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여러곳에서 모셔와 편집한 것입니다
2013년 6월6일 현충일에 부부 동반 조용한 산행을 위하여
퇴촌 분원리 금봉산을 가는데 연휴로 차량 청체로
이어지고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역사에 대한 토론을 하다가
산행중에도 이어졌다 그날의 대화를 적어본다
길은 막히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걱정이 되었다
이지루함 과 초조함을 달래기 위하여 자연 대화가 이어졌다
다산의 고향 두물머리에 가까이 올때
텔레비전에서 다산길이 좋다고 해서 자연 다산에 얽힌 담소를
나누었다.
“다산이 어떻게 유배 되었는가??”
“정모 누구더라 반역에 연류 되었고 ??? 당파 싸움에서 수렴청전 노론의
벽파 정순 황후가 정사를 돌보게 되자 사도세자의 죽음을 억울해 했던 남인
들을 숙청하기 위해서이다“
여기까지는 진리가 있었는데!!!
정여립의 난과 연관 지우는건 개우뚱 해졌다
정여립은 선조때 사람 아닌가???
곡산부사로 부임하기 전에 이계심의 난이 일어났는데, 정약용은 민중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조항 10여 조를 가지고 직접 나아온 이계심을 처벌하지 않고 관리의
부패에 항의하는 자들에게는 천금을 주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즉, 정약용은 민중들을
국가의 권위와 법으로 억누르는 게 아니라,생존권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항의를
귀담아듣는 애민 관리였던 것이다. 1799년에 형조참의가 되었는데
곧 탄핵을 받아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고 사퇴하였다.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데 다산은 배교를 했으며 많은 천주교인 들을
고발하여 형장으로 보냈다 하는데 사실인가??“
“배교 한것은 알겠는데 고변했다는 것은 모르겠는데???”
1801년 신유박해 때 1월 권철신 이가환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정약종 등이
잡혀와 국문을 당하였다 특히 이중에서 정약종 이승훈등 6인이 참형되고
권철신과 이가환은 옥사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유배되었다.
9월29일 체포령이 내려진 7개월동안 잡히지 않았던 맞형의 사위 이자 조카사위인
황사영을 정약용의 고발로 체포되어 능지처참 사형이 집행되고 사실상의 탄압이
종결되었는데 황사영은 충청도 배론에서 잡히기 전까지 숨어 살면서 조선정부의
탄압실상과 종교 자유를 얻게 해달라는 내용의 백서를 작성하였다한다.
1794년에는 성균관에서 강의를 하게 되고, 음력 10월에 경기도 암행어사로서 연천, 삭녕 등을 순찰하고 이듬해 1799년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천주교 신부인 주문모 신부가 교우 강완숙등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아 전교를 하다가 적발된 주문모 사건에 휘말려 그해 음력 7월에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다. 이어 병조참지 좌부승, 곡산부사 등을 지냈다.
곡산부사로 부임하기 전에 이계심의 난이 일어났는데, 정약용은 민중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조항 10여 조를 가지고 직접 나아온 이계심을 처벌하지 않고 관리의 부패에 항의하는 자들에게는 천금을 주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즉, 정약용은 민중들을 국가의 권위와 법으로 억누르는 게 아니라,생존권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항의를 귀담아듣는 애민 관리였던 것이다. 1799년에 형조참의가 되었는데 곧 탄핵을 받아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고 사퇴하였다.
1800년 천주교를 일시적인 종교적 현상으로 이해하여 묵인하는 온건한 정책을 펴던 정조는 노론 진영에서 천주교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자, “사교(邪敎)는 자기자멸할 것이며, 정학(正學)의 진흥으로 막을 수 있다.”라는 그러니까 성리학이 바르게 교훈된다면 성리학에 반하는 천주교는 스스로 없어질 것이니 탄압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로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윤지충과 권상현 이 천주교 예식으로 모친의 장례를 치른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관련자들을 처형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천주교가 성리학 전통을 부정할 경우에는 탄압하였다. 임금정조가 승하하자, 이듬해 정월 조선 천주교회는 대왕대비 정순황후 김씨의 천주교 탄압령을 시작으로 탄압을 받았는데, 이를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신유박해라고 부른다.
신유박해는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남인을 제거하기 위한 노론의 정치적 공격으로, 이가환 ·권철신·이승훈·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최창현(崔昌顯) 등이 연루되었으며, 이 박해에 정약용과 그의 두 형인 정약전(둘째 형), 정약종(셋째 형)도 연루되었다.
정약용과 그의 둘째 형 정약전은 정약종과는 달리 이미 천주교를 버린 뒤였으나, 노론에서는 이미 이들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약종만 천주교 신자일 뿐, 정약전과 정약용은 천주교에 무관심한 비신자라는 점이 확인되면서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 그리하여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되었으며, 정약종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아 장형을 받던 중 죽었다.
다산과 이계신
사회폐단 따지는 ‘이계심’이 필요해 * 이계심(조선시대 곡산의 백성)
다산 정약용은 1797년 황해도 곡산 부사로 발령이 난다.
당시 그는 승정원 동부승지로 있었다.
승정원 자리는 청직 중의 청직이고 요직 중의 요직이다.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승지 자리에서 외직으로 나가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럼에도 정약용을
외직으로 내보낸 것은 정조가 따로 궁리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다산은 정조의 지우를 입어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지만, 그의 재능과 출세를
시기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소인배들은 다산이 과거 서학을 공부했던 것을 꼬투리
삼아 기회가 있으면 다산을 공격하였다. 봄날 살얼음판을 디디듯 위태위태한 다산의
처지를 머리 좋은 정조가 모를 리 없다. 때마침 곡산 부사 자리가 비자, 다산을
그 자리로 보내며, 정조는 이렇게 말한다.
“지난번에 올린 상소는 글이 좋고 마음씨가 밝았으니 쉽게 쓸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올려 쓰고 싶지만 이러쿵저러쿵 하는 소리가 많으니 왜 그런지 모르겠구나.
한두 해 늦더라도 해로울 것은 없다. 장차 부를 것이니 모쪼록 서운하다 생각하지 말거라.”
지난번 상소 운운하는 것은 바로 서학을 배운 데 대한 다산의 해명을 말한다.
서학을 빌미 삼는 소인배들의 사정권에서 다산을 빼내고자 하여, 정조는
다산을 외직으로 발령을 냈던 것이다. 그러고는 혹시라도 다산이 자신을
내치는 것으로 오해할까 생각해 신신한 당부를 마지않았던 것이다.
감읍한 다산은 곡산에 부임한다. 천재는 내직에 있을 때나
외직에 있을 때나 똑같이 능력을 발휘한다. 유능한 행정관
다산은 곡산의 민폐를 개혁하고 선정을 펼친다. 그런데
다산의 선정에 백성 한 사람의 이름이 끼어 있다.
이계심이란 사람이다. 다산 자신이 쓴 자찬 연보에 의하면,
이계심은 곡산 백성으로 ‘본성이 백성의 폐단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다산 바로 앞의 곡산 부사 재임 중 교활한 아전이 포수의 보인에게 받는 군포의
대금으로 900냥을 징수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자자하였다. 원래 200냥이었으니
, 900냥이면 네 배 반이다. 어찌 원망이 없겠는가. 이계심은 백성 1천여명을 이끌고
곡산 관아로 들어가 따지고 다투었다.
조선시대 관청 것들은 백성들 때려잡는 데 이골이 난 인간들이다. 익은 솜씨로
이계심을 잡아 꿇리고 매를 안기려 하자, 백성 1천명이 이계심을 에워쌌다.
아전과 관노가 몽둥이로 백성들을 마구 치자 백성들은 흩어졌고,
이계심 역시 섞여 달아났다. 수령은 감사에게 보고했고 마침내 체포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이계심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곡산 부사로 부임한 정약용의 선정 뒤에는 부당한 착취에 대해 백성과 함께
당당히 싸우는 이계심이 있었다. 이계심이 있었기에 다산은 곡성의 민폐를
개혁하고 민족의 스승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대학 졸업시즌에 학생들은 실업의
고통에 허덕이고 있다. 문제는 이를 사회문제로 보지 않고 개인능력 문제로 보는 시선이다.
실업을 개인 탓으로 돌리는 세력에 맞서 싸우는 이계심이 되지 않는 한 실업은 영원할 것이다.
우리가 받고 있는 대부분의 고통도 마찬가지다
다산이 곡산 경내에 이르자 한 사내가 길을 막는다. 이계심이었다.
그는 백성을 병들게 하는 조항 10여 조를 쓴 문서를 갖고 있었다.
옆에 있던 아전이 그를 체포해 오라를 지우고 칼을 씌워 가자고 하였으나,
다산은 “그럴 필요가 없다. 자수한 사람이 어찌 달아나겠는가?” 하고 풀어준다.
그러고는 한마디를 덧붙인다. “관청이 부패하는 것은 백성이
자기 이익을 위해 폐단을 따지면서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백성의 억울함을 드러내어 항의했으니,
너 같은 사람은 관청에서 천금을 들여서라도 사들여야 할 것이다.”
다산의 처사는 놀랍다. 보통 백성들의 저항이 일어나면 관에서는
저항의 이유에 설령 공감한다 해도 체제의 동요를 우려해 일벌백계의 의미로
주모자를 무거운 형벌에 처하는 것이 예사다. 어떤 농민 저항에도 예외가 없었다.
그런데 다산은 도리어 “너 같은 사람은 관청에서 천금을 들여서라도 사들여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과연 다산이다.
이계심을 석방한 뒤 다산은 문제가 된 세금을 공정하게 받았다.
백성들이 억울함을 풀고, 여론이 좋아졌음은 물론이다. 다산의 선정은 어디서 온 것인가.
또 다산은 어떻게 곡산 백성의 고통을 절절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인가.
아마도 이계심이 써서 바친 글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 것이다.
오늘날 다산이라 하면 교과서에 실어 초등학교 때부터 가르치고
국민 모두가 민족의 스승으로 떠받든다. 다산에 대해 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한다.
한데 어쭙잖은 생각이지만, 다산을 존경하는 것만큼이나
이계심과 같은 사람도 주목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가당치도 않은 착취에도
그저 입을 다물고 있거나, 부당한 권위를 맹종하여 홀로 웅얼웅얼 불평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과 함께 당당히 싸우는 이계심이야말로 다산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람이 아닐까.
대학의 졸업시즌이 다가왔다. 졸업을 해도 많은 학생들은 학교를 벗어나지 않고
취업공부에 몰두한다. 국민소득 2만 달러니 웰빙이니 명품이니 하는 말이 넘쳐나는
이 풍요로운 세상에, 앞으로 대한민국 사회를 이끌고 나가야 할 젊은이들은
실업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학 도서관은 오직 토익과 영어회화에
골몰하는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과연 이렇듯 개인의 능력을 기르기만 하면 실업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달리 생각해 보면, 실업은 개인의 능력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문제다. 풍요와 실업의 공존이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문제는 실업을 사회문제로 보지 않고 개인의 능력문제로 돌리는 담론이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개인은 늘 자신의 토익점수와 영어회화 실력이 낮다고 스스로를 탓할 뿐이다.
만약 모든 젊은이가 토익에 만점을 받고 영어회화에 능통해졌다고 하자.
그럼 모두에게 원하는 만족스런 일자리가 주어지겠는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또다른 능력을 요구할 것이다. 실업을 개인의 능력문제로 돌리는 담론을 유포하는
세력에 맞서 싸우는 이계심이 되지 않는 한 실업은 영원할 것이다.
어디 실업문제만 그러겠는가. 우리가 받고 있는 고통의 대부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강명관/부산대 교수·한문학
산에서 또 다른 역사 이야기는 허균과 허난실헌에 대한 이야기였다
허난실 초상
허난실 친필과 그림
강릉의 초당 기념관
16세기 조선에서 태어나 27살 짧은생을 살다 간 천재 여성시인 허난설
빼어난 미모.지적능력으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여인으로 평가받은 사람.
동인의 거두인 초당 허엽의 딸로 태어나 남성과 대등한 글공부를 하는것이
불가능했던 시절에 동생 허균과 함께 당대의 시인 손곡 이달에게 시를 배우고
여덟살의 나이에 " 백옥루 상랑문 " 을 지어 세상을 놀라게했다
그녀가 남긴 빼어난 시편들은 중국과 일본에까지 전해져
수많은 이들을 매료시켰고 지금까지 중국과 일본에서는
" 허난설 "의 연구 학회가 이어질많큼 문학 사적으로 큰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닫힌 땅에서 그녀의 삶은 처절한 비애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서릿발처럼 모진 시집의 냉대 자신에게
등돌인 남편의 끊임없는 외도
친정을 향한 애달픈 그리움. 어린 아들과 딸을 모두 잃고
흘리는 피울음에도 원망이나 분노로
자신의 예술혼과 자존감을 흐트리지 않았다
그런 고통도 난설헌의 영혼을 마모시키지 못했다
그런 고통의 마디들은 난설헌으로 하여금
한줄의 "시어 "로 붙들게 만들었고
곡기를 끊고 눈을 감는순간까지도 그 시를 가슴에 품고 쓰려져갔다
그 광경은 억압받은 영혼이 표현할수있는 마지막 자존이며
여자 천재 시인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세가지 한이 있었다고 하였다
나에게는 여자로 태어난것...조선에서 태어난것..
남편의 아내가 된것..이라고 외쳤든 여인
허난설은 여자의 삶이 오로지 복종과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존재했던것을 한탄하였으며
그러므로 남성들이 지배하는 조선에서는 철저히 버러진 이름이 되었다.
그래서 허난설은 죽을때 자신이 쓴시를 모두 태우라고 하였다
그녀가 남긴 시는 족히 방한칸의 분량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허난설의 동생 " 혀균" 이 애석한 마음에 " 난설헌집" 을 펴냈고
그 시집이 일본과 중국으로 알려져 당대 지식인들은
그녀의 시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비로서 널리 알러지게 되었다
모든 여자의 아픔을 가슴팍에 끌어 안은체 못다한 그리움을
시로써 불태워 자신을 정화시킨 여인
여자의 재능을 혹독한 시대에 태산같은 슬픔을 이고
절벽같은 생앞에서도 꼿꼿하게 생을 밀고 간 여인
그런 고통으로부터 외로움으로부터 오로지 자신만이
자신을 구원할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그것을 글로서 시로서 보여준 여인
1563(명종 18)날 태어나 1589(선조 22)날 작고한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으로
스물일곱살에 세상을 떠나 비운으로 살았지만..
우리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조선의 천재가 여성 시인 " 허난설 "이다
허난설이 남긴 시 몇편을 소개합니다
寄夫江莎讀書
燕掠斜兩兩飛 처마 밑의 제비는 쌍쌍이 날고
落花亂撲羅衣 곱은 날개 맞부딛치며 꽃잎 떨군다
洞房極目傷春意 동방에선 눈 빠지게 애가 타는데
草綠江南人末歸 강남에는 풀 푸른데 소식 없구나
哭子(곡자)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지난 해는 사랑하는딸을 잃었고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哀哀廣陵土(애애광릉토) 애달프고 애달픈 광릉의 땅에
雙墳相對起(쌍분상대기) 두 무덤이 서로 나란히 있네
蕭蕭白楊風(소소백양풍) 백양나무 사이엔 쓸쓸한 바람
鬼火明松楸(귀화명송추) 숲속에는 밝은 도깨비불
紙錢招汝魂(지전초여혼) 지전으로 너희들 혼을 부르고
玄酒存汝丘(현주존여구) 너희들 무덤에 술을 따르네
應知第兄魂(응지제형혼) 당연히 너희 남매의 혼은
夜夜相追遊(야야상추유) 밤마다 정겹게 어울려 놀겠지
縱有服中孩(종유복중해) 비롯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한들
安可糞長成(안가분장성) 어찌 제대로 자라기를 바라리
浪吟黃坮詞(낭음황대사) 황대 노래를 부질없이 부르며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 피눈물로 슬픔을 삼키고 있네
빈녀음(貧女吟)
手把金剪刀(수파금전도) 가위로 싹둑싹둑 옷 마르느라면
夜寒十指直(야한십직지) 추운 밤에 손끝이 호호 불리네
爲人作嫁衣(위인작가의) 시집살이 길옷은 밤낮이건만
年年還獨宿(연년환독숙) 이 내 몸은 해마다 새우잠인가
채련곡(採蓮曲)
秋淨長湖碧玉流(추정장호벽옥류) 가을의 긴 호수에 옥 같은 물 흐르는데
荷花深處係蘭舟(하화심처계난주) 연꽃 깊은 곳에 목련배 매어두고
逢郞隔水投蓮子(봉랑격수투연자) 님을 만나 물 건너로 연밥을 던지다가
遙被人知半日羞(요피인지반일수) 님의 눈에 띄었을까 반나절 무안 했네.
碧空白雲作詩歌 * 벽공백운작시가
푸른 하늘 흰 구름은 시 노래를 짓고
牽牛織女繡深夜 *견우직녀수심야
견우와 직녀는 깊은 밤 수놓는데
夢中戀君何處行 * 몽중연군하처행
꿈속에 그리는 임 어디로 가셨는지
愁丘霖淚濫大河 * 수구임루남대하
근심 언덕에 장마 눈물, 큰 강을 넘치네.
규원(閨怨)
비단띠 비단치마 눈물흔적 쌓였음은
임그린 1년 방초의 원한의 자국
거문고 옆에끼고 강남곡을 뜯어내어
배꽃은 비에지고 낮에 문은 닫혔구나
달뜬가락 가을 꿈도 옥병풍 허전한데
서리친 갈밭에 기러기 앉네
거문고 아무리 켜도 임은 안오고
연꽃만 들 못위에 맥없이 지고있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 기대였구나
부용꽃 27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이윽고 돋은 달이 호수로 비처드니
연 캐는 조각배는 밤으로만 돌아오네
저 배야 기슭으로는 들지마라
단 잠든 원앙이 놀라 날겟다,
기하곡 (奇荷谷)
어두운 창가에 환한 촛불 나즈막 한데
반디불이 높은 집을 건너네
고요한 가운데 차가운 밤은 깊어가고
우수수 가을잎 떨어지네
변방에선 소식 드물고
내맘속 근심 숨길이 없구나
멀리 청련궁을 상상 하노라니,
“양반댁의 세도가 불길처럼 성하던 날
높은 다락에선 풍악소리 울렸지만
가난한 이웃들은 헐벗고 굶주려
주린 배를 안고 오두막에 쓰러졌네”
라고 분노할 정도로 사회의식이 강했는데 그녀가 죽은 뒤
허균이 유작 시집을 간행한 것은 그만큼 깊은 감회를 받았음을 뜻한다.
임진왜란은 허균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을 안게 준다. 허균은
모친 김씨와 만삭의 아내 김씨를 데리고 덕원과 단천 등으로
피난을 갔는데 이 와중에 부인 김씨와 어린 아들이 모두 죽고 말았다
님 만나러 가는 길
꽃관 머리에 쓰고
꽃술 저고리 걸치고
아홉 폭 무지개 치마 걸쳐 입으니
어디선가 피리 소리 들려와 퍼지는구나.
비췻빛 구름 사이로
용 그림자,
말 울음소리,
넓은 바다에 반짝이는 달빛
나는야 님 만나러 가는 길이란다.
-허난설 헌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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