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수0 공감수0
임진년 (1592년 음력 4월14일) 부산성과 다대포를 함락한
왜장 고니시는 15만 병력으로
동래성을 함락하기 위하여시시각각 포위망을 압축하고하고 있었다
성 내에는무관인 경상도 좌병사 이각과 문관인 동래부사 송상현
이 있었는데 상급자 이면서 무관인 이각은 송상현의 명으로
성문을 열어주지 않는 수문장을 죽이고 처첩을 거느리며
도망 하였다
길을 열라 살려주겠다
죽기는 쉽다 그러나 길은 줄수없다 하며
싸우다 울산부사 이언암의비굴한 항복과 길 안내로성이 뚤리고
망루에서 진두지휘하던 부사께서부인에게 삼베옷을 가져오라 한다
부사의 사람됨을 잘아는 적장은 생포를 명하나 부사께서는 끝까지
지휘검을 놓지않으셨다
부사를 둘러싼 왜병들중 부사의 팔을치자
도착한 부인은 크게 꾸짖는다
네이놈 ! 어디다 함부로 손을대느냐
오호 ! 애달다
한손이 꺽인채로 다른손으로 지휘검을 놓지않으시고
부인과 함께 장열이 전사한
송상현님은 적장 고니시 마저도 경의를 표하고
장사를 지내주었다
사람이란 한치앞도 분별치 못함이라
도망치던 좌병사 이각은 상주근처에서
관군에 붙잡혀 죽임을 당하는데
송상현은 죽어서도 후세에 님의 충절을 그리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지만
도망가다 같은 싯점에 죽은 이각과 적군에게 목숨을 구걸하던 이언암을
누가 욕하지 않으리오
내가 만약 그런 극한 상황이 였다면 어떤 길을
택하였을까?
매사에 송상현 님의충절을 생각하며
수많은 판단을 경솔함이 없이 하였습 좋겠다
전사전날밤 부친께 혈서로 올린 님의 시
외로운 성에는 달빛마져 흐렸는데
모든 고을들은 잠자고있네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무겁고
부모와 자식의 온정은 너무나 가볍도다
임진왜란 동래부사 殉節도 보물제392호 민박그림
1760년.채색 필사본 145*96 육군사관학교 박물관 소장
충렬묘 구사당 입구
송상현의 위패
정이품(正二品) 資憲大夫 吏曹判書에 증직되었던것을 1741년
영조 17년에 다시 종일품 崇政 대부 의정부 좌찬성으로 추증한 교지
교지는 왕의뜻을 전하는 문서로 세종7년 1425년에 왕지에서
교지로 바뀌었다 대체로 그내용은 생존인물에 대해서는
품계와 관직을 기록하였고 추증하는 인물에 대하여는 추증하는 품계와
관직을 기록하였다
위 교지는 송상현공이 이전에 정이품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는데
이를 다시 종1품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한다는 것이다
부인이씨 貞敬夫人 추증교지
아래글 출처:위키백과
송상현(宋象賢, 1551년 ~ 1592년 4월 13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작가이며 임진왜란
때의 장수이다. 임진왜란 초기 동래성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과 교전하다가
패전 살해되었다. 왜적은 그를 포로로
사로잡아 항복을 강요하였으나 항복하지 않자
처참하에 살해하였다.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한천(寒泉)이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1570년(선조 3) 진사시에 입격하여 진사다 되고,
1576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후 경성판관(鏡城判官)
등을 지낸 뒤 1584년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호조·예조·
공조의 정랑(正郞), 공조좌랑과 군자감(軍資監)의 정(正) 등을 지냈다.
1584년에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91년(선조 24년) 동래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산이 함락되고, 이어
동래에 쳐들어온 왜병과 싸웠을 때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관복을 갑옷 위에 입고 북쪽의
임금께 절을 올린 후 성문의 누각에 앉아 태연히 잡혀 죽었다.
적장이 그의 충절에 탄복하여 송상현을 살해한
자기 부하를 잡아 죽이고, 그를 동문 밖에 장사
지내 주었다 한다.
그의 첩인 김섬(金蟾) 등도 그를 따라 순절하였다.
그의 시신을 찾지 못했으므로 일각에서는
그가 정발과 함께 일본군에 투항하여 일본군 장수가 되었다는
루머가 퍼지기도 했다.그 후 조정에서
그 아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 주었다.
사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동래성에 육박하자 항전했으나
함락되게 되자 조복(朝服)을 갈아입고 단정히 앉은 채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의연함에 감동한 적장(敵將) 중의 한사람은
그가 죽은 뒤 시(詩)를 지어 제사지내 주었다.
사후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고
동래 안락서원(安樂書院)에 제향되었다
인물평
그는 판중추부사 송흥복의 아들로서 성격이 치밀하고
준비성이 많았다. 왜구가 쳐들어올 것을 미리 대비하여
동래성 주변에 나무를 많이 심어 복병을 숨기기
좋은 여건을 조성함과 동시에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성
이 보이지 않게 위장을 하고 성문 밖에는 능철과
마름쇠를 깔아 왜군의 보병과 기병에 대비하였다.
또한 기와를 뜯어 기왓장 마저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도록 하는 등 동래성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이렇게 준비를 철저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숫적열세를 이기지 못해
동래성은 함락되었다
송상현 한소사 김섬,이소사 정려
김섬金蟾(-1592) 선조25년 조선 중기 義妓 동래부사 송상현의
소실이다
처음 함흥기생으로 있다가 후에 송상현의 첩이되어 동래성에 머물고
있을 때 壬辰亂이 일어나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송상현이 굽히지 않고
순절하자 여종 금춘과 함께 관아의 담을 넘어 송상현 곁으로 달려갔으나
적에게 사로 잡혔다 그는 사흘동안 왜구들을 꾸짖는데 잠시도 쉬지 않았다
이에 죽임을 당하자 적장 고니시도 감동하여 관을 만들어 동문밖에 송상현
과 함께 장사지내고 큰나무비석을 세워주었다.
송상현 공과 정발장군을 따라 순절한 金蟾 과 愛香을 위해
충렬사 동문밖에 별도의 사당을 세웠다
도망가는 아군 무관 출신 이각은 이처럼 도망했다
지하철 공사중 발굴된 동래성 앞 혜자
속의 조선군 유골들
김충선 (金忠善 1571 ~ 1642, 본관 사성김해)
본래 일본사람으로 임란 초에 조선에 귀순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 21살의 나이로 왜군의 선봉장으로서
3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부산에 상륙하였습니다.
상륙한 지 일주일 만인 선조25년 4월 20일에
경상좌우병사 김응서에게밀서를 보냈습니다. "
내가 비겁하고 못난 것도 아니고 내 군대가 약하지도 않다.
조선의 문화가 일본보다 발달했고,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군자의 나라를 짓밟을 수 없다.
그래서 귀순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렇게 조선에 귀화하여 장수가 된 그는 부산, 경주, 영천등에
포진하고 있던 왜군을 무찔렀고 존선군에
조총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었을 뿐만 아니라 왜군이
점령하고 있던 18개의 성을 되찾는 공을 세웠습니다.
그의 무공과 충절에 감복한 선조는 친히 불러
김해 김씨라는 성과 '충선'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서른 살 때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하여 경상도 달성군
우록에 터를 잡아 살았습니다.
72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지증추부사,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