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힘이 없어 중국에 바쳐진 인간 진상품…
貢女(공녀) 잔혹사
고려 이어 조선시대까지 '치욕' 계속돼…
元·明 등 새 국가 들어설 때마다 기승
딸이 후보 뽑히면 얼굴에 약 발라 훼손…
비구니로 만들고 아기 때 시집 보내기도
"딸을 낳으면 비밀에 부치고 남이 알세라 걱정하는
형편이라 이웃도 그 딸을 볼 수가 없다. 딸을 숨긴
사실이 발각되면 온 마을이 피해를 입게 되며 친족을
묶어두고 취조하여 모멸감을 준다. 처녀를 선발하는
과정에서 뇌물이 오가는데, 돈 있는 자는
빠지고 돈 없는 자는 끌려간다."
고려 시대 이곡(李穀·1298~1351)이 먼 원나라 황제에게
올린 상소는 절절했다.
그가 애통해 한 것은 때마다 중국에 바쳐야 했던
'인간 진상품', 공녀(貢女). 치욕의 역사는 5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신라에서 중국 북위(北魏)에도
여자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고려 후기부터 조선 시대가 가장 극성이었다.
서울대 규장각의 이숙인 HK연구교수는 이달 말 출간될
'조선사람의 해외여행'(글항아리)에서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공녀 실태를 정리했다.
◆自害·早婚으로 맞서기도
고려 원종 15년(1274년)에 원나라가 140명의
부녀자를 데려간 것을 시작으로 충렬~공민왕 때
원에 바친 여자는 44회에 걸쳐 170명이 넘었다.
조선 시대에도 태종~효종 때 명·청에 9회에 걸쳐
146명이 진상됐다. 중국 고관들이 사적(私的)으로
데려간 경우까지 합치면 수천 명에 이
른다고 학계에서는 본다.
중국의 '채홍사(採紅使)'가 오면 조정에서는
공녀 선발 기구를 임시로 설치하고 각 도를
순찰사가 물색하고 다녔다.
백성들의 저항은 거셌다.
효종 때 경상도 정황(鄭煌)이란 사람은 딸이
공녀 후보로 뽑히자 딸의 얼굴에 약을 발라 상하게 했다.
딸을 비구니로 만들기도 했다. 고려 때는
강보에 싸인 여아를 유모가 안고 시집 보내는
일까지 있었다.
조선 시대 세종은 "12세 이하 여자에 대해 혼취를 금하라"고
법령을 공포해야 할 정도였다.
조선 태종 8년 4월, 각 도에서 처녀 30명이 뽑혀 서울로 이송됐다.
부모 3년상을 당한 자나 무남독녀를 제외한
7명이 경복궁 최종 심사대에 섰다.
하지만 중국 사신은 '미색'이 없다며
관리를 곤장 치려 했다.
처녀들도 낙점을 피하려고 중풍이 든 듯 입을
뒤틀거나 다리를 절룩거렸다. 결국 여자들의
부친 전원이 파직되거나 귀양에 처해졌다.
그해 7월 재선발이 시작됐다. 태종은
"처녀를 숨기거나 침을 뜨고 약을 붙이는 등
흉하게 보이도록 꾀를 쓰는 자"에게는
엄벌에 처하겠다고 불호령을 내렸다.
◆국내외 권력관계 반영
공녀들 대부분은 타국에서 처첩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황제 눈에 들어 비빈(妃嬪)에 봉해지면
권세 가도를 걷기도 했다.
고려 출신 기황후는 모국의 왕위 승계에
관여했을 정도다.
공녀 출신 비빈의 부친이나 오빠도 '황친(皇親)'으로
위세를 누렸다.
기 황후의 오빠 기철은 국왕과 나란히 말을 타며
환담을 나눴다.
태종·세종 때 차례로 두 누이 동생을 공녀로 보낸
한확은 우의정과 좌의정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가 간통을 저질렀을 때도 세종은
"내가 죄 줄 수 없는 사람"이라며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공녀 요구는 대륙에 새 권력이 들어서거나
국내 국가권력이 불안할 때 고개를 들었다.
고려나 조선의 새로운 지배자는 대국의 승인이 급선무였다.
세종조차 공녀 진상이 "국내의 이해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외국에도 관계되는 것이니
조정의 신하들이 간하는 것과는
달리 다만 (중국 황제의) 영(令)만 따를 뿐"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공녀는 중세기 국가의 욕망과 남성의
욕망이 응축돼 있던 국제 역학 관계에서 생겨난
부산물"이라면서 "특정 시기의 사건이라는
차원을 넘어 그 후에도 '위안부' '양공주' 같이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서 반복되어 온 사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