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현충일이었다
전철에서 국립묘지를 지날때 보석에게 나대신 전사한 해군
신병 000기 김00 하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부대원 5명이 휴일 외출중 우연하게 패사움이 벌어저타군 한명이 심하게
부상을 입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내가 승함한 단정에서 내려 진해 대기실로 이첩되어
그 후속 동기생 김현경이 내가 타던 단정에 승함하게 된다
그는 작전중장렬하게 전사 한다.
제대 날 현충원에 가서 그에게 묵념하고 왔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 그분들은 영웅이다
수많은 세월 끝없는 倭와 동족의 침략으로 나라를 지키려다 전사한
호국영령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오늘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의 조선군들 께 묵념을 올린다
제3관문에 들어설 때 문경새재 조령을 포기하고 탄금대로 후퇴
배수진을 쳐 조선군 전원이 신립과 함께 산화한 이야기가 나왔다
신립장군에 대한 역사 를 관촌 이 논하기를
“신립이 배수진을 친것에 대하여 후세에 혹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신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배경을 알아야한다고 운을 떼고
동래성 송상헌부사를 순절시킨 고니시가 정예병 수십만의 병력을 이끌고
문경새재를 넘으려 할때 신립의 방어군은 오합지졸의 농민군으로
하루에 3천명씩 탈영을
하니 그로서는 어쩔수없이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게 된것이다“ 한다.
내가 이르기를
“배수진은 처음 초한의 대전에서 유방의 대장군 한신장군이 개발한 것이라
하던데 신립이 사냥터에서 날 저물어 과수댁에 묵어갈 때 젊은 과부가
신립의 출중함에 반하여 통정 할것을 청하였는데 이를 꾸짖으니 과부가
지붕에서 떨어져 자살을 하여 그 장인에게 사연을 전하니 크게
실망하여 꾸짖기를 사내대장부가 어찌 그리 융통성이 없는가?
장차 그 성품으로 큰 낭패를 당하리라"
하였는데 과연 신립의 선택은 죽기 아니면 살기를
택하였던것은 그 여인의 원혼이 홀려서 택한 결과 였다는 것이라고
야사로 전해진 것이고 과연 그때의 신립이 택한 戰法으로 자신과 수만의 조선군이
전멸을 하였으니 후세에 말이 많을수 있겠으나 적전 도망한 비겁한 장수들도
많아서 그의 의로운 死鬪는 가슴만 아플 다름이다“ 하였다.
행주대첩의 큰공을 세우신 권율장군은 사위가 3명 있는데 신립.오성대감.정충신 이다
탄금대에서 바라본 탄금호
탄금대 전투는 이곳을 등뒤로하고 싸우다가
패배하고 이곳으로 투신 자살하고 만다
신립장군 순절비
탄금대 전투에서 패배한 신립장군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981년 세운것이다
판천고흔 위령탑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신립장군과 수많은
조선군의 넋을 위로하기위한 위령탑
사진출처 :오마이뉴스 송영대 기자
충주 탄금대 전투(위키백과)
임진왜란 당시 신립이 이끄는 8000명의 조선 최후의 정규군 병력이 충주 탄금대에서 전멸한 전투로 이 전투의 패배로 조선의 군대는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배경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나서 동래성마저 함락되고 명장 송상현이 전사하자 조정에서는 긴급대책을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저 몇십명만 이끌고 와서 재물이나 조금 약탈하고 자기네 땅으로 되돌아갔던 기존의 왜구들과는 차원이 다른 전란에 직면한 조선에서는 일단 상주에 이일을 파견해보지만 이일이 싸우지도 못하고 달아났으므로 상주마저 함락되었다. 이에 선조는 당시 조선에서 최고의 명장 대우를 받고 있던 신립으로 하여금 왜구를 방어하는 임무를 부여함과 동시에 상방검을 하사하여 신립에게 선조 자신과 같은 권한을 부여했다. 이에 신립은 문경으로 출동하게 되었다.
문경새재에 도착한 조선군은 종사관 김여물이 신립에게 새재의 바위 뒤에서
궁병으로 왜군을 상대하자고 건의하였으나 신립은 탄금대로 내려가
배수진을 치자고 했다.
전투과정 작전회의
- 김여물의 논지 - 새재에 있는 바위를 방패삼아 궁병으로 공격하면 승산이 있다.
- (기록에 따라, 이종장, 이일도 이와 같이 주장한다.)
- 이일의 논지 - 새재를 수비하기에는 늦었으니, 한강으로 물러나 한강
- 방어선을 구축하자고 했다.
- 신립의 논지 -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쳐야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도망병이
- 속출하기 때문이며 자신이 기병의 전문가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궁병이 아닌
- 기병으로 왜구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또한 기병 대 보병으로 병종 상
- 우위를 점할 수 있다.
결국 지휘관인 신립의 의견에 따라 탄금대에서 기병으로 배수진을 치게 되었고 이때 김여물은 이미 조선군의 패배를 예상했다.
불리한 상황
그러나 음력 4월 28일에 해당되는 양력은 6월 초로서 장마철이었으며
또한 이날 탄금대에는 기병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소나기가 쏟아졌다.
숫적으로도 열세였지만 지형적으로도 불리하였고 기후마저 도와주지 않아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기병은 기동성은 좋은 반면
장거리 공격에 매우 취약했는데 이 점 역시 조선군에게 불리한 상황에 일조했다.
결국 왜군을 향해 돌격해오는 신립의 기병은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의 상대가
될 리 만무했으며 결과적으로 신립의 조선 기병, 즉 당시 기준으로 볼 때
조선 최강의 기병부대는 왜군의 총알받이가 되었을 뿐이었다.
작전 실패
기병의 신속한 기동성을 믿었기에 탄금대로 내려왔고 도망병을 관리하기
위해 배수진을 쳤던 신립의 판단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배수진이었기
때문에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할 수 없었고 그날따라 비가 왔으므로
기병이었기 때문에 움직임에 제한이 많았다. 결국 신립은 기병의
권위자임에도 불구하고 기병의 치고 빠지는 전술을 염두에 두지 않았으며
기상조건을 무시한 무리한 작전으로 인하여 기상조건과 맞지 않는 병과를
선택하여 참패를 자초했다.
신립의 자결
자신이 이끄는 병력이 눈에 띄게 확 줄어드는 것을 인식한 신립은 그래도
힘 닿는데까지 왜병을 쓰러뜨렸다. 탄금대 전투 종반에 이미 신립의 병력은
수백명에 불과했으며 지휘관도 변기와 이종장은 일찌감치 전사한 데다가 이일은
이미 도망친 이후였으므로 신립과 김여물뿐이었다. 재조번방지나 연려실기술,
수정실록 등에 의하면 신립이 김여물에게 "살고자 하는가?" 라고 묻자
김여물이 "내 어찌 살고자 하겠소" 라고 답하고 신립과 김여물이 함께
적병을 죽이고 둘다 강물에 뛰어들어 죽은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
결과 및 영향
이 전투의 영향으로 인하여 왜군은 한양까지 일사천리로 올라갔으며 선조는
어쩔 수 없이 도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몽진을 하기에 이르렀다. 선조의 몽진
이후 통제가 상실된 백성들은 결국 경복궁과 창경궁, 창덕궁을 약탈하고 끝내
방화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이일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는데 이일은 패전의 책임을 어떻게든
회피하기 위해 조선 농민의 목을 벤 후 왜병으로 위장해서 소중하게 간직하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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