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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여걸

이모르 2020. 12. 13. 14:24

 

선덕여왕(善德女王, ? ~647년2월17일  음력1월8일  또는 선덕왕(善德王)

신라의 제27대 군주(재위:632-647년 이며, 한국사에서 최초의 여왕으로 알려져 있다.

은 김(),휘 는 덕만(德曼)이다.

진평왕과 마야부인 (摩耶夫人)의 장녀이며 태종무열왕의 큰이모이다.

선덕여왕은 재위 초반 민생의 안정에 주력하여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도록 하는

구휼정책을 활발히 추진하였으며,첨성대 를 건립하여 농사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그녀가 백성들을 얼마나 인자하게

아끼고 사랑했는지는 지귀(志鬼)의 설화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선덕여왕 을 흠모하는 백성들이 많았는데 지귀는 그 중에서도 특히 흠모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선덕여왕이 영묘사를 행차할 때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선덕여왕이 이를 보고 그의 가슴 위에 자신의 팔찌를 놓고 떠났다.

지귀가 잠이 깨어 이를 알고는 마음에서 불이 나 영묘사(靈廟寺)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또한 불교 또한 널리 장려하여 분황사, 영묘사 등 절을 많이 건립하고 불경을 연구시켜

불교의 일대 부흥을 가져왔다. 특히 선덕여왕은 웅대한 호국의 의지가 담긴

거대한 황룡사9층 목탑 을 세웠다.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 80m의 거대한 탑으로 이를 모두 9층으로 한 뜻은

이웃의 9적을 물리쳐서 복속시키기 위해 나라 이름을 새겨넣은 것이다.

그러나 김부식의 사론은 이와 사뭇 다르다. 그는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라며 왕의 치세를 혹평하였다.

이덕일은 이를 유교적 가치를 갖고 있던 김부식의 차별적 선입견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선덕여왕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더 있다. 예를 들어 안정복은 동사강목 에서 "

왕이 황룡사에 탑을 구축하였는데, 참으로 많은 돈을 썼다.

이러한대도 나라가 망하지 않았으니, 어찌 다행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

라고 말하였다.

또한 김춘추가 당에게 굴욕적인 외교 (아들 김법민을 볼모로 보내는 등)

한 것을 조종했다는 점이나 백제무왕이나 의자왕 이 침공을 하여 1백여개의 성이

함락되었는데도 잘 막지 못하였다는 점이 비판을 받기도 한다.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으로 높이는 약9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

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문화재청)

 

 

 

 

측천무후(則天武后,624년1월23일 ~ 705년11월2일)는 당나라고종

이치의 황후이며 무주(武周) 왕조의 여황제로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여황제이다. 중국에서는 그녀를

무측천(중국어: 武則天)이라 부르기도 한다. 음탕하고 간악하여 황위를

찬탈한 요녀(妖女)라는 비난과 민생을 보살펴서 나라를 훌륭히 다스린

여걸(女傑)이라는 칭송을 같이 받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무조(武照)이고,

아명(兒名)무미랑(武媚娘)이다. 황제로 즉위하자 자신의 이름을 조()로 개명하였다.

무사학(武士彠)의 차녀이다. 태어난 날짜는 정확하지 않고,630년에 태어났다고 하는 설도 있다.

 

 

 

 

 

 

 

 

 

 

 

룽먼석굴(중국어간체: 龙门石窟, 정체: 龍門石窟, 병음: Lóngmén shíkū)

중국 허난성 뤄양시의 남쪽 13km 아래의 양쪽 언덕에 있는 동굴 사원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측전무후가 백성들의 안녕을 빌며 민심을 달래기 위해

구측했다 한다 측천무후의 고향은 낙양이다

 

 

 

하트셉수트(Hatshepsut,기원전1508년 - 기원전1458년)는 고대 이집트

제18왕조 5번째 파라오이다. 하트셉수트란 이름은 "가장 고귀한 숙녀"라는 의미이다.

이집트학 학자들은 하트셉수트의 치세를 역대 파라오의 치세 중에서도

매우 성공적이었던 치세로 본다.

하트셉수트의 재위 기간은 이집트의 여왕 중 가장 길다. (20) 그녀에게는

하트셉수트라는 이름 외에도 파라오로서 여러가지 이름이 있다.

황금의 호루스로서 신성한 모습을 지닌 여인(네테레트),창조의 권능이

풍부한 여인(우세레트),해마다 녹음을 일구는 여인(아우제트 렌푸트),

파라오로서 신성한 빛의 규칙을 상징하는 여인(마아트 카 라),신성한 라의 딸로서,

아몬과 한몸이 된 여인(케네메트문)

하트셉수트는 아버지 투트모세1세가 정비(正妃)와의 사이에서 둔 유일한 자식으로,

이복동생 투트모세2세와 결혼했다. 병약했던 투트모세 2세가 요절하였을 때,

의붓아들인 투트모세3세 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하트셉수트가 섭정이자

 공동 파라오로서 이집트를 다스렸다.(위키백과)

 

 

 

 

 

 

 

 

왕실의 권위를 보여주는 하트셉수트의

웅장한 장제전(죽은 왕을 예배하는곳)

이 다이르알바흐리의 사막절벽을 배경으로 위풍당당하게 솟아있다

주랑 현관의 부조에는 이집트를 21년간 통치한 하트셉수트의 위대한

업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위대한 장제전은 현대식 건물 같은

위용으로 생존해 있었다

 

 

 

 

 

Hatshepsut (하트셉수트)의 미라는 어디 있었나?1세기 전 작은 무덤에서 신원 미상의

여성 미라 두 구가 발견됐는데 도굴을 막기 위해 사제들이 그곳에 옮겨놓은 듯했다

최근 검사 결과 왼쪽 미라는 하트셉수트의 유모이고 오른쪽

미라가 하트셉수트인 것으로밝혀졌다

크레오 파트라의 먼 선배인 하트셉수트는 아주 성공적으로 나라를 통치했다

하지만 클레오의 사랑이야기가 더 비극적이고 더 잘알려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