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Cleopatra)
기원 전 50 년경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는
역사상 그 어떤 여인보다 극적인 삶을 살았다.
한 편의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그녀의 흥미진진한 생애와 러브스토리는
지금껏 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는
창작의 원천이 되었다.
Cleopatra Testing Poisons on Condemned Prisoners
파라오 율법에 따라
남동생들과 두 번씩이나 결혼해 왕좌에 올랐고
왕권을 쟁취하기 위해
남편이며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여 마침내 승리했다.
마케도니아의 마지막 여왕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의 생애는 소설보다 더 흥미롭다.
Gerome, Jean-Leon cleopatra before caesar
클레오파트라의 생애 중에서
일반인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부분은
그녀가 로마의 지배자인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차례로 유혹한 과정이다.
당대 최정상에 오른 두 남자를
어떻게 그처럼 완벽하게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기원 전 48년 클레오파트라는
남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후
강제로 폐위되어 유배된 상태였다.
막다른 골목에 처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를 침공한 카이 사르의 막강한 힘을 빌어
왕권을 되찾는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로마의 최고 실력자인 카이사르와
운명적인 첫 만남을 가졌다.
위 그림에서 보면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를 정복한 카이사르가
이집트 왕궁에 묵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몰래 그에게 접근하려던 그녀는
기막힌 계락을 떠올렸다.
스스로 양탄자 위에 드러누운 뒤
충복에게 자신의 몸을 양탄자로 둘둘 말 것을 명령했다.
충복은 어깨에 맨 양탄자를 호위 병사들에게 보인 후
집정관에게 줄 값진 선물을 가져왔다고 둘러댔다.
큼직한 양탄자는 카이사르의 눈길을 끌었고
호기심이 발동한 카이사르는 서둘러 양탄자를 풀게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양탄자를 펼치기가 무섭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반라의 여왕이
비너스처럼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완전히 반한 카이사르는
연인이 되었음은 말한 나위가 없고
여왕의 정적을 모두 제거하고
그녀를 왕좌에 앉혔다.
여왕은 카이사르의 권력을 이용해 왕권을 되찾고
피맺힌 복수를 감행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의 화가 로렌스 알마-타데마가 그린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는 그녀의 사후 예술가들에 의해 그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그의 연인이 되어 아들 카이사리온까지 낳고
야망을 키우던 클레오파트라에게
찬 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원 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의 무한한 권력에 위협을 느낀 정적들이
카이사르를 암살하였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음 상대로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
로마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한 안토니우스를 점 찍었다.
삼두 정치인 중 한 사람인 안토니우스가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 사령관 에 오른 후
동방 원정길에 나섰다는 정보를 입수한 클레오파트라는
자신과 국가의 운명이 걸린
안토니우스를 유혹하기 위해 묘안을 짜냈다.
위의 그림에서 앨마 테디마는
그리스의 역사가 플루타르크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만남을
묘사한 글을 토대로 이 그림을 그렸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첫 만남을
가진 장소는 타르수스다.
오늘날에는 터키의 한 지방 도시에 불과하지만
고대의 타르수스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손꼽히는 대도시였다.
시가지는 강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안토니우스를 만났다.
선체는 황금빛이요,
바람을 받아 크게 부풀어 오른 돛은
가장 값비싼 색깔인 자주색이었으며
갑판 중앙에는 금실로 수놓은 장막이 좌우로 열려 있고
그 아래 옥좌에 사랑의 여신 비너스로 분장한
클레오파트라가 앉았다.
노예들은 은으로 만든 노를 저으며
피리와 하프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고
배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향기가 바람을 타고 진동했다.
이 화려한 첫 만남에 안토니우스는
그만 혼을 뺏기고 말았다.
정신이 나간 안토니우스가 벌떡 일어서서
두려움과 경이로움이 가득 찬 눈길로
클레오파트라를 바라본다.
클레오파트라는
금으로 장식된 이동 닫집 아래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앉아
요염한 눈초리로 안토니우스를 탐색한다.
안토니우스와 극적인 첫 만남을 가진 이후
클레오파트라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행여 안토니우스가 권태를 느낄새라
늘 새로운 쾌락을 개발했고
날마다 산해진미에
악사와 무희를 동원한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이런 생활이 10년이 넘도록 이어지자 클레오파트라는
연인을 아예 자신 곁에 못 박아두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려 안토니우스의 사랑이
순간적인 열정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끝내 신분과 국적
동양과 서양이라는 인종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이국의 여왕과 혼인식을 올릴만큼
안토니우스는 철저하게 여왕의 노예가 되었다.
그리고, 안토니우스는 결혼 선물로
여왕에게 엄청난 이권이 걸린
오리엔트 지방의 통치권을 주었다.
로마의 권력자를 애인으로 둔 덕분에
그녀는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재물과 권력을 소유한 여왕이 되었다.
Cleopatra
사랑에 눈이 먼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아내 옥타비아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편지를 쓰고
또 다른 권력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의 지배권을 동서로 양분할 것을 요구했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자
로마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국사를 돌보기는 커녕
힘들게 정복한 식민지에서 나온 귀한 수입을
이집트 여인에게 몸땅 안겨주는 사령관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특히 로마의 상속자요, 양자인 옥타비아누스는
여왕의 노예로 전락한 안토니우스를
로마의 수치로 생각했다.
그는 두 남녀를
국가의 명예를 더럽힌 탕아와
국제적인 창녀의 야합으로 매도한 후
안토니우스를 제거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에 벌어진 악티움 해전의 승자가 되었고
패전 사령관이 되어 벼랑 끝에 몰린
안토니우스는 자결하였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갑작스럽고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안토니우스의 묘를 참배하고 돌아온 그녀는
곧바로 최후를 맞았고
역사가들은 그녀가 독사에 물려 죽은 것으로 추정했다.
클레오파트라를 그릴 때는
독사가 벌거벗은 여왕의 젖가슴을 무는
자극적인 장면을 선택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에로티시즘이 강하게 풍겨 나오는 것은
죽음과 성을 한 쌍으로 묶어 표현했기 때문이다.
The Death of Cleopatra
클레오파트라가 팜므 파탈의 원형이 된 것은
정치적인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권력의 최정상에 앉은 남자들을 차례로 유혹해
희생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성적 매력을 이용해
왕권을 차지했고 애인들의 막강한 힘을 빌어
정적을 제거하고 부귀영화를 누렸다.
플루타르크는 클레오파트라의 신비로운 죽음에 대해
여왕의 갑작스런 죽음은
탐스런 무화과 바구니를 든 농부가
여왕을 방문한 직후에 일어났다.
무화과 바구니에
맹독성이 강한 독사가 들어 있었던 것일까?
라고 강한 의문을 던졌다.
들라크루아는 클레오파트라를 방문한
농부의 바구니 속에 숨겨져 있는
뱀을 그려 넣어 극적인 죽음을 예견하고 있다.
우리가 클레오파트라 라고 부르는 여왕은
클레오파트라 3세 이다
이집트 왕조에서는 여왕이 제법 있었는데
고대 이집트 역사 연대기 문헌을 보면
클레오파트라의 시대가 제법 있었다
몇 명의 클레오파트라 라는 이름을 가진 여왕들 중
가장 활약상이 두드러졌던 여왕이
클레오파트라 3세 였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도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 파스칼의 유명한 말처럼
클레오파트라는 세계 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
클레오파트라(B.C 69~30)는 역사적 인물이다. 로마가 세계 제국으로 일어서던 기원 전후 이집트의 여왕이었다. 로마의 통치자들과 연대를 맺으며 자신의 권력과 왕국을 지키다,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신화의 인물이다. 역사상 최고의 미인으로 회자된다. 그녀는 트로이 전쟁을 일으킨 헬레나와 같은 인물이다. 헬레나처럼 그녀의 미모를 확인할 수 없다. 확인할 수 없는 그녀의 미모가 당시 지중해 세계의 정세를 좌지우지했다고 믿어진다. 미모의 헬레나를 놓고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가 일대 전쟁을 일으켰다는 그리스 신화 속의 얘기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클레오파트라의 미모는 대중들에게는 믿어의심치않는 신화였다. 그러나 사실 오랜 학문적 역사적 논쟁꺼리였다. 최근들어 대중들이 다시 그녀의 미모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 계기는 지난 2001년 영국 대영박물관의 클레오파트라 특별전이었다. 이 특별전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클레오파트라와 관련된 유물과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새로 발굴된 유물과 비공개 유물도 포함됐다. 많은 유물과 작품들이 그녀를 고혹적이고 아름답게 그렸으나, 모두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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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전에 주조된 클레오
파트라의 모습. 매부리코
에 살찐 목이 인상적이다
그녀를 고혹적이고 아름답게 그린 작품들은 대개가 그녀의 미모에 대한 신화가 성립되고 난 뒤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녀가 살았던 시대의 유물과 작품들은 그와는 다른 경향을 보여줬다. 엄숙하고 평범한 얼굴에 불과 150㎝ 남짓한 작은 키, 뚱뚱한 몸매와 엉망인 치아로 그녀를 묘사한 작품도 있었다. 특히 그녀가 살았던 시대의 유물들은 대개가 그녀의 코를 커다란 매부리 코로 묘사했고, 그리고 살이 많이 붙은 목덜미를 드러냈다.
▲ (위) 클레오파트라 시대인 기원전 48-30년 때 키프러스에서 주조된 동전.
(아래)클레오파트라 시대인 기원전 51~30년 그리스에서 주조된 동전.
두 동전 모두 클레오파트라 모습을 담았다. 큰 매부리 코에, 살이 찐 목을 드러내고 있다.
당시 큐레이터를 맡았던 고고학 전문가인 수전 워커 박사는 “클레오파트라의 신화는 대부분 난센스”라며 “클레오파트라가 알려진 것과는 달리 뚱뚱하고 못생겼다”고 주장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가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남자를 뇌살시키는 고혹스런 여인이라기 보다는 그리스어뿐만 아니라 라틴어·히브리어·아랍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지성적 인물풍이라고 덧붙였다.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의 실력자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등과 관계를 맺고, 정치적 연대를 한 것은 그녀의 미모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지성과 정치적 수완때문임을 시사한 것이다.
그러자 이집트가 발칵 뒤집혔다. 이집트의 고대 유적 연구가들은 “클레오파트라의 모습을 담은 유물들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늘씬한 미인의 모습”이라고 반박하고 나섰다. 다른 전문가들은 클레오파트라의 미모를 현대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견해도 보인다. 즉 아름다움, 특히 여성의 미모란 시대와 문화의 소산으로서 각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다른데, 현대 서구적 가치기준으로 클레오파트라의 미를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세에는 풍만하고 둥글둥글한 원형미를 갖춰야 미인으로 평가받은데 비해, 현대에서는 날씬한 몸매와 날카롭고 각진 인상의 여인들이 미인으로 대접받기도 한다.
클레오파트라, 혹은 클레오파트라 7세, 정확하게는 클레오파트라 테아 필로파토르는 집안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이다. 이 왕조는 그녀가 태어나기 약 300년 전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의 산물로 성립됐다. 알렉산더의 대제국은 그의 사후 각 지역을 관할하던 장군들에 의해 분할됐으며, 그 중 하나가 이집트 지역에서 성립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이다. 알렉산더 대왕 후손의 한갈래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당연히 그리스계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내력은 클레오파트라의 신화를 규명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 클레오파트라를 닮은 여인의 대리석상. 서기 50-30년 로마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통치한 이집트는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융성하고 번영한 나라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은 유럽 문명의 한 원류인 헬레니즘을 완성했다. 수도 알렉산드리아의 명성에서 잘 알 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은 서방과 동방 문화를 융합해 발전시켰다. 그 난숙한 문명과 문화적 배경은 300년 뒤 클레오파트라가 신흥 군사강국인 로마의 실력자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는 바탕이된다. 즉 신흥 군사강국인 로마의 통치자들은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뒤떨어진 상태였다. 그들에게는 당시 문명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 주변의 지중해 세계를 이해하는 정치적 동맹자가 필요했다.
클레오파트라 신화를 벗겨낼 또 다른 열쇠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근친혼 관습이다. 외래 지배자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극단적인 근친혼으로 일관했다. 클레오파트라 자신이 남매 사이의 결혼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여동생과 결혼해 클레오파트라를 낳았다. 근친혼의 결과가 긍정적이지 않음은 이제 상식이다. 동일한 유전적 요소를 집적하는 근친혼이 용모에서도 균형적인 측면보다는 한 특징을 극대화시킬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녀를 묘사한 당시의 유물에서 묘사된 그녀의 커다란 매부리 코와 살이 두툼한 목덜미 등은 아마 이런 근친혼의 결과로 짐작된다. 즉 그녀는 ‘균형적인 미모’라기 보다는 ‘인상적인 모습’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 클레오파트라의 모습은 엘리자베스 테일러같은
전형적 미인이라기 보다는 마리아 칼라스 같은 인
상적인 모습이었들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마리아
칼라스를 모티브로 한 광고 사진.
그래서 영국의 미학비평가인 휴 퍼먼은 클레오파트라가 영화에서 그녀로 분한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미녀 배우 같은 스타일이라기 보다는 인상적이고 좌중을 장악하는 카리스마를 가진 오페라 가수 마리아 칼라스 같은 스타일이었을 것이라고 비평하기도 했다.
어쨌든 역사학자들은 클레오파트라의 신화는 당시 클레오파트라도 관여된 로마 통치자들의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생겨난 것으로 일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생애는 로마가 세계 제국으로 일어서던 당시 로마 통치자들의 권력투쟁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아버지의 죽음 뒤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관습대로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해 공동왕위와 오른다. 그 후 남동생 쪽과의 권력투쟁에 밀려 망명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까지 밀려온 로마 통치자들의 권력투쟁에 관여되며 권좌를 회복한다. 카이사르에 쫓겨 알렉산드리아로 온 폼페이우스를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죽여 그의 목을 카이사르에게 바쳤다. 로마의 실력자 카이사르에게 아부하기 위한 일이었으나, 카이사르는 격로했다. 폼페이우스가 비록 정적이기는 했으나, 자신의 유일한 사위이자 집정관이었기 때문이다.
▲ 서기 2년 테베에서 출토된 클레오파트라의 미이라.
클레오파트라의 신화는 여기서 출발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카페트로 몸을 말은 뒤 궁전으로 숨어들어가, 카페트가 펼쳐지자 나신의 몸을 카이사르에게 보여 그를 매혹시켰다는 것이다. 그런 클레오파트라에게 반한 카이사르가 그녀를 다시 권좌에 복귀시키는 한편 연인으로 지내다 아들 케사리온까지 낳게 된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21살, 카이사르는 51살이었다. 두 사람이 남녀관계를 맺을 수도 있지만, 한가지 확실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두 사람이 정치적 동맹, 혹은 정치적 상하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당시 급속히 확장중인 로마 제국의 여력과 내부의 정치투쟁으로 미뤄보건데, 직접 통치보다는 현지인을 통한 대리통치가 불가피함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케사리온을 데리고 카이사르를 따라 로마로 간 클레오파트라는 케사리온을 후계자로 지명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카이사르는 조카인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는 로마의 기존 권력층이 두텁기도 했으나,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관계가 정치적 이해관계에 불과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 이 사건은 후에 로마제국의 첫 황제로 등극하는 옥타비아누스가 클레오파트라를 자신의 정적으로 간주하고, 결국 죽음으로 몰아넣는 근본 배경이 된다.
카이사르의 암살 뒤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2차3두정치를 실시한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를 부른 것도 같은 이유이다. 적의 적은 바로 친구이기 때문이다. 안토니우스도 클레오파트라에게 반해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녀와 함께 보낸다. 둘은 쌍둥이를 포함한 자녀 3명을 두고 결혼까지 한다. 안토니우스가 알렉산드리아를 근거지로 삼고 그곳의 실력자 클레오파트라와 관계를 맺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로 보인다. 로마에 근거지를 둔 정적 옥타비아누스와 대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근거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 안토니우스는 당시 동방 지역 원정 책임자였다.
▲ 기원전 32년 로마제국 동쪽 지방에서 주조된 것으로
보이는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모습을 담은 동전. 클레오파트라에게서
고혹적인 모습을 찾기는 힘들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매일 클레오파트라와 향연을 즐기며 로마에 대항하고 있다며 원로원을 설득해 결국 이집트 정벌에 나선다. 유명한 악티움 해전이다.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물리친 옥타비아누스가 알렉산드리아로 진군할 때 안토니우스는 물론이고 클레오파트라가 독사에 물려 자살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얘기이다.
▲ 수많은 클레오파트라 영화 중 초기 대표작인 클로데트 콜버트 주연의 <클레오파트라>(1934). 로마의 통치자를 호리는 캐릭터로 그녀를 묘사한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제국의 통치권을 장악하고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로 오른 다. 제위에 오른 그가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클레오파트라에 대해 무슨 일을 했을 것임은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로마의 통치자들을 홀린 요부·간부로 그녀를 각인시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녀의 미모가 부각돼야 함은 물론이다. 수많은 클레오파트라 영화 중 초기 대표작인 클로데트 콜버트 주연의 <클레오파트라>(1934)는 이런 미모로 로마의 통치자를 호리는 캐릭터로 그녀를 묘사한다.
▲ 클레오파트라의 신화를 완성한 엘리자베스 테일러 주연의 영화 <클레오파트라>
에서 클레오파트라로 분한 엘리자베스 테일러
클레오파트라 영화 중 대중에게 가장 강한 각인을 준 영화는 역시 엘리자베스 테일러 주연의 <클레오파트라>(1963)이다. 단순한 미모만을 부각시키지 않고 상당한 정치력과 결단력을 가진 통치자로 묘사된다. 작품성으로 별 볼일 없는 영화로 평가받지만,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진전된 해석과 세기의 미녀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완숙한 미모가 결합해 클레오파트라 신화를 더욱 증폭했다. 그녀의 애칭 리즈를 결합해 ‘리즈파트라’라는 말도 만들어냈다. 어쩌면 대중들이 기억하는 클레오파트라는 그녀 자신이 아니라 ‘리즈파트라’일 것이다. ??6s정의길 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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