물 조각가 였던 앙투안투안루이 바리(Antoine-Louis Barye)

의 수업을 듣게되고 동물들이 움직일 때의 정교한 근육 조직들을 훌륭히 표현했던

바리의 작품들은 로뎅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875년 이탈이아를 여행 하는데 그것은 자연으로부터의 새로운 출발의 의미가 있으며

(청동 시대)를 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1864년 평생의 반려자인 재봉사 로즈 뵈레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아들 오귀스트 외젠 부렛(Auguste-Eugène Beuret)을 낳았으며,

처음으로 조각 전시회를 가졌다. 전시회를 계기로 명성 높은

조각가 카리에 벨뢰즈 아틀리에(Albert-Ernest Carrier-Belleuse)

작업실에서 작업을 했는데, 지붕, 계단 그리고 출입문 장식들을 도맡아 하였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으로 인해 로댕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나 카리에 벨뢰즈 아틀리에의 요청으로 벨기에 브뤼셀에서 증권 거래소

건물장식들을 만들며 미술활동을 계속하였다. 1875년부터 이탈리아에서 체류했고

1877년에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칼레의 시민, 지옥문,

생각하는 사람》등이있다     위키백과  

 

 

 

 칼레의 시민

 

1347, 잉글랜드 도버와 가장 가까운 거리였던 프랑스의 해안도시 칼레는

다른 해안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거리상의 이점 덕분에 집중 공격을 받게 된다.

이들은 기근 등의 악조건 속에서도 1년여간 영국군에게 대항하나,

결국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처음에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3세는 1년 동안

자신들을 껄끄럽게 한 칼레의 모든 시민들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칼레 측의 여러 번의

사절과 측근들의 조언으로 결국 그 말을 취소하게 된다. 대신 에드워드 3세는 칼레의

시민들에게 다른 조건을 내걸게 되었다.

 

'모든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그러나 시민들 중 6명을 뽑아와라.

그들을 칼레 시민 전체를 대신하여 처형하겠다.‘

 

모든 시민들은 한편으론 기뻤으나 다른 한편으론 6명을 어떻게 골라야 하는지

고민하는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딱히 뽑기 힘드니 제비뽑기를 하자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 상위 부유층 중 한 사람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aint Pierre)'

죽음을 자처하고 나서게 된다. 그 뒤로 고위관료, 상류층 등등이 직접 나서서 영국의

요구대로 목에 밧줄을 매고 자루옷을 입고 나오게 된다.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 '칼레의 시민'

바로 이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절망 속에서 꼼짝없이 죽을 운명이었던 이들 6명은 당시 잉글랜드 왕비였던

에노의 필리파(Philippa of Hainault)가 이들을 처형한다면 임신 중인 아이에게 불길한

일이 닥칠 것이라고 설득하여 극적으로 풀려나게 된다. 결국 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인해 모든 칼레의 시민들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평가 이 일은 '그들이 상류층으로서 누리던 기득권에 대한 도덕성의 의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를 이행한 주요한 예로 꼽히고 있다.

 

역사적 사실

그러나 위의 이야기는 후대에 왜곡 및 과장된 것이다. 칼레 항복을 기록한 당대의

문건들은 모두 약 20여 개가 있는데, 여기서는 모두 시민 대표들의 행위가 항복을

나타내는 연극과도 같은 의식이었다고 적고 있다. 에드워드 3세는 당초부터 이들을

처형하려는 의도가 없었으며, 시민 대표들 또한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은 상태에서

항복 의례의 일부로 연출한 장면이라는 이야기이다. 그 무렵에는 죄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의미로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행진하는 종교 의례가 있었는데,

칼레 시민 대표들의 행위는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일화를 숭고한 희생으로 윤색하고 미화한 것은 14세기의 연대기 작가인

장 프루아사르(Jean Froissart)이다. 그는 1322~1400년 프랑스에서의 주요 사건을

기록한 5권의 연대기 작가로 유명하지만, 현대 연구자들은 다양한 기록의 교차 검증을 통해

그의 연대기가 사건 발생일, 발생지 등의 정보가 부정확하며, 애국적인 성향에 따라 많은

부분 왜곡이 있었음을 비판하고 있다. 칼레의 항복 속설 또한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장 프루아사르의 애국심이 투영되어 민족 정서에 호소하는 미담으로 가공된 것이다.

 

이처럼 당대 많은 기록 중 하나에 불과했던 프루아사르의 해석은, 16세기에 이 사건이

다시 프랑스 세간의 화제로 떠오르면서 대중의 감성을 사로잡게 되었다. 특히 19세기로

접어들어 민족주의가 발호하자 역사 교과서들은 칼레의 시민 대표들을 외세에

저항하며 동료 시민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한 애국적인 민족 영웅으로 부각시켰다.

칼레의 시민은 후대의 필요에 의해 재창조된 신화(myth)였던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1871년 화재로 불 탄 파리의 감사원 청사 자리에 세계 최고의 장식공예

미술관을 짓고 입구에 기념비적인 조각상으로 이뤄진 화려한 문을 설치하기로 했다.

인간의 속세와 영원한 운명을 기독교적 시각으로 다룬 단테의 '신곡(神曲)에 착안,

 200여 명의 군상을 등장시켜 '지옥의 문'으로 이름붙인 이 조각상은 우리에게 너무도

유명한 조각가 르네 프랑수아 오귀스트 로뎅(1840~1917)의 대표작이다.

 

이 조각상의 초점은 바로 지옥의 문 위쪽 벼랑 끝에 걸터앉은 '생각하는 사람'.

가파른 벼랑에 웅크리고 앉아 생각에 잠긴 한 남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애초에는

영혼의 판관인 미노스와 동일시했으나 사실은 시인 단테를 표현했다고 한다. 단테는

불후의 명작 '신곡'에서 지옥과 연옥, 천국에서 겪은 체험 중 지옥을 둘러볼 때

 베르길리우스와 동행한 것을 시로 표현했으나 로뎅은 홀로 턱을 괴고 앉아 벼랑 아래

 정경을 내려다보는 단테의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이후 '생각하는 사람'

 '지옥의 문'에서 독립된 작품으로 분리돼 오르세미술관에 소장하면서 후세에

'생각에 잠긴 인간의 모습'을 상징하게 됐다.

 

이미애 수성아트피아 전시기획팀장

매일신문 공식트위터 @dgtwt / 온라인 기사 문의 maeil01

 

 

 

 

지옥의문(Porte de ľEnfer)로댕의 1880-1917년 미완성작

지옥을 바라보며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간들을 즉시하며

고뇌에 찬 생각하는사람은 지옥의문 윗 부분에 있는데

로댕의 영향을 받은 단테가 앉아 있는 초상으로 알려져 있다

 

 

 

 

 

 

 

 

 

로뎅의 (지옥의문)은 로뎅미술관 과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데

로댕미술관에 있는 것은 청동으로 만들어졌고 반면 오르세 미술관에 것은

석고상으로 만들어졌다

 

1.생각하는사람

 

지옥의 문의 일부로 고통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내려다 보면서

자신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는 부분을 따로 조각해 놓았다

 

 

2.세 망령

 

지옥의문 맨 위쪽 중앙에 자리한 세 망령

동일한 작품을 세점복제하여 다른 각도에서 배치한 것이다

세망령은 혼란스런 저주받은 영혼 무리를 지배하며 질서를

유지시킨다

이들은 발밑에 펼처지는 아비규환에 속해있다

짐진 고뇌로 다리가 부러진 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서로를 맞대고

서로를 지탱하며 똑같은 고통으로 결속된다

운명의 무게는 셋을 짓누르며 육체적 힘의 무상함을 주장함으로

훨씬 위압적으로 보인다

지상을 떠난 망령이 무언의 절망은 어떤 비명이나 신음보다도

무시무시하다

이는 가장 대담한 내면의 갈등의 정점에 선 로뎅의 예술이다

 

 

 

 

3.로댕의 대표작 키스(파올로와 프란체스카) 

 

13단테의 신곡 5곡에 나오는 (Paolo and Francesca 육욕이야기)

형상화 하였다 13세기 젊고 잘생긴 시동생 파올로에 반한

gudtn 프란체스카의 불륜 이야기를 묘사 하였다

그러나 조각 자체는 대단히 아름답게 묘사 됐으며 이두사람이

그유명한 조각입맞춤의 모델이 되었다

서로에 대랑이 함께 어우러지고 있는데 원래는 지옥의문 오른쪽 아래에

입맞춤을 제작하였으나 로뎅이 전체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

떼어내서 살롱전에만 출품했다고 전해진다 한 감정을 깨닫는 순간의

두 연인을 재현한 이작품은 뜨거운 숨결과 부드러운 사랑과 함께

어우러지고 있는데 원래 지옥의문 오른쪽 아래에 입맞춤을 제작하였으나

로댕이 전체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 떼어내서

살롱전에만 출품했다고 전해진다

 

 

4.순교자

 

이 작품은 1889년 처음 전시된 이래 수많은 수정을 거쳤다

순교자 지만 그모습이 고통스럽다 이는 로댕이 가진 인간에 대한

진실 추구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지옥의 문중 무룹을 꿇은 목신이 받치고 있는 두 남녀의

기원이 됐으며 대리석조각 오르페우스 와 유리디체 모델이

되기도 했다

 

 

5.우골리노(Ugolin) 오귀스트 로댕,1906년작

 

13세기 도시국가 전쟁에서 적에생포된 우골리노 델라 게라르데스카는

반역죄를 선고받고 두아들과 손자 2명과 함께 피사의 있는 기아의탑

투옥되고 열쇠는 강물에 던저졌다

아사상태에 이른 우골리나는 배고파 죽은 자신의 아들 시신을 먹고

마지막 생존자가 됐다

그러나 그는 교회에서 금기한 이러한 행동으로 지옥으로 떨어졌다

 

 

6.허무한 사랑(Fugit Amor)

 

단데의신곡 지옥편에 나오는 이야기

(지옥문) 왼쪽 문 가운데와 오른쪽 문 꼭대기에

방향을 바꾼형태로 각각 조각되어 있다

그중에 남성은 탕아에서 다시 나타난다

관능적인 인간의 사랑을 느끼게 하며 달아나는 여인을 붙잡기

위해 뻗치고 있는 남성의 두팔을 보면 여인의 아릅다운 매력을

더욱 느끼게 한다

로댕은 같은 주제로 많은 브론즈 작품들을 제작하였고

대리석으로 만든 작품도 여럿있다

여인의 등은 깊게 파였으며

남자의 트르소는 평평하고 다리는 늘어져 있다

이중 젊은 남자의 얼굴을 로댕은

슬픔의머리(슬픔의두상)라고 불렀다

 

 

중년 (L˙Age mur 1m×14cm 1895-1899 작품)

까미유 끌로델 (Camille Claudell 1864-1943)

 

비운의 로댕의 연인이며 제자였던  까미유 끌로델은 로댕에

대한 연정으로 정신병원에서 병사한다

 

 

 

이탈리아 조각가 첼리니(Benvenuto Cellini 1500-1571)의

메투사의 목을벤 페리세우스

 

-밥티스트 카르포 1827-1875 :

 

Jean Baptist Carpeaux “Dance”(장 밥티스트 카르포.) 춤추는

여섯명의 여성은 춤이 불러오는 터질듯한 환희의 기쁨을 나타낸다

우아하기보다 육감적인 여성들의 춤 동작은 평론가들에게 지나치게 관능적이며

부도덕하다는 평을 받았지만 현재는 자유분망한 모습을

표현한 걸작으로 인정 받는다

 

 

 

 

⑴⑵⑶⑷⑸

오귀스트 클레정제

(뱀에 물린 여인 1847년 대리석)

 

이작품은 무명의 오귀트 클레제제를 일약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예술가로 올려놓은 작풉이다

 

조각가의 모델이었던 사바티에 부인이 당시에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매혹적인 뮤즈였기 때문이기고

클레쟁제의 연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관람자들은 이조각상에서 사바티에 부인의 엑스터시를

연상한 동시에 뱀에 물린 죽어가는 여인의 몸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원할 것 같지만 이제 곧 스러져갈 생명력(에로스)

목전에 두고 있는 죽음(타나토스)의 하모니에 매료될 수

밖에 없을 것 같네요

작품명은 뱀에 물린여인이지만 결국 소재는

클레오 파트라에서 가져온 것이다

 

 

 

 

 

 

 

 

루이 에르네스트 바리아스

과학을 통해 베일이 벗겨지는 자연의 여신

 

1889년 로드로의 의과 대학이 생기며 장식용으로 의뢰된 조각이라한다

의학과 과학 자연 인체를 은유한 유명한 작품으로 장식용으로 많은

모조품이 만들어 진다 한다

 

 

 

오노레 드 발자크(Honore de Balzac,1799-1850) 로댕,1897년작

 

 

빅또르 위고(Victor Hugo,1802-1885)흉상/로댕,189

 

걷는사람(L˙Homme qui marche)

로댕(Auguste Rodin 1840-1917)

높이 84cm 1877년작

 

 

넘치는 미술품속에서 정신을 팔다가

잠시 쉴수 있도록 개방해 놓은

가운데 테라스세느강과 루브르 박물관이 보인다

 

테라스의 조각품 옆으로

멀사크레 쾨르 사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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