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프랑스의미녀(마리 앙뚜아네트 )

이모르 2020. 12. 13. 11:11

마리 앙투아네트역의 커스틴 던스트

 

 

 

 

장 마르크 나티에 (1685~1766)의 39사냥의

여신 다이아나의 모습으로 표현된 퐁파두르 부인391746),

캔버스에 유채, 101*82㎝ ⓒ Photo RMN-GNC media, Seoul, 2010

 

프랑스 베르사유 궁은 연간 100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는 세계 최대의 명소 중 하나다. 이곳에 걸려 있던 국보급 회화 작품 및 유물 84점이 바다를 건너 한국을 찾아왔다.

 

프랑스 절대 왕정의 전성기인 루이 14세부터 루이 16세에 이르는 200여 년간의 프랑스 왕실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다. 특히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로도 우리에게 친숙한 마리 앙투아네트와 관련된 다양한 작품이 눈길을 끈다.

 

14세의 어린 나이로 루이 16세와의 결혼을 위해 오스트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온 이 꿈 많은 소녀는 문화와 유행을 선도하며 화려한 생활을 하다가 혁명군에 체포돼 끝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담긴 그림과 흉상, 그녀가 사용하던 유물 등을 볼 수 있다. 또 붉은 스타킹과 하이힐을 신고 있는 루이 14세의 초상, 베르사유 궁의 정원을 장식한 금도금 부조 등도 이채롭다.

 

프랑스 전 문화통신부 장관이자 현 베르사유 궁 대표를 맡고 있는 장자크 아야공은 “17~18세기의 인물화는 미술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며 “관람객들이 그림에서 당시 생활상과 사람들의 모습을 읽고 이를 한국의 문화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베르사이유 궁 내 거울의 방 Galerie de Glaces

 

베르사이유 궁전 내 루이 14세의 침실

 

루이 14세의 초상

 

 

 

 

원문츌처:http://siemphre.blog.me/30112008617

<Study #1.유럽 인물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사치의 여왕? 철없던 소녀 마리 앙투아네트 이야기>

 

 

 

마리 앙투아네트와 마리 테레즈 공주, 루이 왕자(왼쪽), 루이 16세(오른쪽)

루이 16세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d'Autriche)는 프랑스의 루이 16세의 왕비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프란츠 1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에서 15번째 자녀로 태어난 그녀의 결혼 전의 이름은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폰 외스터라이히로트링겐. 결혼한 후의 이름은 마리 앙투아네트 조제프 잔 도트리슈로렌인데요.

 

 

 

그녀는 결혼 전에 독일어 이름을 사용했고프랑스로 온 결혼 후에는 프랑스어 이름을 사용했죠.

 

우리가 그녀를 기억하는 건 프랑스 혁명과 함께 무능했던 왕 루이 16세의 왕비로 배고픔에 허덕이는 백성들에게"빵이 없다고?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 하세요"라 말했던 백성의 민심을 전혀 모르는 어리석은 왕비의 모습이었죠.

 

하지만 그녀의 일생을 우리가 자세히 모르는 것 처럼후대에 전해내려오면서 많은 왜곡과 오해가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 Marie Antoinette

 

마리 앙투아네트가 했다는 이 말은 그가 세상물정에 얼마나 어둡고 국민들이 처한 상황에 무지하며 무관심했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회자되곤 합니다.

프랑스 국민들이 먹을 빵이 없어 굶주림에 고통 받는다는 말을 듣자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와 같이 말했다고 알려져왔죠.

 

그러나 실제로는 루이 14세의 아내였던 스페인 왕가 출신 마리 테레즈 왕비의 말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마리 테레즈가 “빵이 없다면 파이의 딱딱한 껍질을 먹게 하라” 말했다는 건데요.

 

 

 

 

프랑스 백성들을 만나는 마리 앙투아네트, 백성들이 '절규'하는 듯한 모습이 인상적이죠

사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왕실에서 유일하게 소작인의 밭으로 마차를 몰아 밭을 망치는 짓을 거부한 바 있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관해서도 꽤 잘 알고 있었다고 하죠.

 

유럽 왕실의 결혼 대부분이 그러했듯 이날의 결혼도 프랑스 부르봉 왕가합스부르크 공국 사이의 정략적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 -The Grand Trianon

 

프랑스 왕가를 상징하는 부르봉 가문 출신의 루이16세와 당시 세력이 매우 약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마리 앙투아네트.

둘의 결혼은 조국 오스트리아를 지키려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군주였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선택'하고 그녀에게 '강요'한 결혼이었죠.

 

프랑스의 많은 사람들이 이 결혼 동맹으로 합스부르크 공국이 얻을 이익이 더 크다고 보고 있었고, 부르봉 가문의 후계자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혈통에서 나온다는 것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도 적지 않았다고 해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족들

 

우여곡절 끝에 오스트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오게 된 그녀.비록 읽기와 쓰기 등 학문적 분야에선 조금 부족했으나

그녀의 성격에 대해서만큼은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본성이 상냥하고 친절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해요.

예쁜 용모에 착하고예술을 애호하지만, 산만하고 쓰기와 읽기 능력이 부족한 편인 14살 소녀.

어느 집에서건 쉽게 볼 수 있던 철없는 소녀가 유럽의 중심이던 프랑스왕실로 시집오게 된 거죠.애시 당초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왕비를 반대했던 프랑스의 귀족들은 그녀가 프랑스에 불행을 몰고 오리라는 악의적인 선전을 퍼트렸죠.

 

 

 

영화 <Marie Antoinette>속의 커스틴 더스트가 맡았던 마리 앙투아네트

그 때문에 그녀는 혼외정사를 하며 정부를 갈아치우는 음탕한 여자라는 소문, 동성연애를 한다는 소문, 그녀가 낳은 왕자가 루이 16세의 소생이 아니라는 소문 등 갖가지 나쁜 소문에 시달렸습니다.

 

라 모트 백작부인을 비롯한 일당이 추기경과 보석상을 속이고 왕비를 사칭하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편취한 일명 ‘목걸이 사건 마리 앙투아네트의 평판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미쳤는데요.

 

남편 루이 16세는 부끄러움을 잘 타고 소심하며 우유부단하고 내성적인데다가, 취미도 사냥하는 것 외에 자물쇠를 만들거나 돌을 다듬는 것 정도라 발랄하고 활기찬 성격의 마리 앙투아네트와 잘 어울리지 못했죠.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Marie-Therese-Charlotte)

 

마리 앙투아네트는 결혼 7년만에 태어난 장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에게

“가여운 어린 것, 너는 그들이 바라던 아이는 아니지만 난 너를 사랑한단다. 아들이었다면 국가의 것이 되었겠지만, 너는 내 것이고 내가 보살필 거야. 너는 나와 기쁨을 함께 하고 슬픔을 나누게 될 거야.”

 

라고 말했다고 해요.

그녀가 얼마나 외로운 시간을 보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말이죠.

 

너무 외로웠기 때문일까요?그녀는 점차 호화로운 파티와 무도회를 자주 열고 의복, 장신구, 보석에 많은 비용을 들였으며,밤마다 베르사유 정원 한 구석에 있는 파티장인 프티 트리아농을 호화롭게 개보수 하는데 막대한 국고를 쏟아붓기도 합니다.

 

 

 

 

 

 

 

 

프티 트리아농, Le Petit Trianon

 

당시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고 있던 프랑스왕정과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로 상징되는 "무능하고 사치스러운 세상물정 모르는 왕실"에 분노하고

식료품 가격 폭등, 거듭된 자연 재해, 국가 재정 파탄으로 사회 불안과 불만이 고조된 프랑스 시민들은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프랑스 혁명을 일으킵니다.

 

파리 시민들은 10월에 베르사유를 습격했고 왕실 가족은 튈르리 궁에 유폐되었습니다. 왕실 가족은 1791년 6월 20일 왕당파 세력이 강한 몽메디로 도주하려 했지만 바렌에서 붙잡혀 실패했고 이후 탕플에 유폐되었다가 루이 16세가 1793년 1월 21일에 처형되게 됩니다.

 

 

 

 

단두대에서 처형되는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는 10월 15일 사형 판결을 받았는데요.

그녀는 처형되기 전 새벽, 시누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깁니다.

 

“나는 방금 사형선고를 받았어요.(……) 당신의 오빠(루이 16세)와 마찬가지로 죄가 없기에 나는 그가 마지막에 보여준 확고부동함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양심이 깨끗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는 평온합니다. 나로서 가장 유감스러운 일은 가엾은 아이들을 두고 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오직 아이들을 위해서 살아왔다는 것을 당신은 잘 알겁니다.”

 

그녀의 처형은 마치 프랑스 인들의 분노를 (혹은 루이16세의 수준 미달의 국정운영을)외국인 왕비에게 돌려 뒤집어 씌우는 듯한 분위기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녀가 사형장으로 향할 때 파리 시민들은 “오스트리아 여자가 지나간다!” “뻔뻔스러운 앙투아네트가 여기 있다!” 라고 열광했죠.

기요틴 단두대의 처형대 계단을 오르며 그녀는 처형 집행인 샤를 앙리 상송의 발을 살짝 밟고 사과했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그것이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왕비들은 거의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어요.마리 앙투아네트가 정치적으로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냐에 대해선 이야기가 많지만

실제 그녀는 상냥하고 동정심이 많은 편이었고, 그저 궁 밖의 세상을 전혀 몰랐던 평범한 왕족일 뿐이라고 보는 게 맞다고 봅니다.

 

역사는 역시 '승자'의 기록인가 봐요.사치와 허영의 상징, 마리 앙투아네트

어쩌면 지극히 순진해서 세상 이치를 모르던 철없는 소녀는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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