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덕왕후의 정릉
광통교 교각 기둥
신의왕후 한씨
(神懿王后 韓氏 1337년 음력 9월-1391년 10월21일 음력9월23일) 는
조선 太祖 이성계의 첫 아내로 정종과 태종의
생모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여 왕으로 등극하기 1년 전인
1391년에 지병인 위장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안천부원군 한경(安川府院君 韓卿)과 삼한국대부인 신씨(三韓國大夫人申氏)의
딸로 본관은 안변(청주 安邊 淸州)이다
태조2년(1393년)에 절비(節妃)로 추증되었다가 1398년 그녀의
소생들이 일으킨 왕자의 난으로 태조가 하야하고 그녀의 둘째아들
정종이 즉위하여 비로소 왕후로 승격되었다
시호는 승인순성신의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로 추존된다
신덕왕후 강씨는 1356년 상산 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의
딸로 태어났다 처녀때 사냥나온 이성계에게 주는 물박아지에
버들잎을 띄워 급하게 먹지 못하도록 배려하여 이성계와
매져진 일화의 주인공이다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는 1392년 조선의개국으로 음력8월7일
조선의 첫왕비가 되어 현비(顯妣)에 봉해졌다
태조이성계의 사이에 방번.방석. 두왕자와 경순공주를 낳았다
신덕왕후는 자신의 아들인 방석이 왕세자로 책봉되도록 애썻으며
이와 관련해서 이방원등 신의왕후의 장성한 아들들과 후계 다툼으로
알력이 있었다 정도전과 합세하여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한뒤
신덕왕후는 1396년 음력3월13일 세상을 떠났다 2년후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을 주도한 방원을 위시한 신의왕후의 6형제의 난으로
의안대군을 포함한 신덕왕후의 아들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사위
이제까지 살해당하였다
이성계는 강씨사망후 실의에 빠져서 직접 릉(지금의 정동)옆에
작은 암자를 짓고 행차를 아침저녁으로 다녔으며 1397년 1년여
공사 끝에 170여 칸의 원찰 흥천사를 세웠다한다
하지만 이방원의 구테타로 명분을 쌓기위해 둘째형(정종)을
내세웠다가 바로 수권에 들어가 양위받아 태종이된다
이성계는 사랑하는 두아들의 죽음으로 비통에 빠진체 하야후
함흥으로 들어가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을 탄생 시켰는데
실지 석성린 무학대사등 함흥에 갔던 사람들은 살아돌아왔으니
꼭 차사를 살해 한 것 만은 아닌 것으로 되어있다
태조의 분노가 어떠하였는가를 생각할수 있는 사자성어다
태종이된 이방원은 신덕왕후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의
원한으로 즉위즉시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지위를 격하시키고 태조가
애지중지하던 정릉을 태조사망 일년뒤 파괴하고 이전하였다
1409년 정릉은 한성 도성안 지금의 정동에서 도성밖 양주 지금의
정릉(현재 서울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겼다
태종은 더욱이 정동에 있던 정릉의 원래 자리의 정자각을 헐고
봉분을 완전히 깍아 무덤의 흔적을 없애도록 명했으며 1410년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정릉에 있던 신장이 새겨진 12개의석상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게 하여 온 백성이 다리를 밟고 지나도록 하였으니
그의 원한이 얼마만큼 컸나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광통교 다리는 청계천 복원공사때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광통교는 원래 있었던 자리가 아니고 상류로
좀더 올라가 옮겨진 것이라 한다
태조는 1408년 음력5월24일에 사망에 이르렀다
태종실록에 그의 죽음에대한 것을 서술하고 있다
손수 청심환을 드렸으나 삼키지 못하고 두어 번 태종 이방원을
바라보더니만 숨을 거두었다 이성계가 세상을 뜬 것이다
아들 태종 이방원을 용서한다는 말은 없었다 말을 타고 달려온
상왕 정종과 함께 태종은 통곡하였다 애증이 서려있는 아버지다
효도하고 싶어도 이세상에 없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같은 것은
아버지에 대한 불효 때문이다
태종 이방원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항상 아버지께 환심을 사지못하는 것을 한하여 늘 덕수궁에
머물고 싶었으나 좌우 시종이 많아 내 마음을 이룰수 없었다
세자에게 전위하고 한가한 사람이되면 매양 단기로 출입하여 시인방
(寺人房)에도 들어가고 사약방(司鑰房0에도 들어가 아버님을 뵙든지
못 뵙든지간에 항상 곁에 있으면 환심을 사리라고 여겼는데
이제는 그럴수도 없게 되었구나(태종실록)
광통교의 원래이름은 큰다리라는 뜻으로 대광통이 었고
후대에는 광교로 불리었다
광통교에는 세련된 당초문양과 구름문양이 새겨진 신장석이
거꾸로 놓여있다 이 이것은 태종 이방원이 신덕왕후에게
원한을 가지고 고의로 한것이라 한다
광통교는 화강석을 이용해서 만든 널다리 형태의
석교로 다리상판을 화강석으로 만든 보가 받치고 있다
아래쪽에서 본 상판
고려시대에 발달한 고려미술은 송나라의 영향을 받아 고려말에 원나라 미술이
유입될 때 까지 그맥 맥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국가의 불교장려 정책으로
화려한 미술적 감각을 낳는다
반면 조선으로 내려오면 검소한 것을 미덕으로 삼고 형식적인 예절을 숭상하는 유교사상
인간의 정열과 패기를 억누르고 정서를 메마르게 하였으므로 조선의 예술은 섬세하고
화려한 점을 찾아볼수 없다 조선의 예술의 특색은 소박하고 순진스러움에 있으며
이런점이 오히려 청신한 맛을 풍겨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줄 때도 있다
광통교의 문양들은 초선초 고려 미술의 영향으로 화려하고 아름답다
1890년대 광통교
찬란한 고려 석공예술
경천사지 10층석탑(국보 제86호) .
좌:1904년 당시 경천사에 있던 10층사탑
우:1960년 제모습으로 복원 경복궁에 세워 졌던 경천사탑
기록에 의하면 경천사십층석탑은 고려 후기인 1348년 경천사 경내에 세워졌고
이후 절은 사라지고 풀이 무성해진 절터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한다
개성군과 풍덕군 접경 지역에 있었던 경천사탑은 고려 공민왕 때에 공주를 위해
옥석(대리석)으로 10여층이 되게 세운 수백년된 유물이었다
일인들이 탑을 무너트려 일본으로 반출 하려하자 조선의 군민들이 일제히 궐기하여
막으려 하자 무장한 일본 헌병 80여명이 제압하고 결국 인천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다나카 집 정원에 세워졌다
그후 10여년이 흘러 일본에 있던 경천사 탑은 다시돌아오는데 베델과 헐버트 두 외국
언론인들이 세계적으로 고발하고 양식있는 일본인 학자 정치인 들이 조선으로 돌려줄
것을 규탄하여 1918년 조선으로 돌아와 경복궁에 방치되었다가 40년지난 1960년 옛 모습을
회복하게 되었다 있던 자리로 경천사에 보냈으면 지금은 이북에 있었을 것이다
지금이 아름다운 고려 석탑은 국립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하고 있다
여주 고달사지 승탑은 국보제4호로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고달사 터에 잇는
고려시대 초기의 부도이다 높이는 3.4m8각 원당형 부도 중에서 매우뛰어난 거작이다
조형 양식이 신라의 기본형을 따르면서 세부적인 면에서는 고려시대의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고려 광종때 까지 살아있던 고승 원감대사 의 묘탑이라고 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1천년이 흘렀지만 탑은 여전히 생생하고 놀랍도록 아름다우며 석공의 뛰어난
에술혼을 느낄수 있는 셈세함을 보여주고 있다
고달사지는 폐허가 되었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보존된 탑이 남아 있다는 것이 기적이다
보물 제6호
(1963년1월21일 지정)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는 우
리나라 보물6호로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소재하고 있다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은 보물 제282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동구릉의 이성계의 건원릉 봉분에는 억새풀이 무성하다
벌초를 안하는게 아니라 고향을 그리워하여 그곳에
묻히기를 원했던 태조를 태종은 동구릉에 모시면서
대신 태조의 고향 영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다
봉분에 심었다 한다
성북구 정릉동에 위치한 신덕왕후 릉
정릉 받침대 고려시대 양식과 문양
정릉 석등 고려 현종과 고종시대 양식
제릉(齊陵)은 북한개풍군 상도면 풍천리에 봉릉하였고 제릉의
동쪽 마을에 齊宮을 지어 초경사(肖慶寺)라 했다 능에 제사를
올리는 사찰을 둔 것이다
제릉은 태조 이성계의 향처 첫 부인이다
2대 정종과 정안왕후가 묻힌 후릉과 함께 북한에있는 2개의
조선 왕릉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포함되지 않았다
정종은 이성계와신의왕후 한씨사이에 태어난 둘째아들이다
태조7년(1398년)에 왕자의 난이 일어나 세자 방석이 죽자
대신 세자로 책봉되어 같은해 9월에 태조로부터 선양을 받아
조선 제2대왕으로 즉위한다
정안왕후외 사이에 후사가 없으나 후궁들 사이에
15명의 군과 8명의 옹주를 두었다
그는 2년간 왕위시절 역시 실질적으로는 동생 태종 방원이
의지에 따라 정치가 이루어 졌기에 결국 왕위를 방원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말년을 보내게 된다
조선 임금 정종(재위1398-1400)과 정안왕후가 나란히 묻힌 후릉의
전경 정자각이 아래 있었으나 1970년 회실되고 현재 복원중이라한다
소재지;경기도 개성시 판문군 량정리 북한 소재로
세계문화유산이나 사적이 미지정 되어있다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가 묻힌 헌릉 왼쪽이 태종의
무덤이고 오른쪽이 원경왕후의 무덤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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