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고구려 덕흥리고분 (베르디축배의노래)

이모르 2020. 12. 13. 14:22

 

 

 

 

유럽에 갔을 때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나 최후의심판 같은 걸작앞에서는 관람객들이 인산인해로

표현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유산 고구려의 벽화는 르레상스 시대 15세기에

생성된 최후의 심판보다 1.500년 앞선 벽화이다

남북의 이념대결로 뛰어난 예술성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자유럽게 덕흥리 고분을 관람할수 있다면 독보적인 고구려 코리아

의 문화가 세계여러나라에 전파되어 관광객이 쇄도할 것이다

 

 

 

 

고구려 벽화 무덤은 고구려 왕국에서 무덤의 대표적인 형태이다

그들은 그렇기 때문에 정치.군사.경제.문화 등 고구려의 종교등이

예술성 있게 적나라하게 그려져있다

고구려에 관한 모든역사 자료가 한반도의 수많은 전쟁으로 인하여

많은 손상을 입었고 고구려 역사연구의 측면에서 고구려 벽화 무덤의

중요성은 세계 인류의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대책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고구려는 중국과 다른 대륙 국가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였다

고구려 고유의 문화가 신라와 백제까지 전파되었다한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즐기는 여러 가지 풍부한 문화적 뿌리는 고구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1.500년 후 오늘날 덕흥리 고분은 현존 남아있는 고대 동아시아 문화의 생생하고

풍부한 묘사로 2004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 지정되었다

유네스코에서는 벽화의 손상을 막으려는 많은 노력을 하고 있으나 그 손상속도

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많은 노력이 한국인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고분벽화에 대한 정보를 보급하기 위해 더 큰 노력의

일환이다

 

 

 

 

평양근처 덕흥리 고분은 5세기 초에 만들어 졌다 무덤의 주인공은 화려했던

생존했을때의 생활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있다

무덤의 한 벽면에는 주인공의 신분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되어있다

주인공의 이름은 진으로 유주자사라는 벼슬을 지냈으며 광개토대왕시절

일흔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벽화에 남겨진 다양한 진의 모습 중에는 수레를 타고 행차하는 장면이 있다.

화려하게 장식된 수레를 타고 외출하는 고구려의 귀족. 수레는 고구려인들의

생활 필수품이었다.

 

 

궁수대

군악대

 

 

 

 

 

고구려 기병 개마무사

 

 

고조선으로부터 뛰어난 제련기술을 이어받아 그 기술을 한층더

발전시킨 고구려는기마병을 철기로 무장시켰다 고구려개마는 크게

세 부분 즉 말의 머리에 씌우는 말투구는 말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통철판을 말머리 모양으로 오려서 동그렇게감싸덮었다

 

콧구멍 부분은 드러내거나 숨을 쉴수 있도록 주름을 잡았고 타격을

받지 않는 부분은 그대로 두었다

중무장한 기병들은 적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개마무사 들은

적의 활공격은 물론 웬만한 창으로도 피해를 입지 않았으므로

고구려군은 백전 백승을 할수있었다

3세기를 전후하여 고구려에서 말투구와 말갑옷을 비롯한

개마 모형이 나왔고 3세기중엽에는 고구려군 절반이 철기로 만들었다

 

고국원왕의 무덤이나 덕흥리 벽화 무덤에 있는 고구려의

고분벽화를 보면 행렬도에 왕과 귀족의 수레 제일 근처에

개마무사들이 열을 지어 행진하고 있다

이는 행군시 개마무사들이 항상 전면에 나섰다는 것을 알 수있다

군단 행진도

 

 

고구려 대표적인 무덤인 덕흥리 고분의 앞방 동벽에 그려진 행렬도.

말을 탄 사람들이 있고, 손에 창을 든 무사들이 보이는데,

중앙에는 무사들을 거느리고 행차하는 수레를 탄 귀족들이 있다.

2개의 화려한 수레 중 하나는 진의 부하인 계현현령의 수레고,

다른 하나는 바로 덕흥리 고분의 주인인 유주자사 진이 타고 있는 수레다.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지만 꾀 규모가 있고 화려한 모습이지다.

이렇게 화려한 고구려 수레는 고구려인들의 생활이 비교적 넉넉하고

여유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안시성에서 대패하고 고구려군에

쫒겨갈 때 고구려군의 공격보다 도망치기 바빠서

자기들 끼리 밟고 밟히며 죽는 병사가 더 많았다 한다

이세민이 지금 북경 근처까지 후퇴를

하였을 때는 군대가 아닌 거의 거지꼴이 되어 있었다 한다

 

 

 

이렇게 수레는 고구려인들의 생활에 가장 밀접한, 이를테면

현대인의 재산목록 1호인 자가용과 같았던 것이다.

 

 

 

 

13군 태수 하례도

 

13군 태수들이 유주 자사에게 인사드리는 모습이다.

연군태수. 범양태수. 어양태수. 상곡태수. 광령태수.

대군 내사 북평 태수. 요서태수. 창려태수.요동태수

현도태수. 낙랑태수. 그리고 또 한명의 태수이다. 글자가 지워져

알 수 없게 된 마지막 태수는 대방태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13군이 유주에

속하며 거느리는 현은 75개이고,주의 소재지는

광계이며, 지금의 소재지는 연국인데, 덕양으로부터 2,3백리 떨어져 있다.

이 벽화를 통하여, 당시 광개토태왕때 일시적이나마 고구려가

중국 화북 지방까지 점령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덕흥리 고분의 전실 오른편 벽화. 유주자사를 지낸 무덤의 주인인

진이 13군의 태수로부터 배례를 받고 있는 모습이다.

 

 

덕흥리 고분의 묵서명;유주자사를 진이 지냈던 벼슬과 무덤을 만든 날짜를 적어넣었다

 

평안남도 대안시 덕흥리에 있는 덕흥리고분에는 풍부한 벽화와 묵서(墨書)가 있다.

동벽에는 입구를 향하여 걷고 있는 2, 3인의 인물상과 창을 쥔 수문장이 있고,

서벽 북쪽에는 동자를 데리고 있는 인물상이,

남쪽에는 수문장이 2개의 창을 쥐고 서 있다. '

 

 

 

 

앞방에는 주인공이 생전에 일을 보던 광경과 천상세계에 대한 내용이

그려져 있고, 북벽의 통로 입구 윗벽에는 황색을 칠한

네모난 구획 안에 14154자를 종서로 쓴 묘지명이 있다.

이 묘지명에 의하여 주인공은 영락 18(408) 1225일에

안장되었음을 알 수 있고, 나아가서 이 고분의 축조연대를 알게 되었다.

통로의 동서벽에는 거가행진도(車駕行進圖)가 그려져 있다.

 

 

 

 

널방의 북벽에는 주인공의 일상생활을 묘사한 그림이 그려져 있고

서벽에는 마술·궁술 등 무예를 겨루는 그림이, 남벽에는 마굿간·외양간이,

동벽에는 불교행사에 관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밖에 여러가지 모양의 장식무늬가 배치되어 벽화와

더불어 현실을 화려하게 하였다. 앞방 북벽 천장에 남아 있는

명문의 내용을 보면, 그 주인공은 하북성일대인

유주(幽州)에서 자사(刺史)를 지낸 뒤 고구려로 들어와서 408년에

이 무덤에 안장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절대연대가 명문으로

남아 있어 5세기 초 고구려 고분의 구조나 벽화양식을 알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고분으로 평가된다.

 

 

덕흥리 고분벽화 오른쪽에 서 있는 직녀가

소를 끌고 가는 견우를 떠나 보내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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