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터키의미녀들(쿄셈과록셀리나)

이모르 2020. 12. 13. 11:08

 

 

터키여배우 사진을 여러곳을 찾아 다녔지만 구할수 없었는데

딱 한군데 에페소에서 촬영대기 하는 여배우를 찾아내서 빌려왔습니다

꾀 유명한 배우라던데 이름은 모릅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1780-1867) 가 그린 노예매매 와 오달리스크

 

오스만 터키의 술탄들은 궁궐에다 하렘을 차려놓고 사들인 노예

나 전쟁포로 등 천민들을 들여와 황태자를 낳게 했는데

오스만제국에서 짚시였던 쿄셈과 우크라이나 노예 였던 록살라나

는 신분을 뛰어넘어 황후에 오른 사람들입니다

 

 

 

 

술탄 아흐멧1세 초상화

쿄셈이 죽거든 내 곁에 !!!!!!

오스만제국의 역대 왕 중에 사랑하는 여인을

자기 무덤 옆에 묻어 달라고 유언한 왕은 14대 술탄 아흐멧 뿐입니다.

 

 

 

 

 

 

 

쿄셈의 초상그림을 구할 수가 없어서

삽화로 그려보았습니다

 

 

 

 

 

쿄셈은 짚시 발리댄서 였습니다

 

 

 

 

 

터키의 발리댄서들 사진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스탄불에 오시면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이 불루 모스크일 것입니다.

 

 

 

 

 

술탄 아흐멧1세가 지은불루모스크

 

 

 

 

 

 

 

 

 

바로 이 사원을 지은 왕이지요. 이 불루 모스크 옆에 술탄 아흐멧 가족의

무덤이 있는데 왕비들은 왕의 가족묘지에 들어 올 수 없는 계율을 어기고

오직 그녀만이 당당하게 왕의 옆에 묻혀 있습니다.

이들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어느날 톱카프 궁전에서 외국 사신들을 위한

연회가 베풀어졌는데 쿄셈이라 불리는 한 집시여인이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이 날 술탄 아흐멧은 그만 이 여인의 세련미와 미모에 반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곧 그녀를 후궁으로 들이게 되었고 국적, 연령, 본명이 불 분명한

집시를 왕비로 삼는다는 것은 오스만 제국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습니다.

드디어 집시인 이 쿄셈은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고

왕은 첫번째 왕비를 멀리하고 오직 쿄셈만을 옆에 두었습니다

첫번째 왕비는 너무나 마음이 상하여 그만 병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항상 그렇듯 이래서 비극의 역사는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장자 계승법에 의해 첫번째 왕비의

아들인 오스만이 1618년 13세의 나이로 왕위를 물려 받게 되었습니다.

위기를 느낀 쿄셈은 남몰래 어린 왕에게 마약을 술에 타서 여자와 함께 계속

넣어 주어 어린 왕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였습니다.어느날 중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쿄셈은

“대 제국의 황제인 오스만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여러분들은 알고 나 계십니까?”

하고 모함하였습니다. 중신들이 왕에게 가보니 마약과 술에 취해

왕은 정신을 잃을 정도가 되어있었습니다. 이 때 쿄셈은

그를 정신병자로 몰아세웠습니다

쿄셈의 측근은 정신병자가 어찌 대 제국의 왕이 될 수 있겠는가

하여 강제로 퇴위 시키고 (이 때 나이 17세) 예디쿨레로 보내어 사지가

묶인 채 처참히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지금도 로마의 성벽이 시작되는 곳에

예디쿨레(일곱 개의 성)가 그대로 있고 젊은 오스만왕이 죽었던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결국 쿄셈의 아들 무랏드 4세가 1623년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고,

어리다는 이유로 쿄셈이 뒤에서 조정을 좌지우지하게 되었습니다.

철이 든 후 무랏트 4세는(시중에서 커피집에 모여 궁중의 불평을 늘어

놓는다하여 커피집을 폐쇄했던 왕) 자기 누나와 동생을 살해하게 됩니다.

쿄셈은 분노하여

“네가 오늘에 있기까지 누구의 덕인데 네 형제를 마음대로 죽이는가?”

그러자 무랏드 4세가 말하기를 “나는 어머니가 오스만 형에게 한

그대로 행했을 뿐입니다.

왕권에 도전할 자는 누구든지 죽일 것입니다.

“ 아무도 모르고 있으리라 했던 오스만에게 행한 행위가 벌써

아들의 귀에 까지 들어갔음을 알고 다른 아들 이브라힘이라도 살리고자

그를 불구로 만들어 왕권에 도전할 의사가 없음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무랏트 4세가 재위 17년만에 죽자 쿄셈은 이브라힘에게

왕위를 물려받게 했습니다. 불구가 된 이브라힘은 마음의 상처로

인해 성격이 비뚤어져 쿄셈에게 대항했습니다.

결국은 반대 세력들에 의해 몰리게 되자 쿄셈은 장롱 속에 숨어있었으나

들켜 커튼 줄에 목이 졸려 죽임을 당하고 65세로서 한 세대를 풍미했던 그

의 영화는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집시 출신인 그녀가 술탄 아흐멧의 가족묘지에 묻힐 수 있는

영광을 갖게 된 것은 오직 순정 파 황제 아흐멧의 유언 덕입니다.

 

 

 

 

Süleyman(터키어)술레이만 대제1494.11.6 ~ 1566.9.5 (재위 1520 ~ 1566)

 

 

오스만 제국을 최전성기로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는 제10대 술탄. 이명은 '입법자'(Kanuni, 터키) 및 '장엄제'(The Magnificent, 유럽)이다. 한국 등 동아시아권에서도 '대제'(大帝)의 격으로 높여 부른다. 즉 쉴레이만 대제.

 

 

쉴레이만이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한마디로 먼치킨. 문무 다방면에 조예가 깊고 예술을 애호하는 등 명군주의 면모가 모두 혼재된 술탄으로, 심지어 적국인 신성 로마 제국의 대사조차도 "도리에 어긋나는 모든 것들을 맹렬히 공격하고 무너뜨린 인물"이라며 그를 찬양했다. 그리고 작렬하는 천둥과 번개의 모습과도 같다고 비유했다.

 

 

 

 

 

우크라이나 노예출신으로 황후에 오른 록살라나

 

 

 

또한 그는 오스만의 술탄 중에서 매우 보기 드문 애처가였다. 문제는 오스만 술탄 중에 그가 유일하게 결혼을 했다는 점이지만(.....) 공식 황후를 두지 않았던 선대의 술탄들과 달리, 그는 일평생 록살라나(휴렘)라는 여인을 애지중지 사랑했다. 게다가 그 여인은 우크라이나 원정에서 잡아온 노예 출신이었다. 쉴레이만은 25년이나 록살라나와의 일부일처를 유지하는 순애보를 보였다.

 

 

그런 한편으로 8남 1녀를 둔 제국의 주인으로서 그는 비정할 필요도 있었다. 그의 부황이 그러했듯이 마찬가지로 제위 계승에 걸림돌이 될 아들들은 제거해야 했던 것이다. 쉴레이만은 아들인 무스타파와 바예지드를 처형한 후 깊은 시름에 잠겼다.

 

 

말년과 최후

쉴레이만의 정복 사업은 그가 죽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페르시아와 평화 협정을 맺은 뒤 그의 시선은 다시 서쪽으로 쏠렸다. 이미 그의 경쟁자였던 카를 5세도 세상을 떠나 유럽 세계는 강한 구심점을 잃었다.

 

 

1565년, 술탄의 함대는 전에 로도스 섬에서 버티던 성 요한 구호기사단이 이주한 몰타로 출격했다. 격렬한 사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로도스와 달리 몰타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깨졌다.

 

 

1566년에는 72세의 노구를 직접 이끌고 또 다시 헝가리 원정에 나섰다. 시게르바트 요새에서 격렬한 사투가 벌어졌다. 노쇠해진 상태로 의자에 앉아있던 술탄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자신이 젊은 시절 말에 올라타 몸소 성을 공격하던 기억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요새를 함락시키기 몇 주 전인 9월 6일, 그는 마차로 자신의 헝가리 영지를 돌아보던 중 평안하게 객지에서 눈을 감았다. 사망 당일 그의 일기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

 

"요새는 저리도 타오르고 있건만, 승리의 북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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