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로마쾌락의 흥망(동영상)

이모르 2020. 12. 13. 14:03

 

 

로마 공화당을 견문할 때 기원전 로마의 황제 생성의

일화들이 생각났다

카이사르(율리우스 시저)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꿔놓은

유명한 말이미 루비콘 강을 건넜다폼페니우스에게 한말이다

그도역시 믿었던 부르트스에게 암살당하며 "브르투스여 너마져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크레오 파트라의 연합군 악티움전투에서 이겨 결국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 왕조가 건설되는 과정

그리고 카이사르의 무덤앞에서 그옛날의 영욕의 삶을 그려보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저

 

장레옹 제롬 1867년에 그린것으로 기원전44년3월15일

마르쿠스 부르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가 주도한 옥타비아누스

양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터 시저의 화장터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CÆSAR·DIVI·FILIVS·AVGVSTVS,

기원전63년 9월23일 ~ 서기14년8월19일)

는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재위 기원전27년 ~서기14년)이다.

또한 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스 황조의 초대 황제이기도 하다.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Gaius Octavius Thurinus)였으나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된 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라틴어: CAIVS IVLIVS CÆSAR OCTAVIANVS)로 불렸다.

기원전44년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외할머니 율리아 카이사리아의 남동생이자

자신의 외종조부뻘인 유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유언장에 따라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

그 후계자가 되었다. 기원전43년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군사 정권인 제2차삼두정치를 열었다.

삼두 정치를 행한 집정관의 한 사람으로서 옥타비아누스는 효과적으로 로마와

속주를 지배하였고, 세력을 모아 히르티우스와 판사가 죽은 뒤 집정관에 재선되었다.

이후 제2차 삼두 정치도 깨지는데 다른 집정관이었던 레피두스는 유배되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31년 악티움해전 에서 진 뒤 자살하였다.

2차 삼두 정치의 붕괴 후 옥타비아누스는 대외적으로 로마 공화장을 부활시키고

정부에 관한 권한은 로마원로원에게 주었으나,

사실상 권력은 그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유일한 통치자가 다스리지만 대외적으로는 공화국 형태인 정치 체제의

기틀을 다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껍데기만 공화국인

이 나라는 훗날 로마제국 으로 불린다. 황제권은 옥타비아누스

이전에 로마를 통치했던 카이사르와 술라의 독재권과는 전혀 달랐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들로부터 독재권을 부여받았지만거절하였다.

법에 따르면 존엄자’(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원로원은 평생 동안 권력을 가지도록 하였고

호민관 권한”(tribunitia potestas)을 가졌으며 기원전23년 까지 집정관을 역임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재정적인 성공과 원정에서 얻은 물자,

제국 전체에 걸쳐 맺은 여러 피호 관계(clientela), 군인과 재향 군인의 충성,

원로원에서 부여한 여러 권한과 명예 그리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다.

아우구스투스가 가진 로마의 정예병 로마군단 다수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은 원로원에게

군사적인 위협이 되어 원로원의 결정을 억압하였고, 군사적 수단을

사용하여 원로원의 정적들을 제거하여 원로원이 자신에 복종하게끔 하였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는 로마의평화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계속되는 변방에서의 전쟁과 황위를 둘러싼 1년의내전(기원후 69)에도 불구하고,

지중해 세계는 두 세기가 넘게 평화를 지속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영토를 넓혔으며 제국의 국경과 동맹국을 보호하였고

파르티아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 그는 로마의 조세 체계를 개선하였고

파발을 위해 육로 교통망을 구축하였으며 상비군과 소수의 해군

그리고 황제의 친위대인 로마근위대 를 창설하였다.

또한 로마에 경찰청과 소방청을 설치하였고 로마 시의 상당 부분을 재개발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에 자신의 업적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것은 《아우구스투스 업적론 로 불리며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서기14년 그가 죽은 직후, 원로원과 민회는 아우구스투스를 신으로 선포하였고

로마인들의 숭배를 받았다.[5] 이후 모든 로마 황제들이

그의 황제명인 아우구스투스카이사르를 이름으로 썼다.

또한 그를 기념하기 위해 기존의 "여섯 번째 달"(Sextilis)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바꾸어 불렀다.

그의 황위는 의붓아들이자 양자인  티베리우스가 물려받았다.

 

 

1672년 로렌조 카스트르가 그린 악티움전투(영국 해양박물관 소장)

 

로렌스 알타테마가 그린 안토니우스와 크레오 파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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