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조선의형벌

이모르 2021. 1. 2. 06:54

 

 

조선 중기 행정도첩

 

 

 

 

19세기 말 관아에서의 소송 장면을 묘사한 그림.

화가 김윤보의 ‘행정도첩’에 실려 있다. 사진 제공 너머북스

 

 

 

조선시대 소송에서 오늘날의 피고는 척(隻)으로 불렸다.

남에게 원한을 사지 않도록 하라는 뜻으로 쓰이는

‘척지지 말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19세기 말 관아에서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 제공 너머북스

 

 

 

조선시대 형벌의 종류


1. 태형 : 극히 가벼운 죄인에게 작은 매로 볼기를 치는 형벌

 

2. 장형 : 약간 가벼운 죄인에게 곤장으로 볼기를 치는 형벌

 

 

 

태형(笞刑)길이 1m 정도의 곤장으로 볼기를 치는 형벌.

가벼운 죄를 처벌하는 것으로, 삼국시대부터 일제 초기까지 존속되다가

3·1운동 직후인 1920년 완전히 폐지되었다. 태 10부터 여러 등급이 있었고,

속형(贖刑)이 허락되어 주로 가난한 민초들에게 집행되었다.

 

 

주리를 트는 형벌

 

 

3. 도배형 : 약간 중한 죄인에게 곤장을 친후 일정기간 복역시키거나 군대에 동원시킴

 

4. 유형 또는 유배형
- 유배 : 죄인을 귀양 보내는 형벌
- 장배 : 죄인에게 장형과 유형을 병과하는 형벌
- 찬축 : 죄인을 먼 곳으로 귀양 보내 쫓아낸다는 뜻
- 안치 : 죄인이 귀양 간 곳에서 일정한 처소에 주거를 제한하는 형벌(왕족에게 적용)

 

5. 사형
- 사사 : 사약을 내려 자살하게 하는 방법
- 주살 : 죄인을 처벌하여 죽임
- 참형, 참살 : 죄인의 목을 베어 죽이는 형벌
- 능지처참 : 죄인을 일단 죽인 후에 다시 머리, 두 팔, 두 다리, 몸통 등 6개로 찢어서 각지에 보내어 사람들에게 보이는 형벌
- 부관참시 : 무덤을 파헤치고 관을 꺼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서 거리에 내걸던 형벌
- 효시, 효수 : 죄인의 목을 베어 군중 앞에 보이는 형벌

 

 

 

 

참수형(斬首刑), 즉 참형(斬刑)이란 조선시대 도적이나 역적과 같은 무거운 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한 사형 제도로서, 몸과 머리를 분리하는 사형 방법을 말합니다.

 

만일 지체가 높거나 권위 있는 집안의 사람을 죽여야 한다면 대부분 참형보다는

사약을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렇게 사약을 내렸던 이유는 유교

사회였던 조선시대에는 비록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부모님이 주신 신체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형수에 대한 정부의 배려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참수형의 경우 망나니들은 큰 칼로서 죄인의 목을 치긴 했지만, 실제로 위의 장면과 같이 죄인을 앉혀 놓고 목을 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앉혀 놓고 목을 치면 목이 제대로 베어지지도 않을 뿐더러, 한 칼에 목을 베기는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조선시대 형벌을 집행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린 [형정도첩(刑政圖帖)]이라는 책을 보면, 참수형의 경우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사형수를 베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형틀에 묶고 땅에 엎드려 놓고서 나무 목침 위에 사형수의 목 앞부분을 걸쳐 몸을 고정시킨 후 망나니가 칼을 아래로 내려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아주 숙련된 망나니라도 사람을 단 번에 죽이는 것은 힘들었으므로 한 칼에 목을 베지 못해서 4~5번씩 목을 내려쳐야 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여러 번 짓이겨 죽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럴 경우 사형수는 매우 고통스럽게 죽게 되고, 또 시신도 온전하게 거두기 어려워지므로 죄인의 가족들은 망나니의 칼날을 대신 갈아주거나, 망나니에게 돈을 주면서 한칼에 고통 없이 목을 베어 달라고 사정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형수의 가족이 망나니에게 참형을 빨리 끝내 주기를 부탁하여 주던 뇌물을 ‘속참행하(速斬行下)’라고 합니다. 이왕 죽을 것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고통 없이 죽기를 바랬던 것이 당시 죄인과 그 가족들의 마음이었나 봅니다.

 

 

 

김옥균의 효수형



그러면 사형집행인이었던 망나니는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을까요?
고려 시대에는 무관들이 직접 사형을 집행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고려가 불교국가였고, 또 사람을 죽이는 일은 아주 천한 일로 생각하여 무관들이 다들 꺼려했기 때문에, 조선 시대에는 그 대신 도축업자였던 백정을 동원하거나 사형수를 무기징역으로 감형시켜 지금의 감옥과 같은 전옥서(典獄署)에 수감해 두고 사형이 있을 때마다 이들을 동원하여 사형을 집행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백정들도 사형에 동원되는 일을 꺼려했으므로 특히 후자의 경우가 자주 이용되었는데, 이들을 ‘망나니’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망나니는 자신의 삶을 연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야 했던 비극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교수형

 

 

 

교수형교수형은 중죄인의 목을 형구로 옭아매어 죽이는 형벌이다.

사진에서 교수형을

당한 사람들은 의병이 아닐까 추측된다. 1910년 전후

10여명이 공개적으로 교수형을

당할 만한 사안은 일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한 의병 외에는 달리 없었다.

 



다음으로 ‘망나니’란 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요? 많은 국어 학자들은 망나니가 ‘막 나온 아이’에서 비롯된 말이며, 세상에 막 나온 아이처럼 버릇없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에서부터 인정사정없는 포악한 사형 집행인으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망나니는 주로 살인죄를 저질러 사형수가 되었던 사람을 무기징역으로 감형시켜 동원하였기 때문에 으레 성질이 포악하고 인상이 험악한 사람이 많았으며, 설령 처음에는 성질이 포악한 사람이 아니라 해도 여러 번 사형 집행을 하다보면 사람을 직접 죽여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 때문에 성품이 나빠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갑오개혁 이후로 참형이 없어지고 교수형만을 실시하게 됨에 따라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이었던 망나니의 존재도 사라졌고, 지금은 ‘못된 짓을 일삼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다시 변화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망나니의 생활은 어떠하였을까요?

망나니의 생활 중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평소 이들은 전옥서(현재의 유치장)에서 살았다는 점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지금과 같이 죄를 지으면 감옥에서 일정기간 머물러야 하는 금고형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직 망나니만이 감옥에서 사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던 거죠.

평생 이들은 원래 사형수와 같은 중죄인 신분으로 바깥출입은 금지되어 가족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도 없었으며, 삼엄한 감시 속에 격리된 채 좁은 감방에서 생활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 곳에서 할 일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가끔 선배 망나니가 전해주는 사람 목 베는 기술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사형집행에 대한 어떠한 월급이나 보수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평소에는 끼니도 제대로 먹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망나니에게 고기와 술을 푸짐하게 차려주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망나니에게 배불리 밥을 먹이는 것을 일컬어 '한밥 먹인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뜻밖에 좋은 음식을 먹거나 이유 없이 무엇이 생기는 것을 ‘한밥 먹다’라고 말하고 있지요. 어쨌든 망나니에게 한밥을 차려준다는 것은 곧 사형 집행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신호와 같은 것이었으므로 망나니들은 곧 있을 사형 집행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만약 망나니로 지정된 자가 사형수의 머리를 내리치지 못한다면 그 망나니는 망나니 구실을 못하는 것이므로 다시 감해주었던 죄목을 부활하여 그 망나니를 죽이도록 했습니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망나니는 자기가 살기 위해 사형수를 죽여야 했습니다.

다음으로 참형은 주로 어떤 장소에서 이루어졌을까요? 조선 정부가 참형을 실시했던 이유는 그 죄를 저지른 죄인에 대한 처벌의 의미도 있었지만, 다른 일반인들에게 죄에 대한 경각심을 주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참형은 남대문 밑이나 종로 네거리, 서소문 밖 등 주로 사람의 왕래가 많은 지역에서 행해졌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망나니들은 왜 형을 집행하기 전 칼춤을 추었을까요?
조선시대 망나니들이 형을 집행하기 전 칼춤을 추는 것은 구경꾼들에게는 경각심과 함께 볼거리를 주고, 사형수에게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기고 자신의 삶을 단념하게 하는 의미가 있으며, 망나니들 역시 사형 집행에 대한 죄책감이나 부담을 줄이는 효과를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또한 망나니들이 사형 집행 전 물을 입에 한껏 머금었다가 칼에 뿌렸던 이유는 이들이 형 집행을 잔인하게 보이려는 목적보다는 맨 칼로 목을 베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칼에 물이나 막걸리를 뿌려 일종의 윤활유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망나니에 의한 사형 집행이 매일매일 이루어졌던 것은 아닙니다. 즉 국혼이나 국상과 같은 국가적 행사가 있을 때, 비가 올 때나 해가 뜨지 않을 때, 일식 등으로 해가 가려지는 등 기상 이변이 있을 경우는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금형일(禁刑日)’이라고 하는데, 국가가 이렇게 금형일을 두었던 이유는 국가적 행사에 혹시나 있을 수 있는 액운을 제거하고, 기상 이변 현상을 하늘이 조선 정부에 내리는 어떤 계시로 보고 이를 신성시 여겼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신체형 그리고 가혹한 고문

 

범죄자가 잡히면 일단 옥에 갇힌다. 조선시대에는 범죄자에 대한 판결이 나면

곧바로형을 집행하였기 때문에 감옥은 지금의 교도소와는 달리 미결수들이

머무르는 곳이었다.감옥이 죄인을 교화하는 역학을 갖추게 되는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감옥에서의 생활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조선 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은 감옥을 이승에서의 지옥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는

 

또 당시 옥종에서의 다섯 가지 고통으로 형틀의 고통, 토색질의 고통, 질병의 고통,

 

춥고 배고픈 고통,오래 갇혀 있는 고통을 들고 있다.

 

 

원래 옥사를 판결하는 데는 기한이 정해져 있어 사형 죄인의 경우 30일 도형과

 

유배에 처할 죄인은

 

20일 태장의 매를 가할 죄인은 10일 내에 판결하도록 하였고장형이상의

 

죄인에 대해서만 감옥에 구속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체계적인 조직과규칙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모든 사건이 정해진 기한 내에 처리된 것은 아니었다.

 

일단 감옥에 갇혀 심리를 받는 죄수들은 조사 과정에서 지금과는 달리 일상화된 고문의

 

고통을 겪게 된다.

 

현대 법제하에서는 어떠한 목적으로도 고문은 원칙적으로 허용될수

 

 

없으며 이는 모든 문명국가에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중죄인의

 

심문에 고문이 허용되었다.

 

 

일반적으로 당시 죄인을 때리는 형구라 하면 으레 곤장만을 연상하는데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사용된 형구는 태장, 신장, 곤장 등 세 종류가 있었다. 태장은

 

앞에서 든 오형 중의 하나이고, 군대에서는 곤장이 형장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고문을할 때는 신장을 사용하였다

 

.

신장은 원칙적으로 가시나무로 만드는데 태장과 같이 손잡이가 둥글지만 끝은 넓적해

 

죄인의 볼기와 넓적다리를 치도록 되어 있었다. 중한 죄를 범하여 증거물이 명백한데도

 

자백을 하지 않는 경우에 한번에 30대까지 때릴 수 있었다. 또한 곤장은 버드나무로 만

 

들었으며 태장보다 충격이 훨씬 크기 때문에 군무와 관련된 범죄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지방 수령은 원래 신장이나 곤장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런데 수령들이 곤장을 불법적으로 사용하였고, 원장이라 불리는 둥글고 큰 형구를

 

들어사용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가혹한 고문을 하여 그 폐단이 문제가 되었다.

 

고문의 대표적인 예는 조선 후기 토포영에서 도적을 다스릴 때 사용하던 난장형과

 

주리 형이 있었다.

 

난장은 발가락을 뽑아버리는 형벌이다. 주리는 ‘주리를 튼다’는 말에서 잘 알려져

 

있듯이 두 나무를 양쪽 정강이 사이에 얽어 끼워 비트는 것으로 백성들이 한번 이

 

고문을 당하면죽을 때까지 부모 제사도 지낼 수 없을 정도로 후유증이

 

심각하였다고 한다.

 

중앙에서 역적을 다스릴 때 주로 사용되는 정강이를

 

나무로 강하게 누루는 압술형 몸을 담근질하는 낙형 여러개의 붉은 몽둥이로 몸을

 

난타하는 주장당문 등도 당시 무서운 고문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가혹한 고문과 신체형은 모든 신분에 적용된 것은 아니다.

 

문무 관리나 사대부는 큰 범죄가 아닌 경우에는 돈으로 대신 속죄하여 몸에

 

매를 대는 것은 삼갔다.

 

또 사족 부녀자도 큰 죄가 아니면 형장을 치지 않았고, 늙은이와 어린이의 경우

 

고문이 금지되어 있었다. 특히 여자의 경우 볼기를 치는 일은 욕스러운 일로 여겼다.

 

유교적인 가치관과 신분제가 강력하게 영향력을 미친 가운데 ‘법은 허물 수 있어도

 

윤리는 허물수 없다’거나 ‘형장은 대부에까지 미칠 수 없다’는 생각이

 

보편적이었으므로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전남 강진군 강진읍 동성리에 위치한(四宜齎)는

 

다산 정약용이 1801년 강진에 유배와서 처음 묵은 곳이다

 

 

 

 

힘겨운 귀양살이

 

 

 

마지막으로 앞서 지적한 조선시대 형벌 중 유배형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 보자

 

일반적으로 귀양간다는 말로 잘 알려져 있는 유배형에는 여러 경우가 있었다. 일반 범죄자

 

를 귀양보내는 경우, 죄인의 친족으로서 연좌되어 귀양가는 경우, 공경대부나 탐관오리

 

등 관직자로서 귀양가는 경우 등 다양하였다. 조선시대 정치적 이해 대립의 소용돌이의

 

속에서 세력을 잃고 불우한 운명으로 유배된 관리 중에는 학문, 사상적으로 주목되는

 

걸출한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의 귀양살이는 그들이 유배지에 영향을 미쳐 그곳에

 

독특한 유배문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

이 밖에 유배형 중에는 왕족이나 고위 관료들에 한해 유배 지역 내의 일정한 장소를

 

지정하고 그곳에 유폐시키는 ‘안치’와 주위에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를 심고 이 곳 밖에

 

나오지 못하도록 한 ‘위리 안치’도 있었다. 따라서 위리 안치시킬 겨우 주로 탱자나무가

 

많은많은 남쪽 섬지방으로 보냈다. 경종 때 임인옥사가 발생하여 영의정 김창집이

 

거제도에,영부사 이이명이 남해에, 판부사 조태채가 진도에 각각 위리 안치된 것이

 

그 예이다.그런데 유배지를 정할 때에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과 달리 국토 면적이 넓지

 

않았기 때문에 유2000리, 유2500리, 유3000리의 규정을 그대로 적용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조선초기에 거주 지역에 따라 유배 지역을 어느 정도 지정하였으며 후기에는

 

유배지로 직행하지 않고 우회하여 감으로써 거리를 계산하는 경우도 있었다.

 

 

유배지는 지역으로 삼수,갑산과 같은 함경도, 평안도 국경 지역이 많았고, 경상,

 

전라도의 거제도, 진도, 추자도등섬 지방도 자주 이용되었다. 영조 때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흑산도와 같이 위험한 곳이나 무인도에는 유배를 금지시켰다.

 

 

 

 

또 한가지 언급할 것은 고위 관료들이 과연 유배형에 딸린 장100대의 형장을 직접 당하였는

 

가 하는 점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속전(贖錢, 죄를 면하려고 바치는돈)을 바

 

치고 이를 면하였을 것이다. 영조 때에는 아예 진사 이상인 자는 유배형에 처해져도 형장을

 

치지말도록 지시하여 적어도 귀양가는 자들의 형장의 고통은 덜어 주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유배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망하는 자가 많았을 것이다.

 

 

 

그럼 실제 유배자들의 귀양살이는 어떠하였을까? 귀양온 자들에 대한 대우는 귀양간 사람

 

이나 귀양간 지역마다 달랐다.

 

어느 곳에서는 일정한 거주 지역을 마련하여 집집마다날짜를 정하여 돌려가며 먹을 것을

 

주거나, 혹은 고을의 모든 백성으로부터 고루 거두어유배자들이 거처하는 곳의 집 주인에

 

게 주기도 하였다.

 

한 고을에는 대체로 유배자가 10명을 넘지 않았다

.

 

그러나 영조 때 전라감사가 귀양온 자가 너무 만하 도민과 유배가 모

 

두가 모두 굶을 지경이니 다른 지역으로 옮겨달라고 요청한 경우도 있었다. 정약용은

 

곡산 부사로 있을 때 기와집을 한 채 사서 귀양온 자들을 거처하게 하고, 백성들에게서

 

해마다 500냥을 거두어 그 돈으로 곡식과 반찬, 그릇 등의 비용으로 삼았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1> 심재우, ‘조선시대 형벌 제도는 어떠하였나’ 참조

 

 

 

 

 

 

죄인(회슬레) 죄인을 끌고 다니며 우세를 주던일 죄인의 팔을 결박하고

등에다 북을 매달아 치면서 동네나 장터를 돈다

김준근 그림 (기산풍속도첩) 시장을 열지못하게 하라 김대길

시장은 모역자를 처단하는 장소로도 활용 되였다

 

 

 

기방무사 (妓房無事) (1805) ]

방안에서 남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다가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당황한 듯 하다. 아마도 방 안의 여인은 기생의 몸종이고, 방안의 남자는 기생을 찾아왔다가 그녀의 몸종과 사랑을 나누던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갑자기 기생이 들어오니 사내는 이불로 자신의 벗은 몸을 가린 듯 하다. 혜원의 춘화 중에는 이와 같은 내용으로 이불을 덮지 않은 채 벌거벗은 사내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 있다.

 

 

 

 

사대부들의 간통 현장을 목격하다 (출처 월간조선)

근엄했던 조선의 유교적 규범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는 숱한 성 문란 행위가 저질러졌다. 왕실 가족들의 근친상간은 물론이고 고관들이 간통을 하다 적발돼 신세를 망치는가 하면 문종의 둘째 부인 봉씨는 궁녀와 동성애를 즐기다 발각돼 폐출됐다. 왕의 사위인 부마들은 첩을 들이지도 못하고 관직 진출도 봉쇄되어 몰래 첩과 즐기다 곤장을 맞는가 하면 양성(兩性) 인간이 대신의 부인과 정을 통하다 귀양을 간 현장 목격기를 소개한다

김용삼 월간조선 차장대우


왕실 친척들의 근친상간

조선 사회 500년을 지탱한 기둥은 성리학 규범이었다. 학이 날아오르고 난향(蘭香) 그윽한 별실에 앉아 고매한 도덕과 품성 함양을 삶의 규범으로 삼았던 고품격 사회라 해도 그곳이 인간들의 삶터인 이상 남녀 간의 애증과 갈등은 필히 존재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간통 사건이 있었는지, 만약 있었다면 왕조실록은 그 현장을 어떻게 기록했는지를 살피기 위해 조선왕조실록 CD-ROM의 단어 검색 기능을 이용해 '간통'이란 질의어를 주자 무려 1742건의 관련 기사가 떠올랐다.

이 무슨 변고인가. 근엄했던 도덕국가에서 이처럼 무수한 간통 사건이 벌어졌다니. 게다가 무엇보다 지고해야 할 왕조실록에 간통 사건을 적나라한 필치로 기록해 놓다니...

그것은 하나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고매한 품위와 교양으로 철갑을 두른 사대부들이나 그 부인들도 밤에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의 도리에 그다지 충실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성종 7년(1486) 1월 22일 실록에 왕실 친척들 간의 간통 사건이 발견됐다. 실록은 덕성군의 후처 구씨가 언니의 아들인 이인언과 간통한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이인언)가 허벅지에 종기가 나서 누워 있는데, 구씨가 아픈 곳을 묻고 종기를 문지르며 음욕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튿날 또 와서 종기를 만지다가 드디어 음근을 만지기에 내가 발로 찼습니다. 그 뒤 병이 나은 어느 날 밤중에 구씨가 나를 불러 침방으로 끌고 가더니 '내가 어우동이 되어 죽더라도 정욕을 참을 수 없다'며 간음했습니다. 그 뒤로는 틈을 타서 간음했는데 하루는 구씨가 '오랫동안 월경이 없으니 임신 된 것 같아' 하므로….">

세종 20년(1438) 8월 1일에는 서울 한복판에서 벌거벗은 유생들의 유부녀 추행사건이 벌어졌다.

<성균관 문묘에 성묘하기 위해 치제하던 날 생원 최한경과 정신석이 반수(성균관 옆을 흐르는 냇가)에서 목욕하던 중 앳된 부인이 여종 둘을 거느리고 다리를 건넜다. 최한경이 홀랑 벗은 채 뛰어나가 앳된 부인을 잡고 희롱하며 욕을 보였다. 부인이 완강히 항거하고, 그의 계집종이 부르짖자 정신석이 두 여종을 쫓아버리고는 최한경을 도와 힘으로 여자를 억눌렀다.>

 

 

 

작가 : 신윤복(申潤福)
아호 : 혜원(蕙園)
제목 : 월야밀회(月夜密會)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화첩 종이에 채색
규격 : 28.2 x 35.3cm
소장 : 간송미술관

해설 : 장안의 인적이 끊어지고 보름달만 휘영청 밝게 비치는 야밤중에. 골목길 후미진 담그늘 아래에서. 남녀가 어우러져 깊은 정을 나누고 있다. 남자의 차림새가 전립(氈笠)을 쓰고, 전복(戰服)에 남전대(藍纏帶)을 매었으며. 지휘봉 비슷한 방망이를 들었으니, 어느 영문(營門)의 장교일시 분명한데. 이렇듯 노상에서 체면없이 여인에게 허겁지겁하는 것은, 필시 잠깐밖에는 만나볼수 없는 사이인 때문일 것이다.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버린 옛 정인(情人)을 연연히 못 잊어, 줄이 닿을 만한 여인에게 구구히 사정하여 겨우 불러내는 데 성공한 모양이지만. 여기서 이렇게 다시 헤어져야만 하는 듯하다. 이쪽 담모퉁이를 도는 곳에 비켜서서, 동정어린 눈길로 이들을 지켜보는 여인은, 밀회를 성사시킨 장본인인 것 같다. 차림새가 여염의 여인은 아닌듯 하여, 장교를 만나고 있는 여자의 전력(前歷)도 대강 짐작이 간다. 조선시대의 화류계를 주름답던 사람들이, 대개 각영문의 군교(軍校)나 무예청(武藝廳)의 별감(別監)같은 하급 무관들로서, 이들이 기생의 기둥서방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을 상기할 때. 군교 차림의 이런 애틋한 밀회는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숙종 29년(1703) 7월 26일 사헌부는 적나라한 간통 사건을 임금에게 보고했다.

<"충주에 사는 선비 박동필이 죽었는데 그 아내 강씨는 나이 젊고 자식이 없습니다. 겨우 1년이 지나자 음탕하고 더러운 짓을 멋대로 행하여 이웃에 사는 득철이란 놈과 몰래 간통하다 이웃 여인에게 들켜 간통 현장에서 붙잡혔는데 마을의 노소가 모두 모여 직접 보았습니다. 득철은 벽을 뚫고 도망치고 강씨는 그의 동생 집으로 묶어 보냈더니 강씨가 도망하여 득철의 집에 숨었습니다.

박동건(박동필의 형)이 강씨를 잡아다 관가에 고발한 결과 낱낱이 승복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목사는 강씨의 집안인 관계로 강씨를 죽음에서 살릴 길을 찾으려고 말을 바꾸어 '박동건이 그의 전답을 빼앗고 그를 죽이려고 남자를 묶어서 방 안으로 던져 이 옥사를 꾸몄다' 하고 '박동건을 잡아 가두려 하니 서울로 잡아 올려 사실을 밝혀 주십시오' 했습니다.">

사대부 관리들의 섹스 스캔들

정종 1년(1399) 6월 1일에는 '곽충보 스캔들'이 실록에서 발견되었다. 곽충보는 관직의 권한을 남용하여 문제가 많았던 인물이다. 사헌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논지로 그를 탄핵했다.

<"곽충보는 본래 시정 사람인데 지나치게 국은(國恩)을 입어 벼슬이 추부(군사관계 일을 맡은 조선 초의 중추원)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근신하고 두려워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기를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곽충보가 교주도(강원도)에서 군사를 맡았을 때 한 도의 양가(良家) 여자를 협박하여 모두 첩으로 삼고 그 가축과 재산을 빼앗았으며, 지나는 곳마다 군사를 놓아 노략질했습니다. 백성들이 '차라리 왜구를 만나면 만났지 곽충보는 만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또 김인찬의 처를 간통하고, 벼슬하는 황문과 그 아내 등 세 사람을 곤장으로 때려 거의 죽게 만들고, 사람 똥을 그 입과 볼에 칠했으니 풍속을 훼손한 것이 이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놓아두고 죄를 묻지 않으면 법을 어지럽히는 신하가 잇달아 일어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금의 신임이 두터웠던 곽충보는 벌을 받지 않았다. 문제의 사나이가 사대부 집안의 과부 이씨와 간통하다 들통나 곽충보는 탄핵을 받고 이씨는 옥에 갇히게 된다. 이씨는 살기 위해서였는지 "간통한 것이 나뿐만 아니고 이원경의 처 권씨도 나와 같습니다"라고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권씨도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씨는 권씨 외에도 여러 사대부 집안 여인들의 간통 사건을 폭로하는 바람에 섹스 스캔들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이 사건에 등장하는 이원경의 처 권씨는 처음에 안전에게 시집갔다가 다시 안소에게 재가했고, 또 이원경에게 시집가는 바람에 사람들이 음부(淫婦)로 지목할 정도였다. 권씨는 또 지경과 상문이라는 중과 간통한 사실이 적발되어 지경과 권씨는 각각 곤장 90대를 맞았고, 지경은 수군에 편입되었다. 상문은 틈을 타서 도망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숙종 18년(1692) 7월 13일엔 사간원이 상소를 올려 "고을의 수령들이 계집종을 간음하고 외람된 짓을 범하고 있으니 지방관들의 간음을 각별히 살펴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시절 얼마나 성도덕이 문란했으면 이런 상소까지 올려야 했을까.

세종 9년(1427) 5월 9일에는 음란 행위를 자행한 고위 관리들이 지방으로 쫓겨난 사건이 발생했으니 그 정황은 다음과 같다.

<이무생과 이복생의 직첩을 거두고 이무생은 배천, 이복생은 원주, 이의생은 강화에 거주하게 했다. 또한 이들과 놀아난 기생 자동선, 간설매, 죽간매, 약계춘과 보금은 곤장 90대씩 때리고, 기생 매소월은 곤장 80대를 때려 모두 해당 고을로 돌려보내 고역에 종사하도록 했다.

처음에 이무생은 자동선, 간설매, 죽간매와 간통했고, 이복생은 약계춘, 보금과 간통했다. 태종의 제삿날 이들이 광대를 모아놓고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시다 적발됐다. 약계춘, 죽간매는 효령대군 이보(태종의 2남)가 일찍이 관계했던 여자들이고, 보금은 의성군 이용이 관계했던 여자다.

간설매는 봉녕군의 아들이 관계했던 여자인데, 이의생이 먼저 매소월을 첩으로 삼고, 그녀를 시켜 위의 기생들을 중매하여 음란한 짓을 하게 된 것이다. 이의생, 이무생, 이복생은 모두 공정왕(정종) 첩의 아들들이다.>

연산군 2년(1496) 4월 6일에는 사간원 관리 이감이 타락한 사회상을 한탄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자못 흥미를 끈다.

<"지금은 척리(임금의 내척과 외척)가 상복을 입고서 창기의 집에 묵고, 재상이 음탕하고 꺼림이 없습니다. 집안 종놈이 그 주모를 간음하고, 계집종이 상전의 딸을 죽이고, 첩이 지아비를 이깁니다. 하인이 상전을 해치고, 음욕스러운 첩이 간사한 꾀를 부려 골육의 은혜를 해치고, 향리가 고을을 반하여 백성 다스리는 관장을 모해합니다. 풍속이 상하고 무너짐이 이처럼 참혹하니 진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간통죄로 남자는 귀양, 여자는 참수

세종 5년(1423) 10월 8일에는 지신사(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는 직책) 조서로가 귀양을 갔다. 먼 친척간인 전 관찰사 이귀산의 처 유씨와 근친상간하다 덜미를 잡혀 인생을 망친 것이다. 그나마 남자는 목숨을 구했지만 여자는 사흘 간 저자에 세웠다가 목을 베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이 참혹한 고위 관리의 섹스 스캔들을 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 관찰사(도지사) 이귀산의 아내 유씨는 조서로와 먼 친척 사이였는데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여승이 되어 조서로의 어머니 집에 출입하다가 조서로가 14세 되던 해 정을 통했다. 조서로의 어머니가 이것을 알고 몹시 미워하여 유씨가 그 집에 드나들지 못하다가 후에 머리를 기르고 이귀산에게 시집갔다.

이귀산은 나이 늙어 아내를 몹시 사랑했는데 조서로가 아내의 친척이라고 후하게 대접했고, 침실에서 술자리를 벌여 아내로 하여금 술을 권하기도 하고 좋은 말(馬)을 주기도 했다. 유씨는 문자와 장기 바둑 등을 약간 해득했는데, 수필(手筆)로 쓴 글을 은밀히 서로에게 전해 서로 약속하기를 "목복(木卜)의 집에서 만나 음울하게 맺은 정을 풀기 바란다" 했다. 목복(木卜)은 박(朴)자로서 이는 조서로 누이동생의 아들인 박동문이다.

지난해 9월부터 사통해 오다가 사헌부에 적발됐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동방이 예의로 나라를 다스렸으니, 그 유래가 오래다. 대대로 벼슬하여 온 세족의 집에서는 이 같은 행실이 있지 않았다. 지신사는 그 직분이 왕명 출납을 맡았으니 임무가 지극히 무겁거늘, 그 죄가 강상을 범한 것이다. 공신인지라 형벌을 가할 수 없지만, 유씨는 대신의 아내로서 감히 음탕한 짓을 행했으니 크게 징계하여 뒷사람을 경계하라.">

그리하여 남자는 귀양을 떠나고 유씨는 3일 동안 저자에 세웠다가 목을 벤 것이다.

이러한 사례로 미루어 볼 때 조선시대는 형벌에 있어 성차별이 심했던 사회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남성 권위주의 사회의 표본이었던 만큼 칠거지악(七去之惡)이란 제도까지 만들어 여성들에게 족쇄를 채우기도 했다. 칠거지악에 해당되는 사건의 표본이 세조 14년(1468) 5월 25일 공조판서 남이의 재혼 사건이다.

<"공조판서 남이가 말하기를 '신이 함길도에 정벌 나갔을 때 신의 어미가 질병이 있어 아내를 보려고 불렀는데 아내가 '천첩(賤妾)을 내친 뒤에야 가서 보겠습니다' 하며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신이 다시 북방에 나갔을 때도 위문하지 않았습니다. 어미에게 불효하고 지아비에게 불순하여 부도(婦道)에 합당하지 못했으니 다시 처를 얻게 허락하소서"라고 했다.

임금이 이르기를 "의리가 칠거지악에 해당하니 임의대로 행하라" 했다. 남이의 어미는 성품이 악독하여 아들과 며느리가 동침을 못하게 하여 의논이 분분했는데,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이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도 합당한 사유가 있을 때 임금의 허락을 받고 합법적으로 이혼이나 재혼이 가능했다.
이러한 칠거지악은 왕실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세종의 아들 문종은 여복(女福)이 없는 인물이었다. 세자 시절 두 번이나 부인이 폐출되는 아픔을 겪었고, 왕비 없이 왕위에 올랐다가 궁녀와의 사이에 외아들 단종을 생산했을 뿐이다.

세자빈 봉씨, 동성애 사건으로 쫓겨나

단종의 어머니(현덕왕후 권씨)는 국혼 가례를 치른 정식 왕비가 아니라 궁녀로 들어와 단종을 생산하고 사흘 만에 죽은 뒤 현덕왕후로 추존됐다. 문종의 첫째 부인 김씨는 질투와 시기심이 지나쳤던 여자였다. 그녀는 세자(문종)의 환심을 사기 위해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액을 수건으로 닦아 허리에 두르고, 세자가 좋아하는 여자의 신발을 훔쳐다 불에 태운 가루를 세자에게 마시게 하는 등 남을 저주하는 압승술(壓勝術)을 쓰다 발각되어 결혼한 지 두 해를 못 넘기고 쫓겨났다.

세종은 재임 11년 7월 20일, 며느리 김씨를 내쫓으며 이렇게 말한다.

<"부덕한 자가 받드는 제사는 조종의 신령이 흠향하지 않을 것이며, 왕궁 안에서 용납할 수 없으니 도리대로 마땅히 폐출시켜야 할 것이다. 내 어찌 그대로 두겠는가. 이미 선덕 4년 7월 20일 종묘에 고하고 김씨를 폐빈하여 서인을 삼았으며, 사가로 쫓아보내 우리 가법(家法)을 더럽히지 못하게 했다. 그의 비위를 맞춰 죄에 빠지게 한 시녀는 해당 관청에 넘겨 법과 형벌을 바르게 밝히도록 했다.">

두 번째 세자빈으로 간택된 여인이 봉씨다. 그런데 봉씨는 김씨보다 더 말썽이 많은 여인이었다. 지엄한 법도를 지켜야 할 세자빈이 시녀와 동성애를 하다 들켜 궁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 적나라한 동성애의 현장은 세종 18년(1436) 10월 26일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날 세종은 봉씨의 폐출을 알리며 이렇게 말한다.

<"세자 나이 14세 때 '후사를 잇는 일이 중대하니 빨리 배필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신하들이 주장해 김씨를 간택하여 빈으로 삼았다. 그러나 김씨는 정말 어리석고 못나고 총명하지 못해 기유년 사건(압승술이 발각되어 폐출된 것을 이름)을 초래했다. 이를 폐하고 다시 봉씨를 간택했는데 뜻밖에도 부부가 금실이 좋지 못한 지가 몇 해나 됐다.

내가 중궁과 함께 가르치고 타일러서 그 후에는 대하는 모양이 다르게 되었지만 침실의 일까지 부모가 어찌 가르칠 수 있겠는가.">

세종은 세자가 어서 빨리 자손을 생산하여 왕업의 대를 이을 것을 고대했다. 그러나 부부관계가 답답하게 돌아갔으니 신하들과 의논 끝에 첩을 몇 명 들이게 된다. 신하들도 임금의 고민을 덜기 위해 "마땅히 명문집의 덕 있는 규수를 잘 골라 후사 잇는 길을 넓히도록 서둘러야 한다"며 적극 찬성하고 나섰다. 그 바람에 세 명의 승휘(세자궁에 딸린 여자 관리로 종4품)를 뽑아 들였다.

봉씨는 시기심이 많고 질투가 강한 여자였다. 처음엔 세자의 사랑을 받지 못해 원망과 앙심을 품고 있다가 권승휘(단종의 어머니 권씨. 사후에 현덕왕후로 추존)가 임신하자 봉씨는 궁인들에게 "권승휘가 아들을 두면 우리는 쫓겨나게 될 거야"라며 더욱 원망하고 분개하는 소리가 궁중까지 들렸다.

다급해진 봉씨는 거짓으로 임신 사실을 꾸며 세상을 놀라게 한다. 봉씨는 스스로 "태기가 있다"고 하여 궁중이 모두 기뻐했다. 특히 세종의 기쁨은 지대했다. 그가 혹시 잘못되지나 않을까 하여 궁실로 옮겨와 조용히 거처하도록 했다. 한 달이 지나자 봉씨는 "낙태했다"면서 말하기를 "단단한 물건이 형체를 이루어 나왔는데 지금 이불 속에 있다"고 거짓말을 하여 궁중 사람들을 우롱했다.

이 사건 이후 봉씨는 더욱 해괴한 짓을 하여 스스로 파멸의 길을 자초하게 된다. 시녀들의 화장실 벽 틈으로 사람들을 엿보다 들켜 물의를 일으켰고, 세자궁의 여종들에게 남자를 사모하는 노래를 부르게 하기도 했다.

더욱 해괴한 일은 봉씨가 궁녀와 동성애를 자행하다가 임금에게 발각된 사건이었다.

<"봉씨가 여종 소쌍을 몹시 사랑하여 잠시라도 그 곁을 떠나기만 하면 원망하고 성을 내면서 '나는 너를 사랑하나 너는 나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구나' 했다. 소쌍도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빈께서 나를 사랑하기를 보통보다 매우 다르게 하므로 나는 정말 무섭다'고 했다.

소쌍이 권승휘의 집안 노비인 단지와 좋아하여 함께 자기도 했는데 봉씨가 집안 노비 석가이를 시켜 항상 그 뒤를 따라다니며 단지와 함께 놀지 못하게 했다.

내가 중궁과 함께 소쌍을 불러 진상을 물으니 소쌍이 말하기를 '지난해 동짓날에 빈께서 저를 내전으로 부르시더니 같이 자기를 요구했습니다. 저는 사양했으나 빈께서 윽박지르므로 마지못해 옷을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더니, 빈께서 나머지 옷을 빼앗고 강제로 눕게 하여 남자와 교합하는 형상으로 서로 희롱했습니다' 했다.">

이어진 세종의 발언을 보면 이 시절 궁중에서 동성애가 광범하게 유행했던 모양이다.

<"내가 듣건대 시녀와 종비들이 사사로이 좋아하여 동침하고 자리를 같이한다고 했다. 내가 궁중에 금령을 엄하게 세워서 이 금령을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곤장 70대를 집행했고, 그래도 금지하지 못하면 곤장 100대를 더 집행하게 했다. 그런 다음에야 동성애 풍습이 조금 그치게 됐다. 내가 이러한 풍습을 미워하는 것은 하늘에서 내 마음을 인도하여 그리된 것이다. 어찌 세자빈이 이런 풍습을 본받아 음탕한 짓을 할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세종이 세자빈을 불러서 소쌍과의 일을 물으니 봉씨가 답하기를 "소쌍이 단지와 항상 사랑하고 좋아하여 밤에 같이 잘 뿐 아니라 낮에도 목을 맞대고 혓바닥을 빨았습니다. 이것은 저들이 한 짓이며 저는 처음부터 동숙한 일이 없습니다"라고 발뺌을 했다. 그러나 모든 정황이 들통나는 바람에 봉씨를 폐출하여 서인으로 삼아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이처럼 두 번에 걸친 세자빈 폐출 사건의 여파로 문종은 왕비 없이 왕위에 오른 군주가 됐다. 문종의 부인은 사후 왕비로 추존됐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단종은 서자에 해당한다. 세종의 둘째 아들이었던 수양대군은 바로 이 점을 쿠데타의 명분으로 삼았으니 단종이 폐위되는 비극은 이 시절부터 잉태되었던 것이다.

부마들의 처량한 신세

중종 39년(1544)에는 왕의 사위인 부마가 왕의 딸인 옹주(왕의 후궁에게서 태어난 딸)를 박대했다가 사회 문제가 된 속칭 풍가이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은 중종 39년 2월 19일 실록.

<임금이 말했다.
"전 순원위 조의정(중종의 사위)은 성품이 사납고 패악스러워 여러 해 동안 도에 어긋난 행동을 많이 저질렀으므로 내가 훈계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허물을 고치지 않을 뿐 아니라 4~5년 전부터는 옹주의 여종인 풍가이를 첩으로 삼아 사랑하면서 옹주의 거처를 종처럼 대하고, 풍가이의 거처를 옹주처럼 대우하여 가정의 법도를 문란시켰으니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이를 경계시키기 위해 풍가이는 내수사(왕실의 재정을 관리하는 관청)에서 죄를 다스리도록 하고, 조의정은 외방에 내쳐 잘못을 고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조의정은 즉시 종을 보내 몰래 풍가이를 데려다 집에 두었다. 나는 나이 어린 부마의 광패한 소치라 생각하고 용서하여 죄를 다스리지 않았는데, 오히려 내심 기뻐하며 이때부터 옹주를 더욱 박대했다. 조의정이 옹주가 죽는다면 이 첩을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지가 이미 오래됐다.">

사연은 이렇게 정리된다.
중종은 자신의 후궁인 숙원 이씨 소생의 딸 효정옹주를 조의정에게 시집보냈다. 그런데 효정옹주가 천하의 박색이었음에 비해 그를 따라온 몸종인 풍가이는 천하 절색이었던 데서 비극은 시작된다.

조의정은 효정옹주를 천대하고 풍가이를 안방에 들여놓아 재미를 보다가 이 사실이 장인인 왕에게 들통난 것이다.

옹주가 출산 달이 되었을 때 몸이 단 임금이 의녀를 보내려 했다. 그러나 조의정은 가타부타 한 마디 말도 없다가 옹주의 병이 위독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왕에게 의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왕이 즉시 의녀를 보내 그 집에 당도하자 조의정이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했다. 의원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옹주가 죽었다고 말한 것이다. 화가 난 임금이 이렇게 지시했다.

<"조의정의 행위가 매우 수상쩍으니 의금부에서 조사하라. 풍가이는 아무리 조의정의 사랑을 받았다 해도 이미 옹주와는 종과 주인의 분수가 있다. 조의정의 사랑을 믿고 항상 옹주를 능멸하고 거처를 문란케 하여 소박을 받게 하고 죽게까지 했으니 아울러 조사하라.">

임금의 지시에 대해 사관은 이러한 논평을 달아놓았다.

<이때 시중에 투기가 성했는데 대궐이 더욱 심했다. 부마들은 모두 첩을 두지도 못하고 조금이라도 범하는 자가 있으면 혹독한 형벌을 가해 아들과 어미가 함께 곤장 아래서 죽는 이도 있었다. 조의정은 연소하고 성질이 거칠어 비첩을 사랑하다가 여러 차례 견책을 받았으나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옹주가 정숙하여 투기하지 않고 잘 보호하여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옹주가 산후증으로 갑자기 죽자 즉시 그의 첩과 함께 의금부에 가두고 지난날의 잘못을 낱낱이 적발하면서 죽게 된 사유를 추문했다. 그리하여 사건이 장차 예측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구해주는 자의 힘을 입어 먼 곳에 유배되는 것에 그쳤다.>

중종 39년 3월 17일 풍가이는 곤장 100대에 유배 3000리의 형벌(서울에서 3000리 떨어진 곳으로 귀양 보내는 것. 이것은 명나라의 법을 모방한 것인데, 조선은 서울에서 3000리 되는 곳이 없어, 먼 곳으로 귀양 보낸다는 의미로 쓰였다. 여자의 경우 유배 3000리 형벌 대신 벌금을 바치는 제도도 있었다)을 받았다.

이날 사관은 풍가이의 인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신은 논한다. 풍가이는 죽은 효정옹주의 여종이다. 옹주가 평소에 좋아했기 때문에 부마에게 첩을 삼도록 했고, 질투하는 마음이 없었다. 계묘년(1543)에 죄를 받아 함흥으로 귀양 갔을 때 옹주가 두 차례나 대궐에 나가 죄가 없음을 알렸다. 그러자 임금이 "부녀자로서 질투가 없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면서 이를 물리쳤다.

풍가이는 국문을 당하면서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고, 한 마디도 헛된 말을 하지 않았다. 풍가이는 글을 조금 알았다. 그의 손가락이 끊어졌기에 물어보니 "어머니가 아플 때 끊어서 약에 타서 먹였다"고 했다. 아아, 어찌 자기 어버이에게 효도한 사람이 자기 상전에게 그처럼 불공하게 했겠는가.>

그런데 은대라는 여인이 내수사의 종 다섯 명을 시켜 풍가이를 방에 가둔 뒤, 다시 곤장 맞은 곳을 더 때려 죽게 만들었다. 중종 39년 6월 4일 풍가이 살해사건에 대해 사신은 비분강개의 어조로 은대를 비판하고 있다.

<사신은 논한다. 은대는 궁중에 세력을 두고 위세를 부려 풍가이를 죽게 한 것이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또 여성위(순원 이씨가 낳은 정순옹주에게 장가들인 왕의 사위 송인을 말함)와 간통한 종이 아이를 낳자 아이를 밟아 죽이고 어미를 때려죽여 물의를 일으켰다.

대간과 시종이 여러 날 동안 번갈아 글을 올렸으나 위에서는 오히려 감싸다가 양사(사헌부와 사간원)가 합사하여 사직한 지 대엿새가 되고 대신들이 멀리 귀양 보내기를 청한 뒤에야 마지못해 은대를 귀양 보냈다. 죄는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은데 귀양에 그쳤으므로 인심이 시원치 않게 여겼다.>

이 시절 부마들은 세도가 당당했던 집안의 자제들이었으니, 요즘으로 치면 재벌 2세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공주와 결혼했다는 죄로 다른 사람들처럼 첩을 두지 못하고 공직에 나가는 길이 봉쇄되는 등 많은 사회적 제약을 받았으니 스트레스가 무척이나 심했을 것이다.

양성(兩性) 인간의 섹스 행각

세조 13년(1468)에는 희한한 섹스 스캔들이 발생했다. 사방지라는 이름의 양성(兩性) 인간이 조선시대의 유명한 천문학자 이순지의 딸을 간통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순지는 문화부가 선정하는 '이달의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던 조선시대의 간판 천문학자였는데, 딸의 사건으로 그만 망신살이 뻗쳤다. 사건의 전모는 세조 13년 4월 5일 실록에서 발견됐다.

<김귀석의 아내는 이순지의 딸이었다. 일찍이 이순지의 딸이 과부가 됐는데 그 일가인 안맹담의 종 사방지라는 자는 턱수염이 없어 모양이 여자와 같은데다가 재봉질을 잘해 여자 옷을 입고 한 여자 중과 간통했다. 여자 중과 이씨(이순지의 딸)가 이웃 관계였기 때문에 사방지가 이씨의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마침내 사랑하고 친해져 이씨의 곁에 있으면서 음식과 그릇을 같이 쓰고, 앉고 눕는 데도 자리 차지하기를 집주인과 같이하여 이웃 마을에서 이 사실을 알아도 이씨는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추잡한 소리가 퍼져서 조사를 했는데 임금이 석방하려 하니 권남이 죄를 주어야 한다고 청했다. 임금은 사방지를 의금부에 가두지 않고 이순지에게 일을 맡기니 이순지가 사방지를 비호하여 죄를 주지 않고 시골집에 두었다. 그런데 이씨가 온천에 목욕한다 하고 사방지를 따라갔다.

이순지가 죽을 지경이 되자 사방지는 다시 이씨 집에 들어가 처음과 같은 행동을 하므로 사헌부가 다시 사방지를 잡아다 의녀로 하여금 그의 신체를 조사하게 했는데 남녀 양성의 인간이었다. 이에 이순지가 여러 재상들에게 "사헌부는 어찌 소문에 흑심합니까" 하니 당시 사람들이 비웃기를 "속담에 사위를 췌랑이라 부르니, 이공(이순지)은 진실을 변명하고 있다"고 했다.

이에 한명회가 아뢰기를 "사방지는 다시 이씨 집에 들어가 추잡한 흔적이 더욱 현저하니 먼 지방에 유배하소서" 했다.

임금:"전에도 국문하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우선 용서하라."

신숙주:"사방지는 일찍이 한 여자 중을 간통하고 여자 중은 마침내 머리를 길렀으니 그 정상을 알 만합니다. 청컨대 도성 안에 머물러 풍속을 오래도록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홍윤성:"신과 한계희, 노사신 등이 함께 들었으니 이 일은 허위가 아닙니다."

신숙주:"외간에서 전하는 말이 사방지가 아니고 바로 서방적이라 하니(속담에 사위는 서방에서 묵으니 사위를 서방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사람(남녀 양성)은 '강호기문'에도 나옵니다."

임금:"경도 사방지가 남녀 양성이란 사실을 아는가."

서거정:"잘 압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하늘에 달려 있는 도리는 음과 양이라 하고 사람에게 달려 있는 도리는 남자와 여자라 한다' 했습니다. 이 사람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니 죽여서 용서할 게 없습니다.">

이에 임금은 "이 사람은 인류가 아니다. 마땅히 나라 안에서 함께 할 수 없으니 외방 고을의 노비로 영구히 소속시켜라"고 명함으로써 사방지 사건은 막을 내리게 된다.

중들의 간통과 왜인들의 간통

연산군 1년(1495) 5월 5일에는 중 지선과 비구니 지호가 간통하여 곤장 60대를 맞는 사건이 있었고, "성종의 국상(國喪) 중에 음란한 짓을 자행한 중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보고가 접수되기도 했다.

<예조에서 충청도 관찰사의 보고를 받고 아뢰었다.
"중의 무리가 국상을 당해 매와 개를 많이 길러 공공연하게 길들입니다. 널리 전원을 차지하고 소, 말을 번식 양육하며 아내를 두고 자식을 기르며, 혹은 관청 기생과 정을 통하고 나이를 숨기면서 어리석은 백성을 속이고 유인합니다. 그들은 사장 혹은 도사라 칭하며 남녀가 함께 모여 간음하기를 거리낌없이 하여 풍속을 무너지게 하니 그 버릇을 그대로 자라게 할 수 없습니다.">

성종 1년(1470) 2월 3일에는 "금교도 부근에 사는 중이 간통하여 낳은 소생이 모두 130명"이라는 보고도 있었다. 태종 16년(1416) 2월 25일에는 죽은 대언 윤수의 아내 제석비와 장님 중 신전의 섹스 스캔들이 발견됐다.

<윤수의 아내 제석비가 불경을 읽어 액막이를 하기 위해 장님 중 신전을 불러와 밤을 주면서 "밤맛이 어떠세요" 하니 장님이 "매우 달아요" 했다.

윤수의 아내가 희롱하기를 "밤보다 더 좋은 것이 있어요" 하고 그와 함께 간통한 지 여러 해였는데, 자식을 낳았으나 이 사실을 아는 어린 노비를 죽여 입을 막았다.>

세종 11년(1429) 2월 10일에도 간통한 승려가 처벌당하는 모습이 발견됐다. 승려 간통 사건의 정황은 다음과 같다.

이인이란 승려가 귀산사에 있을 때 은밀히 절의 계집종 동질가이와 간통하여 세 아들을 낳았다. 그 후 개경사에 있으면서 계집종을 제 아내로 삼고는 중들을 먹여야 할 쌀과 소금을 비밀리에 빼내어 자기 아내에게 주었다.

그는 또 태조 신위 앞에 올리는 멥쌀에 좁쌀을 섞었고, 개경사에 거주하면서 서울에 왕래하며 음욕을 방자하게 행사하다 관청에 적발된 것이다. 관청에서는 "법률에 의하면 궁궐에 바칠 음식물을 정결하게 하지 않는 자는 곤장 80대, 승려로서 간통한 자는 곤장 100대인데 두 사건이 겹쳤을 때는 중한 율을 좇아 죄를 결단한다"고 보고를 올렸다.

단종 1년(1452) 6월 23일에는 승려가 고위 대신의 첩을 간통하다가 현장을 발각당한 사건이 발견됐다.

<권총이 일찍이 집에 불당을 지었는데 중 학열이란 자를 믿어 불당에 있게 했다. 학열이 권총의 첩 세 사람을 몰래 간통했다. 하루는 권총이 의심이 나서 가 보니 학열이 한 비첩과 함께 누워 있다가 학열은 곧 도망하고 비첩은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이 밖에도 숱한 승려 간통 사건이 있었으니 당시 승려들의 타락상이 심한 것도 원인 중의 하나지만,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인 사대부들의 인식도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승려 간통 외에도 골치를 썩인 사건은 왜인들의 간통 사건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왜인들이 합법적으로 우리 땅에 거주하며 상업을 하는 왜관이 있었는데, 이곳에 거주하는 왜인들의 간통 사건이 심심치 않게 사회문제가 되었다.

숙종 1년(1675) 5월 3일엔 동래의 어부동이란 사람이, 왜인이 자기 아내를 간통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왜인을 쳐죽여 바다에 던진 사건이 있었다.

<이때는 변방의 금령이 해이해져서 왜관에 있는 왜인들이 가만히 여염으로 다니며 부녀자를 간음했다. 그래서 동래와 부산의 백성 중 왜인 출신이 많았으며 서북의 사람도 같아 호인(오랑캐)의 귀와 눈이 되어 나라의 일을 일러주므로 식자들이 이를 근심했다.>

숙종 16년(1690)에는 왜인들과의 성 관계가 문란해지자 왜인과 간통한 동래 여인 세 명, 이들을 유인하여 왜관에 데리고 들어간 권상과 서부상이란 사람을 왜관 문 밖에 효시했다. 이러한 일벌백계주의도 신통력이 없자 숙종 38년(1712) 3월 5일 동래부사 이성진은 대마도주와 왜인들의 범죄 처벌 조약을 체결하고 돌아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대마도 사람이 왜관 밖으로 나가 강간한 경우는 사형에 처하고, 유인하여 화간한 경우 및 강간 미수는 영원히 먼 곳으로 귀양 보내며, 왜관에 잠입한 여인을 잡아 보내지 않고 간통한 자는 그 다음 율을 적용한다.>

예조에서는 이 조문을 본부에 간직해 두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며 왜관 안에 이 내용을 새긴 팻말을 세워 왜인으로 하여금 금지사항을 널리 알게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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