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려실기술 제24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이괄(李适)의 변(變)
이괄은 참판 이육(李陸)의 후손으로 무과에 합격하였으며, 글을 잘하고 글씨를 잘 써서 명성이 있었다. 계해년(1623)에 북병사(北兵使)로 임명되어 부임하기 전에 김류(金X29804;)ㆍ이귀(李貴) 등이 이괄이 재주와 지혜가 많다 하여 그에게 반정의 비밀 계획을 말하였더니, 이괄이 강개하여 따랐다. 반정하던 날 부서를 나누는 등 모든 계획을 이괄이 하였으나, 공훈의 등급을 논할 때에 반정에 늦게 참여하였다 하여 2등으로 낮추었으므로 이괄이 매우 불평하였고, 공론 역시, “박원종(朴元宗) 등이 반정(중종반정)을 할 때에 유자광(柳子光)은 처음 계획에 참여하지 않은 자였으나, 반정하던 날에 그의 계책을 썼으므로 일등 공신이 되었다. 오늘날 이괄의 한 일이 자광과 같은데 공을 책정하는데는 그보다 오히려 낮았다.” 하며 자못 억울하게 여겼다. 이해 여름에 평안도에 오랑캐의 침입이 우려되어 괄을 평안병사(平安兵使) 겸 부원수(副元帥)로 삼았더니, 이괄이 크게 노하여 마침내 속으로 딴 마음을 품었다. 《하담록》
○ 반정 이튿날 반정에 참여하였던 여러 장수가 어전에서 일을 의논할 때에 이귀가 아뢰기를, “어제의 공적은 이괄의 힘이 많았으니 마땅히 그를 병조 판서로 삼아야 합니다.” 하였으나 이괄이 자리를 피하면서, “신에게 무슨 공적이 있으리오. 다만 일에 임하여 회피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어제 대장인 김류가 약속 시간에 오지 않아서 이귀가 신에게 그를 대신케 하였는데 김류가 늦게 왔으므로 그를 베고자 하였으나, 이귀가 극력 말려서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더니 자리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이 실색하였다. 이에 김류가 말하기를, “이경(二更)으로 시간을 정하였으니 병법으로 논한다면 미리 온 자가 마땅히 참형을 당하여야 한다.” 하니, 한교(韓嶠)가, “병법에는 그런 말이 없다.” 하자, 김류가, “《오자》(吳子 전국 시대의 명장 오기(吳起)가 지은 병서(兵書))에 있다.” 하였다. 그러자 이귀가, “《오자》에는 병졸이 장수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돌진하여 명령을 어기면 참(斬)한다는 말은 있으나 미리 도착한 자를 참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하였다. 또한 그때 임금이 쇠고기와 술을 많이 준비하여, 반정에 참여하였던 장수와 병졸을 모화관(慕華館)에서 대접하였는데, 좌석의 서열을 정하는 데 있어 이귀는 호위대장(扈衛大將)으로 북쪽에 앉았고, 김류는 거의대장(擧義大將)으로 이귀의 위쪽에 앉았으며, 이괄 이하의 모든 장수들은 동서로 나누어 앉게 되었는데, 이괄은 자기 자리가 김류의 아래인 것에 분노하여 물러나 흘겨보았다. 이에 이귀가 좋은 말로 화해시켰더니, 이괄이 분노를 참고 자기 자리에 가 앉았다. 뒤에도 이괄은 일마다 김류와 서로 맞섰고, 또 이괄의 아들이 반정에 참여하였는데도 등용되지 않았으며, 그 아우 이수(邃)는 문과에 합격하였는데도 벼슬 자리를 얻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훈이 도리어 김류의 아들 김경징(金慶徵)의 아래였는데다 이괄이 또한 평안 병사로 서쪽 변방에 나가게 되니, 앙앙거리며 분노를 품고 갑자년의 변을 일으켰다. 《연평수록(延平手錄)》
○ 그때 이수일(李守一)은 내응한 공적이 많다 해서 곧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고, 이괄은 늦게 반정에 참여하였다 하여 수일보다 낮은 판윤(判尹)에 임명되니 공론이 억울하게 여겼다.
○ 5월에 장만(張晩)을 도원수(都元帥)로, 이괄을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삼고, 임금이 친히 모화관에서 전송하면서 손수 어도(御刀)를 내리고 수레바퀴를 밀어 보냈다. 이때 이괄의 기색에 화난 기색이 역력하므로 신경진이 손을 잡으며 송별하면서, “영감이 이번에 가게 된 길은 우리들도 모두 한 번씩은 거쳐야 할 것이니, 영감이 체직되어 오면 내가 대신 가겠소.” 하자 이괄이 벌컥 성을 내며, “나를 내쫓아 보내는 것이오. 영감은 속이지 마시오.” 하였다. 《일월록》
○ 그때 원수(元帥)는 평양에서, 부원수는 영변(寧邊)에서 각각 개부(開府)하였다. 이괄은 평소부터 군사를 잘 다룬다고 일컬어졌고, 정병 수만 명과 항왜(降倭)와 검사(劍士)가 모두 그에게 예속되어 있었다.
○ 갑자년(1624) 1월 《일월록》에는 14일이라고 하였다. 문회(文晦)ㆍ이우(李佑)ㆍ김광숙(金光X29117;) 김광숙은 《승평시장(昇平諡狀)》에 기록되어 있다. 등이 기자헌(奇自獻)ㆍ현집(玄楫)ㆍ이괄과 그의 아들 전(X26051;)ㆍ한명련(韓明璉)과 그의 아들 난윤(瀾潤) 등이 반란을 음모한다고 고발하였다. 그때 원훈(元勳)들은 처음으로 특별한 공훈을 세웠으므로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복종하지 않을까 지나치게 염려하여, 널리 기찰하려고 밀고할 수 있는 길을 크게 넓혔다. 이때에 문회 등이 고변하였으므로 임금이 대신 및 원훈을 불러 의논케 하였던바 김류는 이괄이 반역하지 않을 것이라 하고, 이귀와 최명길 등은 반드시 반역하리라 하여 어전에서 서로 다투었는데 이귀가 노하여, “김류는 틀림없이 이괄과 공모하였으므로 이괄이 원통하다고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다만 이괄의 아들 이전과 기자헌 등만을 체포하도록 하였는데 이날은 17일이였다. 이귀가 또 말하기를, “만약 이괄이 반역 음모가 없으면 그만이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아버지인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지방에 있는데 그 아들만을 체포하면 그가 어찌 기꺼이 공손하게 명을 듣겠는가. 부자를 함께 체포하느니만 못하다. 만약 그 일이 억울한 것이라면 그를 도로 부임지에 돌아가게 한들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이 찬성하지 않았다. 《연평행장(延平行狀)》 《하담록(荷潭錄)》
○ 기자헌ㆍ이시언(李時言)ㆍ한여길(韓汝吉)ㆍ유공량(柳公亮)ㆍ이성(李)ㆍ김원량(金元亮)ㆍ전유형(全有亨)ㆍ윤수겸(尹守謙)ㆍ현집 등 40여 명을 하옥하였다. 《일월록》
○ 17일 선전관(宣傳官) 김지수(金智秀)ㆍ의금부 가도사(假都事) 심대림(沈大臨)ㆍ고덕창(高德昌) 등을 보내어 이전(李X26051;)과 한명련 등을 잡게 하였다.
○ 심대림은 심대(沈岱)의 아들로 이 때 그의 나이는 자기 아버지가 왜란에 죽던 때의 나이와 같았고, 또한 집에 재변이 있어서 가도사로 떠나면서 심히 걱정하고 두려워하더니 마침내 역적의 손에 죽었다. 《일월록》
○ 일찍이 윤의립(尹義立)의 서조카 인발(仁發) 등이 과거 공부를 빙자하고 인성군(仁城君)의 집 근처에 모여 살면서 이괄과 서로 통하였는데, 이우(李佑)와 문회가 그 음모를 알고 고변하려 하였다. 이에 인발이 그 일이 이미 누설되었음을 알고 사람의 시체를 구하여 그 낯가죽을 벗겨서 이부 고개[利夫峴]에 버리어 자기가 죽은 것처럼 해놓고 영변으로 가서 종적을 감추었다. 이 때 문회 등이 음모 사실을 여러 공신들에서 알렸으나 모든 공신들은 발설하여 고변하기를 어렵게 여기는데 이귀가, “신하된 자로서 화가 종사에 절박하게 닥쳤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차라리 고변하였다는 비방을 들을망정 혐의를 피하기 위하여 덮어둘 수 없다.” 하였다. 이어 문회 등을 붙잡아 두고, 우선 군관(軍官)을 보내어 고발 관련된 정찬(鄭澯)ㆍ정방열(鄭邦說)ㆍ한흔(韓X35362;)ㆍ한준철(韓浚哲) 등을 체포하도록 하는 한편 그날 밤에 이귀의 집으로 여러 공신을 초대하여 놓고는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을 청하였으나 그는 병으로 오지 못하고, 다만 그 아들 회일(會一)만을 보냈다. 이에 같이 문회 등의 말을 듣고 그들로 하여금 고변하도록 하는 한편, 여러 대장과 함께 각각 군관을 거느리고 대궐을 호위하였다. 그때 연일 국문하였는데 고발에 관련된 사람들이 곤장을 맞으면서도 자인(自認)하지 아니하자, 추관(推官)이 그 고발이 무고(誣告)라 하여 고변한 한흔을 죽였고, 또 장차 문회와 이우를 아울러 죽여 옥사를 번복할 계책을 세우니 이귀가 어전에서 “옥사를 다스리는 초기에 고변한 자를 먼저 죽이는 것은 불가하다.”고 극력 다투어 죽이지 않게 되었다. 옥사가 점차 만연되어 기자헌 등 30여 명이 잡히게 되었고, 이괄 부자의 이름 역시 뚜렷이 국청의 명부에 있는데 국청에서 다만 그의 아들 이전(李X26051;)만을 체포하도록 청하므로 이귀가 그 불가함을 극력 진술하며 소리를 높여 다투기까지에 이르니, 임금이 “이귀를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묵재일기(默齋日記)》
○ 김원량은 본래 이괄과 서로 친하였으므로 여러 공신들에게 힘써 이괄을 구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자, 이귀에게 편지를 써서 이괄의 사실을 변명하면서 당초에 인성군(仁城君)을 세우자고 의논하던 일까지 들어서 증거를 대고, 또 이괄의 아들의 재주와 행실을 크게 칭찬하는 동시에, 그 원통한 실상을 역력히 진술하며 앞으로 그와 생사를 같이 하고자 한다는 말까지 하였으나 이귀는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아니하였다. 《일월록》
○ 그때 정용영(鄭龍榮)과 그의 아들 정찬(鄭澯) 역시 심문을 받았는데, 용영이 곤장을 맞게 되자 정찬이 나아가 말하기를, “만약 아버지의 곤장을 면해 준다면 내가 그 실상대로 고하겠습니다.” 하니 추관(推官)이 앞으로 나가 묻고 문사랑(問事郞) 김시양(金時讓)이 그 공술을 받았는데 정찬이 말하기를, “이괄이 반역하려는 실상을 토로한 자가 있습니까?” 하므로, “없다.” 하니 정찬이, “이괄이 이달 그믐께 군사를 일으켜 반란하여 개천(价川)ㆍ순천(順川)ㆍ곡산(谷山)ㆍ수안(遂安)의 길을 따라 올라오기로 약속하였는데, 문회가 이미 고발하였으니 이괄이 반드시 금부도사와 선전관의 목을 베고 이미 군사를 일으켰을 것입니다. 우리 형은 한명련의 사위로서 이괄의 행동을 탐지하여 고발하려고 명련의 처소에 가 있는데 금명간에 반드시 올라올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면 “명련이 공모하였는가?” 하자 정찬이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그러나 협박을 받아 반란에 가담하였을런지는 나도 알 수 없습니다.” 하니, “기자헌도 역모에 참여하였는가?” 하니 정찬이 대답하기를, “다른 마음이 있다는 것은 들었으나 그들이 서로 통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였다. 또, “너의 아버지도 아는가?” 하였더니, “아들이 하는 바를 아버지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였다. 추관 김류 등 이괄이 반역할 사람이 아니라고 하던 이들이 모두들 크게 놀라 용영을 불러 물었더니 용영이 대답하기를 “윤인발(尹仁發)이 죽은 것처럼 꾸미고 남 몰래 이괄에게 가서 그의 술책가(術策家)가 되어 있습니다.” 하였더니 추관이 모두, “윤인발이 살아 있다니 이 사람의 말은 모두가 믿을 수 없다.” 하고 끌어내려 곤장을 쳤는데 이는 지난해 10월에 인발이 이부 고개에서 도적을 만나 살해되어 그 낯가죽이 벗겨지고 거세된 채 내버려진 것을 그의 집에서 장사지냈다고 소문난 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하담록》
○ 인발은 고 승지 경립(敬立)의 첩자(妾子)로 이괄의 아들 이전과 함께 음모하여 내응키로 약속하였는데 이우 등에게 고발당하자 죽은 것처럼 꾸미고 영변으로 들어갔다. 《일월록》에, “묘당통유(廟堂通諭)에 있다.” 하였으니 참조하시오.
○ 21일에 금오랑과 선전관이 이괄의 병영에 갔더니, 그때 이괄의 직속 군사이며 정예병이라 일컫는 1만 2천여 명과 항왜(降倭) 1백 3십 명이 삼동(三冬 음력 12월)인데도 연습하고 있었다. 의금부 도사가 다다르자 이괄은 고의로 늦게 문을 열어주고, 한편 그의 부하 이수백(李守白)ㆍ기익헌(奇益獻)ㆍ최덕문(崔德雯)ㆍ이정배(李廷培) 등을 데리고 꾀하기를, “나에게는 오직 아들 한 명밖에 없는데 그 애가 잡혀가서 장차 죽음을 당할 것이니 어찌 아비가 온전할 수가 있겠는가. 일이 이미 급해졌으니 남아가 죽지 않는다면 몰라도 잡혀 죽으나 반역하다 죽으나 죽기는 일반이니, 어찌 능히 머리를 숙이고 죽음을 받겠는가.” 하니 익헌 등이 이구동성으로 “거사하려면 내려온 사자(使者)를 죽여서 군중(軍中)을 위협시켜 다른 의논이 없도록 하시오.” 하였다. 이에 이괄이 일을 의논하려고 여러 장수를 부르니 중군(中軍) 이윤서(李胤緖)ㆍ별장 유순무(柳舜懋)ㆍ이타(李)ㆍ우후(虞侯)ㆍ이신(李愼)이 모두 왔으므로 이괄이 그 계책을 말하고 칼자루를 어루만지면서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며, “감히 어기는 자 있으면 죽이리라.” 하니 좌우가 두려워하며 모두 “예, 예.” 하였다. 이에 성 안에 군사를 포진시키고 문을 열어 도사를 들어오게 하여 미처 뜰에 이르기도 전에 군교(軍校)에게 명하여 베니 온 군중이 두려워 떨었다. 곧 군중에 명을 내려 22일에 거사할 것을 약속하고 또 근방의 병영과 수령에게 명을 전달하기를, “시급한 군무(軍務)로 상의할 일이 있으니 밤낮을 가리지 말고 급히 오라.” 하였는데 이때는 21일 해시(亥時)였다. 김기종(金起宗)의 《서정록(西征錄)》
○ 이괄이 반란할 때 직속 부하 중의 날쌘 자를 나눠 보내어 여러 장수를 부르면서, “서울에 변이 생겼으니 군사를 이끌고 들어가 구원하여야겠다.” 하였는데, 정주(定州) 목사 정호서(丁好恕)는 그 말의 사실 여부를 의심하고 이괄의 사자를 베어 죽이고 군사를 이끌어 장만(張晩)에게로 나아갔다.
○ 그때 도원수(都元帥) 장만은 평양에 개부(開府)하고 있었다. 중군(中軍) 남이흥(南以興)의 부하 남두방(南斗傍)이 때마침 사사로운 일로 영변에 갔다가 잡혔는데 이괄이 놓아 보내면서 그의 편에 남이흥에게 편지를 부쳤다. 다음날 편지가 평양에 이르니 이흥은 이괄이 이간시키고자 함을 미리 알고서 뜯어 보지도 않고 원수부(元帥府)에 바쳤다. 원수가 뜯어 보았더니 글 가운데 이흥과 유효걸(柳孝傑)ㆍ박진영(朴震英) 등의 자(字)가 쓰여 있었고 그 줄거리는, “밝은 임금이 위에 계신데 흉악한 무리가 조정에 가득 찼으니 임금님 옆의 악한 무리를 숙청 아니할 수 있는가. ……” 하였다. 장만이 곧 이를 올려 아뢰었다. 《일월록》
○ 그때 장만은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역적이 부원수의 칭호를 가지고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려 바로 올라오니, 그 예봉(銳鋒)을 경솔히 범할 수 없다. 내 비록 명칭은 원수이나 거느린 군사는 수천 명도 되지 않으니 힘으로는 싸우기가 어렵다.” 하고 여러 고을에 전령(傳令)하여 군사를 재촉하여 평양에 들어와 고수할 계획을 하였다.
○ 남북의 감사와 병사에게 전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오라 하고 군관 강용(姜涌)을 수안(遂安)의 임시 수령으로 삼는 한편, 이정(李靖)에게 포수병(砲手兵) 1초(哨)를 주면서 수안과 서흥(瑞興)의 두 읍 군사를 모아 미리 새원(塞垣)을 막아 적의 길을 끊게 하였다. 《일월록》
○ 22일에 적이 영변을 출발하여 개천(价川)을 향해서 사잇길로 빨리 달렸는데 대체로 장만과의 교전을 피하려는 것이였다. 또한 군사가 기율이 있고 부서가 정제(整齊)되어 있었다. 안주(安州) 방어사 정충신(鄭忠信)이 숙천(肅川) 부사 정문익(鄭文翼)을 시켜 안주를 지키게 하고, 자기는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원수부로 떠나 저녁 때 장만의 원수부에 도착하였더니, 장만이 곧 잡아들여 죄를 주려 하므로 충신이, “적의 계획은 빨리 서울로 진군하려는 것이므로 반드시 안주는 거치지 않을 것이고, 설사 거친다 해도 세력이 막아내기 어려울 것이므로 외딴 성을 고수하고 있는 것보다는 원수부에 와서 명령대로 움직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였더니 장만이 옳게 여기고 정예한 기병 100여 명을 주어 군관 조시준(趙時俊)과 함께 안주에 가서 성을 지키게 하였다. 충신이 안주로 가다가 중도에서 적이 이미 개천으로 향하였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 보고하기를, “안주가 이미 적의 수중에 들어 있으니, 앉아서 빈 성만 지킴으로써 임금에게 적병의 걱정을 끼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일월록》
○ 이괄은 정충신이 원수를 따르고 있다는 말을 듣고 꺼리는 기색이 있었는데 관군의 여러 장수의 능력을 헤아려 보고 모두 가볍게 여기면서도 충신에 대해서는 “이 사람은 가볍게 볼 수 없다.”고 하였다.
○ 장만이 충신에게 묻기를, “지금 역적의 계획이 어떠할까?” 하니 충신이, “상ㆍ중ㆍ하의 세 가지 계책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적들이 처음 일어나던 날쌘 기세로 곧장 한강을 건너 임금의 행차에 가까이 오면 성패를 미리 알 수 없을 것이니 이는 상책이요, 평안도와 황해도에 걸쳐 모문룡(毛文龍)과 세력을 연결하면 조정에서 쉽사리 제압할 수 없을 것이니 이는 중책이요, 사잇길로 빨리 서울로 달려가 빈 성만 지키고 앉아 있으면 소용이 없을 터이니 이는 하책입니다.” 하였다. 다시 묻기를, “그대의 생각으로는 이괄이 어떤 계책을 쓸 것 같은가?” 하니, 충신이, “괄은 날래나 꾀가 없으니 반드시 하책을 쓸 것입니다.” 하였다.
○ 한명련(韓明璉) 또한 도사(都事)를 죽이고 먼저 30여 기병을 이끌고 이괄에게 가면서 중군 김효신(金孝信)과 별장 강작(康綽)에게 그 군사 1200명을 거느리고 뒤따라 출발하게 하였다. 혹은, “명련이 처음에는 반역한 사실이 없이 잡혀가게 되었는데 이괄이 그 사실을 추측하여 알고 항왜(降倭)를 시켜 중도에 숨었다가, 도사를 베어 죽이고 명련을 잡아다 군중에 가서 풀어놓고 달래었더니 명련이 드디어 따랐다.” 하였다. 효신 등은 개천에 가서야 명련이 반역한 것을 알아차리고, 강작을 베어 죽이고 귀순하였다. 《일월록》과 《하담록》에는 이와 다르다. 다음에 나온다.
○ 24일에 장만의 장계(狀啓)가 들어오니 도성 안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 이수일(李守一)을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삼았다. 《일월록》
○ 이원익(李元翼)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이시발(李時發)을 부도체찰사(副都體察使)로 삼아 이중로(李重老)를 거느리고 평안도로 내려가게 하는 동시에, 경기 감사 이서(李曙)를 시켜 개성부(開城府)에 주둔하여 적이 내려오는 길을 막게 하였다. 《일월록》
○ 변흡(邊X28509;)을 황해 병사로, 이경직(李景稷)을 전라 병사로 삼았는데, 그때 이미 남으로 파천할 행차가 있을 것을 생각한 것이였다.
○ 그때 원익이 몸소 출전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때이니 원로(元老)는 멀리 가서는 안 되오.” 하고 시발을 시켜 수일 등을 인솔하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 선전관을 각 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급히 보내어 도내의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오도록 명하니, 중화(中和) 부사 유대년(柳大年)은 군사 1천 여명을 거느리고 올라오고 황주(黃州) 포수 1천 명도 왔고, 성천(成川) 부사 정두원(鄭斗源)은 백여 명을 거느리고 왔으며 겸하여 군량을 관리하였고, 자산(慈山) 군수 안몽윤(安夢尹)ㆍ삼화(三和) 현령 유대일(兪大逸)ㆍ강동(江東) 현감 최응일(崔應一)ㆍ상원(祥原) 군수 이숙(李琡)ㆍ용강(龍岡) 현령 신유(申X26328;)ㆍ강서(江西) 현령 황익(黃瀷)ㆍ증산(甑山) 현령 장돈(張暾)ㆍ광량(廣梁) 첨사(僉使) 장훈(張X26331;)이 잇달아 달려왔으며 본도 도사(都事) 김진(金搢)도 지방에 나가 순시하다가 돌아왔다.
○ 본도 감사 이상길(李尙吉)이 철산(鐵山)에서 달려 왔고 용천(龍川) 부사 이희건(李希建)ㆍ곽산(郭山) 군수 민여검(閔汝儉)ㆍ선천(宣川) 부사 김경운(金慶雲)ㆍ정주(定州) 목사 정호서(丁好恕)ㆍ선사포(宣沙浦) 첨사 이택(李澤)ㆍ복수장(復讐將) 김양언(金良彦)ㆍ삭주(朔州) 부사 민인길(閔仁佶)ㆍ영원(寧遠) 군수 안준(安俊)이 모두 잇달아 왔으며, 덕천(德川) 군수 이후여(李厚輿)는 변을 듣고서 군(郡)을 버리고 곧 서울로 달려왔다.
○ 그때 이괄이 반란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오니 조야가 흉흉하였다. 임금이 이귀를 불러 보고 이르기를, “내가 경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음을 후회하오. 경의 추측에는 지금 적세가 어떠하겠소.” 하니, 이귀가, “신이 듣건대 원수의 군사가 이미 황주(黃州)에서 패하였다 하옵니다. 평안도 병력이 적을 토멸하지 못하였으니 황해도 병력은 더욱 막아낼 수 없을 것이고, 황해도가 패하게 되면 경기에서는 막아내기가 실로 어려울 것이며 도성 안에도 내응하는 자가 많을 것이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금일의 계책으로는 우선 종묘의 신주와 대비를 받들어 강화도로 옮기도록 하시고, 사대부의 가족이 피난하는 것도 금하지 말 것이며, 전하께서는 친히 전군(全軍)을 독려하여 기회를 보아 적을 토멸함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으나, 이 의견은 일부 사람들에게 저지되어 행해지지 않았다. 《연평일기(延平日記)》
○ 그때에도 김원량(金元亮)은 이괄이 반란하지 않았을 것이라 하며, 자신이 가서 달래겠다고 청하였다. 《연평일기》
○ 그때 장만이 남이흥에게 묻기를, “적은 숫자가 많고 우리는 적은데 어떻게 하면 이기겠는가?” 하니, 이흥이, “적의 장수 유순무(柳舜懋)ㆍ이신(李愼)ㆍ이윤서(李胤緖)는 비록 적중에 있으나 적과 마음이 일치하는 자들은 아니니 편지를 보내어 유혹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염헌집(恬軒集)》
○ 이에 장만이 윤서의 종 효생(孝生)을 불러 음식을 잘 대접하고 재물까지 후히 주며 약속하기를, “윤서에게 편지를 전하고 그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귀순하게 하면 너에게 꼭 상으로 천금을 주겠다.” 하였더니 효생이 재물을 사양하며 말하기를, “이 글을 전함으로써 주인을 죽음에서 벗어나서 살게 하는 것만도 이 종으로서는 다행한 일입니다. 제가 어찌 이로 말미암아 재물을 받고자 하겠습니까.” 하므로 보는 이들이 모두, “의롭다.” 하였다. 윤서는 장만의 편지를 받아보고 귀순을 결심하여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장관(將官)과 밀약하고 밤중쯤 되어 포를 쏘며 군문(軍門)에 나가서 크게 외치기를, “우리들은 의(義)로써 귀순하러 간다. 병사들은 역적을 따르지 말라.” 하였다. 그 다음날 이윤서ㆍ유순무ㆍ이신ㆍ이타 등 4명이 원수부에 나아가 통곡하자 장만이 병상에서 내려와 손을 잡아 위로하고 곧 순무를 중군으로 삼았는데, 이날 밤 적 진영에서 탈출한 자는 3천여 명이나 되었고, 윤서를 따른 자는 6백 명이 되었다. 장만이 문득 원수부 서문 밖에 흰 깃발을 꽂아놓고 항복할 자를 불러오게 하여, 방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말하기를, “능히 나를 찌를 수 있거든 찌르라. 그렇지 않은 자는 내가 시키는 대로 들으라.” 하니 사람들이 그의 도량에 감복하여 울면서 죽기를 맹세하였다. 윤서는 당초에 죽지 못하였음을 한탄하며 마음의 병이 되어 칼에 엎어져 죽었다. 한편 이괄은 결사병(決死兵) 8명을 모집하여 그들을 시켜 장만과 감사를 찔러 죽이게 하였던바 한 명이 나졸에게 붙들렸다. 이에 장만이 이괄의 결사병에게 술까지 먹여서 풀어놓아 가게 하였는데 이는 적들로 하여금 평양에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였다. 장만이 또 김기종(金起宗)을 시켜 격문 2백 통을 쓰게 하였는데, 그 중 반은 언문으로 써서 길 옆에 붙이게 하였더니 적의 선봉이 이 격문을 보고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 “전에 들으니 원수도 역시 반란에 참여하였다고 하더니, 이제 격문을 보니 이괄이 우리를 속였구나.” 하였다. 《일월록》
○ 윤서가 귀순한 후로 이괄은 매우 두려워하여 감히 관부(官府)에 들어가 자지 못하고 하룻밤 사이에도 여러 번 자리를 옮겼는데, 이는 군사들이 저를 죽일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였다. 《하담록》
○ 28일에 장만이, 적이 평양을 거치지 않을 것을 알고 출병하기를 의논하는데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이날은 직성(直星)이 7살(七殺)이니 병가(兵家)에서는 꺼립니다.” 하였더니 정충신이, “어찌 객지에서 부모의 병환 소식을 듣고 날을 택하여 가는 자가 있으리오. 그리고 군사는 의(義)가 힘인데 어찌 음양의 날짜나 방위에 구애되리오.” 하니 뭇사람들이 굴복하였다. 이에 충신을 전부대장(前部大將)으로, 박영서(朴永緖)를 전봉장으로, 유효걸(柳孝傑)ㆍ장돈(張暾)을 좌우협장(左右協將)으로, 남이흥을 계원장(繼援將)으로, 조시원(趙時瑗)을 돌격장(突擊將)으로, 평양 판관 진성일(陳誠一)을 전후장(殿後將)으로, 안몽윤(安夢尹)을 관향관(管餉官)으로, 최응일(崔應一)을 향도장(嚮導將)으로, 정주 천총(定州千摠) 홍침(洪沈)을 척후장(斥侯將)으로, 박진영(朴震英)을 별장(別將)으로 삼고 1천8백여 명을 거느리게 하였다. 이날 늦게 군사를 출발시켰는데 해가 이미 저물어서야 겨우 대동강을 건넜다. 《일월록》
○ 독전어사(督戰御史) 최현(崔晛)이 평산(平山)에 이르러 원수부에 통첩을 보내어 군사를 재촉하여 나아가 싸우게 하였다.
○ 적을 쫓아가 황주(黃州) 서쪽의 신교(薪橋)에서 만나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적의 장관(將官) 안륵(安X29583;)과 허전(許銓) 등이 부하 군사를 거느리고 장만에게 투항하였다. 《하담록》
○ 황주(黃州) 마장(馬場)에 이르러, 들판을 사이에 두고 진을 치고서 안륵을 석방하여 선봉에 속하게 하여 적을 쳐서 속죄하게 하였다.
○ 2월 2일 묘시에 관군이 진을 정렬하기도 전에 적이 진영에서 거짓으로 포를 쏘더니, 허전(許銓)ㆍ송립(宋X23718;)이 기병을 이끌고 관군에 투항하러 오는데, 관군은 적병이 공격하여 오는 줄로 알고 놀라 무너졌다. 별장(別將) 안륵과 척후장(斥侯將) 오섬(吳暹)은 적에게 사로잡히게 되었고, 선봉(先鋒) 박영서는 적중에 함몰되자, 말을 버리고 단정히 앉아 꾸짖기를, “네, 부원수 겸 부원군(府院君)으로서 무엇이 부족하여 감히 하늘에다 활을 쏘아 반역을 하였느냐.” 하였더니, 적이 영서를 마구 찍어 죽였다. 《일월록》
○ 그때 유효걸(柳孝傑)도 역시 포위되었었는데, 그의 종 산수(山水)와 함께 곤봉을 가지고 휘둘러 치며 싸우다가 산수는 죽고, 효걸은 겨우 죽음을 면하여 편장(偏將) 강열(姜說) 등과 함께 돌아왔다. 이 싸움에서 관군으로 적에게 잡힌 자가 30여 명이였고, 전사자 또한 30여 명이였다. 적병으로 내항(來降)한 자는 1천8백 명에 달하였다.
○ 이괄이 수안(遂安)에 와서 관군이 새원(塞垣)을 지키고 있음을 알고, 돌아서 기린(麒麟)으로 가는 길을 향하였다. 장만은 패한 군사를 수습 정비하여 그 뒤를 추적하다가 서흥(瑞興)에서 부원수 이수일을 만나 함께 평산(平山)에 이르렀다. 그때 부찰사(副察使) 이시발ㆍ독전어사(督戰御史) 최현ㆍ황해 감사 임서(林X14688;)가 평산 산성에 있으면서 진군할 것을 의논할 때 남병사(南兵使) 신경원(申景瑗)이 또한 군사 8백 명을 거느리고 왔다. 6일에 이괄이 저탄(猪灘)에 이르렀으므로 방어사(防禦使) 이중로(李重老)ㆍ이덕부(李德符)가 풍천(X35920;川) 부사(府使) 박영신(朴榮臣)ㆍ평산(平山) 부사 이확(李廓)ㆍ연안(延安) 부사 이인경(李寅慶)ㆍ옹진(瓮津) 현감 윤정준(尹廷俊) 등을 거느리고 여울목을 지켜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적이 별안간 낮은 여울을 건너 육박하여 관군을 대파하였다. 이에 중로ㆍ덕부 등은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한편 정충신은 포성을 듣고 군사를 재촉하여 구원하러 왔었으나 이중로 등이 이미 패한 뒤였다. 충신이 강물을 사이에 두고 마주 진을 치니 한참 만에 말 한 필에다 중로 등 일곱 장수의 머리를 실어 보냈는데 얼굴 모습이 생생하고 분명하므로 온 군중의 기운이 꺾였다. 그러나 남이흥(南以興)이 짐짓 말하기를, “잡혀간 우리 장수는 나와 잘 아는 자들이다. 이 얼굴들을 보니 모두 장수가 아니다. 틀림없이 군졸들의 머리인데 적이 우리를 속이려는 것이다.” 하였더니 군사들의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하담록》 《염헌집》
○ 그때 이확은 쌓인 시체 더미 속에 들어가 죽음을 면하였다.
○ 윤정준과 박영신(풍천(X35920;川) 부사)이 포로가 되어 적진에 가니 이괄과 한명련이 호상(胡床)에 앉아서 말하기를, “내 너희들의 생명을 구하여 줄 터이니 나를 따르지 않겠는가.” 하자 정준과 영신이 크게 소리지르기를, “우리는 너를 따르지 못하겠다. 빨리 죽여라. 군사가 많은 자는 반역을 하고, 힘이 약한 자는 적에게 항복하는 것이 신하된 도리이냐. 너는 무인으로서 나라로부터 두터운 은혜를 받았고 또 부원수ㆍ부원군이 너에게 부족한가. 무슨 까닭으로 반역하느냐.” 하였다. 이에 명련이 소리를 지르며, “네 몸이 이미 포로가 되어 있는데 어찌 감히 이렇듯 당돌하냐.” 하니, 정준이 “명련아, 너는 문화(文化)현 수군(水軍)에서 벼슬이 순변(巡邊)에 이르렀으니 너에게는 더할 수 없는데 어찌 감히 나라를 등지는가. 나는 대대로 관록있는 신하인데 어찌 역적들에게 절을 할까보냐.” 하였다. 적이 오른쪽 팔을 자르니 영신이 눈을 부릅뜨고 꾸짖기를, “역적 괄아, 국은을 이미 저버리고 또 의로운 사람을 죽이느냐.” 하자, 이괄은 심히 성내지 않았으나 익헌과 명련이 죽이기를 굳이 청하였다. 정준 역시 죽음을 당할 때까지 꾸짖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포저집(浦渚集)》 윤정준의 비문
○ 저탄(猪灘)에서 패하고 장만과 이시발이 여러 장수를 불러 일을 의논할 때 모두 걱정된다고 하는데 김시양(金時讓)은 홀로 말하기를, “이괄의 턱 아래에 군살이 달려 있는데 이는 곧낭(狼)이 제 턱살을 밟게 되는 형상[X29408;跋其胡]이니 마침내 반드시 낭패하여 죽게 될 것이다.” 하니, 장만이 심히 기뻐하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이괄의 턱에 달린 살은제비 턱과 호랑이 머리로 봉후(封侯)의 형상이라 하더니 이제 공의 말을 들으니, 과연 낭(狼)의 턱살이구나.” 하고, 여러 장수들을 격려하여 보내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하담록》
○ 7일에 기자헌(奇自獻) 등 49명을 죽이였다. 《연평일기(延平日記)》에는 38명이라 하였다.
그때 조정에서 매우 놀랐다. 김류가 심히 두려워하여 체포된 기자헌ㆍ김원량ㆍ윤수겸ㆍ이시언ㆍ현집 등을 빨리 죽임으로써 역적과 내통하여 내응할 염려를 없앨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를 좇았다. 이에 이귀가 극력 다투기를, “체포된 사람 중에는 높은 재신(宰臣)이 많으니, 반드시 모두 이괄과 함께 반역할 리가 없을 것이오. 나라 일이 비록 위급하다 할지라도 어찌 옥사의 체통을 돌아다 보지 않으리오. 또 한 사람이라도 죄없이 죽이는 것은 왕도에서 삼가는 일인데 이제 심문하지도 않고 죽인다면 뒷날 후회가 될까 염려됩니다. 자헌의 경우는 대론(大論 폐모론(廢母論))을 당하여서 절의를 세웠다가 귀양간 자이니, 어찌 분별하여 밝히지 않고 한결같이 모두 죽이리오.” 하므로 임금이 대신들에게 물었으나 김류가 다시 입대(入對)하여 자헌 등 40여 명을 모두 죽이기를 청하였다. 이에 이귀가 다시 아뢰기를, “자헌은 혼조(昏朝 광해조(光海朝))에서 절의를 세운 사람인데 이제 여러 사람 속에 섞이어 죽음을 받게 되었으니, 원컨대 자헌에게 ‘변이 갑자기 일어나, 사람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므로 부득이해서 너를 죽이는 것이지 반드시 네가 흉모에 참여하였다 해서 죽이는 것이 아니다.’는 말로써 조정의 뜻을 알게 하고 죽이기를 바랍니다.” 하였으나 조정에서 좇지 않으니 이귀가 다시 아뢰기를, “대신을 의심스럽다는 것만으로 곧바로 참형을 가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으나, 결국 목을 베어 죽였다. 연평행장(延平行狀) 《하담록(荷潭錄)》
○ 그때 일이 창황하여 매질로 심문할 겨를이 없어 옥석(玉石)을 가리지 않고 모두 죽였으니 이는 천고에 없는 변이였다. 이에 재신(宰臣) 권첩(權X24599;)이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관옥(冠玉 김류의 자)은 자손이 끊어질 것이고 옥녀(玉女 이귀의 자)는 자손이 반드시 번창할 것이다.” 하더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 전에 이원익이 아뢰기를, “기자헌은 반역에 가담한 죄상이 나타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비를 폐할 때에 극력 다투다가 멀리 귀양갔으니 가히 자손 10대까지 죄를 용서해줄 만합니다.” 하였으나 이괄이 반역하였다는 소식이 이르자 공신들이 입대하여 체포된 자를 모두 죽이기를 청하니 임금이 따랐다. 다음날 아침 원익이 이 말을 듣고 놀라면서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수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그 의논에 참여치 못하였으니, 이제 나는 늙어 폐물이 되었구나.” 하고 항상 혀를 찼다. 그 후에 자헌 등의 관작을 도로 주었다.
○ 그때 체포된 사람들을 의금부 문 밖에서 죽였다. 김극전(金克銓)ㆍ극명(克銘)ㆍ이욱(李煜) 등 8, 9명과 역적 이제(李X29765;)의 집 종은 옥문을 때려 부수고 크게 소리지르면서 나왔는데 도사(都事) 윤유길(尹有吉)은 겨우 몸을 피하여 살았다. 이욱은 이시언의 아들인데 말을 검게 염색하여 타고 적을 맞이하였다. 승평시장(昇平諡狀)
○ 오직 이서(李曙)는 수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청석동(靑石洞)에 주둔하였고, 이흥립(李興立)은 수원의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임진강 상류를 지키니 임금이 이귀에게 명하여 강 여울목을 순찰하고 오게 하였다. 《연평일기》
○ 8일에 호남ㆍ호서의 군사가 한강을 건너와 남대문 숭례문(崇禮門) 밖에 진을 쳤다.
○ 적의 군사가 날로 가까이 오므로 조정에서는 드디어 남으로 파천할 것을 결정하는 동시에 전라 감사 이명(李溟)에게 교지를 내리기를, “생각하니 호남의 땅은 실로 진양(晉陽)으로 돌아감에 비길 만하다. 경은 친히 경계에까지 나와 공급하는 데 소홀함이 없게 하라.” 하였다. 이에 이명은 은진(恩津)에서 전주로 달려 돌아가 주선하였다. 《일월록》
○ 적이 이서가 청석동을 지킨다는 말을 듣고 항왜(降倭) 수십 명을 시켜 밤에 이서의 군대를 교란시키게 하는 한편 그 길을 거치지 않고 산예(X29435;猊)의 소로로 개성을 지나 곧장 임진강으로 향하였다. 그때 이귀는 임진강을 지키고 파주 목사 박효립은 여울목을 지키고 있었는데, 적이 큰 길을 따라 오지 않고 예상과는 달리 여울을 따라 건너오자 효립이 달아나니 이귀가 또한 소문을 듣고 서울에 급히 돌아와 출성(出城)하고 피할 것을 굳이 청하였다.
○ 장만(張晩) 등의 군사가 급히 쫓아 나룻가에 거의 이르렀을 때 적은 이미 강을 건넜었다. 이에 장사(壯士)들은 분하여 팔을 걷어붙이고 혹은 칼을 빼어 나무를 찍었다. 《일월록》
○ 그때 이귀가 파주(坡州)에 가서 개성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편 최명길(崔鳴吉)은 총독부사(總督副使)로 전에 개성에 가 있었는데 적이 닥쳐오자 겨우 몸만 빠져 나와 밤중에 파주로 돌아와서 이귀에게 말하기를, “군사가 없는 두 장수가 함께 한 곳에 머물러도 성패에는 소용이 없으니, 종사관(從事官) 이식(李植)을 남겨두어 나와 함께 일하게 하고, 공은 직위가 어영대장(御營大將)이니 속히 돌아가 호위하시오.” 하니, 이귀가 자기 아들 시방(時昉)을 보내어 빨리 파천할 계책을 정할 것을 청하게 하고, 한편으로 부하 한교(韓嶠)ㆍ최무(崔茂) 등을 이흥립ㆍ박효립의 진에 나눠 보냈다. 이에 효립이 사람을 시켜 강 여울을 지키던 군사가 이미 무너졌음을 보고하였더니 이귀가 한 필의 말을 달려 대궐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었다. 이귀가 아뢰기를, “일이 급해졌으니 반드시 오늘 저녁에 한강을 건너 적의 칼날을 피하소서.” 하였다. 《연평일기》
○ 8일에 적병이 벽제(碧蹄)에 이르렀으므로 임금이 창졸히 남으로 파천하기 위해 남대문을 지나 한강에 당도하니 날이 조금 어두워졌다. 나룻사람이 모두 달아나 버렸으므로 백관은 발을 동동 굴렀다. 배는 모두 강 가운데 떠 있으면서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니 선전관 우상중(禹尙重)이 죽음을 무릅쓰고 헤엄쳐 강 가운데 뱃사람을 쳐서 넘어뜨리고 5, 6척의 작은 배를 구하여 밤새도록 건넜다. 9일에는 임금의 행차가 사평원(沙平院)에 머물렀는데 해가 저물 때까지 먹을 것을 얻지 못하였다. 남원 부사 신준(申埈)이 율무죽과 곶감을 올렸다. 이내 수원에 도달하였다. 《일월록》
○ 그때 임금은 장차 남쪽으로 파천하고 대비는 신흠으로 하여금 호위케 하여 따로 강화도로 들어가게 하려 하였다. 출발하려 할 때 신흠이 입대(入對)를 청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대비와 따로 갈려서는 안 됩니다.” 하였더니, 임금이 그렇겠다고 하여 드디어 일행이 되었다. 상촌시장(象村諡狀)
○ 임금이 서울을 떠날 때에 이정귀(李廷龜)에게 명하여 대비ㆍ왕비ㆍ세자를 호위하고 강화로 가게 하니 정귀가 아뢰기를, “신이 비록 재주와 꾀는 없사오나 대가(大駕)를 따라 가서 책응(策應)하고 호위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대사헌 정엽(鄭曄)이 아뢰기를, “신은 늙은 어머니가 있으니, 원컨대 대비와 중전을 따라 먼저 강화로 가고, 이정귀는 재주와 역량이 있으니 대가 곁을 떠나게 할 수 없습니다.” 하였더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비의 행차에 대신ㆍ중신(重臣)이 없을 수 없고, 원자(元子)를 보좌함도 역시 중한 것이니 예조 판서(이정귀)는 마땅히 강화로 가야 하오.” 하였다.
○ 처음에 의논하기는 대비는 따로 강화로 가기로 하였었는데 행차가 이미 떠난 뒤에 다시 임금의 행차와 같이 가기로 정하여 정귀와 우의정 신흠이 뒤쫓아가 양화(楊花) 나루터에 이르러 모시고 돌아왔다. 《월사집(月沙集)》
○ 그때 임금 행차가 먼저 떠나고 대비가 이어서 출발하였다. 남문 밖에 도달하여 대비가 행차를 돌려 시위하는 자들에게 급히 잠두강(蠶頭江) 윗길로 향하라고 명하였다. 여러 신하들은 모두 다 뒤처져 남았는데 오직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만이 모시고 갔다. 임금이 동작(銅雀)에 도달하여서야 비로소 그 보고를 받고는 놀라고 황급하여 안심이 되지 않아 급히 정귀와 신익성(申翊聖)에게 명하여 대비의 행차를 맞이하여 오게 하였는데, 이것은 정귀가 대비의 사위 주원의 외조부였고 익성(신흠의 아들)은 바로 부마였으므로 그들을 시킨 것이다. 그들이 잠두(蠶頭)로 달려갔더니 대비는 이미 촌가에 들어갔는데 오직 주원만이 혼자 모시고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이 앞에 엎드려 행차를 돌리자고 극력 아뢰었으나 대비는 돌릴 뜻이 없었다. 이에 익성이 주원을 불러내어 큰 소리로 꾸짖기를, “금일 나라의 일이 위태로운데 대비께서 여기에 오신 것은 뜻밖의 일이니 만약 곧 행차를 돌리지 않으시면 영감이 마땅히 제일 먼저 처단을 받을 것이니 스스로 생각하라.” 하였더니, 주원은 나이가 어려서 눈물을 흘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목소리가 대비에게 들렸으므로 한참 만에 대비가 비로소 행차를 돌려 임금의 행차를 따르게 하였다. 이날 저녁 임금이 수원에 도달하여서는 기진맥진하였으므로 훈척의 여러 신하들이 둘러앉아 구호하더니 이 보고가 이른 후에야 조금 나아졌다. 《남계집(南溪集)》
○ 임금의 행차가 수원에 도달하였을 때 여러 사람이 의논하기를, “부산에 거류하는 왜인을 청하여서 적을 치자.” 하였다. 임금이, 전 병사 이경직(李景稷)은 예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왜인들이 신복하였던 사람이라 하여 부산에 갈 것을 특명하였다. 이경직은 왜인들이 틀림없이 저희 나라에 알리고 출병할 것이니 사세가 오래 걸릴 것이라 하여 난처한 점 대여섯 가지 이유를 조목조목 아뢰니 대신 이원익이 수긍하였다. 임금이 그 아뢴 바를 보고 드디어 갈 것을 중지시켰다.
○ 그때 영광(靈光) 군수 원두표(元斗杓)ㆍ금구(金溝) 현령 이각(李恪) 등이 각각 자기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들어왔으므로 임금이 도감군(都監軍) 및 원(元)ㆍ이(李)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하할 계획을 정하였다. 《연평일기》
○ 임금의 행차가 공주에 이르러 머물렀다. 중도에서 고생한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광정참(廣亭站)에 도착했을 때 충청도 노인들이 음식을 가지고 나와 곡하면서 맞이하였다. 임금이 충청ㆍ전라 군사로 하여금 산성(山城)과 금강을 나눠 지키게 하고 심기원(沈器遠)을 한남원수(漢南元帥)로 삼아 적을 막게 하고 신경진(申景X31131;)은 도감병(都監兵)을 이끌고 뒤를 막게 하였다. 《연평일기》
○ 그때 전라 감사 이명(李溟)이 길 왼쪽에서 맞았는데 군대의 질서가 정연하였다. 임금의 특명으로 그를 가선(嘉善)에 가자(加資)하였다. 이명이 군사를 나눠 차령(車嶺)의 험준한 곳에서 막기를 청하였으나 김류가 군사를 한데 모아 기다리자고 아뢰어 마침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염헌집(恬軒集)》
○ 9일 오후에 적의 군사 30여 기병이 먼저 서울에 도달하여 외치기를, “도성 안의 사람들은 놀라 동요하지 말라. 새 임금이 즉위하였다. ……” 하였다. 10일에 이괄이 한명련과 함께 말을 나란히 하여 도성에 들어올 때 이괄의 아우 수(邃)는 이충길(李忠吉)과 이시언(李時言)의 아들 이욱(李煜) 등을 데리고 모집한 군사 수천여명을 거느리고 무악(毋岳)의 북쪽에서 적을 영접하여 길을 인도하였고, 또 각 군청의 서리와 하인들이 의관을 갖추고 나와서 맞이하였으며 백성들은 길을 닦고 황토를 깔고 맞이하였다. 이괄이 서울에 들어와 경복궁 옛터에 주둔하였다.
○ 이때에 왕자 흥안군(興安君) 이제(李X29765;)가 임금을 따라 한강을 건너다가 중도에서 도망쳐 이괄에게로 오니 이괄이 속으로는 그 사람됨이 시원치 않다고 여기었으나 당분간 세워서 임금을 삼았다. 경기 방어사(防禦使) 이흥립이 이괄에게 통하여 항복하니 이괄이 대장을 삼아 이제를 호위하게 하였다. 이제가 술과 고기로 군사들을 먹였다. 도성 백성들이 말하기를, “이괄이 추대한 것이 이제이고 보니 사세가 오래 못 가겠구나.” 하였다. 《일월록》 ○ 첨재(僉載)에는 “괄이 예전에 이제와 더불어 추대하겠다는 약속이 되어 있었으므로 이제가 임금을 따르지 않았다.” 하였다.
○ 괄이 이충길(李忠吉)을 대장으로 삼아 호위하게 하고 방을 붙여, “도성 백성들은 각각 자기 본업에 충실하라.”고 고시하였다. 한편 친구로서 도성 안에 남아 있는 자를 불러 관에 배치하고 조정을 구성하였다. 세력을 잃었던 사람과 무뢰배가 계속 항복해 오는데 그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 장만이 파주에 도착하여 임금이 파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종사관 이민구(李敏求)를 보내어 급히 가서 문안드리게 하고 10일 새벽에 혜음령(惠陰嶺)에 이르러 여러 장수를 모아 길에다 풀을 깔고 앉아서 일을 의논하였는데 갖가지 의논이 많았다. 장만이 말하기를, “금일의 계책으로는 두 가지가 있으니 지금 반드시 도성 백성들이 모두 적을 따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간혹 성패를 관망하는 자가 있을 것인데 만약 하루 이틀 더 지체하면 사람들이 모두 적에게 붙을 것이므로 의향이 굳어진 후에는 공격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니 지금 이때에 결사적으로 싸우는 것이 그 첫째 계책이고, 이서(李曙)의 군사를 재촉하여 동쪽 길을 지키게 하고 신경진의 군사는 남쪽 길을 지키게 하여 사방의 길을 장악하고 차단시킴으로써 그 군량 보급로를 끊어놓고 여러 도의 군사가 도착함을 기다려서 힘을 합쳐 치는 것이 또한 안전할 것이니 이것이 둘째 계책이다. 두 가지 계책 중에서 어느 것을 채택할까?” 하였다. 이에 충신이 크게 말하기를, “이미 죽도록 힘을 다하고도 적을 격파하지 못하여 임금께서 파천하셨으니 우리들의 죄는 만 번 죽음을 받아도 합당한데 사세가 이미 다급한데도 적을 보고만 있을 수 없으니 승패를 탈 것 없이 일전을 어찌 아니하리오. 또한 북쪽 산을 먼저 점령하는 편이 이긴다는 옛날 장수의 사적(史績)도 있으니 무악재를 점거하여 진을 치면 도성을 내려다 보고 누를 것이니 적이 싸우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싸우게 되면 적은 올려다 보고 공격하게 되고 우리는 높은 곳을 이용하여 편리한 지점에서 적을 쳐부술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자 남이흥(南以興) 등이 극력 그 계책을 찬성하므로 만이 그 의견이 따랐다. 충신이 드디어 말을 타고 먼저 나가고 모든 군사가 뒤따라 나가니 장만이, “천천히 몰아 형편을 살피라.” 하였다. 충신이 도리어 군사들에게 외치기를 원수께서 빨리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고는 채찍을 들어 질풍처럼 달려 나갔다. 충신이 연서(延曙 지금의 은평구 연신내)에 도착하여 김양언(金良言)으로 하여금 2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가만히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봉졸(烽卒)을 잡아 전일처럼 봉화를 올리라 하였다. 대군이 정토사(淨土寺)를 거쳐 진군하여 진을 치니 날이 이미 어두웠다. 정충신ㆍ유효걸(柳孝傑) 별장(別將)ㆍ이희건(李希建) 용천(龍川)ㆍ김경운(金慶雲) 해중(海中)ㆍ조시준(趙時俊)ㆍ최응일(崔應一)ㆍ신경원(申景瑗) 등이 고개 위에 먼저 도달하여 진을 쳤고, 남이흥(南以興)ㆍ변흡(邊X28509;) 이하의 여러 장수가 잇달아 진군하고 이수일(李守一)은 뒤를 엄호하였다.
○ 박상(朴X29818;)ㆍ이휴복(李休復)ㆍ성대훈(成大勳)ㆍ이희건(李希建)ㆍ김경운을 두국(頭局)으로 삼았는데 모두 다 정충신이 거느린 사람들이였고 남이흥(南以興)ㆍ변흡(邊X28509;)은 고개 안을 지키게 하고 김완(金院)은 고개의 서쪽을, 신경원ㆍ이정(李靖)은 고개 북쪽을 지키게 하고 황익(黃瀷)ㆍ안몽윤(安夢尹)ㆍ최응일ㆍ이경정(李慶禎)을 중견사(中堅使)로 삼았다. 이확(李廓)은 포수 백 명을 거느리고 치마바위 골짜기에 잠복하여 창의문(彰義門)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 부서(部署) 배치를 끝내고, 밤에 모든 군사가 왔는데, 사람과 말 소리가 시끄러웠으나, 그날 밤 동풍이 심하게 불었기 때문에 성 중에서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이에 이시발이 미리 공명첩(空名帖) 수천 장을 만들어 성 안에 몰래 보내어 성 안의 사대부와 백성들에게 내응하여 적병이 돌아갈 길을 막게 하였다. 《일월록》
○ 그때 장만이 이서와 임서 황해감사 의 군사를 재촉하여 낙산(駱山)을 점거하고 의각지세(X25486;角之勢)를 삼으려 하니, 이서가 만에게 편지를 보내어, “적이 이미 도성을 점거하였으니 격파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공은 서쪽에서 나는 동쪽에서 서로 적의 군량 보급로를 끊으면 적이 군색하게 될 것이니 남방의 군사가 오기를 기다려 협력하여 치면 반드시 만전할 것입니다.” 하니, 여러 사람이 옳다고 하였으나, 이시백 협수사(協守使) 은 홀로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적이 성 안에 하루라도 더 머물러 있으면 그만큼 모이는 사람이 늘어날 뿐이니, 날을 끌지 말고 마땅히 적의 기세가 안정되기 전에 날쌘 기세로 치자.” 하니 장만이 찬성하여 말하기를, “이제 충신(忠信)에게 전령(傳令)해야겠는데 무어라고 지시할까?” 하자 시백이 “내 충신의 사람됨을 알고 있다. 그는 틀림없이 벌써 무악재에 올랐을 것이다.” 하더니 조금 후에 전군(前軍)이 이미 무악재에 도착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에 장만이 놀라며 말하기를, “용감하도다. 충신이여, 충신이여.” 하고, “그대(시백)가 과연 잘 알아맞혔다.” 하였다.
○ 11일에야 적은 비로소 관군이 이미 무악재에 올랐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어느 사람이 이괄을 달래기를 다른 데는 이괄의 말이라 하였다. “정예병은 모두 선봉에 속해 있고 원수(元帥 장만)는 고립된 군사를 거느리고 뒤에 있으니, 일부 군사와 항복한 왜군을 이끌고 창의문에서 삥 둘러 나가면 북을 한 번 쳐서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원수가 잡히면 모든 군사가 전의를 상실할 것이니 단번에 전승(全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이괄이 전군(前軍)이 적은 것을 바라다 보고 말하기를 다른 데에는 명련(明璉)의 답이라 한다. “멸하기 쉽겠구나. 여러 말을 할 것 없다.” 하였다. 명련이 말하기를, “고개 위의 군사는 내 이미 알고 있다. 백성들을 몰아내어 성 위에 올라가 싸움을 구경하게 하고 한길로 진군하여 힘을 다해 공격하면 멀리서 온 오합지졸은 바라만 보고도 반드시 무너질 것이니 백성의 인심을 가라앉혀 복종하게 할 수 있다.” 하였다. 이어서 군사들에게 명하기를, “이것들을 격파하고 나서 밥을 먹자.” 하고 성문을 열고 군사를 두 길로 나누어서 산을 포위하고 오르게 하였고 구경하는 백성들이 곡성(曲城)에서 남산까지 성채를 가득 메웠는데 명련이 항복한 왜군들을 데리고 선봉이 되어 전영(前營)에 육박하였고 이괄은 중군(中軍)에서 싸움을 감독하였다. 그때 동풍이 몹시 휘몰아치는데 적이 바람을 타고 급하게 공격하니 화살과 탄환이 비오듯 하였으나 우리편 군사는 이미 산꼭대기에 있었으므로 모두 죽도록 싸우다가 잠시 수십 보를 물러났다. 남이흥(南以興)ㆍ변흡(邊X28509;)이 다같이 칼을 뽑아 들고 싸움을 독려하였고, 김경운(金慶雲)ㆍ이희건(李希建)은 앞에 나서서 적진에 충돌하다가 경운은 탄환에 맞아 죽었다. 싸움이 한창 무르익어 갈 때 문득 바람의 방향이 변하여 서북풍이 심하게 불어 적이 바람머리에 위치하게 되었으므로 모래먼지가 적병의 얼굴에 휘몰아쳤다. 그러자 관군의 용기가 더욱 떨쳐 묘시부터 사시까지 크게 싸웠는데 적의 장수 이양(李壤)이 탄환을 맞아 떨어져 죽고 명련은 화살을 맞고 물러섰다. 때마침 이괄이 자리를 바꾸려고 하는데 기가 움직여지자 남이흥이 바라다 보고 크게 외치기를, “이괄이 패하였다.” 하였다. 이에 적의 군사들이 급히 달아나느라고 서로 짓밟아 골짜기 개울에 떨어져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들 관군이 이긴 기세를 타고 소리지르며 추격하니 한 명이 열 명을 당해내지 못하는 자가 없었는데, 적의 군사는 죽음을 면하기에 급급하여 민가에 달아나 숨기도 하고 혹은 길을 나누어 흩어져 달아나고, 혹은 마포나 서강으로 달아나 물가에 다다라 죽는 자도 있었다. 백성들이 또한 돈의문(敦義門)과 서소문의 두 문을 닫고 막자 적이 들어가지 못하고 곧 숭례문(崇禮門)으로 향하였는데, 충신이 그를 추격하려 하자 이흥이 말리기를 “금일의 승리는 하늘 덕분이다. 며칠 안 되어 적의 괴수 두 명의 머리가 올 것인데 무엇 때문에 끝까지 추격하리오. 도성 안에는 좁은 골목이 많으니 만약 적의 복병이 있어 득실이 있게 되면 어찌하리오.” 하니 충신이 말하기를, “빠른 우레엔 귀를 막을 겨를도 없듯이 적이 이미 넋을 잃었으니 어느 겨를에 꾀를 쓰리오. 급히 추격하면 광통교(廣通橋) 못 미쳐서 사로잡을 것이다.” 하였으나 이흥이 적극 말렸다. 드디어 박진영(朴震英)을 보내어 동쪽 교외에 숨었다가 적을 맞아 치게 하였다.
○ 그때 충신이 시백에게 이괄을 추격하여 잡을 것을 청하니 시백이 말하기를, “역적이 오래지 않아 사로잡힐 것인데 우리가 어찌 감히 남의 공을 빼앗을 것인가.” 하였다. 이에 충신이 탄복하여, “다른 사람이 미치지 못할 바이다.” 하였다.
○ 이수일(李守一)ㆍ김기종(金起宗) 등이 잠깐 산등성이 위에 마주 앉아 있는 사이에 적의 머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이때 한 사람이 중의 머리 하나를 바쳤는데, 그 얼굴 모습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이를 본 사람들이 윤인발의 머리라 하였다. 처음에 이괄이 곡산(谷山)에 이르렀을 때에 그의 부하 최덕문(崔德雯)이 장만에게 귀순하여 말하기를, “윤경립(尹敬立)의 아들로 중이 된 자가 이괄의 모사가 되어 잠자리를 같이 하면서 가장 친밀하게 지냈는데, ……” 하였는데 윤인발이 이때에 수일의 군사에게 잡혀 죽었다. 지난 겨울에 이부(利夫) 고개에서 죽은 자는 곧 인발이 종실인 연성도정(連城都正)의 종을 죽여 놓고 자기의 시체라 사칭한 것이였는데 낯가죽을 벗기고 거세한 것은 자기 아내도 알아보지 못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일월록》과 《하담록》에 기록되었다.
○ 이욱(李煜)을 사로잡아서 바치는 자가 있었는데 김시양이 말하기를, “교외에 나가 적을 맞았고 또 말에 먹칠을 하였으니 적을 따른 형적이 명백하다.” 하고 드디어 죽이게 하였다. 이욱이 형벌을 받음에 임하여 외치기를 “안망구(安望久)가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하였는데, 안망구는 적의 진중에서 이욱을 불러간 자이다. 《일월록》
○ 밤 이경(二更)에 이괄과 한명련이 수백 명 다른 데는 오륙십이라 하였다. 기병으로 수구문(水口門)을 몰래 빠져나와 12일 삼전도(三田渡)를 거쳐서 광주(廣州)를 지날 때 목사 임회(林檜)를 죽이고 이북(利北) 고개를 넘었으므로 충신이 유효걸(柳孝傑) 등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경안(慶安)역에 다다랐는데, 기병 27명을 거느렸을 뿐이였으나, 적은 배후의 군사가 있는가 의심하여 멀리서 보고 무너졌다. 이날 밤 적이 이천(利川) 묵방리(墨坊里)에 이르자 이괄의 부하 익헌(益獻)ㆍ수백(守白) 등이 이괄ㆍ이수ㆍ이전ㆍ한명련 등 9명의 목을 베어가지고 급히 달려와서 바치니 수백 등이 곧 편지를 써서 임대곤(林大坤)을 시켜 원수부에 전하였다.
○ 임회가 적을 경안역 앞에서 만났는데 이괄이 항왜(降倭)를 시켜, 임회를 붙잡아 놓고 위협으로 굴복시키려 하니 임회가 분노하여 꾸짖기를, “국가에서 너를 공신에 녹훈하였고 너의 작위를 높여 주었는데, 네가 어찌 감히 반역하였느냐. 내 너를 만 번 죽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어찌 빨리 나를 죽이지 않느냐.” 하자 이괄이 크게 노하여 칼을 뽑아 제 손으로 임회를 찔러 온 몸에 성한 곳이 없는데도 오히려 꾸짖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괄이 더욱 노하여 말하기를, “너도 글을 읽은 선비인데 안고경(顔X26482;卿)의 죽음을 듣지 못하였는가.” 하고 곧 혀를 잘라 죽였다.
○ 이제(李X29765;)가 인경궁(仁慶宮)에서 곡성(曲城)에 올라가 싸움하는 것을 바라보니, 군사가 패하여 좌우가 모두 흩어지므로 달아나 광주(廣州) 소천(昭川)에 가서 원수의 군관이라 사칭하였다. 이를 안사함(安士X35572;) 전(前) 현감ㆍ한교 등이 잡아서 원수부에 바치니 장만이 가두어 놓고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는데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 심기원(沈器遠)ㆍ도감대장(都監大將) 신경진(申景X31131;) 등이 “이제가 이미 호(號)를 참칭하였으니 누구든지 잡아 죽일 수 있다.” 하고 돈화문 앞에서 목매어 죽었다. 그 일이 조정에 알려지니 조정에서 기원과 경진을 의금부에 투옥시켰다가 며칠 후에 내놓았다. 《일월록》 《하담록》
○ 이제가 온 가족을 데리고 달아나자 한교가 잡아서 포박하여 원수부에 바치니 기원과 경진이 군사에게 위엄을 보여 주노라고 죽였다. 《연평일기》
○ 명련의 아들 윤(潤)과 조카 한 사람이 도망갔다.
○ 정배(廷培)도 잡혀서 죽음을 당했고, 흥립은 투옥되어 자살하였다.
○ 양사에서 심기원ㆍ신경진이 자기들 마음대로 왕자를 죽였다 하여 그들을 잡아 국문하기를 청하니 이귀가 차자를 올리기를, “천하에 반역보다 더 악한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역적은 누구나 잡아 죽일 수 있는데도 한교는 군신의 대의를 몰라서 이제를 체포하고도 며칠이 지난 뒤에 안사함과 함께 원수부에 묶어 보냈으니 그 사이에 혹시 뜻밖의 변이 있었더라면, 비록 한교에게 죄를 주어도 족히 그 분함을 씻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한남원수(漢南元帥)가 의(義)로써 화근을 제거하였는데, 삼사에서는 당초에 죽이지 못한 신하(한교)를 죄주어야 한다고 청하지 않고, 도리어 기원 등을 잡아 국문하기를 청하니, 신하가 역적을 토벌하는 의가 아닙니다. ……” 하였다. 《연평일기》
○ 그때 대사헌 정엽(鄭曄) 등이 “이귀ㆍ한교ㆍ박효립이 모두 싸우지 않고 달아나 무너졌으니 그들의 직을 파면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전쟁을 피해 달아남으로써 군사를 무너지게 한 장수를 어찌 파면시킴에 그치리오. 오늘날 일을 논하는 것이 실로 구차스럽다.” 하였다.
○ 대사간 장유(張維) 등이 아뢰어 이귀를 백의호가(白衣扈駕 면직하여 관복을 벗고 백의로 임금을 모시고 가는 것)시키기를 청하였더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에 홍문관의 윤황(尹煌)ㆍ이목(李X26968;) 등이 차자를 올려 임진강 여울에서 군사가 달아나 무너진 것은 이귀에게 죄가 있으니 그를 한교ㆍ박효립과 함께 법에 따라 처리하기를 청하고, 또한 양사에서 주장하는 논의가 약하다는 것에도 언급하였다. 이에 양사에서 피혐하니 답하기를, “옥당에서 훈신(勳臣)을 모함한 말을 어찌 족히 따지리오.” 하였다. 《연평일기》
○ 15일에 적의 머리가 도착하니 임금이 친히 종묘와 사직에 고하고 정시(庭試)를 베풀었으며 박효립을 목베어 돌렸다. 이어서 여러 도의 군사를 해산시키고, 윤방(尹昉)을 보내어 먼저 서울에 들어가 진정하고 무마하게 하니, 윤방은 서울에 들어가 백성이 적과 내통한 문서를 거두어 모두 불살랐다. 임금은 19일에 공주(公州)를 떠나 22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친히 종묘와 사직에 고하였다.
○ 이원익이 종묘와 사직에 고하기를, “영의정 겸 도체찰사(都體察使) 신(臣) 이원익은 삼가 아룁니다. 역신 이괄ㆍ한명련 등이 서부 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곧 조정에 덤벼들어 도성을 침략하여 차지하고, 궁궐을 불태우며, 백성을 살해하고 약탈하였습니다. 다행히 천지신명의 도움에 힘입어 도원수 장만ㆍ부원수 이수일 등이 관군을 지휘 감독하여 용맹을 떨쳐 무찔러서 무악재에서 크게 이겼습니다. 이에 적이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밤에 달아나므로 온 군사가 추격하니 광주(廣州)에 가까워지자 적의 무리가 모두 흩어졌는데, 이달 12일 밤에 역적의 수하인 이수백ㆍ기익헌(奇益獻)ㆍ이선철(李先哲)에게 목을 잘렸습니다. 이에 역적 이괄과 그 아들 이전(李X26051;)과 그 아우 이수(李邃)와 역적 한명련과 그 조카 모(某)와 그 무리 원종경(元宗慶)의 머리 여섯 개가 행재소에 바쳐졌으니 이는 종사와 신민의 경사이옵고 신들은 기쁨을 이길 수 없어 삼가 노포(露布)로 아룁니다.” 하였다. 이어서 군대의 의식을 성대히 베풀었는데 백관(百官)ㆍ관찰사ㆍ수령이 모두 융복 차림으로 칼을 차고 유생들은 안과 밖에 나뉘어 차례로 섰는데, 임금이 융복 차림으로 정전(正殿)으로 나오자 군악을 울리니, 도체찰사가 노포를 받들어 올리고, 적의 머리를 바치는 자가 적의 머리를 선전관과 의금부 당상에게 전해 주었다. 이에 선전관이 머리를 섬돌 위에 벌여놓자 병조 판서가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역적의 괴수가 틀림없음을 고하니 임금이 안으로 들어갔다.
○ 그때 장만이 서부 변경에서 온 여러 장수들을 신칙하여 임금의 행차가 서울에 돌아오기를 기다려 한강 가에서 맞아 절하게 하였는데, 오직 충신만은 안주(安州)로 돌아가며 말하기를, “내 서방에서 군사를 거느리는 신하로서 역적을 빨리 목베지 못하여 임금의 행차가 파천하게 되었으니, 죄가 적지 않은데 어찌 감히 공이 있는 사람처럼 강가에서 임금의 수레를 맞으리오. 오히려 임지에 돌아가 마땅히 조정의 처분을 기다릴 뿐이다.” 하니 임금이 그에게 역마(驛馬)를 타고 오게 하여 불러 보고 금을 내려주며 공신에 녹훈하고 발탁하여 평안 병사에 임명하였다. 《하담록》
○ 24일에 양사에서 아뢰기를, “2월 14일까지 행재소에 달려오지 않은 자는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실로 늙고 병든 사람 이외에는 모두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 일찍이 이괄이 반역했다는 보고를 듣고, 교리 오숙(吳X17304;)이 초씨(焦氏)의《역림》(易林 책이름)으로 점을 치니 건(蹇)괘가 진(晉)괘로 가는 점괘가 나왔는데, 이는 곧 “흉함을 피하여 동으로 달아나다가 도리어 화에 빠져 부하에게 제지되어 뼈가 재와 흙이 된다.”는 것이였다. 그 후 이괄이 패하여 동으로 달아나다가 이천에 도착하여 자기 부하에게 죽음을 당했으니 과연 들어맞았다. 《우복집(愚伏集)》
○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예조 정랑 송상인(宋象仁)에게 명하여 평안도를 선유(宣諭)하게 하였더니 능히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상인은 송상현(宋象賢)의 아우로서 광해군 때 제주도에 위리 안치되었다. 《계곡집》
○ 김효신(金孝信)이 강작(康綽)을 이끌고 역시 이괄의 명령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숙천(肅川) 땅에 이르렀을 때 강작이 칼을 빼어 효신을 찌르다가 효신의 부하에게 살해되니 장만이, “강작이 이괄을 위해 효신을 죽이려고 하다가 효신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하며 효신의 공을 높이고 그를 발탁해서 충청 수사(忠淸水使)에 임명하였다. 이에 김시양이 그 사실을 충신에게 물으니 충신이 말하기를, “강작이 여러 번 효신을 달래어 이괄에게서 달아나 귀순하자고 하였으나, 효신이 듣지 않았다. 강작이 효신을 찌르면서 외치기를, ‘내 이 역적 때문에 의롭지 못하게 죽는다.’ 하였다. 효신이 이미 강작을 죽였는데 이괄의 군사는 벌써 멀리 떨어져 있어 쫓아갈 수 없었으므로 부득이하여 원수에게 나아가서 그 말을 뒤집어 강작에게 허물을 덮어씌웠다. 따라서 효신은 충절 있는 이들을 해치고도 오히려 그 공을 누리니 심히 통분하고 놀라운 일이다.” 하였다. 시양이 뒷날 이 말을 장만에게 하니 장만이 빙긋이 웃으며 말하기를, “일이 이미 끝났는데 정충신이 이런 말을 반드시 할 필요가 있을까.” 하였다. 《하담록》
○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린 것으로서, 하지 않아도 되어지는 것이 있다. 이민구(李敏求)는 도원수의 종사(從事)로서 평안도에 있을 때, 정주(定州)의 한 기생을 매우 사랑하였는데, 장차 여러 인근 읍을 순회하고 병영에서 군대를 사열할 예정이였으므로, 그 기생과 어느 날 병영에서 만날 것을 언약하고 구성(龜城)에 도달하니, 그 기생이 길을 질러 가서 가산(嘉山)에 이르렀다고 하므로 정을 이기지 못하여 갑자기 가산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는데, 5리도 채 못 갔을 때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재빠른 기병을 보내어 구성 부사 한명련(韓明璉)을 위협하여 반란에 가담하게 하고, 명련을 잡으러 온 금오랑과 선전관을 죽였다. 만약 민구가 곧은 길로 갔든지 밥먹을 정도의 시간만이라도 머뭇거렸더라면 반드시 이괄에게 잡혀 죽었을 것이다. 문회(文晦)가 변을 고할 때 정호선(丁好善) 감사 이 안변(安邊) 부사로 있었는데 그 이름이 고발장에 올랐으므로 잡혀서 김화(金化)에 왔는데 금오랑이 별안간 급한 병이 나서 한나절을 머물렀었다. 그런 까닭에 서울에 다다르기 전에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이르러서, 체포되어 투옥된 자는 모두 마구 처형되었다. 그 다음날 호선이 도착하여 옥에 갇히었으나 그 아우 호서(好恕)가 정주 목사로서 이괄의 사신을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근왕(勤王)하였으므로 이로써 오직 호서만이 용서되었다. 《하담록》
○ 심광세(沈光世)가 막료로서 이괄을 따랐는데, 이괄에게 속았다. 예전에 서로 사이가 매우 좋았는데 광세가 서울로 돌아오자 이귀가 평안도 일을 물으니 광세가 말하기를, “이괄이 그러는데 한명련이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 하였다. 이귀가 말하기를, “나는 이괄이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하였다. 광세가 이 말을 이괄에게 곧 알리니, 이괄이 병을 핑계하고 사직하는 소를 올리면서 병기를 수리 정비하고 군사를 훈련시켜서 오랑캐가 쳐들어 와도 막을 수 있다는 상태를 크게 과장하고 소의 맨 끝에 쓰기를, “몸에 병이 이러해서 끝까지 힘을 바쳐 성은(聖恩)에 보답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였으니 여기에 이미 그 신하 노릇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나타내었으나 조정에서는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광세는 영남에 있으면서 그 소식을 듣고, 조정에서 자기가 재빨리 이괄에게 알렸다는 죄로 논할까 두려워하여 등창이 나서 길을 가다가 죽었는데,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경계가 될 것이다. 《하담록》
○ 이욱(李煜)의 아우 이환(李煥)이 욱과 함께 반역하였다가 도망하였다. 이환은 국구(國舅) 한준겸(韓浚謙)의 서(庶)사위이다. 김시양이 원수와 여러 공들에게 말하기를, “이환이 권세에 의지하여 면죄되면 왕법(王法)이 폐하여져서 나라의 체모가 말할 수 없이 될 것입니다.” 하니 모두, “그렇다.” 하고 장차 추적하여 체포하려 하였다. 임금의 행차가 환도하던 날 시양이 주막에 숙박하고 있는데, 한회일(韓會一)이 찾아와 준겸의 말을 전하기를, “이환이 김확(金X30705;) 일가와 함께 수원 땅에서 피란하였는데, 이환이 적에게 붙었다고 공이 그가 적에게 투항한 것으로 잘못 듣고 장차 그를 처벌하고자 한다 하니, 만약 공이 믿지 못하겠거든 이확에게 물어보기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내 어찌 일개 서녀로서 감히 나라의 역적을 놓아 주리오 하였다.” 하니, 이환은 드디어 면죄되어 수년 후에 병으로 죽었다. 《하담록》
○ 무인 전 군수 아무개는 이괄에게 붙었는데, 그는 구천군(龜川君) 수(X26220;)의 서매부였으므로 김시양(金時讓)이 수에게 묻기를, “사람들의 말에 아무개가 적을 따랐다 하는데, 적을 따랐는데도 요행히 죄를 면한다면 국법이 장차 폐하여질 터이니 공은 종실의 중신으로서 어찌 한 명 누이를 위하여 나라의 역적을 놓아줄 수 있습니까. 공의 말씀을 듣고 처리하겠습니다.” 하였던바 수의 얼굴빛이 변하더니 한참 만에 천천히 말하기를, “공이 종사의 일로서 나에게 물으니 내 어찌 감히 숨기리오. 아무개는 사실 이괄을 따랐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베었다. 《하담록》
○ 김원량(金元亮)은 어려서부터 명예를 좋아하고 조행(操行)이 있어 친구들 사이에 그 이름이 드러났었다. 정경세(鄭經世)가 영남 유림의 우두머리였으므로 책 상자를 짊어지고 가서 그 문하에 유학(遊學)하였다. 반정의 모의에 참여하였으므로 발탁되어 6품에 올랐다. 김시양이 경세에게 묻기를, “원량이 유생으로서 반정의 공훈에 참여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경세가 말하기를, “그가 김자점(金自點)ㆍ이시백(李時白) 등과 서로 친하였으므로 비록 함께 모의한다는 소리는 들었으나 참여한 일은 없었다.” 하였다. 공훈을 책정할 때 원량이 3등으로 되자 그 잘못된 것을 분하게 여겨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시양이 경세ㆍ임숙영(任叔英)과 홍문관에 모였을 때 시양이 말하기를, “원량 자신이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말하더니 3등 공신으로 녹훈되자 그 잘못된 것을 분하게 여기니 어찌된 것인가.” 하였더니 경세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자, 숙영이 말하기를, “내가 원량과 매우 친하였는데, 원량이 어느 날 찾아와서 반정의 모의를 말하기에 내가, ‘녹을 먹고 나라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종사를 위하여 이러한 거사를 하려는 것은 진실로 옳은 일이나, 그대는 유생으로서 위로 홀로 된 부모를 모시고 있는데 일이 만약 실패하면 화가 부모에게까지 미칠 것이니 충성과 효도를 모두 잃어버리겠소.’ 하였더니 원량은 얼굴빛이 변하여 가버렸다. 원량과 이괄은 6촌간으로서 이괄이 반정에 참여하게 된 것도 원량을 통한 것이다.” 하였더니 경세가 웃으며 믿지 않았다. 그해 겨울, 문회가 고변하자, 원량이 자기가 영변 판관으로 가서 이괄을 정탐하겠다고 청하였는데 여러 공신이 크게 의심하여 허락하지 않았다가 이괄이 반란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원량을 심문하고자 청하여 마침내 베었다. 사람들이 혹 말하기를, “인발이 죽은 체하고 이괄에게 항복한 것도 원량 때문이다.” 하였는데 그의 친구 나만갑(羅萬甲)ㆍ조직(趙X28333;) 같은 무리들은 모두 지금까지도 원량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말한다. 《하담록》
○ 원량은 이괄의 부자를 깊이 믿었으므로, 이괄이 고발당하자 자기의 전 가족이 이괄을 보장하겠다고 하였는데, 이괄이 반란하였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승지 김자점이 아뢰어 그를 가두게 하였더니, 원량이 옷을 찢어서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로 소를 썼는데 그 대략에, “신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여 역적을 충성스럽다고 인정하여 감히 다른 뜻이 없다고 보장하였다가 드디어 임금을 속인 것이 되었으나, 신의 본 마음은 하늘의 해가 증명할 것입니다. 대개 이괄은 곧 신의 타성(他姓)의 근친으로 평소에 논하는 바나 몸가짐이 한결같이 사대부 같았고, 그 아들 이전(李X26051;)은 어려서부터 신의 집에 드나들며 소학(小學)ㆍ가례(家禮) 등의 책을 배웠고, 또 한때의 선생과 점잖은 분을 스승으로 모시었고, 나이가 적고 배움이 없다 하며 벼슬 받기를 원하지 않았으므로 신이 이 때문에 그를 허여하였습니다. 속임수를 쓴 것이 이에 이를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정찬(鄭澯)이 고발하였을 때에 신의 생각으로는 정찬이 폐위된 광해군 때의 훈척(勳戚) 집안의 신하이므로 이괄이 그와 함께 모의하였다 함은 사실에 가까운 것 같지 않아서 끝내 의심하지 않았다가 이제 반역한 신하의 인척으로 전하의 의혹을 사게 되었으니 신은 땅에 들어가도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 하였었는데, 그 소는 끝내 올려지지 못하였다. 임금의 행차가 남으로 떠나려 할 때, 판의금 김류(金X29804;)에게 묻기를, “가두어 놓은 여러 죄수들을 모두 죽일 것인가, 김원량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니, 김류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자점이 재빠르게 말하기를, “남겨 두었다가 적에게 넘겨 주어서 적이 이용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니 드디어 자점의 친한 사람을 보내어 옥중에서 목을 베게 하니 이경생(李更生)이 자점에게 말하기를, “김아무개는 어진 선비인데 죽였으니 사람들이 장차 공을 어떻게 생각하겠소.” 하니, 자점이 크게 말하기를, “선비를 죽였다는 비난은 내 자신이 감당하겠소.” 하였다. 김장생(金長生)이 예전에 말하기를, “김원량은 진실로 죽음을 취할 만한 점이 있었으나 그 마음이야 어찌 의심하리오.” 하고, 또 자점에게 말하기를, “네가 원량이 예전에 관서(이괄이 부원수로 있었던 영변)의 수령을 원하였다는 것으로 의심의 단서를 삼으니, 그렇다면 내가 예전에 무주(茂朱) 현감을 구하였으니 이것도 역시 의심할 수 있는가.” 하였다. 김원량의 묘표(墓表) ○ 원량이 사람들이 서변 임명은 싫어 피하는 것을 보고서 분개하여 영변의 수령이 되기를 청하였다.
○ 3월에 장만(張晩)ㆍ정충신(鄭忠信) 등 29명을 진무(振武)공신으로 녹공(錄功)하였다. 이시발(李時發)ㆍ최현(崔晛) 등은 공이 있었으나 함께 녹훈할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장만이 여러 번 소를 올려 아뢰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월록》
○ 예전에 이시발이 명을 받고 적을 방어하러 나가 평산(平山)에 주둔하였는데 이서(李曙)가 군사를 거느리고 이어서 왔다. 시발이 적에 대한 정보를 입수할 때마다 곧 이서에게 전령(傳令)하여 이에 응하게 하였는데, 하루에도 서너 차례나 되었다. 정보의 말이 같지 않았고 전령 역시 따라 변하였다. 이서가 반정의 원훈(元勳)으로서 권세가 바야흐로 성하므로 김시양(金時讓)이 시발에게 말하기를, “금일 일의 형세를 보건대 한 조각 종이의 전령으로서는 완풍(完X35920;) 부원군 이서 을 제압할 수 없으니 그로 하여금 상황에 따라 작전을 바꾸게 하고 자주 전령함을 그만두는 것이 어떤가.” 하였으나, 시발이 따르지 않았다. 이괄이 이미 토벌된 후 이서가 이귀(李貴)와 함께 방어하지 못하였다 하여 죄를 받게 되자 이서가 보관해 두었던 그때의 전령 문서를 모두 사람들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호령이 이처럼 자주 변하여 동서로 달려 왔다갔다 하기에도 겨를이 없었는데 어떻게 적을 맞아 싸울 수 있었겠소. 이것이 과연 나의 죄인가.” 하였다. 장만이 진무공(振武功)을 감정(勘定)할 때 임금이 명하기를, “문관은 기록하지 말라.” 하였다. 이에 이시발(李時發)ㆍ김기종(金起宗)ㆍ남이웅(南以雄)ㆍ최현(崔晛)ㆍ김시양(金時讓)이 모두 삭제되었다. 연말에 장만이 시양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진무공신에 문신을 녹훈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이 판서(시발)가 반정의 원훈들에게 거슬렸기 때문이라 하니 만약 나를 따르던 문신만을 녹훈하기를 청하면 반드시 허락받을 것이다. 문신을 녹훈하지 못하게 한 일이 부득이해서 그렇게 되었으니 이번 회맹(會盟)이 행하여지기 전에 다시 청하겠다.” 하였다. 며칠 후에 기종(起宗)ㆍ이웅(以雄)만을 녹훈할 것을 청하였더니 과연 허락하였다. 《하담록》
○ 안륵(安X29583;)ㆍ황익(黃瀷)ㆍ이원로(李元老)ㆍ안철(安澈) 등 70여 명을 아울러 가자(加資)하고 상직(賞職 명예직)에 임명하였다.
○ 그때 임금의 행차가 남으로 파천하여 중앙과 지방의 인심이 흉흉하였는데 이이첨(李爾瞻)의 잔당이 많이 내응하려 하였고 권진(權縉)이 양산(梁山)에 귀양가 있었는데, 그가 무사 및 항왜(降倭)와 결탁하여 수상한 형적이 있었으므로 민성휘(閔聖徽)가 먼저 베고 난 뒤에 보고했다. 그의 계획은 간흉한 싹을 미리 잘라 버리려는데서 나왔으나, 적이 토평된 후 마음대로 죽였다 하여 파면되었다. 《명신록》
○ 계해년(1623) 초에 권진이 광해군의 총애를 받던 신하라는 이유로 양산(梁山)으로 귀양갔었는데 이괄의 변이 일어나자 통제사 구인후(具仁X22421;)ㆍ우병사(右兵使) 신경유(申景裕)가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달려가면서 권진이 이괄에게 응할까 염려하여 감사 민성휘에게 비밀히 말하여 권진을 죽이게 하니, 성휘가 감히 어기지 못하고 청도(淸道) 군수 정경업(鄭慶業)을 보내어 권진을 목베게 하였다. 권진이 죽음에 임하여 말하기를, “반드시 조정의 명령이 아닐 것이다. 내가 죽는 것이 합당하지 않으나, 일이 벌써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쩔 수 없구나.” 하였다. 이괄이 이미 토평된 뒤에 조정에서 민성휘를 투옥시켜 재신을 마음대로 죽인 죄를 추궁할 때 공신들이 모두 힘써 구원하였고 임금 역시 일은 비록 망동(妄動)했으나 의도는 나라를 위한 것이라 하여 벼슬만 삭탈하라 하였다. 몇 달이 지난 뒤 함경 감사 권반(權昐)이 교체되자 공신들이 재주가 성휘와 같은 이가 아니면 북방을 지키기 어렵다 하여 그로써 권반을 대신하게 하고자 하였다. 신흠(申欽)이 말하기를, “나라의 형세가 굳건하지 못하여 장래에 변란이 없을지 모르겠다. 북방은 사대부가 귀양가는 땅이니 불행히도 난이 생겼을 경우 성휘가 감사가 되어 권진을 죽이듯이 마음대로 죽이면 나라의 체모가 없다.” 하여 드디어 공신의 의논이 중지되었다. 《하담록》
○ 권진이 과거에 올라 벼슬에 나아가는 데 급급하여 이산해(李山海) 편에 붙어서 높은 벼슬에 올랐는데, 홍여순(洪汝諄)의 권세가 산해보다 중한 것을 보고는 드디어 여순에게 가까이 하였다. 여순이 패하자 또 유영경(柳永慶)에게 가까이하여 청관(淸官 홍문관의 벼슬아치)을 지냈으나, 그 욕심을 다 채우지 못하자 또 목장흠(睦長欽) 등과 함께 서로 관계를 맺어 스스로 사류(士類)라 칭하였다. 광해군 때 임자년 옥사가 일어나자, 권진이 형방승지로서 옥사를 다스릴 때 임금의 뜻에 영합하여 드디어 광해군으로부터 총애를 받아서, 몇 년 동안에 벼슬이 올라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반정을 하던 날 화가 미칠까 크게 두려워하여 참판 박정길(朴鼎吉)을 죽이고자 청함으로써 공신에게 아첨하여 붙으려고 꾀하였다. 정길의 죄는 비록 죽어서 마땅하지마는 사람들이 모두 다 권진의 반복(反覆)을 미워하였으니 민성휘에게 살해된 것도 역시 자초한 것이였다. 《하담록》
○ 이수백(李守白)ㆍ기익헌(奇益獻)이 이괄ㆍ한명련(韓明璉)을 목 베어와서 항복하였으므로 그 죽음을 특별히 면하고 나누어 귀양보내었다가 수년 후에 대사령(大赦令)으로 사면하여 편의대로 거주하게 되었는데, 이중로(李重老)의 아들 문웅(文雄)ㆍ박영신(朴榮臣)의 아들 지병(之屛) 등이, 수백(守白)이 이괄의 무리였다고 해서 복수한다고 명분삼고 대낮에 서울 거리에서 수백을 목베고 소를 올려 살인한 죄를 처벌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김시양(金時讓)이 아뢰기를, “문웅 등이 비록 복수라고 하였지마는, 제 마음대로 인명을 살해하였으니 그 죄는 사형에 해당됩니다. 이를 사형시키지 않으면 이 뒤로부터 복수라 칭하고 마음대로 살인하는 자가 잇달아 나올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의금부에 명하여 심문하게 하고 심문한 글이 올려지자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김류(金X29804;) 등이 그 효성을 여러 번 칭찬하고 용서하여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문웅 등이 반드시 사형받을 줄을 각오하고 죽였다면 효가 되겠지마는 지금 조정의 공론이 반드시 이와 같을 줄 알고서 수백을 죽였을 것이니 죄를 주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그러나 임금 역시 이중로가 반정 공신이라 하며 마침내 그 사형을 면하여 주었다. 《하담록》
○ 이중로(李重老)의 처 정(鄭)씨는 고(故) 재상 정언신(鄭彦信)의 딸이였다. 반정 초에 중로가 이천(伊川)에서 군사를 일으켜 의거에 나가려 할 때 정씨가 경계하기를, “신중히 하시오. 만약 한 사람이라도 죄 없는 이를 비명으로 죽게 하는 것은 오늘 거사하는 뜻이 아닙니다.” 하였으며, 이번 이괄의 난에 중로가 죽자 몸소 싸움터를 돌아다니며 그의 시체를 거두어 돌아왔고, 복기(服期)가 끝났어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이때 두 아들 문웅(文雄)ㆍ문위(文偉)가 수백(守白)을 목베니 정씨가 듣고서 곡하며 말하기를, “아이들이 능히 이 일을 하였는가.” 하였다. 그 머리를 가져다 중로의 영전에 고하고서야 고기를 먹고 소복을 벗었다. 무릇 11년 만에 벗었다. 사람들이 비로소 놀라 탄복하였다. 84세에 죽었다.《강화지(江華志)》
○ 윤인발(尹仁發)은 곧 판서 의립(毅立)의 서조카이다. 인발이 법으로 처단된 후에, 임금이 의립의 평소의 행동과 몸가짐으로써 그의 마음가짐을 살펴 연좌형을 적용하지 않아 관직과 작위가 전과 같았다. 《공사견문》
○ 3월 8일 호종공(扈從功)을 녹훈하고 문관 42명에게 가자(加資)하였다. 《우곡일기(愚谷日記)》
○ 3월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 정경세(鄭經世) 이하 박사 이소한(李昭漢)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이 차자를 올리기를, “이안눌(李安訥)ㆍ황치경(黃致敬)은 몸이 재상의 반열에 처해 있으면서 사람을 대하여 공공연히 패역한 말을 함부로 하니 듣는 이의 가슴이 터질 것 같고 그 살을 찢어주고 싶을 정도인데, 이목의 관직인 양사에서는 규탄하여 죄를 논하는 일을 하지 않았으니 언관(言官)의 체신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청컨대 양사를 갈아 바꾸소서.” 하였다. 답하기를, “사람들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으리오.”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 예전에, 이괄의 목을 베어 오는 자에게는 부원군(府院君)에 봉하고 천금을 내려 주겠다고 현상에 부쳤는데, 이때에 이르러 대간이 익헌(益獻)ㆍ수백(守白) 등의 예전의 죄를 들어 죽이기를 청하자, 이귀(李貴)가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는 뜻으로 어전에서 힘써 다투어 부원군으로 봉하고 금을 내려줄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익헌이 이괄의 목을 바친 것은 이미 패한 뒤였다 하여 죽음만 면제해 주게 하였다. 그 후에 또 익헌의 이름이 고변장에 올려져서 멀리 귀양보내었다. 나중에 이우(李佑)ㆍ문회(文晦)ㆍ김광숙(金光X29117;) 등이 진무(振武) 공신에 들었으나 익헌 등이 들지 못하자 이귀가 또 아뢰기를, “선왕 때 서림(徐霖)이 대간의 아룀으로 인하여 비록 공훈은 삭탈당하였으나, 특명으로 동지(同知)에 임명되어 녹을 받은 사실이 있었으니 이제 이러한 전례에 따라 익헌 등의 죽음을 용서하여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 하였다. 《연평일기》
○ 가을 7월에 이홍주(李弘X20881;)를 도원수(都元帥)로 삼았다.
○ 전교하기를, “전 원수 장만(張晩)이 출사(出師)하는 날에 내가 수레바퀴를 밀어서 전송하였으니 대접이 후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는데, 적을 섬멸한 공적은 종묘와 사직(여기서는 서울)이 함락된 뒤에 이루어졌다. 서울에서 출전한 장수와 군사가 용렬한 것이 장만의 복이였다. 원수의 자리는 관계되는 바가 대단히 중하므로 교체하지 않았는데 장만이 받은 병부(兵符)를 거만하게도 군관을 시켜 올려 보내었고, 군무를 의논하고자 하여 유지(諭旨)를 내려 불렀는데 또 병을 핑계하고 올라오지 않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고. 내 심히 놀랍고 괴이히 여기니 중하게 추고(推考)하여, 거만하게 조정을 멸시한 죄를 징계하라.” 하였다.
○ 공조 참의(工曹參議) 김덕함(金德X35572;)이 사직하는 소에, “신이 이안눌(李安訥)과 선후해서 가도(X26933;島 원문에는 단도(X26932;島)라 하였는데, 가도의 오식이다.)에 들어와서 황주(黃州) 이어연(鯉魚淵)의 관군이 불리하다는 기별을 들었고, 저탄(猪灘)에서 군사가 패한 후에 궁궐에 침범하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없었으므로 신이 말하기를, ‘섬(가도)에 있는 사신들은 의당 일제히 도독(都督 모문룡(毛文龍))에게 알려 군사를 청해야 할 터인데, 어찌 역적 이괄이 칼을 들어 대궐에 범하려는 것을 앉아서 보고만 있고 한 가지 계책도 쓰지 않으리오. ……’ 하였더니, 윤의립(尹義立)과 철산(鐵山) 부사 안경심(安景深)은 다 같이 신의 말이 옳다고 하였으나 오직 안눌만이 이괄에게 세 가지 책략이 있으니 잘 알아본 후에 대책을 세우자 하고 며칠이나 섬에 머물면서 시종 우리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섬에서 철산으로 나왔을 때에 본도의 순찰사(巡察使) 이상길(李尙吉)의 편지를 받아 보았더니, “모문룡에게 군사를 청하러 가도로 향한다. ……” 하였습니다. 또 와전된 말이 있어, ‘역적 이괄이 남대문 밖 촌가에서 대비를 받들고 한 왕자를 추대하였으며 임금의 행차는 저자도(楮子島)로 피하였다. ……’ 하였습니다. 그때 안눌이 말하기를, ‘군사를 청하여 토적하는 것과 근왕(勤王)하는 것 중 어느 편이 옳을꼬.’ 하고, 계속하여 말하기를, ‘이제(李X29765;)가 대비를 모셨다 하니 이도 또한 우리 임금(선조)의 아들이다.’ ‘인조가 임금된 지도 1년이 넘지 않았다.’ ‘저자도에서 능히 난을 면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 밖에 반정 초에 미진하였던 일, 공신들의 명이 짧다는 일, 역적 이괄이 정승 등을 세웠다는 일들을 함부로 지껄여 조리가 없으므로 윤의립이 말리며 말하기를, ‘역적 이괄이 새 조정을 포치(布置)한 것을 어찌 족히 말할 것이 되리오.’ 하였습니다. 신이 안눌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모문룡에게 청병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는 알기 어렵지 않다. 대비가 10년 동안 유폐되어 장차 불측한 변이 있을 뻔하였다. 그때에 왕자들이 모두 대비를 폐위하기를 청하였는데 지금 반정하여 대비가 복위된 때에 왕자가 이괄에게 추대되었다 하니, 비록 지금 대비를 빼앗아 받들었다 하더라도 나라를 다투는 역적임은 분명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안눌의 발언이 광패(狂悖)하고 처사가 어긋남을 보고 실성했나 의심하였습니다. 환도하여 서울에 들어온 후 한 집안 사람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 들으니, 안눌이 옥당 관원에게 말하기를, ‘미유년(未踰年 인조가 임금된 지 일년이 넘지 않았다.) 세 글자가 신(김덕함)의 입에서 나왔다고 하고 또 안경심(安景深)에게 변명하기를 13개월이나 되니 이미 1년이 넘었다고 말했다.’ 하니 이는 천지신명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 하였다. 전교하기를, “안눌이 말한바 이괄의 세 계책은 어떤 것인고. 승정원에서 김덕함에게 물어서 아뢰라.” 하니 덕함이 글로서 아뢰기를, “안눌이 윤의립이 거처하는 방에서 먼저 말하였는데 신은 감히 다시 묻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윤의립과 안경심에게 물어보라.” 하였더니 두 사람이 함께 말하기를, “안눌이 말한 세 가지 계책은 임금의 행차가 있는 곳을 바로 치는 것이 상책이고, 대비를 받들고 왕자를 세우는 것이 중책이며, 서울에 머물러 이괄 자신이 임금이 되는 것이 하책이라.” 하였다. 양사에서 이안눌을 잡아 국문하여 법대로 처단하자고 아뢰어 멀리 경성(鏡城)으로 귀양보냈다. 《성옹집(醒翁集)》
[주D-001]직성이 …… 꺼립니다 : 음양(陰陽) 중에, ‘천문학상으로 어느 날에는 어떤 별이 당직(當直)을 한다.’는 말이 있는데, 칠살(七殺)은 흉성(凶星)이므로 칠살이 직성(直星)인 날에 출병하면 불리하다는 것이다.
[주D-002]낭(狼)이 …… 형상 : 이것은 《시경(詩經)》에 있는 말인데, 낭(狼)이라는 짐승은 턱살이 처져서 걸을 때에 턱살을 밟다가 꼬리를 밟다가 하는 짐승인데 여기서는 앞뒤로 곤란을 가져온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주D-003]제비 턱과 …… 봉후의 형상 : 상법(相法)에, ‘호두연함(虎頭燕X38967;)은 봉후(封侯)할 좋은 상이라.’ 하였다.
[주D-004]진양(晉陽)으로 돌아감 : 춘추(春秋) 때에 조양자(趙襄子)가 난을 당하여 진양(晉陽)으로 피하여 갔다. 여기서는 전라도로 파천하자는 뜻이다.
[주D-005]안고경(顔X26482;卿)의 죽음 : 당 나라의 안고경은 안녹산(安祿山)에게 잡혀 굴하지 않고 꾸짖다가 참혹하게 죽었다.
[주D-006]서림(徐霖) : 명종조(明宗朝) 때에 강도 임꺽정[林巨正]의 첩주(諜主)로 관군에게 쫓기자 항복하여 임꺽정이 있는 곳을 알려 임꺽정을 잡히게 하고 죄를 면하여 공신이 되었다.
출처 양평 문화탐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