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흥천사(조선의타지마할)

이모르 2020. 12. 14. 14:49

 

 

 

 

버들잎 축제를 보고 정릉으로 가서 이성계와 신덕왕후의 사랑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여인의 명복을 빌던 흥천사

원찰을 찾아 나선다

흥천사는 지금의 정릉 과 거의 붙어있다 싶이한다

조선의 타지마할 흥천사 또한 단풍으로 곱게 치장되어 있었다

흥천사는 옛날 신흥사로 불러지며 주위에 큰 장급 요리집들이 포진

우리 부부는 여기서 약혼식을 하여 추억이 깃든 곳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강씨 사망이후 정릉(지금의 정동)에 암자를 짓고 행차를

조석으로 바쳤고 재올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수라를 들었다고 한다

또한 원찰인 흥천사를 건축하여 자주 둘러 법도를 마련했다고 한다

원찰의 위치는 처음 정동에 있었던 릉 동쪽에 170여칸 으로 크게 세웠다

1794년 정조18년에 현재의 장소로 옮겨 젔다.

원찰이란 창건주 자신의 소원을 빌거나 사자의 명복을

빌기위하여 세운 사찰을 말한다

 

 

 

선덕왕후는 태조5(1396 병자년)813일에 세상을 떠난다

밤에 현비(顯妣)가 이득분의 집에서 훙() 하였다

임금이 통곡하고 슬퍼하기를 마지않았고

조회(朝會) 저자() 10일간 정지하였다 (실록)

 

궁궐이 아니라 이득분의 집에서 돌아간 것은 병세가 위중하여

피접을 나간 때문이다

옛날에는 병이 위중할 때 집을 옮기면 행여 나아진다는 소망이

있었다

 

신덕왕후의 장지는 행주.안암동.등을 물색하다가 취현방(聚賢坊)

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태조5 (1396병자년)820

임금이 행주에 행차하여 능지를 보았으나 뜻에 맞지 않았다

서운관(書雲觀) 유한우(劉旱雨) 배상충(裵尙忠) 이양달(李陽達)등이

저희끼리 서로 좋으니 나쁘니 하면서 다투다가 결정을 짓지 못하므로

임금이 크게 노하여 매로 다스렸다

 

태조5( 1396)821

임금이 취현방에 거동하여 능지를 보아 결정하였다

실록에는 취현방으로 나와 있으나 흥천사기 에는 황하방으로

나온다 지금의 덕수궁옆 정동이다

 

태조 6(1397년 정축년) 13

신덕왕후를 취현방 북녁언덕에 장례하고 貞陵이라 이름하엿다(실록)

 

1396 8월에 돌아가시고 13971월에 장례예식을 가졌으니 사후

6개월 만이다 당시 천자는 일곱달 제후는 다섯달 경대부는 석달

사서인은 달을넘겨 장사지내는 법도가 있었다

 

조선태조 이성계는 1335 1027(1011일에 태어나 1408

618 (524)죽었다

태조사망이후 일년뒤 1409년 태종의 명에 따라 도성안 지금의 정동에

있던 신덕왕후의 능을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면서 능 주변에 있던

비석 및 석상을 모두 제게하여 능을 묘로 격하시키면서 사실상 주인없는

가묘로 전락되었으나 1699년 우암 송시열이 효종에게 제창하면서

종묘에 모셔지고 이때 들어서 지금의 정릉으로 봉안되었다

 

 

 

 

 

종각엔 진품 범종대신  

진품 범종은 덕수궁에 있다

 

높이2.82 직경1.70 두께3

이종은 1462 7월 태조가 후비 신덕황후를

추모하기 위하여 만들어 져서 흥천사에 있었다

이종은 덕수궁 근처에 유페된 신덕왕후의 왕실무덤

근처 흥천사에 있었으나 흥천사가 중종 5(1510)

에 화재로 소실되어 영조 23(1747)에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으로옮겼다 한일 합방후 일인들이 이 종을 창경궁으로

옮겼다가 후에 덕수궁 현 위치에 다시 옮겨놓았다

 

 

서울 성북구 흥천사길 29 (돈암동) 에 위치한 흥천사는 신덕왕후가 죽자

릉을 정릉(지금의 정동)으로 정한후 그녀의 명복을 빌기위해

태조 가 세운 원찰이다 당시 이절은 관세음 보살상을 모시고

국가와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하던 170여칸 규모의 큰 사찰이었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이되어 있는

극락보전은 10겁 이전에 성불하고 서방 극락세계에서

대중을 위해 설법하고 있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이다

철종4년인 1853년에 계장 스님에 의해 다시 지어졌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옆면이 여덜 팔자

모양인 팔작 지붕집이다

지붕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위와 기둥사이에도 놓인 다포양식 건물이다

 

흥천사 극락보전은 19세기 사찰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화려한 목조건축으로서 뛰어난 건축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극락보전 정면에 달아 낸 창호의 조각인 상당히 독특한

조형미를 자랑하고 있다

극락보전은 서울에서 희귀한 사찰의 건축물로서

매우 중요한 문화 유산으로 평가된다

 

흥천사 극락보전 문살장식

 

 

 

1985 125일 극락보전과 함꼐 서울시 유형문화재67호로

지정된 명부전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여 주는

지장보살을 모시는 법당으로 철종6년인 1855년에

순기 스님이 세웠다 한다

지장신앙은 아미타신앙과 함께 조선 시대에 널리

유행한 민간 신앙으로서 조선시대의 사찰에는 거의

명부전이 설립되어 있다

 

 

 

 

 

 

 

 

 

 

 

 

 

 

 

 

 

 

 

 

 

 

 

 

 

 

 

 

 

 

 

 

 

 

 

 

정릉에서 흥천사로 들어오는 터널

 

 

 

 

흥천사 화보

 

 

 

 

북극전

 

 

독성각

 

 

대방의 관세음보살

 

 

명부전 지장보살님

 

 

 

인도의 타지마할은 무굴제국 황제인 샤 자한이 아내인

아르주만드 바누 베강을 가리기 위해 지은 묘이다 이영묘는

물타즈 마할(선택받은 궁전이라는 뜻)이라고도 하는데

이 이름이 전와되어 타지마할 이라고한다

아르주만드 바누 베강은 1612년에 황제와 결혼한 뒤 서로 떨어져 살수

없는 반려자로 지냈으나 1631년 부란푸르 라는 도시에서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타지마할은 인도.페르시아.중앙아시아 등지에서온 건축가들의

설계에 따라 1632년경에 착공되었다 메일 2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동원되어 1643년경에 영묘가 완공되었고 1649년경에는

모스크 성벽 통로등 부속건물이 완공되었다

타지마할 전체가 완공되기 까지는 22년의 세월과 4.000만 루피의

비용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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