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조선의신분제도(구한말사진)

이모르 2021. 1. 2. 07:17

 

신분 제도(身分制度)는 출신에 따라 계층을 나누는 제도이다.

인류 대부분의 문화에서 신분 제도를 유지한 역사적

시기가 존재한다.

 

어떤 개인이 사회에서 처한 상황에 따라 나뉘는 계급과 달리

신분은 태어날 때 이미 정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신분의 가장 큰 특징은

혈연적 관계에 의해 세습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점이다.

신분 제도가 강하게 유지되는 사회에서도 경우에 따라 한 개인이

신분 상승을 하거나 몰락하는 경우가 있어 왔으나 사회 전체의

지배 질서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다.

 

노예.평민.귀족.왕족과 같은 신분은 서양의 경우 고대 그리스  이전부터

동양의 경우 수메르와 고대이집트 를 비롯한 아시아 전역의

고대 문명에서 이미 발견된다.

 

이 중에는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같이 현대에 이르러서도 신분 제도가 강한

영향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한국사에서 신분의 구분은 이미 고조선 시기부터 언급된다. 지금까지

전하는 고조선의 8조법 중 도둑질한 자는 종으로 삼는다는 구절이 그것이다.

삼국시대 에 이르러 왕족과 귀족 및 평민과 천민의 구분이 명확해졌다.

신라의 경우 지배 계급의 신분을 다시 짐골과 여러 단계의 두품으로 세분화 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법에 명문화된 신분은 양민과천민으로 단순화 되었으나

실제 조선 사회에서는 양반 중인 평민, 천민의 구분이 있었다.

조선은 갑오경장으로 인하여 신분제를 폐지하였으나 형평사 운동이

1935 까지 지속된 것처럼 사회적 불평등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6.25 동란 이후 양반출신, 천민출신 여부를 따지는 것과 같은

신분제의 잔재는 거의 완벽히 사라졌다.

 

노비와 천민: 조선 시대에 노비는 모두 천민이었으나 천민 모두가 노비는 아니었다.

노비는 관가에 속하거나 양반가에 딸린 종의 신분이었으나 천민은 보다

넓은 계급을 아우르는 말이다.

백정이나 사당패 기생 광대등이 모두 천민으로 불렸으나,

실제로 법률, 경국대전을 비롯한 법전에 명문화된 천민은 아니었다.

(위키백과)

 

 

 

 

모자의 나라 조선>전시작품. 좌측 구한말 갓을 쓴 양반과 

우측 야얌을 쓰고 있는 여인네의 모습

 

갓과 망건, 족두리 외 갈모, 굴레 등 다양한 조선시대 쓰개 1백여점 이 전시된다.

구한말 외국인들로부터 모자의 나라로 칭해질 만큼 다양한 종류의 쓰개

 문화를 갖고 있던 조선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이채롭다.

 

 

18---19세기 사진

 

 

 

 

 

 

 

 

 

 

 

 

 

 

 

 

 

 

 

 

 

 

 

 

 

 

 

 

 

엿장수 아동

나무 장수

평양

동대문

인왕산 성곽

 

 

 

 

 

 

 

 

 

 

양반의 행차

옹기 장수 행렬

광화문

숭례문

양반가의 혼인식 신부 가마행렬

양반가의 행여 행렬

악사들

몸종을 둔 양반가 규수

 

 

 

내가보기엔 홍지문과 오간수문 같은데 사진 하단엔 수구문으로 되어있다

이사진은 우편엽서로 유통되던 사진이라 한다

 

 

3단그네

 

 

 

 

 

 

 

 

 

 

 

숙박업소

개성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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